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끼나와 방문 소감문
작성자: 사회학과 진영옥 AM20140603
1. 출국에 앞서서
2015년 3월 봄 학기부터 <동아시아비교연구> 수업을 들으면서 내내 6월에 제주도처럼 아름다운 오끼나와 땅에 구경가는 꿈에 부풀었다. 1945년부터 지금까지 미군기지 반대투쟁의 땅이기도 하고 일본 본토로부터 차별과 수난을 몸으로 역사에서 겪고 있는 오끼나와는 아름답고 슬픈 땅이었다. 오끼나와에 대해서는 몇가지가 기억에 있었다.
역사적으로 비극적 전쟁과 차별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땅은 제주도보다 남쪽에 위치한 인구 100만명의 섬이다.
1945년 태평양전쟁 종결 후에 미군 점령지로서 남았다.
즉 대동아공영권에서 일· 미 공영권으로 변신한 일본은 오끼나와를 버리고 그를 발판으로 삼아 번영을 도약한다. 미국은 일본에게 전쟁범죄를 물어 비무장국가,상징천황제,오끼나와의 배타적 군사지배라는 3종 세트를 남겼다.1) 현재 일본 전역의 미군기지의 75%가 오끼나와 섬에 집중되어 있다. 이미 60년대에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에는 동일규모의 미군기지가 존재했지만, 1972년 오키나와의 반환을 계기로 일본 본토의 기지가 약 3분의 1로 줄었기 때문에, 국토면적의 겨우 0.6%인 오키나와로 미군기지의 약 75%가 집중되는 상황이 벌어졌다.구조적 오키나와 차별은 오키나와 반환으로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 일본 본토에서는 기지문제를 실감하는 일이 거의 없어지게 되고 , 반 기지투쟁, 반 안보투쟁은 눈에 띄게 쇠퇴해간다. 기지문제는 전적으로 오키나와 문제가 되어 오키나와의 투쟁은 고립될 수 밖에 없게 된다.2)
이런 긴장감있는 정보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는 우선 외국으로 구경가는 설레임이 앞섰다. 특히 2014년 미군기지 반대문제를 둘러싸고 현지사 선거에서 진보적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는 뉴스도 본적이 있었다. 그리고 문화인류학적으로 장례관련 풍습중에 사람이 죽은 후에 세골의식을 치르는 영상을 ‘일본 오끼나와-제주 교류 세미나’에서 보고 나서는 본토와 많이 다르구나라는 인상이 컸다.
마치 제주가 육지와 다르듯이 문화와 세속적 풍습이 많이 옛날 식으로 남아있구나라는 인상을 받았다.
언어면에서 오끼나와 지역말이 있다고 노마 필드의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읽은 기억도 있다. 오끼나와 현지인을 인터뷰하면서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이 있었다고 하는 부분이 나온다.
제주도에도 제주말이 있다. 제주사람들은 육지에 살러 가면 대부분 언어를 표준어로 표준화시키면서 변하고 온다. 대부분은 그렇다. 아니 배운 사람일수록(?) 그런 것 같다.
내가 자랐던 1980년대에 그런 경험이 있다. 육지로 대학을 가거나 혹은 취직을 한 친구들이 한 번씩 집에 내려오면 기름칠한 서울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 좀 이상했다. 1년만에 서울가면 말도 바뀌나? 너무하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곤밥(쌀밥)먹은 소릴 하는 것이다.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언어의 변화가 가장 필요한 변신의 증거인 듯 하였다. 학생데모를 하더라도 육지대학은 멋있게 이론가답게 말도 잘할 것이라는 환상이 있었던 것 같다.
언어의 표준화는 가장 드러나는 변화이다. 사투리-제주말을 안 써 볼려고 그래서 서울 사람처럼 신식으로 문명화된 사람이 되기위해 도시의 문물을 받으면 똥뙈지로 상징화 되는 냄새나는 제주 촌사람 태를 벗을수 있다는 그래서 서울사람이 된다는 80년대 90년대 분위기가 있었다.
요즘이야 제주도가 최고의 휴양지가 되었지만. 공기 좋고 한적하고 사람살기 좋은 땅으로 땅 값이 오르고 있다. 참 지가가 오르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땅을 살수 없으니 불편한 것이다.
오끼나와는 진짜 제주도처럼 바람많고 습기가 높은 분위기였다.
메르스 때문에 가기 전부터 건강을 챙기느라 운동도 하고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홍삼정도 구입 하였다.
세계적으로 홍삼정은 면역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어느 서양의사가 쓴 책을 본 적이 있다.
사실상 내가 비염증세가 있는데, 홍삼정을 먹을 때는 감기에 잘 걸리지 않는다.
2. < 1일차 > 오끼나와 도착 인상
어쨌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오끼나와에 도착했다.
나는 이번 답사에서 맡은 역할이 비디오촬영이다.
그래서 비디오 기록만 잘 하면 답사는 잘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출발 했다.
1) 오키나와 렌트카 임대하다.
내려서 우리들은 공항에서 렌트카 회사를 찾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조교수님 내외를 맞이하러온 아라가끼라는 60세 가량된 여성분이 공항 로비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일본 말도 모르는 상태라 조교수님과 사모님께서 통역해주셔야 무슨 상황인지 해석이 되었다. 이런 불편함이란. 말을 모르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절감 하는 순간이었다.
아라가끼 선생님은 대학에 강의도 나가시고 제주도에도 오시고 역사연구도 하시고 필리핀에서 남편과 만나 전쟁동안 지내다가 오키나와에 계신다고 한다. 그렇구나. 저렇게 머리가 하얀데 공부를 좋아하시는구나. 내가 오끼나와에서 느낀 사람들의 모습중에 가슴이 띠뜻해지는 두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아라가끼’선생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 김기강이라는 해노코 미군기지 반대투쟁 현장에서 만난 41세의 재일교포 3세 여성이다.
생각하면 감동으로 코 끝이 찡해진다. 두 사람의 열정과 진지함과 따스함이 이번 오끼나와에서 얻은 선물이다.
내가 사회학과 대학원에 입학할 때 나이가 들어서 이 무슨 주책으로 대학원에 다닐까하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이젠 즐겁고 내가 스스로 나를 좋아해지는 느낌이다.
공항에서 우리는 렌트카 업체를 찾아 여기저기 메모로 받은 장소를 찾아다녔다. 오끼나와 나하 공항에는 국내선과 국제선 건물이 따로 있다. 국제선에서 기다리다 보니 국내선으로 가야 한단다. 그렇구나 . 이젠 국내선으로 가서 묻고 물어서 996 렌터카 회사 사람을 겨우 만났다.
교수님의 하얀 얼굴에 땀이 송송 맺혀서 줄줄 흘러내린다. 진짜 덥네. 오끼나와 첫 인상은 습기찬 여름이었다.
아이고 미안해서 어쩌나 . 말을 모르니 가만히 교수님을 따라만 다닌다.
996 렌터카는 자그만 회사인가 보다. 니뽄Nippon 렌터카도 아니고 류뀨 렌터카도 아니고 996이라니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이 들어도 모른단다. 996이 뭐냐? 이런 얼굴표정이었다.
Small is beautiful이라는 환경학자의 말이 이런 뜻인가. 렌트비용이 저렴한 작은 업체였다.
차를 빌리고 오른쪽 운전석을 보는 것도 신기하다. 우측 차선을 타고 가는 이 기분. 진정하게 낯설다는 것은 이런 것이로구나. 니산 회사의 경차를 빌리고 숙소로 간다.
공항 도착 후 두 시간은 지났다. 이버 답사 참석자중에 한국학 과정을 공부하는 외국인이있다. 길림성출신 리리와 부다페스트 출신 아니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수리성에서. 그런데 정신없이 도착 후 ‘아름다운 작은’ 996회사를 찾느라 수리성에 못갔다. 그 두 젊은 여성들은 잘 기다리고 구경하고 오겠지.
나하시내 Live Max 호텔로 열심히 간다.
우측에서 운전하고 왼쪽 차선으로 주행하는 조교수님 차를 타고 시내로 간다.
그런데 차선이 중앙으로 너무 붙어 가는 듯, 아이구 무서워라.
그런데 네비게이션에 찍힌 주소가 아닌가보다. 우리가 묵을 호텔이 아니 나타난다.
내려서 걸어서 동네 젊은이들에게 영어로 물어본다. 이 주소를 아느냐고? 대만 젊은이가 노트패드를 들고 주소를 찍더니 길 건너 가야겠다고 구글 지도를 들고 같이 가준다. 친절한 대만 친구이다. 여행을 왔다고 한다.나는 지도 찾는 것을 앱으로 잘 못한다. 진짜 두렵다. 연습도 해야지.
여튼 감사하게 그녀의 구글 지도를 옆에 끼고 같이 호텔에 도착하니 진이 다 빠진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을 찾아서 나간다. 오끼나와 국수와 새우튀김.해초튀김을 먹고 계란말이도먹고 리리와 아니타를 만나 오끼나와의 밤을 보냈다. 밤에 잠을 잘 못잤다. 낯선 땅에서 몸도 낯설어 한다.
3. <2일차> 오끼나와 전쟁 유적지 답사시작하다.
--가가츠 고지에 청구의 탑과 교또의 탑, 가가츠 탑. 후텐마 비행장 전경을 보다.
1) 가가츠 고지를 올라가는데 높은 계단이 많다. 오르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고지대라서 전쟁중에 일본군과 오키나와 현주민들이 격전을 치르는 아마 전쟁승리를 원하는 일본군으로서는 유리한 곳이었나 하는 느낌이다.
靑丘의 塔 은 오끼나와 전에서 죽은 청구 ,푸른 언덕, 즉 조선인들을 위한 탑이다. 그런데 이를 세운 사람들이 일본 본토 사람들인데 , 천황을 위해서 싸우다 죽은 조선 군인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의미이다. 일본 민주동지회의 대표가 우익 사람들의 돈을 모금하여 조선인 전사자를 기리기 위한 탑이다. 이 탑은 일본을 위하여 즉 대동아공영을 위하여 전쟁중 죽어간 조선출신군인들을 즉 천황의 자식들로서 훌륭히 싸우다 전사한 것을 기리는 비이다. 교또쪽 천황과 관련된 사람들 이름이 적혀져있다. 우익인사들과 전범 이름이 적혀있다. 왜 우익단체대표가 조선인을 위한 이 탑을 왜 만들었을까? 민주동지회대표가 조선인들이 천황을 위해 싸우러 와서 전사했는데 천황의 아들 딸이다. 일본군의 일부로서 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었으니 훌륭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일본우익으로서 전쟁의 입장은 반성과 후회가 아니라 대일본국의 세계로의 진출에 수단으로서 작동되는구나. 그래서 죽은 이들도 천황을 위하여 장렬히 전사하니 자랑스러운 죽음인 것인가 보다 . 가가츠 전투는 15일간 격렬하게 저항하여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그 정신과 영혼을 자랑스럽게 기리자는 것이다.
교또의 탑(교또에서 온 군인들이 이 곳 오끼나와에서 전사한 것을 기리는 비석)옆에 청구의 탑이 세워져 있다.
평화헌법을 고쳐서 전쟁이 가능한 나라, 군대가 필요한 나라로 만들어서 일본은 또 세계제패를 바라는 것인가 보다. 오끼나와 전쟁에서 처음부터 전세는 일본군에게 불리했다.미군이 50만명 넘게 밀고 들어왔고 일본군은 수적으로 절반도 안되었다. 일본군이 일찍 항복했다면 이렇게 많은 민간인 희생이 줄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일본은 수치스럽게 항복하느니 끝까지 싸우고, 장렬히 전사하거나 마지막에 자살을 택하였다. 민간인에게도 희생을 강요했다. 오끼나와전 사련관이 마지막 전투에서 자살을 했다. 사령관이 이토만 전투에서 자살한 것을 기리면서 ‘여명의 탑’을 근처 마부니 언덕에 세우고 참배하는 자위대 군인들은 오늘도 군인들의 죽음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일본 우익의 군국주의는 실제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한 사람들에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에 일본이 자살특공대 정신을 등재하고자 신청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일까? 이 밤을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룸 메이트는 가톨릭 신자인데 강정에 해군기지 반대 집회와 미사에 여러 번 다녀왔다고 한다. 생명존중이 가톨릭 신앙의 중심이니까 신앙에 따라 그랬다고 했다. 그런데 가미가재식 일본 정신이 세계문화유산이 되기를 원하는 이 나라 우익들은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걸까?
차별받아 마땅한 오끼나와같은 땅은 버려도 된다는 것일까? 치바나 쇼오이찌씨가 치비찌리 동굴에서 말하던 말이 떠오른다. 집단 자살이 아니라 집단강제사라고 .군국주의교육은 바뀌어야 한다는 말.
2) 카데나 기지에 인공굴이 뚫려 있다고 한다. 제주도 송악산 밑이나 성산일출봉 옆 동굴처럼. 오끼나와 전쟁때 자살보트가 숨어 있다가 자살특공대가 되어서 19살 20살 21살 젊은 청년들이 비행훈련학교에서 배운 비행기술로 배를 타고 자살보트를 타고 미군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숨어 있는 동굴들이 아름다운 해안가에 안보이는 면으로 있다고 한다. 죽기 위한 방법도 알려주면서 죽을 때 적군의 함정과 부딪혀서라고 일본군에게 승리를 주어야 한다는 교육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천황의 나라를 위하여 내 아들이 내 남편이 죽어서 이제는 야스꾸니 신사에 이름을 자랑스럽게 올리고 추모하는 일본의 교육이데올로기는 오늘도 살아 있다. 여기에 주로 굴을 판 사람들이 조선인과 중국인이었다고 한다. 10년전 조교수가 답사왔었다고 한다.이 해안가는 요미탄 미군 상륙지점이다. 자살보트를 감추었던 굴이 멀리서 보인다.
이 아름다운 바닷가의 요새에 청년들을 죽게 만드는 굴을 파게 하고 죽게 하다니.
이 곳에 1995년 종전 50주년 기념사업으로 만든 비가 있다. 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945년 4월 1일 요미탄 촌의 서해안부에서 본토로 미군이 상륙했다. 녹색이 푸르른 땅은 초토화되었다. 전쟁은 과거 경험했던 것을 없앴다. 섬의 문화와 사람들의 평화로운 삶과 인명을 빼앗아갔다. 다시는 아름다운 해안이 어떠한 군대의 상륙지점이 되지 않도록 우리 요미탄 주민들은 기념한다. 태평양전 오끼나와전 종전 50주년 기념하여 이 비를 세운다”
이 남쪽 지역은 북쪽 지역에 비하여 일본군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이 많다고 한다.
남쪽에 3개월간 전투가 치열했고 그만큼 인명피해가 많았다. 오끼나와 북쪽은 4월1일 상륙해서 미군이 15일만에 점령했다. 남쪽은 특히 조선인과 대만인의 희생이 많았다.
남쪽 사람들은 전장속에서 3개월 기억이 많다고 한다. 북쪽은 주로 밀림과 수용소가 있었던기억이 많다고 한다.
전쟁중에 서로 스파이라 의심하고 신고하고, 민간인이 생존하면 자신들 위치를 밀고할까봐서 일본군은 오끼나와 민간인을 죽였다고도 한다. 이것이 차별과 희생의 근거가 되다니 전쟁은 양심을 버리는 행위 이상이다.
3) 치비찌리 동굴(가마)
동굴앞에는 예술 조각 작품이 있다. 동굴에서 주민들이 죽고 아기까지 살해되는 장면을 조각했다. 조각은 겉으로 드러난 부분과 안으로 안보이는 부분이 있다. 안에는 아기의 해골과 어른의 해골을 형상화한 조각과 해가 드는 밖을 보는 아기의 얼굴이 창백하게 조각되어 있다.
우익들이 이 조각상 작품을 부순 일도 있다고 한다. 숨기고 싶은 집단 강제사 과거이므로.
여기는 요미탄( 4월 1일) 상륙지점과 가까운데, 지역주민이 자연동굴(가마)에 4월2일 피난한 곳이다. 피신했던 140명중 83명이 집단 자결했다.
미군에서 잡혀서 포로가 되느니 스스로 천황을 위해 명예롭게 목숨을 끊자고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강요했다한다. 아이들은 스스로 죽을 수 없으니 부모가 죽였다고 한다.
‘집단 강제사’가 맞는 표현이다. 집단 자결이 아니라 .
“어머니가 어떻게 아이를 죽일 수 있었을 까?.일본이니까 가능했다. 생존자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오끼나와 사람은 차별 받아 왔다. 그래서 더 이제는 차별받지 않기 위해 훌륭한 일본 본토인처럼 되기위해 언어.표현.태도를 일본인 답게 .일본인처럼 노력해야한다고 어머니들은 동굴에서 생각했다. 결국 가엾은 어린아이를 희생시킨 것이다.
수퍼마켓 주인 츠바나 쇼이찌 씨는 1945년생이다. 다행히 전쟁에서 다치지 않고 살아남아 이런 교육을 하는 안내자가 되어 교육을 하고 계신데 . 머리가 희어서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그래도 책에는 오버하지 않고 진지하게 군국주의교육을 지적하고 오끼나와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모습을 잘 쓰고 있다.
“ 쇼오이찌는 그의 행위를 비난하는 오끼나와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네 현에서 국민체육대회가 개최되기를 바랐고, 소년부 쏘프트 볼 경기를 자기네 마을에 유치하려고 열심히 뛰어 다니기도 했다. 상공회의소에서 차지하고 있던 그의 위치를 보더라도 그러한 열의는 당연한 것이었다. 찌나고 보니 지나치게 나이브했다고 할수도 있겠으나 ,심상찮은 한 걸음을 내디뎌서 한계를 훌쩍 넘어버린 다음에야 비로소 심상한 것으로 여겨지던 것ㅇ의구조가 확연해지는 그런 경우는 자주 있는 법이다. 일장기를 불사르고 그 결과에 직면하는 일이 없었더라면 쇼오이찌는 국민체육대회의 성격을 지금 같은 형태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3)
2세 3세 4세 아이도 죽여졌다. 군국주의 황민화 교육이 사람을 죽이도록 만들었다. 기념비석에 희생자 이름, 성, 당시연령이 새겨져있다. 1965년에 원호법이 생겨서 적극적 군 부역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한다. 증언을 받아서 분류했다 한다.
쇼오이찌는 ‘군국주의’ ‘황민화교육’의 문제점을 말한다. “병사는 전쟁이 나면 주민을 지키지 않는다. 이 동굴에서의 집단 자살은 ‘교육에 의한 살해’이다.”
황민화교육, 천황의 백성이 되는 교육, 절대 항복하지 말아라,미리 목숨 끊어라. 140명이 숨어들어가서 희생자 85명이 서로 죽이고 죽여준 것이다.
4) 사탕수수밭 노래 기념비.
1920년대 오끼나와에는 사탕수수밭에서 농사를 지어 설탕을 수출하고 전쟁자원이 되었다. 전쟁자금이 된 것이다. 그 농토에 미군들이 탱크로 밟고 사탕수수 농사를 못짓게 만들었다.
밭을 밀고 들어온 미군 때문에, 오끼나와 땅은 초토화되었다. 손으로 악보가 그려진 철판으로만 듯 듯한 박스모형의 철제조형물에서 노래가 나온다. 빗속에서 슬픈 여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5) 恨(한)의 碑(비)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의 “한의 비”
조총련에서 세우려 했는데 한국에서 박정희가 알고 급히 돈과 비석을 준비해서 세운뒤 참배는 오지 않는다.
6) 사끼마 미술관 방문
오끼니와 전쟁 그림 전시관이다. 상설 전시관에는 가마에서 집단 자결한 사건 그림이 벽 전체를 덮고 있다. 검은색 그림이 주를 이룬다. 해골들이 많이 그려져 있고, 엄마가 아이를 안은 사진.하늘에 떠 있는 듯, 땅 바닥에 누워 있는 듯 한 그림이다. 빨강색 핏물이 사이 사이 흐르는 듯함 색이 보인다. 옥상에서 계단을 오르면 미군기지 비행장 경계 펜스를 볼 수 있다.사끼마미술관은 자신의 땅을 소송을 -40년간- 통하여 되 찾은 땅이다. 마당에 가족 묘가 있다. 옥상에는 6개 계단과 23개 계단을 분리해서 두 단계로 연결했다.
6월 23일. 1996년 오키나와의 고등학생들이 전쟁에서 돌아가신 사람들과 같은 개수의 돌을 26만 6905개의 돌에 하나씩 번호를 써넣고 쌓아올려서 만들었다. 미군 후텐마 기지가 바로 옆에 이어져서 철조망 한 발자국 사이로 경계로서 보인다. 한 작가의 노력이 40년을 싸ㅇ워서 사람들에게 기억을 재생시키고 교육 공간을 통해 의식을 바꾼다. 놀라운 일이다. 40년이라는 세월이 무겁고 아름답게 나를 감동시킨다.
한글로 미술관 설명을 적어 놓은 안내문이 있다. “여기는 우리 조상들의 땅이었다. 그 곳에는 350년 전에 ‘소나무 가로수’가 수리성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일본군과 미군에 의해 다 베어져 버렸다.” 이제 은빛 숲과 금빛 숲을 만들려고 한다고 적었다.
7) 6.22일 전야제.
< 오키나와전쟁 전몰자 추도식 전야제.>
오끼나와 사람들은 가지 않고 본토에서 온 일본 유족회가 참석하고 주관하는 전야제라고 한다. 우울하고 무거운 분위기 이다. 일본 본토에서 온 사람들이 대다수 참석자라고 한다.
행사장 무대중앙에 부처조각상이 키가 크고 부피가 너무 압도적이다. 천정에 닿을 듯 높아서 사람들을 누르는 분위기이다.
전야제는 주최가 ‘류꾸협회’이고 공동주최는 ‘류꾸현 유족 연합회’,‘류꾸현 평화기념재단’이다. 협찬으로 ‘일본 유족회’라고 적혀 있다.
류꾸 무용 봉납 순서에 전통복장을 한 여성 예능인이 춤을 춘다. 그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
창작무용인데 무용작품 제목이 ‘숙정(淑靜)’이다. 우리나라에서 정숙이라는 말을 한자식은 숙정이라 한다. 길림성에서 온 리리도 숙정이라고 (중국에서도 정숙을 (be quiet) 표현할 때)한다. 예능인은 시체같은 춤을 춘다. 표정이 없다. 슬프거나 편안하거나 괴롭거나
감정을 드러나지 않게 마취한 얼굴이다. 아무런 말도 없고 느낌도 없다. 다만 정숙.숙정만 있다. 전통 의상을 입고 춤을 추고 끝난 후에 다른 연주자도 조용하다.
기념관 건물 안에 복도 전시관에는 정물화도 있고 편안한 농사짓는 인물화도 있다. 전쟁에 죽은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니 행복한 그림들이 많다.
4. <3일차> 위령공원/6월23일 일정
1) 자위대 참배 장소에 가다
새벽 4시 기상하고 여명의 탑에 자위대 참배 모습을 보기위해 출발했다. 위령공원에 도착하니 칠흑처럼 깜깜하다. 차를 세우고 공원을 지나 ‘여명의 탑’으로 간다. 위령공원 끝까지 간다. 긴장감으로 자위대 간부가 여명의 탑에 올 때까지 기다린다. 먼저 가서 시민단체에서 항의성 집회 할 예정이었다 하는데 , 자위대 군간부의 참배를 막아서고 “ 군국주의 부활 반대한다!” 내지는 “미군기지 이전 반대!”라고 소리치려나. 그런데 조용히 참배는 이루어졌다. 아무런 항의도 없었다.
자위대 군인들은 10명 정도 간단히 참배하고 새벽 미명에 ‘여명의 탑’앞에 05시에 참배하고 조용히 내려갔다. 전쟁 마지막에 자살한 사령관이 자살한 위치에 탑이 있으니 상징적이다.
이제 날이이 밝을 때까지 걷고 현 지역별 비석들을 차례대로 보면서 아름다운 바다도 보면서 바람도 머리칼을 흩날리게 불러주지만 덥다. 한국인 위령탑에 참배했다. 1975년에 세워진 것이다.
2) 위령제에 12시에 아베 총리 참석이 예정되어 있다. 폴리스 라인이 쳐지고 사람들을 통제한다. 아베는 버스를 타고 들어 왔다. 아베총리가 발언하는 시간에 군중들 중에 야유가 나온다.경찰은 그를 둘러싸서 제지한다. 아베가 “아름다운 오끼나와섬.” 어쩌구 하니 “뻥까지 마라”발언이 터져 나온다..
3) 평화기념관 자료관.
증언자의 증언을 기록한 자료관이 인상적이다. 증언자의 이름과 나이를 적고 증언 그대로 사람 몸만큼 큰 전지를 코팅하여 손으로 만지고 넘기면서 읽어도 훼손이 덜 가게 코팅처리한 증언 책이다. 동굴도 있다. 실제크기의 사람모형으로 만든 것이 보였다. 가마(동굴)에서 엄마의 손에 의해 아이가 숨이 틀어 막힌 채 군인 총검에 협박아래 죽는 장면이 있다.
6월 23일 추모제가 열리는 날이어서 그런지 관람객이 많다.
4) 6.23 국제 반전 오끼나와 집회.
. 시민단체 집회를 하면서 연주를 하는 듯.죽은 사람들 조각이 세워져 있음.
현수막에 6.23 국제 반전 오끼나와 집회라고 적혀 있다.
천막을 치고 무대를 설치하고 바닥에 앉아서 박수치는 사람들.전통 복장을 하고 연주를 하는 출연자 2명.
5) 학도병 위령제와 히메유리평화기념 자료관
두 여학교 히매(아가씨)와 유리(백합)라 불리는 여학교 15-17세의 학생들이 동굴에서 질식사한 곳이다. 관람객들이 많다. 수학여행단 학생들이다. 기록하고 관람하는 분위기까 진지하다. 벽에는 사진과 글이 찍혀져 있다. 사진을 벽화처럼 입혔다고 보인다. ‘15세.사망.사망,’
교복입은 단발머리의 여학생들 사진이 웃는 모습으로 있다. 밖에는 기념비 앞에서 동창생들과 유족들과 참배객들이 기념행사를 한다. 6.23일 종전기념 집회이리다.
벽에 한 장소에 영어와 일본어로 글이 새겨져 있다.
‘나는 다시 걷고 싶어요. 햇볕 아래서 두려움 없이요.
나는 목이 말라요. 물을 주세요.
엄마아. 나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친구들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말을 해요.
우리는 전쟁터로 갔어요. 진실을 모른채로.
전쟁은 모든 것을 죽여요. 한 사람의 존재의 목숨을.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되요.
우리는 전쟁의 진실을 말할 거에요.
우리 몸안에 새겨진 잔인성,고통,기억들과 전쟁의 진실을 말할 거에요.‘
히메유리 학생들은 학도병이었고 80명 질식사했다.1945년 6월 19일이었다. 그 중에 8명 생존자가 있다. 그 생존자가 동창생이겠다. 오늘 6월23일 추도식에 좌석배치중에 ‘同窓(동창)席(석)’으로 배치된 한자 글이 이를 보여준다. 경찰이 긴장하면서 비디오로 同窓(동창)席(석)이라는 글자옆줄 참배와 위령 장면을 못 찍게 한다.
5. < 4일차 > 6월 24일 수요일 일정.
1) 해노꼬 미군 신기지 후보지 농성장 방문.
신기지 반대 항의 집회와 농성중이었다.
군기지의 소녀 군인 폭력 사건에 분노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동경출신의 영어 가능한 여성 ‘마유꼬’에게 설명을 들었다. 미군범죄자가 일본 법정에서는 재판도 처벌도 불가능하다한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미군은 한국에 주둔해도 미국법에 따라 재판을 받는다.
“NO NEW BASE"를 외치면서 집회중이었다. 아침에 공사차량 출근저지 집회를 하고 일과를 시작한다. 2015년 1월부터 집회가 매일 이루어진다. 페이스북등 SNS를 통하여 선전홍보 활동을 하고 있다. 집회의 요구 사항은 “ 사람을 죽이는 기지를 만들지 말아라.” ‘탈식민지’라고 쓴 현수막도 보인다. 해노꼬 기금이 3억엔 모여졌다. 4월부터 모금 시작했다고 한다. 나하와 나고 출신 어머니들이 밥을 해서 가져다 준다.현의회 의원들중에 몇몇이 주 1회 집회 참석을 한다.수요일 오전에 한다. 그 날은 공사차량이 출근을 늦게 한다. 의원들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그런다.
나이든 여성과 남성들이 집회에 많이 참석하는 이유는 전쟁 경험자들이 ‘군기지는 안된다’는생각으로 참석해서 이다.바다에서 구명조끼 입고 해상 시위하다가 경비대에게 묵이 눌려서 부상자 발생하기도 했다. 1개월간 목을 못 쓰고 고생했다.
김기강이라는 오사카 출신 재일 교포 3세를 만났다. 연극인이다. 우리말로 설명해준다. 반갑다.모노드라마 공연을 제주도에서 한적이 있다고 한다.‘할머니이야기’ 라는 제목의 모노드라마다. 제주도 놀이패 한라산에서 공연을 했다.
2014년 재일교포 출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여 한라산 놀이패와 같이 공연했다.
김기강씨는 우리를 해노코 해변에 산책을 시켜주었다. 덥고 습한 날씨에 바닷가를 향해 언덕을 걸어서 가는데 즐겁고 한국인들과 만났던 이야기를 즐겁게 한다. 10년간 텐트를 치고 투쟁한 현장은 아름답다. 신문기사도 붙이고 듀공이라는 멸종위기의 바다표범이 다녀간다는 것을 상징으로 그림을 그려두었다. 사진을 찍고 다시 집화농성장까지 걸어 왔다. 너무 더워서 음료수를 사먹고 걸어오는데 제주도마을과 비슷한 분위기이다. 바닷가 한적한 강정 마을 분위기 였다. 헤어지면서 한 번 안아 보았다. 꼭 껴안는 김기강씨. 9월에 기지 조사결과가 나오면 기지공사를 한다고 하지만 아나 아베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으니까 우리는 이길 것이고 기지는 취소 될 것이라 한다. 이 마르고 열정적인 제주도 성산포출신의 할머니를 손녀가 건강하기를빈다.
6. < 5일차 > 6월 25일 목요일 일정.
아침에 쉬고 공항으로 바로 가기로 했다. 커피숍을 겸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공항으로 갔다.공항에 가기 전에 렌터카 996 회사를 찾아갔다. 주유를 하고 기름을 채웠다.
공항에 가니 첫날 뵈었던 아라가끼 선생님이 와 계셨다. 망고 농사를 짓는다는 이 선생님은
공항 커피숍에서 메모지에 우리 주소를 적는다. 그리고 이메일 주소를 사용하지 않는다.제주도 4.3 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매해마다 4.3 행사에 간다고 하신다.
필리핀과 한국과 오끼나와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글을 쓰고 편집하는 일을 한다고 한다. 1998년 동아시아 심포지엄에 참석했고 2005년 제주대학교 심포지엄에서 발표를 했다고 한다. 조교수님이 심포지엄에서 질문을 많이 해서 교류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끼나와 주민들이 미군기지를 반대하는 데도 만들어졌고, 전쟁 전부터 중국과 미국이 오끼나와를 미워해서 힘든 땅이 되었다고 한다.
아베는 새 미군 기지를 만든다고 한다. ‘우리는 질 수 없다’고 반대하면서 싸우고 있고, 일본어판 『‘4.3은 말한다』를 읽고 있다고 한다. 2년전 친구 5명과 함께 강정에 구럼비 바위를 보러 갔다. 아름다운 곳이라고 느꼈다.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신문,시민강좌도 교육수단으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올가을에는 한라산에 가고 싶다고 하신다. 그리고 나서헤어진 줄 알았다. 인사하고 가는데 , 다시 ‘오끼나와 과자’를 사서 우리에게 주시고는 아이처럼 손을 흔들고 헤어졌다.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 했다. 진지함과 다정한 편안함을 가진 공부하는 할머니 아라가끼의 모습이 일본의 힘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우리를 이틀간 안내한 제주출신 고00 연구원의 말처럼 나이든 활동가들과 퇴직한 교사들과 지식인들이 계속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과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힘으로 이러 저런 항의현장에 재판정에 집회에 나가는 힘이라고 느껴졌다.
<사진자료>
청구의 탑
답사자들
교또의 탑
쇼오이찌
미군기지 비율
오끼나와평화기념당
여명의 탑
오끼나와전쟁 전몰자 추도식 전야제 전경
사탕수수밭 노래비
끝.
첫댓글 다 읽진 못하고, 부분만 읽고나서 댓글을 답니다. ㅎㅎ 아라가키 선생님은 남편이 필리핀 사람이 아니고, 아버지가 필리핀에 갔을 때 필리핀 여성과 결혼, 전쟁이 끝나자 함께 오키나와로 돌아왔어요. ㅎㅎ 제가 통역을 잘 못해나봐요. 저도 제 블로그에 사진 위주의 여행기 올렸습니다. 지금은 동경에 와 있는데 인터넷 상황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서 간단히 적습니다. 방학동안 건강하세요^^ 그때 홍삼엑기스는 정말 효과 좋았어요. 저는 그때 이후 아픈 데가 없고, 여행짐도 제가 더 많이 무겁게 들고 다니고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갑자기 더 건강해진 게 그때 홍삼 덕분인가합니다 ㅎㅎ
ㅎㅎ.ㅎㅎ.여러가지로 고맙습니다.댓글 감솨함다. 홍삼효과를 보았다니 다행임다. 더운 날씨에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