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문예> 제6호(2023년)를 빌려 "일출의 선이 파도를 탈 때"를 싣는다.
일출의 선이 파도를 탈 때
- 화성 궁평항, 국화도
차용국
아침 궁평항은 아늑하다. 전후좌우로 성벽처럼 쌓아 올린 방파제가 사방으로 둘러싼 항구는 작지만 견고한 진영(陣營)처럼 보인다. 원양에서 하얀 대가리를 치켜들고 달려온 파도는 방파제에 부딪혀 바스러진다. 키 큰 파도조차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바다의 요새(要塞) 안에서 크고 작은 배들은 편안하다.
방파제를 경계로 바다는 부풀어 일렁이고, 갯벌은 갯고랑을 드러내며 해안선에 바짝 달라붙은 식당과 카페에 닿아 있다. 나는 문 연 카페에서 주문한 따뜻한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을 들고 출항 시간을 기다리며 방파제와 피싱 다리를 천천히 거닐었다. 바다에 철제 기둥을 박고 해안선을 따라 떠 있는 하늘색 데크와 방파제 가장자리에서 부지런한 낚시꾼들은 벌써 자리를 잡고 줄을 던져 시간을 낚고 있다.
산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는 말에 대놓고 거역하거나 반기를 든 적은 없지만, 그 말에 매몰되어 관계 우선주의로 몰아가는 사람들과 부득불(不得不) 어울릴 때면 문득문득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물코처럼 연결된 사람과 집단의 관계망이 때로는 의지할만한 힘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번거로운 사슬이 되기도 한다.
걷기도 마찬가지다. 걷기는 오로지 내 두 발을 움직여서 나아가는 일인데, 간혹 여러 사람과 휩싸여 여행이나 등산할 때면 난감한 상황에 부딪히곤 한다. 진영의 정치 이념이나 집단의 관념을 내세우며 날카롭게 선을 긋고 내편 네편의 관계를 저울질하는 인간, 어쩌라고 남이 잘 알지도 못하는 어떤 인물의 연대기와 근황을 들이밀면서 지루하게 떠드는 인간,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인지 숨을 헉헉거리며 끊임없이 주절거리는지 알 수 없는 인간이 끼어있기 마련이다. 사람 모인 곳이면 늘 말이 말을 만나 말들이 들떠서 말과 말 사이에서 말들이 길을 잃고, 말과 말이 뒤엉켜 말들을 배척하고, 말이 말을 만나 만들이 갈팡질팡한다. 같은 공간이지만 내면의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가능한 대로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 걸으려고 신경을 쓰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단체나 지인들과 함께하는 여행과 등산을 작두에 여물 쓸 듯이 싹둑 잘라낼 수는 없는 일이니 어찌하랴. 내 비록 욜로(YOLO ; You Only Live Once,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의 인생관을 신봉하여 나만의 행복과 만족에 방점을 찍으며 홀로 걷기에 푹 빠진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혼자 걷는 여행과 등산을 마다하지 않는다. 혼자 걷는 길이 오히려 자유롭고 섬세한 풍경과 마주칠 수 있는 행운도 따라줄 때가 있으니.
배 따라오며 사람들이 던져주는 새우깡을 덥석 낚아채는 날렵한 갈매기 묘기는 오래도록 변하지 않은 풍경 그대로 새로움을 현시(顯示)한다. 출렁이는 파도에 정처 없이 떠도는 부표 사이로 배는 달린다. 넓은 바다 이곳저곳에 마구 뿌려놓은 듯한 저 수많은 부표 중에서 자신이 던져놓은 부표를 용케 찾아내어 물고기를 걷어 들이는 어부의 신통력이 늘 신비로웠는데, 나는 말을 신비라는 부표에 그대로 묶어놓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신비의 베일을 벗겨 진실을 찾아내는 것도 가치로운 일이겠으나, 삶의 어느 한쪽에 늘 신비로운 공간 하나쯤은 남겨두어도 좋을 듯싶다.
1시간 정도 달려온 국화도 선착장 방파제에 등대가 있다. 살색에 가까운 원형의 무인 등대는 9미터 높이에 이르고, 밤이면 매 6초 1섬광을 쏘아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6초 1섬광, 이것이 국화도 등대의 고유 좌표이고 식별 부호다.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빛난다. 이 등대의 섬광은 12킬로미터에 달한다. 서해의 선박들은 이 불빛의 안내로 국화도 인근을 오간다.
국화도는 경기도 화성에서 남서부 바다 28킬로미터 거리에 떠 있는 작은 섬인데, 오히려 충남 당진과 가깝다. 당진 화력발전소가 물 건너 저편에서 굴뚝을 곧게 펴서 세우고 바다와 하늘이 맞잡은 풍경을 펼친다. 당진 장고항에서 바라보면 국화도는 소나무 숲이 뒤덮인 외딴섬처럼 보인다는 말도 있는데, 섬을 거닐면서 보니 구릉과 해안 단애에 소나무가 많기는 하지만, 참나무와 동백나무(?) 같은 크고 작은 여러 활엽수가 적절히 섞여 있어서 숲은 소나무가 지배하는 단조로운 고립무원(孤立無援)이 아니다. 숲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국화도는 여느 섬 못지않게 다양하고 건강한 식물종의 낙원이다.
원래 국화도는 만화도(晩花島)라 했는데, 꽃이 늦게 피고 늦게 지는 섬이란 뜻이다. 실제로 섬에 지천으로 피는 들국화가 만화(晩花)를 대변한다고 해서 국화도라 바꿔 부른다고 하니 개명에 시시콜콜 따질 일은 아닐 듯싶다. 다만 아쉬움이 하나 있다면 9월은 만화의 계절이 아니어서 만화의 들국화는 피지 않았다.
장고항에서 배를 타면 10분이면 닿을 수 있고, 해안선을 따라 한 바퀴 천천히 걸어도 2시간이면 돌아보고도 남을만한 작은 섬. 마땅한 경작지도 별로 없으니 어패류 채취나 근해어업을 주업으로 살아가는 소수의 주민이 살아온 섬. 지금도 주민은 많지 않고, 가족 또는 연인들이 당일치기 또는 1박 2일 정도로 찾아오는 나들이객을 상대로 펜션이나 식당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여름이 가을의 문을 열고 들어선 9월의 고즈넉한 해변에서 아이들은 물놀이하거나 모래와 자갈을 호미로 파서 조개를 들어 올리며 깔깔거리고, 어른들은 낚싯줄을 던져 낚아채는 손맛을 즐긴다.
동쪽 해변에 약간의 모래밭이 있을 뿐, 해안은 대체로 파도에 부딪혀 떨어진 바위가 널브러져 있다. 좁은 모래밭에는 조수 간만의 차이만큼 밀려온 크고 작은 밀물의 선을 따라 조개껍질이 쌓여 하얀 육상 트랙처럼 그어 놓았다. 해안 단애 옆으로 나무 데크를 설치하여 섬을 빙 둘러 만든 해안길은 걷기에 불편함이 없다. 물 빠지면 건너갈 수 있는 토끼섬은 물때가 어긋나 갈 수 없었지만, 9월의 햇살이 파도 소리에 떠밀려 가는 서해 저편에서 노을빛이 일렁이며 일어선다.
노을의 풍경은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시선의 각도에 따라 빛의 색깔과 파고는 변화를 거듭하며 출렁거렸다. 변하는 것이 어디 빛뿐이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풍경과 사물은 변화를 거듭하는 것이어서 익숙한 것도 다른 시선으로 보면 다 낯설다. 익숙한 것을 낯설고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신문명의 창조자요 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지만 더는 나아가지 않았다. 어떤 심리학자는 생각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이라고 했는데, 하는 것이든 나는 것이든 생각이 드나드는 문이 있다면, 다만 잠시라도 잠가버리고, 들리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보고 싶었다.
국화도 밤은 고요해서 오히려 쉬이 잠들지 못한다. 구형 아날로그 TV의 수신 채널은 단조로워 흥밋거리가 되지 못한다. 요즘 시대의 필수 소지품인 스마트폰을 열면 도시나 섬이나 볼거리에 차이가 없으니 TV가 아날로그이든 디지털이든 별 관심이 없다. 차라리 국화도에서는 스마트폰마저 끄고 무료함과 한적함의 경계를 넘나드는 긴 밤을 즐기는 편이 났다. 나는 스마트폰을 접고 가져온 책마저 덮고, 바다와 하늘을 구별할 수 없는 캄캄한 공간에서 보내는 파도 소리와 6초 1섬광 등대의 불빛을 바라볼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밤은 지새우기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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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일출의 붉은 선이 바다를 가로질러 섬에 닿기 전에 부지런한 어부들은 배를 띄운다. 새벽 바다는 파도 소리와 뱃고동 소리가 뒤섞여 분주하고, 해변으로 날아온 갈매기는 자갈을 뒤적여 먹이를 쪼았다. 일출의 선이 파도를 타고 해안으로 밀려올 때면, 바다 위에도 섬마을에도 돌아갈 객(客)의 가슴에도 삶의 기상(氣像)은 저절로 일어선다.
나는 가슴을 풀고 서해를 건너는 일출의 붉은빛을 깊이 받아 마신다. 몸은 가볍고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