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과 이성계가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까닭
이형우(고려대 강사)
황금을 돌같이 여긴 최영, 명궁 이성계
우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꾸준하게 민족의 역사를 배워왔다. 선사시대부터 최초의 국가 고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우리 역사를 배우면서, 우리는 때때로 ‘그때 만약에 이렇게 되었더라면’하는 가정을 해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가정들은 하나의 양념이 되어 우리가 선조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또 다른 재미를 더해준다. 그런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그려 보았을 가정은 잃어버린 만주 벌판에 대한 것일 것이다.
최영 장군이 추진하였던 요동정벌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가정을 하게 해주었다. 만약 요동정벌이 성공을 거두었더라면,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지 않았더라면,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를 최영이 물리쳤더라면 등등이 그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이때의 요동출병과 뒤이은 위화도 회군은 고려말 두 거목 최영과 이성계의 명암을 갈라놓았고, 결국은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최영은 당대의 명문 집안 철원 최씨 출신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직계 선조들은 그다지 현달하지 못했고 아버지도 그의 나이 16세 때 일찍 죽었다. 그런 까닭에 최영도 과거 등을 통하여 문신으로 출세하지 못하고, 남보다 뛰어난 완력을 바탕으로 군인의 길을 걸었다. 이후 아버지의 유훈인 “황금 보기를 돌과 같이 하라”를 생활신조로 삼고, 공민왕. 우왕 때에 여러 차례의 군공을 쌓으며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공민왕 말기는 물론 우왕 재위 기간 내내 막강한 권력자의 지위를 누렸다.
이성계는 전주 이씨 출신이다. 고조할아버지인 이안사는 지금의 함경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 지역은 당시 원나라의 통치 아래 있었고, 이안사를 비롯하여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에 이르기까지 원나라의 벼슬을 받았다.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반원 개혁정치를 단행할 때 이자춘이 고려에 귀화하면서 다시 고려의 관직을 받고 활동하였다. 이성계는 개경에 기반이 없던 자신의 불리함을 뛰어난 활솜씨 등 탁월한 무재를 바탕으로 극복하여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다.
중국대륙 정세의 급변, 그리고 홍건적의 침입
고려는 30여 년 동안 몽고와 전쟁을 치룬 끝에 강화하여 이후 근 100년 동안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다. 원나라는 그 기간 동안 고려가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1356년에 원나라의 세력을 몰아냈을 당시에 고려는 군사적으로 매우 취약하였다. 군사적으로 취약하다고 해도 원 간섭기에는 원나라의 보호 아래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몽고족의 지배를 받던 한족들의 반란으로 중국대륙이 혼란해지면서 상황은 돌변하기 시작하였다.
홍건적은 원나라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군 중의 하나였다. 한산동, 유복통 등이 중심이 되어 하북성 영평을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떨쳤으며, 한족 반란군의 선봉이 되었다. 그들은 머리에 빨간 두건을 둘러 표식을 삼았기 때문에 홍건적 또는 홍두적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백련교를 등에 업고 몽고족에 대한 한족들의 반원 감정을 이용하였다. 한산동을 송나라 휘종의 8세손이라고 선전하면서 빠르게 세력을 키워, 1355년에는 그의 아들 한림아가 황제로 추대되었으며, 국호를 송이라 정하였다. 그 뒤 원나라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그들 중 한 무리가 원나라 군대의 반격을 받고 고려 쪽으로 쫓겨 들어와서 노략질을 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홍건적의 침입이라고 부른다. 대륙의 정세가 급변하자 고려는 이유도 없이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홍건적은 두 번 침입하였다. 첫 번째는 1359년 12월에 있었다. 모거경 등이 4만의 무리를 이끌고 평안북도 의주와 정주를 함락시키고 순식간에 평양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고려는 전열을 정비하여 이듬해 1월에 평양을 탈환하고, 도망치는 홍건적을 추격하였다. 이 때 압록강을 넘어 살아 돌아간 홍건적이 수백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뒤에도 홍건적은 간헐적으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다가, 1361년 10월에 두 번째로 쳐들어왔다. 이때는 반성, 사유, 관선생이 무려 10여 만의 대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고려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수도인 개경까지 압박하게 되었다. 다급해진 공민왕과 관리들은 어쩔 도리 없이 하룻밤에 수도를 버리고 안동까지 도망갔다. 홍건적은 11월 하순에 개경까지 하락시켰다.
고려에서는 전열을 정비하고, 군대를 징발하는 데 황급한 시간을 보낸 다음, 다음해 1월에야 20만의 군대로 개경을 포위할 수 있었다. 이 때 활약한 장수 중에는 안우, 이방실 외에 최영과 이성계가 있었다. 때마침 1월 엄동설한에 눈비가 섞여 내렸는데, 적들은 향수에 젖었는지 방심하고 있었다. 그 때를 틈타 고려의 군대는 기습하여 비교적 쉽게 10여 만 명 가까운 수의 적을 무찌르는 큰 전과를 올렸다. 개경 성안에서 어린아이까지 삶아 먹으면서 만행을 저지르던 적이 고려군의 기습에 자기들의 처자식도 데리고 가지 못한 채 압록강을 바라보며 도망가기에 바빴다. 군사적으로 취약했던 고려는 홍건적의 공격에 기선을 제압당하여 처음에는 고전하였지만, 곧바로 반격하여 두 차례 모두 적을 거의 섬멸할 수 있었다.
고려 말기의 바이킹, 왜구
홍건적이 침입한 것은 두 번뿐이었지만, 왜구는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지속적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다. ‘왜구’라는 말은 본래 ‘왜가-를 노략질하였다’라는 말인데,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왜가 우리나라와 중국을 너무 빈번하게 침입하였기 때문에 일본 해적을 가리키는 명사가 되어 버렸다. 왜구가 우리나라에 침입한 것은 삼국시대에도 있었다. 그러나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지속적이고 그 피해가 매우 컸다는 점에서 이전 시기와는 달랐다. 그들은 고려의 수도까지 위협하여 정부에서는 빈번하게 계엄을 선포하기도 하였으며, 수도를 보다 안전한 내륙으로 옮기자는 논의도 있었다. 공민왕 때부터 공양왕 때까지 41년 동안 왜구는 총 506회, 1년 평균 약 12회 이상 침입하였다. 우왕대에 제일 극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1377년(우왕 3)에는 월 평균 4회 이상인 총 52회 쳐들어와서 백성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렇다면 왜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결사적으로 고려를 침략했을까? 첫째 이유로는 일본의 국내 사정을 들 수가 있다. 왜구가 창궐하던 당시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1333년 멸망하고 무로마찌 막부가 들어섰으며, 동시에 황실이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대적하는 남북조시대였다. 당연히 중앙의 통치 권력이 제대로 행사되지 못하였고, 그 틈을 타서 각 지방의 무사들은 자신들의 영지 획득에 혈안이었으며, 그 와중에서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수많은 해적이 형성되었는데, 그들은 고려뿐만 아니라 중국 연안까지도 출몰하면서 약탈을 일삼았다. 특히 곤궁했던 남서부 지역의 ‘왜’들이 가장 빈번하게 쳐들어 왔다.
두 번째 이유로는 고려의 취약한 군사력을 들 수 있다. 이 시기는 대부분 공민왕 때와 우왕 때에 해당한다. 반원 개혁 이후 공민왕은 국가를 정상화하려고 노력했지만 기존의 권세가들이 반발하여 정치는 혼란스러웠고 그 와중에 공민왕이 암살당하고, 나이 10살의 어린 우왕이 즉위하였다. 개인적인 치부와 세력 확대에 골몰했던 집정자들은 새로운 상황에 맞는 군사제도를 확립하지 못하였고, 군대의 기강도 해이하였다. 특히 수전에 강한 왜구를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가 없었다.
왜구의 주된 약탈 품목은 곡식이었다. 일본은 본래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서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쌀을 교역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남북조 전쟁으로 더욱 생활고에 허덕이게 되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왜구가 되었던 만큼 곡식 약탈에 혈안이 된 것은 당연하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고려의 조운선을 습격하였고, 나아가 연안의 곡물창고를 직접 노략질하는 등 침입 초기에는 주로 해안지방을 약탈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조세를 거두어 육로를 이용하고 조창을 옮기자 왜구는 내륙지방까지 쳐들어오기도 하였다. 해적으로 출발한 왜구가 기병부대까지 만들기도 했다. 그들이 내륙까지 침략해 들어오면서 고려 백성들이 입은 피해는 더욱 심각하였다. 곡식 이외에 사람도 마구 잡아가고 죽였으며, 어떤 곳에서는 사로잡은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시체가 산같이 쌓였고 지나는 곳마다 피의 물결이었다고 전한다. 이런 모습은 중세 유럽의 해적인 바이킹이 해안 지역을 약탈하다가 뜻대로 안되면 내륙지방까지 침입하여 노략질한 사실과도 비교된다. 해적의 실상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유사하였던 것 같다.
무장세력이 득세하던 시절
고려는 홍건적과 왜구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고, 당연히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홍건적은 단 두 번 침입하였지만, 너무나 피해가 컸기 때문에 외교정책도 변화하게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다시 원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또 있을지도 모르는 홍건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왜구 침입은 지속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정부의 대책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수립되어야만 하였다. 고려는 화친과 전쟁 양면 정책을 사용하였다. 회유책으로는 첫째로 왜구의 투화를 받아들였지만, 이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둘째로 일본 정부와 직접 교섭을 벌여 왜구를 금지시키려고 하였다. 이 방법은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1377년(우왕 3)에 일본 구주지방의 실권자에게 사신으로 갔던 정몽주는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 수백 명을 데리고 왔다.
이런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침입이 끊이지 않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을 쌓고 수군을 강화하며 새로운 무기인 화포를 개발하는 등 국방력을 강화하여 왜구를 토벌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왜구의 퇴치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389년(창왕 1)에는 박위가 100여 척의 병선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직접 정벌하였다. 우왕 말기에는 왜구의 침입이 많이 줄어들었다.
적극적인 왜구 토벌이 효과를 거둠에 따라 무장들의 정치적인 지위가 높아졌다. 그 중에서도 최영과 이성계가 중심이었다. 왜구의 침입이 격심해지면서 전국 각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들은 고려의 장수들 중 최영과 이성계만을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우왕 때의 왜구 토벌에서 명성과 권력을 함께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이성계는 그의 근거지인 동북면 출신으로 이루어진 사병을 거느렸는데, 이들은 이성계가 출세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 기록에서는 최영과 이성계의 눈부신 무용담을 찾아 볼 수 있다. 최영의 경우 흥산전투가 유명하다. 삼면이 모두 절벽이고 오직 한 길만이 통할 수 있는 곳을 왜구가 먼저 차지하고 있었다. 여러 장수들은 겁나서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최영이 61살의 노구를 이끌고 앞장서서 돌격하니 적이 무너졌다. 이 때 숲속에 숨어 있던 왜구가 최영을 쏘아 입술을 맞히자, 피가 철철 흘렀다. 그러나 그는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 적을 쏘아 쓰러뜨린 다음 화살을 뽑고, 더욱 세차게 싸워서 적을 거의 섬멸시켰다.
이성계의 활약은 그가 조선의 건국자이므로 더욱 과장되게 묘사되었다. 그는 싸우기 전에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를 이용하여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백 수십 걸음 밖에 놓여 있는 투구나 새 등을 목표물로 삼은 뒤, 화살 몇 발을 정해 놓고 ‘이것이 모두 명중하면 이번 전투는 이길 것이다’ 하고는, 모두 쏘아 맞추었다. 그의 활솜씨는 지금의 전북 남원 지역인 황산전투에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그는 얼굴까지 갑옷으로 가려서 화살을 맞출만한 틈이 없었다. 이성계가 활로 투구 꼭지를 쏘아 적중시키자 투구가 떨어졌다. 이 틈에 얼굴을 쏘아 죽이니 적은 기세가 꺾여 도망가고 고려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들이 흘린 피로 냇물이 온통 붉어져 6, 7일간이나 변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마시지를 못하였다 한다. 지금도 남원에는 그 지역의 땅이 붉은 빛이 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최영과 이성계 두 사람은 뛰어난 무장으로서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며 출세할 수 있었다. 이후 그들의 행보는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으로 연결된다. 최영은 명나라의 강압적인 태도에 반발하여 요동정벌을 단행하였고, 이성계는 그것을 거역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조선 건국의 첫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