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wthvr(,소테르)
구주 saviour, 구원자 deliverer, 보존자 preserver.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a) 명사 소테르는 소조(swvzw, 4982)로부터 형성되었으며, 따라서 소조와 소테리아의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다. 이 단어는 거의 독점적으로 신들과 사람들에게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의인화된 강에 적용되는 경우처럼(Hdt., 8, 138, 1) 예외가 있다.
소테르의 행위의 대상에 대해서는 동사 소조, 명사 소테리아와 명백한 차이가 있다. '상품을 보존하는' 것과 같은 어떤 소테르도 거의 없다. 소테르의 사역(使役)의 비인격적 대상 중에는 선박들(선원들과 함께), 또한 족장의 가정, 도시, 집, 조국, 세계 질서 등 인간 존재와 불과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이다. 그러므로 대체로 소테르는 인간의 영역에 국한되어 있다. 구원받는 자는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구원자에게 의존되어 있다.
(b) 인간을 통치, 간섭하고, 인간이 의지하는 신들은 구원자들이다. 신들은 인간의 생명을 위험들로부터 구원한다. 소테르를 사용하는 가장 오래된 본문에서 그리스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인간들의 구원자로 지칭되었다(Hymni Homerici, Ad Neptunum, 22, 5). 이 단어는 여신인 레다(Leda, Hymni Homerici Ad Castores, 33, 6이하)와 수많은 신들에게 사용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제우스에게 사용되었으며(Pindar, ol, 5, 17, Plato, Rep. 9, 583b), 이시스(Isis)와 세라피스(Serapis)도 종종 구원자로 칭해졌다. 또한 헬라-로마 시대에는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도 병든 자들의 구주로 간주되었다(Clem. Alex., Protrepticus 2, 26, 8).
(c) 사람들도 구원자들로 불리워졌다.
① 조력자, 생명을 구해준 자, 의사는 구원자이다. 인간 구원자들은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보호해 준 자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해준 자들, 병든 사람을 고쳐준 자들이다.
② 철학자들도 다른 사람을 도와 주거나 자유롭게 해주었을 때 구원자들이다. 따라서 소테르는 철학자들에게, 특히 에피쿠루스(Epicurus)에 대해 사용되었다(Polystratus, Herc. 346, p.80, 5).
③ 정치인들과 통치자들은 첫째로 그들의 특정한 활동에 관하여, 둘째로 그들의 신격화와 관련하여 구원자들로 불리워진 것이다. 마케도니아의 필립(Philip)은 데쌀리(Thessaly)의 거민들에 의해 친구요, 은인이요 구원자로 환호를 받았다(Dem., Orationes 18, 43).
로마 세계에 있어서 이 용어는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여전히 특정한 행위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반드시 신격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데 폼페이와 그의 부하의 경우에서처럼 최후의 책임이 있는 자의 부하들에 대해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④ 헬라니즘의 통치자 숭배에 있어서 소테르라는 칭호는 왕들에 대한 공적 칭호의 일부가 되었고 신적인 명예가 그들에게 부여되었다. 소테르와 데오스 소테르(theos soter)는 프톨레메이오스(Ptlemaic) 왕조와 셀레우코스(Seleucid) 왕조의 왕들을 일컫는 공식명칭의 하나가 되었고, 소조(구원하는 일)는 통치자의 특별한 직무이다. 이 명칭은 이집트에서 통치자가 신의 아들이라는 관념과 관련되어 있다. 이집트에서 이 명칭은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에 역시 정부 관리들에게 붙여졌던 것이다.
⑤ 황제 숭배에서 소테르는 가장 강력하게 표현되었다. 소테르 테스 오이쿠메네스(인간 세계의 구원자)라는 말은 맨 처음에 시이저에게 사용되었다(IG 12, 5, 1, 557). 그러나 소테르는 로마 통치자들의 공식 명칭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비문들에는 하드리안(Hadrian)이 특정한 도시의 소테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세주"라는 명칭은 보편화되었다. 황제가 주화에 자신이 소테르로 새겨지는 것을 허용하는 일은 드물었다.
⑥ 황금 시대에 관해서 말하자면, 은혜를 베푸는 자로서의 황제에 대한 개념은 또한 자신의 자비로운 통치로 시작된 평화와 질서와 번영의 황금 시대의 개념과 연결되었다. 곧 주전 1세기의 아우구스투스 통치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아시아 지역에 유포된 일반 칙령의 복사판인 것처럼 보이는 할리카르낫수스(Halicarnassus)의 칙령은 다음과 같이 선포되었다. "영원하고 불멸적인 우주의 특성인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품에 있어서, 우리에게 시이저 아우구스투스를 주심으로써, 이미 주어진 엄청난 은혜에 가장 큰 선한 것을 덧붙여 주신 것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행복한 생활에 있어서 그 자신의 나라의 아버지시요 데아 로마요 아버지 제우스 온 인류의 구주(soter)이시며 그의 섭리는 모든 사람의 기도를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능가하시기까지 하셨도다왜냐하면 땅과 바다에 평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니라. 현재의 기쁨이 극치에 이르고 풍성하도다. 사람들은 경기와 헌물과 제사와 찬양의 [즐거움]이 흘러 넘침으로 충만되었도다…"(E.Barker, ed.,). 이와 유사하게, 프리네 비문(Priene, 대략. 주전 9년)에는 아우구스투스가 "우리를 위한 구주"로 칭송되어 있다. 비록 황제가 완전히 이 세속적 의미에서의 구원자이기는 하지만 그는 신이나 신적 섭리에 의해 이직분을 부여받은 것이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소테르는 70인역본에서35회 나오며, 히브리어 야샤(구원하다), 예샤(구원, 구출), 예수아(구원)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소테르는 특히 여호와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사 45:15에서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말한다.
외경들에서 소테르란 호칭은 하나님께만 사용되었다(지혜서 16:17; 집회서 51:1; 마카베오일서 4:30; 마카베오삼서 6:29, 32; 7:16). 쿰란 문서에는 헬라어 소테르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 없다. 요세푸스는 이 단어를 예를 들어 요나단과 같은 인간 구원자에 대해서만 사용했다(Ant. 6, 240). 그러나 필로는 하나님을 자기 백성의 구원자이시며 민족과 우주의 유지자이시요, 고난과의 투쟁에서 영혼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보았다. 랍비 문서들에 단 한 번 나오는 실례는 별도로 하고, 메시야는 구원자로 칭해지지 않았다. 그밖에 하나님과 메시야는 고엘(구속자)이라는 단어로 묘사된다. '구속자'나 '구원자'가 신약성경 시대에 통용되던 메시야에 대한 호칭이었다는 증거는 없다"(W.Foerster; J.Schneider; C.Brown).
3. 신약성경의 용법.
소테르는 신약성경에서 '구원자, 주주'를 의미하며, 24회 사용 중 16회는 그리스도에게 사용되고, 8회는 하나님께 사용되었다.
(a) 눅 2:11에서 소테르는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천사가 그것을 목자들에게 한 고지에 나타난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곳의 소테르(soter)는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민족 지도자와 하나님께 붙인 명칭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E.E.Ellis).
눅 2:14에 의하면 예수님은 구주로서 평화를 주시는 자이시다. 이것은 사람들이 아우구스투스를 평화를 가져온 소테르로 찬양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참된 전달자이신 소테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는 구주로서 낮은 세상에 그의 보좌를 세우고 어두운 세력을 멸하며 인간을 모든 위험과 필요와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재난과 파멸에서 보호하시고 땅위에 평화를 가져온 자이다. 헬라어 성경에는 구주란 말에 관사가 없으니 이는 그 이름이 여기서 고유 명사로 쓰인 까닭이며, 오직 그 만이 구주심을 나타낸다.
눅 1:47의 마리아의 찬가에서 소테르는 하나님에게 사용되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합 3:18에서 이런 표현을 볼 수 있다. "하나님 내 구주"는 마리아가 하나님을 자기 구주로 인정하는 신앙을 표현한 것이다. 마리아는 자기가 죄있는 비천한 자임을 인식하고 구주의 필요를 인정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의 구주시며,특별히 자기의 구주시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외부적인 원수에서 구원이요, 또한 내부적인 죄에서 구원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으로 확실히 되었는데 마리아에게 허락한 메시야를 통하여 성취될 것이다. 마리아는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영광스런 구원 계획의 도구로 비천한 촌 처녀인 자기를 택하여 메시야의 모친이 되는 큰 영예를 주신 특별한 은총에 감격하고, 그런고로 자기가 받은 영광의 찬사와 오고 오는 세대에 모든 사람이 자기를 "복이 있다" 칭할 모든 찬사까지 함께 모아 그것을 모든 영광과 감사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 하나님께 돌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함은"이라고 찬송했다. 마리아의 구주에 대한 찬양과 그 기쁨은 영혼의 가장 조용하고 고상하고 신성한 성전에서 흘러 나온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영광을 깨달을 때 더욱 자신이 값 없고 보잘 것 없는 것을 느꼈으며, 그 영광이 자기에게 어떻게 귀한 것임을 깨달을 때 참된 주의 계집종으로서 복종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b) 요한의 기록에서 소테르는 2회, 요한복음에서 1회, 요한일서에서 1회 나온다. 요 4:42에서 소테르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는 사마리아인들의 고백에 나온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사마리아 여인)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각성시킬 때 사용하신 말과 대조된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의 예배의 헛됨에 관심을 집중시키시고 이 구원은 유대교와 결부되어 있으며 유대교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요 4:42에는 구원의 우주적인 국면이 나타나 있다.
요한복음에는 그 외의 역설이 암시되어 있으니 곧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구원을 보고 응답하였음에 반하여,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두 구절이 그리스도는유대인들의 구원자 뿐 아니라 이방인들의 구원자도 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일 4:14에서 요한은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한다"고 천명하였다.
(c) 유대인들에게 행한 원시 교회의 선포(사도행전)에서 소테르는 2회 나온다.
행 5:31에서 소테르는 이스라엘을 위한 구주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임금과 구주"는 70인역 사사기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원수들에게서 구원하기 위해 세우신 자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의도된 역할을 예시해준다.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정치적 해방을 소원한 반면, 그리스도는 죄사함을 내용으로 하는 영적 구원을 주시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행 13:23에서도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이 두 구절에서 설교는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를 분명하게 구별짓는다. 동시에 이 설교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도구로 택함받아 하나님의 임명을 받고 권능을 받으신 분으로서의 예수님의 유일회성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엄밀히 말해서, 바로 이 점이 교회와 유대인들 간의 충돌점이었다.
(d) 교회에 보내는 바울 서신들에 소테르는 오직 두번 나온다. 빌 3:20에서 소테르는 독자들에게 현생의 시련들 가운데 있는 그들의 종말론적 실존과 기대를 상기시키는 말씀에 나온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엡 5:21-엡 5:33에서 소테르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상징으로 나오는 결혼 관계 내에서의 상호 사랑과 존경에 대한 권면에 나온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 엄밀한 의미에서 몸의 구주는 '자기 몸인 교회의 구속자요 보호자이신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그리스도는 구원자이시다. 왜냐하면 구원이 완성될 때 자기 앞에 순결하게 세우시기 위하여 자신의 교회를 사랑하사 사망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셨고 물과 말씀으로 씻어 교회를 정케 하셨기 때문이다(25절 이하).
(e) 목회 서신들에서 소테르(soter)는 다른 어떤 신약성경의 문서들에서 보다 비교적 더 자주 나오며 6회는 하나님에 대해, 4회는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었다.
① 목회 서신들에서 구세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진술은 보편성과 특별성을 나타낸다.
딤전 4:10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 특별히 믿는 자의 구주로 나온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딛 1:3에 의하면, 이 구원은 전도로 실시되었다: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맡기신 것이라". 이는 구원의 메시지가 만만에게 전파되어 그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구주"란 말은 피상적이나마 만인구원설을 시사해준다. 바렛트(Barrett)는 딤전 4:10에서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생명의 구원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생명을 보존하시며, 악인과 선인에게 해를 비추고 동일한 비를 내리신다. 이러한 뜻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주'시다. 이렇게 보고 마지막 구절인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란 말을 읽으면 그 뜻이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는 누구나 받는다. 그러나 오직 깨어서 그리스도께 전적인 순종과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의 은혜를 받는다(참조: J.G.Goul).
딛 2:10에서 소테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떼어 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기독교인들은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돋보이게 하는 생활을 영위하여야 한다. 그러나 다음 구절(딛 2:11)에서 이미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 능력에서 계시되었고 교회 구성원들, 곧 종들의 새 생활에로 나타내어진다고 선언하였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모든 사람을 포용하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계획들을 실현시키는데 관심을 기울이신다. 디모데전서의 서문에서(딛 1:1-4)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동일한 방법으로 구주로 칭함을 받으신다.
② 구주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구절들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 아주 포괄적 묘사를 한다.
딤후 1:10에서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세우신 사람들을 구원하실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의 첫번 나타나심을 통해 세상에 나타내셨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딛 3:4에 의하면 구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타났으며(딛 3:4) 그것은 특히 헬라의 통치자들을 찬양할 때 사용되었던 특성들이었으나 이곳에서는 하나님께로 양도되었다. 딤후 1:10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는 그의 죽음을 폐지하심과 불멸의 →생명(Life)을 빛으로 가져오심으로 이룩되었다.
영원 전에 정해진 하나님의 자유로운 목적과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그분의은총을 통해서따라서 우리의 공적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신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다. 정화와 중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긍휼하심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셨다. 성령(영→Spirit)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풍성히 임하게 되었다(딛 3:5이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로서 신자들은 구원의 완성과(딛 3:7), 소망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으니 이것은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하여 받게 될 것이다(딛 2:13).
(f) 베드로후서에서는 소테르가 일반적으로 퀴리오스(주)라는 칭호와 결부되어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비교적 자주 벧후 1:1이하에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벧후 1:11에서 베드로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권면한다.
벧후 2:20에서 소테르는 정욕에 얽매이는 것에 대한 경고와 관련되어 나온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벧후 3:2에는 "진실한 마음"을 일깨우도록 하라는 말씀이 있다.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이곳에서 기독교는 새 율법이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참조: 벧후 2:21). 이 서신은 다시 지식이라는 주제를 사용하고 있는 기도로 끝나는데, 이 지식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의 계명에 대한 지식도 포함되어 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아멘"(벧후 3:18).
이와 유사하게 유 1:25도 다음과 같이 끝난다.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찌어다 아멘."
(참조: W. Foerster; J. Schneider; C. Brow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