‘386 세대’ 이야기
1. 얼마 전까지 ‘386세대’라 불리던 집단은 현재 한국 사회를 구성하고 이끌어가는 가장 중심적인 집단이다. 보통 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을 집합적으로 지칭하는 이 개념에는 민주화에 헌신했고 탈인습적인 합리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정보화 시대를 시작한 사람들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다. 그들 스스로도 ‘비판적 성향이 강하다’,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과잉의 경향이 있다.’, ‘어떤 세대보다 소외된 집단에 대한 이해심이 높다’, ‘민중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다.’라는 공통적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1990년대~2000년대 초반 386세대 출신이 정치에 진출했을 때, 오래되고 낡은 관행을 깨고 참신하고 개혁적인 정치적 실험을 이끌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었다. 하지만 2020년대 이들은 정치적 퇴출을 강요받고 있다. 80년대 운동권 출신이라는 특정한 위상을 단지 정치에 진출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만 활용하고 있으며 정치적 편파성을 확장 유지하는 방식으로만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2. 386세대(이후 86세대)가 이렇게 ‘공공의 적’(?)으로 공격받는 것은 정치 영역뿐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한 사회학자는 86세대가 지나치게 모든 영역에서 자원을 독점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객관적 수치로는 어느 정도 사실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세대적 흐름에 따른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점에서 과도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86세대가 나이가 들어 자연스럽게 사회 전 분야의 핵심적 지위를 획득한 것이며 이러한 현상은 항상 어느 시기 어느 세대의 독점현상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86세대부터 대학진학이 늘어났고 인구수도 많은 관계로 86세대의 독점이 도드라지게 보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3. 86세대와 관련된 논쟁은 자원의 배분에 따른 갈등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80년대 한국 사회에 끼친 이들의 사회적, 윤리적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어떤 세대보다도 가치와 의미를 중시했고 기존의 관습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창출하려고 시도했으며 이제 그러한 시도와 결과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의 시도했던 ‘민족, 민주, 민중’에 기초한 변혁적 관점이 우리 사회 변화에 어떤 효과를 보였으며 실제로 민주화에 긍정적 요소로 작용했는가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이들이 갖고 있던 관념적이고 모호한 정치적 의식과 편향된 태도가 또 다른 부정적 요소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일련의 평가가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사실 ‘86세대’에 대한 정치적 공격은 현재 진행 중에 있으며 기득권을 지녔다고 평가되는 야당 정치인들에 대한 정치적 프레임으로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4. 86세대 정치인들에 대한 공격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이들이 정치에 진출하고 실제적인 정치적 영향을 제대로 보여주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야당인 민주당의 상황은 최악의 ‘반민주적 행태’로 타락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80년대 중반부터 운동권에 침투한 북한의 ‘주체사상’의 교묘한 변형으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특정 인물에 대한 찬양은 결코 정상적인 민주주의에서는 작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86세대 운동권은 강력한 군부정권과의 투쟁 속에서 강력한 조직의 필요성 때문에 점차 집중화, 위계화, 독점화 현상을 보여 왔다. 운동권의 지도자인 전대협이나 한총련의 의장은 기존 정치의 독재자 못지않게 절대적인 특권과 권력을 향유했던 것이다. 그러한 현상이 지금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5. 86세대를 대표한다고 말해지는 86세대의 정치인들은 사실 86세대의 이상과 신념을 배신하고 있다.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결탁되어가는 지금의 현상은 90년대 운동권 몰락의 징조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86세대’ 정치인들에 대한 공격은 그들의 타락에서 찾아야지 86세대 전체의 문제로 치환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지금은 86세대가 가졌던 정치와 사회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상적 가치의 현실적 실현에 대해서 다시 고민해야 할 시기인지 모른다. 지금 필요한 것은 86세대 꿈꿨던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 ‘모든 존재의 자유와 평등’, ‘소외집단에 대한 전체적인 연대’ 등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86세대가 가졌던 순수했던 생각들을 다시 살펴보는 것도 나름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한상진은 1981-1989년 수업 때 학생들에게 ‘생애사적 보고서’라는 리포트를 받았다고 한다. 격변의 시대, 학생들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고민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글들은 약 20년간 교수가 보관하고 있다, 2003년 『386세대, 그 빛과 그늘』이라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책이 발간된 이후 다시 20년이 지났다. 책에 담긴 그들의 고민과 신념을 통해 ‘86세대’가 꿈꿨던 개인의 목표와 사회적 가치에 대한 지표와 방향을 다시금 정리해본다.
6. 대부분의 서울대 입학생들은 학교 생활에 충실한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학생운동’에는 부정적 인상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선배들과의 대화, 강압적인 시위 진압현장, 고통받는 학우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회적인 모순과 정부에 대한 불신을 깨닫게 되었으며 서서히 시위에 동참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사회와 국가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지식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모든 주장을 억압적으로 탄압하는 정부에 굴종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시위에 참여하기 전 학생들이 갖는 가장 큰 고민은 부모의 간청을 외면하기 어려웠던 점이다. 많은 학생들의 글에서 이러한 갈등은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럼에도 결국 그들은 개인적 신념을 통해 변혁운동에 참여한다. “가정규범과 개인윤리가 결정적으로 충돌할 때는 결국 개인윤리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할 모순에 부딪힐 경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선택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이란 자기가 스스로 부여한 역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7. 학생들이 실제 겪었던 학내 문제에서 가장 큰 고민 중에 하나는 ‘수업거부, 시험거부’였다. 수업이나 시험거부는 억압적인 정부와 이에 순종적인 학교에 저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학생들은 끊임없이 토론하면서 ‘시험거부’를 전체적으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은 때론 군중심리에 지나치게 휩쓸리거나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작용한다는 비난과 함께 기본적인 의무를 버린다는 공격도 뒤따랐다. 그럼에도 그것은 때론 근본적인 변혁을 위한 출발이기도 하였다. “시험거부 결정은 고등학교 때까지 시험을 거부해 보기는커녕 수업에 빠지는 것조차 엄두를 못내고 결석 한 번 없었던 나에게는 하나의 큰 변혁이자 모험이었으며 대학에 온 이후의 내 의식의 변화를 나타낼 수 있었던 가장 두드러진 사건이었다.” 어떤 행동에 대한 신념은 반대의 경우도 이끌어낼 수 있다. 시험거부를 찬동하지 않은 한 학생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제게 수업과 시험에 응하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원칙에 준하는 행위였기에 도덕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정당성을 확신하지 못하는데도 단지 외부의 심리적 압력에 눌려 자기 소신을 접고 함께 행동한다면 설사 그 행위가 결과적으로 옳았다 하더라도 제 자신에게 있어서만은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8. 학생들의 생각의 핵심은 어떤 행동을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의미 부여였다. 현재의 행동은 앞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짓는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신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성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유혹과 맞설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지성인이 되는 것은 참으로 험난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바른 소리를 하면 감옥에 들어가고 시류에 따라 지배계급에게 아부하면 출셋길이 열리는 이 모순된 사회구조 속에서 과연 나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인가?” 학생들은 군중심리와 개인적 이기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해야 했다. 그것은 올바른 가치관을 갖기 위한 내면의 투쟁이자 사회의 힘을 자각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9. 학생들의 글 중에서 많은 부분은 여학생들의 자각이 담긴 글들이었다. 딸과 여성으로의 제한된 관점에서 살던 여학생들은 대학의 문화 속에서 여성의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저는 딸이나 여학생이나 여자만이 아닙니다. 오직 저는 한 인간일 뿐입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서려하고, 스스로 제 인생을 개척하려는 그래서 한없이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입니다.” 이밖에도 광주항쟁의 경험과 영향, 노동운동의 중요성에 대한 견해, 학생운동에 대한 반성 등 다양한 견해가 학생들의 글에 등장하고 있다. 이들의 글에는 공통적으로 “80년대에 대학생으로서 한국 현대사의 가장 어둡고도 역동적인 시대를 직접 경험하면서 어느 세대보다도 민주화, 탈권위주의, 제도적 합리성 등의 가치에 대한 강렬한 신념”이 담겨있는 것이다.
10. 한상진 교수는 책을 발간하면서 86세대가 가졌던 다양한 의식이 21세기에 중요한 행동원칙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후 ‘86세대’는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 의미로 활용되고 공격받았다. “‘권력 장악 ‘막강 386세대’ 양보해야 자녀 세대가 산다‘, ’26세 청년이 386에 던진 돌직구 "그들은 여전히 비주류라고 착각한다"‘, ’유신세대와 386은 폭력을 멈춰라‘, ’386세대 허위의식이 문제… 전근대적 세계관 벗어나야‘, ’ 386세대에게 헬조선의 미필적고의를 묻다‘”
그렇다면 ‘86세대’는 새로운 시대를 역행하며 퇴출되어야하는 집단이며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일까? 오히려 소수의 권력을 잡은 ‘86세대’ 정치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세대를 왜곡하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86세대’ 정치인들은 86세대를 대표할 수 없다. 86세대들이 학생 때 가졌던 이상들의 실현을 배반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86세대의 근본적인 정신은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한 연대와 협력’이었다. 그렇기에 과감하게 자신의 지위와 특권을 버리고 노동현장, 문화현장, 민중운동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권으로 들어간 세력들은 ‘민중’과의 연대라는 ‘희생’을 버리고, ‘권력’과 결탁한 세력일 뿐이다. 다만 그 속에서 변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노력했다면 그러한 행위는 존중받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86세대 정치인들에게 숭고한 희생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11. ‘86세대’에 대한 공격은 그들이 가졌던 이상의 고귀함과 소중함의 소멸에서 기인했는지 모른다. 살아가면서 선택하기 어려웠지만 희생과 용기로 추구했던 한 때의 신념이 이후의 생활 속에서 지속될 수 없다면 그것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슬픈 증명이 될 것이다. 86세대에 대한 공격 중 대표적인 표현이 ‘과거의 영광(투쟁)이 현재의 잘못을 감추거나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어리석은 행동이나 사고를 하면서 과거의 훈장 속으로 숨어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태도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 제기될 문제는 86세대가 공유했던 사회적 가치가 지금도 여전히 의미있는가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공동체를 중시하고 개인의 희생을 중시하는 관점은 개별적이고 개인적 욕구를 우선하는 현 세태와는 충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와 욕망’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회와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개인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수많은 문제를 개인과 집단의 갈등상황으로 몰아 넣는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를 기반으로 ‘개인’의 자유를 추구했던 86세대의 윤리적 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문제는 그러한 의식이 지속되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것에 있다. 86세대가 가졌던 이상적인 가치와 윤리를 다시 점검하고 그것을 현시대에 효과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을 다시 찾는 것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이다. 개인의 자유와 존엄은, 때론 자신의 선택에 의해 자유와 존엄을 유보하거나 희생할 때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더욱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첫댓글 - 공동체적 사고 방식의 작동, 세대간의 갈등, 의미 부여, 가치 체계의 변화....... 화려하게 등장한 자와 조용히 사라진 자들, 이득을 취한 이들과 희생을 겪으며 묵묵히 잊혀진 사람들..... 모든 것은 변하고 계속해서 또 변한다.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에 대한 생각조차도 변하고 있다. 자기 이익에 대한 교묘한, 재빠른 변화만이 남은 시대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