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청룡사靑龍寺>
안성 서운산(瑞雲山)에 있는 사찰로 나옹화상이 절 중창 때 청룡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절과 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황석영이 <장길산>의 무대로 삼은, 사당패 후견인이 되어 민중의 애환과 신명을 껴안은 민중의 절이다. 인평대군의 원찰이기도 하니 상하층을 모두 끌어안은 절인 셈이다.
1. 사찰 대강
명칭 : 靑龍寺
위치 :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서운산(瑞雲山)
방문일 : 2023.10.4.
입장료 : 없음
2. 둘러보기
상서로운 구름속의 산에 청룡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사찰이 청운사이다. 그러면서 상하층을 수용하는 넓은 자비와 부처님의 가피를 온 세상에 보이는 사찰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방문할 때마다 엄숙함보다 편안함이 더 먼저 느껴진다.
일주문이 없고, 절 대문이 사천왕문이 아닌 것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원래 이 일대가 모두 청룡사 땅이었던 곳으로 보이는데, 그것이 줄어들면서 원형을 잃은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입구 마을 중간 식당 옆에 서 있는 비석이 혹시 사찰 관련 비석이 아닌지.
사찰이 어떻게 민중과 함께 가야 하는지 그 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절로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1)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2교구 본사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1265년(원종 6) 명본대사(明本大師)가 창건하여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던 것을 1364년(공민왕 13) 나옹왕사(懶翁王師)가 크게 중창할 때 청룡(靑龍)이 서기가 가득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절 이름을 청룡사, 산 이름을 서운산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1985년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음전(觀音殿)·명부전(冥府殿)·관음청향각(觀音靑香閣)·대방(大房) 등이 있다. 유물로는 사적비가 1985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도 800근이 넘는 범종(梵鐘)이 있는데, 1674년(현종 15)에 밀언(密彦)에 의해서 주조된 것이다. 부속 암자로는 은적암(隱寂庵)·내원암(內院庵)·서운암(瑞雲庵)이 있다. 은적암은 약 600년 전에 창건된 암자로서 선수(仙水)라고 불리는 유명한 약수가 있다.
내원암은 청룡사 중창 다음해에 창건되어 48명의 강사(講師)가 계승된 유명한 강원(講院)이며, 용허(龍虛)·장호강백(莊昊講伯)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 동안 계속되었던 선불장(撰佛場)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암자이다. 서운암은 원래 내원암의 속암이었다. 강원으로서 이름을 떨쳤던 내원암으로 찾아오는 학승(學僧)들이 너무 많아 약 100여 년 전에 내원암 강주(講主)였던 만우(萬雨)가 창건한 암자이다. 이 밖에도 속암으로 은신암(隱神庵)·청련암(靑蓮庵) 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유지(遺址)조차 찾아볼 수 없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소개 (사찰 홈피)
1265년(고려 원종 6년)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1364년(공민왕 13년)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절 안에는 대웅전(보물 824), 관음전, 관음청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 등이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은 다포계의 팔작집으로 고려말 공민왕 때에 크게 중창하여 고려시대 건축의 원형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다.
법당 안에는 1674년(조선 현종 15년)에 만든 5톤 청동종이 있고, 큰 괘불이 있어 대웅전 앞에 괘불을 걸 돌지주까지 마련해 놓았다. 구불구불한 아름드리 나무를 껍질만 벗긴 채 본래의 나무결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세웠다.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원찰(願刹)이었다는 청룡사는 1900년대부터 등장한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이들은 청룡사에서 겨울을 지낸 뒤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들고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연희를 팔며 생활했다. 지금도 건너편에는 남사당마을이 남아 있다.
주변에 서운산, 칠장산, 미리내성지, 고삼저수지, 안성장, 삼일운동기념탑, 죽주산성 등의 관광지가 있다.
입구. 진입문. 일주문이 따로 없이 이 문이 대문인데, 천왕문이 아니어서 좀 특별하다. 아예 사천왕상이 없다. 민중적인 색채가 강한 절이어서 그런가?
청룡사는 원래 고려 원종 6년(1265) 명본국사가 세워 대장암(大藏庵)이라 불렀던 곳이다. 공민왕 13년(1364) 나옹화상이 크게 넓히면서 청룡사라 이름을 고쳤는데 청룡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광경을 보고 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절의 중심 법당인 대웅전은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건물로 추측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다. 이를 다포 양식이라 하는데 밖으로 뻗쳐 나온 재료 윗몸에 연꽃과 연꽃봉오리를 화려하게 조각해 놓아 장식이 많이 섞인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인다. 기둥은 전혀 가공하지 않은 원목을 그대로 세운 것이 눈길을 끈다. 건물의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천장으로 꾸몄다.
이 대웅전은 안쪽에 조선 헌종 15년(1674)에 만든 범종을 보관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의 건축 기법과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찰 홈피)
민흘림 기둥. 대웅전은 자연스런 나무의 선을 이용하여 민흘림 기둥을 사용하였다. 민흘림기둥은 위보다 아래가 넓어 안정감과 육중한 느낌을 준다. 배흘림은 중간 배가 더 굵은 공법이다.
*소개
배흘림은 민흘림과 함께 흘림기둥의 한 종류이다. 기둥의 입면 형태에 따른 것으로 흘림이 없는 기둥은 상하 직경이 같다. 흘림없는 기둥은 살림집이나 부속채 등 작은 건물에 사용하고 규모가 크거나 궁궐 및 사찰과 같은 권위건축에서는 보통 흘림기둥을 사용한다. 기둥 상부직경보다 하부직경을 크게 하여 사선으로 체감을 한 기둥을 민흘림기둥이라고 한다. 민흘림은 단면이 방형인 기둥에서 많이 사용하며 고구려쌍영총 전실의 팔각기둥과 통일신라시대 경북 의성의 탑리 5층석탑 일층탑신에서 그 사례를 볼 수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불단 위의 석가 삼존불
닫집이 장엄하다.
구석에 놓은 범종이 조선 헌종 15년(1674)에 만든 것이다.
다포계 팔작지붕의 처마 장식이 화려하다.
청룡사 삼층석탑
명부전과 산신전
명부전 외부
명부전 내부
산신전 외부
산신전 내부. 산신 탱화
야생토끼. 사람을 보고도 겁내지 않는다. 위로는 최상층 왕실 인평대군에서 아래로는 천인 사당패에 이르기까지 조선 백성 모두를 품었고, 옆으로는 동물까지 품고 있는 것이 청룡사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3. 관람후
1) 사당패와 청룡사
사당패는 사찰을 근거지로 하여 전국적으로 여러 군데에 분포하고 있었는데, 송석하 선생은 「사당고」에서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정수사 부근, 안성군 서운면 청룡리, 황해도 은율군 구월산, 경남 남해군 고현면 대곡리 화방사 등을 ‘사당골’이란 지명을 들어 사당의 본거지로 꼽았다.
그리고 신재효의 박타령에는 안성 청룡사, 영남 하동 목골, 함열 성불암, 창평 대주암, 담양, 옥천, 정읍, 동복, 함평 월량사 등이 사당패의 근거지로 나온다. 이는 일성록과 비변사등록에 사당들은 삼남에 아주 많다고 기록된 부분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19세기 중후반만 해도 이처럼 전국 여러 곳에 분포하던 사당패들은 19세기 말이 되면 안성 청룡사를 제외하고는 전혀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이들이 모두 동시에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대부분의 사당패가 남사당으로 바뀐 것인지에 대하여 청룡리 이외에는 전혀 기록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다. 이에 사당패의 근거지인 청룡리를 통하여 사당패가 남사당패로 바뀌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남사당패의 근거지로 알려진 안성 청룡사는 예로부터 사당패의 총본산으로 알려져 왔다. 이는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 및 송석하, 이능화, 백화랑 등 일제 강점기 초기 연구자들의 논문 그리고 사당패의 선소리, 탈춤 대사 등 많은 자료에서 확인된다. 심지어 송석하는 안성 청룡사에서는 사당을 양성하여 전국으로 보급한 곳이라고도 하였다.
현재도 청룡리에서는 청룡사 옆의 불당골을 여덟 사당이 살던 마을이라고 하여 ‘팔사당골’로 부르는데, 이는 아마 청룡사에서 애사당을 길러 전국 팔도의 사당패에 공급한 흔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당패의 분포와 안성 청룡사 Ⅰ, 시사안성, 2018.08.07, 원문 http://www.sisaanseong.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0)
2) 안성남사당풍물놀이
남사당패의 주요 터전이었던 안성을 근거로 조직한 웃다리농악. 1997년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안성 사당패의 근거지였던 불당골은 안성군 서운면 청룡리청룡사(靑龍寺)로 들어가는 계곡인바, 청룡사로 좌회전하지 않고 직진하여 얼마를 더 들어가서 만나게되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사당패를 이어 안성은 남사당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
송순갑의 1990년도 증언은 이러하다.“원 남사당은 무동아이들이 소고를 들고 여럿이 나와 춤추고 노래하는 형태였고, 구경꾼들을 모이게 하려고 사물악기를 쳤으나 본격적인 풍물을 놀지는 않았으며, 걸립을 다니지도 않았다. 이러한 원남사당은 60∼70년 전에 없어지고 그 이후에 나온 것이 ‘낭걸립’이다. 안성 개다리패 즉, 바우덕이 김암덕(金岩德)패를 뒤이어 꼭두쇠가 되었고 남사당의 마지막 뿌리였던 김복만을 비롯하여 남운용·양도일·송순갑·최은창·송복산 등이 1950년대 후반에 새 남사당농악을 꾸몄다. 요즈음 연희되고 있는 서울 남사당 농악(상쇠-김재원)·평택농악(상쇠-최은창)·천안시 흥타령농악(상쇠-이돌천)·안성남사당농악(상쇠-김기복)·대전웃다리농악(상쇠-송순갑)의 판제가 비슷한 것은 이들 각 농악단의 상쇠가 상술 새 남사당농악에 직·간접으로 관여하였던 데서 그 까닭을 찾을 수 있다. 나보다 3, 4세 연상인 이원보는 마을 쇠꾼 출신으로, 뒤에 남운용 낭걸립패에서 판제를 익혔다.”
김기복(金奇福)을 중심으로 1980년 10월에 지금의 안성 남사당농악이 조직되었고, 1989년 제30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김기복은 11세 때에 고삼면 다리골에서 백석문화제에 참석한 이원보 행중을 만나 무동을 섰으며, 17세에 상법고가 되었고 18세 때부터 상쇠를 배워 다리걸립이나 학교걸립을 다니곤 했다 한다.
그 밖의 농악대원으로는 전원근(상법고)·송영홍(상북)·박상오(수징)·정진태(부쇠)·박만구(상장고)·이상천(쇄납) 등이 있다.
안성 남사당풍물놀이의 일반 판제는 길놀이·인사굿·돌림벅구·겹돌림벅구·당산벌림·양상치기(벅구놀림)·허튼상치기(당산 벅구놀림)·오방감기와 풀기·무동놀림·쌍줄백이·사통백이·좌우치기·종대옆치기·가새치기·마당일채 쩍쩌기굿·개인놀이·무동서기와 동리받기·채상놀이 마당씻이로 짜여진다. 1997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바우덕이
안성남사당의 전설적인 인물이며, 우리나라 남사당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성 꼭두쇠로 알려진 인물이다. 구전에 의하면 5살 때 머슴살던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남사당패에 맡겨져 살면서 재주를 익혀 염불, 소고춤, 줄타기 등 남사당의 모든 기예를 익혔다고 한다. 15살 때 당시 안성남사당패를 이끌던 윤치덕이 사망하자 남사당패의 관례를 깨고 바우덕이를 우두머리인 꼭두쇠로 선출했다. 바우덕이는 여성꼭두쇠라는 특성과 탁월한 기예로 안성 남사당패를 최고의 인기패로 육성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865년(고종2)년 경복궁 중건 공사 때, 인부들을 위로하기 위해 전국의 남사당패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이때 안성에 거주하던 이승지의 후원으로 바우덕이패와 안성 돌우물패가 최고의 인기를 얻어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기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바우덕이가 살던 곳은 청룡사가 위치한 불당골인데, 이 곳은 예로부터 남사당패가 겨울을 나던 장소이다. 이 곳 남사당패는 청룡사의 신표를 받아 봄부터 가을까지 전국을 누비고, 겨울에는 이곳에 와서 월동을 했다고 한다. 바우덕이는 23세 때 폐병으로 사망했다고 하며, 마지막에 그를 돌보던 이경화가 망인의 유지에 따라 청룡골 입구 개울가 양지바른 곳에 매장했다고 한다. (위키백과)
근처에 그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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