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가복음 7장24~37절
제목 : 모든 이의 주
예수님의 관심은 유대를 넘어 온 땅을 향합니다.
유대를 중심으로 두로와 시돈, 데가볼리에서도 예수님의 권능이 드러납니다.
이방 지역인 두로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귀신 드린 어린 딸을 치유하십니다.
이후에 시돈과 데가볼리를 지나 다시 가릴리 지역에 이르러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십니다.
1. 이방 여인의 딸을 치유하시다(24~30절)
1) 두로 지방을 찾으시는 예수님(24절)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 거기는 '게네사렛' 곧 갈릴리로 봅니다.
서서히 고조되어가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예수님은 일단 갈릴리 활동을 중단하시고 그곳을 떠나 북쪽 두로 지경으로 그 거처를 옳기셨습니다.
이 같은 활동 무대의 이동은 벱새다율리아스 이후 두번째 경우입니다.
한편 '두로'라는 도시는 갈릴리 북서쪽 지중해 해안 도시로서 '뵈니게' (Phoenicia)라는 지금의 레바논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도시는 원양 항해술과 예술이 발달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곳으로 갔는지, 그 지역에 얼마만큼 진입해 들어갔는지에 관해 본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땅을 떠나 이방인들의 지경에 조용히 스며들어 가셨던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휴식과 새로운 활동을 위한 준비를 위해 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방 지역에서도 이미 예수님 자신이 숨어 지낼 수 없을 만큼 당신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눅6:17에 의하면 산상수훈 당시에 이미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조용하게 피신하여 쉬려했으나 그 명성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치병과 선교 활동을 하게 된 사례가 이미 앞에서 여러 번 언급된 바 있습니다(6:30-34;53-56).
한편 본문에 제시된 '한 집'이란 그곳 원주민의 집인지, 유대인의 집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짐작컨대 예수님께 대해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집임이 분명합니다(Meyer).
평행 본문인 마 15:23에서 제자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제자들도 예수님과 동행하였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다만 마가는 이 여행에서 제자들의 역할이 주목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고 판단되어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25,26절)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 예수님을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방인 여인에 대한 배경 설명입니다.
확실히 그녀는 예수님께 대한 소문, 그중에서도 그분의 탁월한 신유의 은사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찾아 왔을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오신소문을 듣자마자 '곧'(유뒤스) 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겸손과 절대 신뢰의 자세를 취했습니다.
한편 그 여인의 딸은 '더러운 귀신'에 들렸는데(1 :23;5:2 주석 참조).
평행 본문인 마 15:22에서는 '흉악한 귀신'이 들렸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번역에서는 '악령'과 '마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딸을 두고 있던 그 여인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을 것입니다.
마가는 그 여인은 헬라인(a Greek)이면서 수로보니게 족속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이들 이방인들은 민족적 우월성에 도취되어 있던 유대인들에게 심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Josephus).
간구하거늘(에로타). 그 어미가 자기 딸의 치유를 소망하며 예수님께 거듭거듭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실로 그녀는 오직 딸의 구원을 위해 민족적 반감이나 개인적 자존심을 모두 팽개치고 예수님께 매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대답과 여인의 반응(27~28절)
(1) 예수님의 대답(27절)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기서 '자녀'(테크논)란 하나님의 선민(選民) 곧 유대인을 가리키며. '배불리 먹게 하다'는 말은 본 상황에서 '유대인 환자를 먼저 치료해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고, 좀 더 포괄적으로는 복음 또는 하나님이 구원의 시혜에 관한한 유대인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배타적인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전 인류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우선 선택된 것일 뿐이었습니다(창 12:2, 3).
본문에 언급된 '개'는 주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경멸할 때(시 59:6),
또는 자신을 비하시킬 때와 악한 존재를 상징할 때 사용하던 말입니다.
그러나 '개'라는 사실 그 자체는 본질상 비천하고 속된 경향을 띨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자녀'와 '개'의 대비(對比)를 통해 신적 특권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사이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2) 여인의 반응(28절)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 본서에서 예수가 '주'로 불리운 곳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여기 언급된 '주여'란 단순히 상대방에 대한 존칭이지만 그 이면에는 예수의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는 참 신앙이 마음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옳소이다마는'이라는 말은 상대의 말을 일단은 인정하나, 그 말에 대한 또 다른 자기 이견(異見)을 피력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반의 접속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불굴의 답변은 그녀에게 내재된 강한 믿음의 반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수로보니게 여인은 재치 있게 예수님의 말을 받았습니다.
즉 그녀는 마치 상아래서 꼬리를 흔들고 주인의 호의를 기다리는 귀여운 강아지를 연상시키면서 적어도 자신과 자신의 딸도 그러한 입장에서 당신의 호의를 기다리고 있다고 간청한 것입니다.
실로 그녀가 간청한 것은 유대인에게 특별히 허락된 은혜와 축복의 '부스러기'에 블과 했습니다.
이 말은 앞 절에서 언급한 뒤 유대인들의 배타적 우월감과 편견에 대해 극한 대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개'라는 말로 자신을 지칭할 때 받는 인격적 모멸감과 훼손된 자존심을 개의치 않고 주의 은총을 간청하는 모습은 극한 겸손(謙遜)의 표시입니다.
이 같은 겸손과 유대인의 오만한 우월의식이 대비되어 이방 여인의 믿음이 높여집니다.
마가는 이 이야기 속에서도 역시 유대인들의 잘못 된 전통을 무효화하고 이방인의 모습 속에서 겸손하게 복음을 수용하는 모델을 제공하며, 예수의 언행에 대해 사사 건건 시비를 거는 유대인들을 간접적으로 공격하고자 합니다.
4) 놀라운 반전(29~30절)
(1)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29절)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이 말을 하였으니 -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대답에 매우 만족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그 여인의 입을 통해 전해진 말로써 그녀의 내면에 깃든 독특한 믿음을 간파하셨던 것입니다.
마태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평행본문에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 이제 이방 여인이 안고 시름해했던 최대의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순수하고 끈질긴 그녀의 믿음에 충분히 만족하시고 이제'돌아가라'(you may go,)고 말합니다.
이것은 치병 기적을 행한 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어투로서 완전한 회복을 전제한 말입니다.
즉 육체적, 정신적 소명 뿐 니라 가정 복귀 또는 사회복귀를 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는 선언을 통해 그녀의 믿음에 확실히 응답하셨습니다.
특히 여기 '나갔느니라'는 말은 그 선언과 동시에 이미 귀신이 그 딸에게서 떨어져 나갔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원거리에 있는 병자를 고치신 경우는 본서에서 이곳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어떤 특별한 명령이나 외침 없이 당신의 거룩한 의지로 치병 기적을 이뤄냈다는 것은 그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적 권능을 보여 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2)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습니다(30절)
“[30]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집에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선사하셨습니다.
그녀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아무런 설명 없이 그녀의 딸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고 증언하는데, 이는 아마도 귀신이 그 딸에게서 나오면서 최후의 발악을 함으로써 그 딸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9:26, W.W. Wessel).
이와 더불어 마가는 '귀신이 나갔더라'는 말을 완료 능동태 분사로 기록하여 그 딸에게서 귀신의 존재가 완전히 떨어져나가 매우 깨끗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시다(31~37절)
1) 귀먹은 자를 치유하심(31~35절)
(1)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습니다(31절).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 물론 이'갈릴리 호수'는 이방 지역에 속한 땅을 지칭합니다.
사실 본문에 제시된 예수님의 여행로를 지리적으로 상세히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지금 이방인 구역에 거하고 계십니다.
여기 언급된 데가볼리에는 대부분 이방인들이 거주했으나 상당수의 유대인들도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2)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 합니다(32절)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귀먹고 말 더듬는 자. -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데리고 온 환자는 귀먹고 말을 하기 곤란한 사람인데, 귀머거리는 자연히 말하기 곤란해지거나 아예 무의미한 소리만 지을 줄 아는 벙어리가 되는 것이 상례입니다.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 이미 5:20주석에서 언급된 바처럼 이 지방에 예수님의 치병 기적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안수하는 것 역시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치병 행위였습니다(5:23;6:5).
(3)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33~34절).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 환자를 따로 데리고 무리를 피해간 이유로는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⓵ 36절에서 언급한 바처럼 군중들의 흥분된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병 고치는 기적을 비밀로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⓶ 예수님이 환자와 긴밀한 인격적 관계를 갖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그 환자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온 피동적 인물이었고 자신의 치유 의지가 거의 없던 상태였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무감각하고 피동적인 인격에게 당신의 존재 본질을 분명히 드러내시고 그로 하여금 믿음의 반응을 보이게 하시려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5:40에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도 이러한 은밀함을 요구하신 바 있습니다.
*막5: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 이와 같이 환자의 취부에 직접 접촉하면서 침사용하는 치료법은 당시 일반 백성들 사이의 민간요법으로 많이 활용되었던 것 같으며 특히 침이 치유의 효과와 화를 막아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형태로 치병 활동을 했다는 고대 기록들이 남아있는데 로마의 황제 베스파시안(A.D. 69-79)이 소경에게 침을 눈에 발라 치료하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그외 플리니우스(Plinius), 슈톤(Sueton)등의 기록에도 나옵니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치유 행위는 당시 혤라와 유대인 의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한 방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Taylor).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환자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고도 능히 치유 하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게셨음에도(2:3-12;3:5)이러한 행동, 그것도 미신적 행위로 오해받을 수 있는 치유법을 선택하셨을까?
이는 참으로 신비한 장면으로서 다만 추측하건대,
⓵ 예수님은 귀먹고 어눌한 자에게 직접 접촉하심으로써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표시하셨고,
⓶ 그를 위해 당신께서 지금 힘쓰고 계신다는 사실행동으로 보여 주셨으며,
⓷ 귀먹고 어눌한 자가 능동적으로 믿음을 지닐 수 있게 도와주시기 위해 이 같은 행동 언어를 취했을 것이라 봅니다.
여기서 양 귀에 손가락을 넣은 것은 그의 귀가 열릴 것을 암시하며. 혀에 손을 대신 것은 그의 혀가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 이 같은 행동은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는데, 6:41에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면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한 모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탄식'이라는 말은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하늘을 바라보며 신음 소리를 나타내는 행위는 고대의 기적 설화에서 초인적인 힘을 끌어들이는 형식적 표현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본너(Bonner)는 능력 있는 발언이나 기적능력을 나타내기 전에 예언자나 기적행위자가 하는 준비 동작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마가가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예수님의 행위를 이해했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이 인간을 깊이 사랑하시고 그 고통마저 동참하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애정의 탄식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하늘을 보며(요 11:41;17:1) 탄식한 것은 단순히 당신의 감정을 표출한 것이 아니라 탄식으로 간구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탄식은 환자의 고통뿐만 아니라 인류의 아픔을 탄식하는 당신의 지극한 애정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혹자(Van der Loos)에 따르면 '예수의 탄식은 기도의 탄식이었으며 성부와 성자 예수의 감추어진 교제에 따르는 탄식이었다.
예수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 것이 늘 상 예수의 기도 방법이었다면 초대교회도 역시 이런 기도의 자세로 병을 치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단지(예수의 이름으로) 치료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라고 이 장면에 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에바다(여파다) - 이 말은 아람어의 음역으로서 마가는 그 뜻을 열리라(디아노이크데티)로 밝히고 있습니다.
즉 마가는 자신의 이방 독자들에 대한 친절한 노력으로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아람어를 언급한 후 그 뒤에 헬라어로 설명 구를 덧붙이고 있습니다(5:41).
그런데 이 '열리라'는 말이 단지 닫혀 진 귀에만 관련된 말이 아니라 혀에도 그 영향이 미치는 명령어로 보아야 합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이 같은 명령은 그 환자의 심령 뿐 아니라 그 닫혀 진 귀를 뚫고 들려졌습니다.
이는 메시아의 시대를 예언한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다'는 사 35:5 말씀의 완전한 성취로서 지상에 돌입한 메시아 왕국의 현존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4)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문이 열였습니다(35절).
“[35]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열리라''는 명령과 함께 즉시 귀가 열리고 말문이 열리게 됩니다.
여기서 '말이 분명하여 졌더라'(엘라레이 오르도스)는 그가 적어도 완전한 벙어리가 아니었으며(그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단지 언어에 장애(障碍)가 있었을 뿐임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여기 사용된 동사가 미완료시제로서 그의 말의 호전된 상태가 점점 구체적으로 또렷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2) 구약의 성취(36~37절)
(1)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경고하였지만 더욱 널리 전파했습니다(36절)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 이렇게 치병 기적에 대하여 비밀로 침묵하라는 명령은 마가가 자주 묘사하는 내용입니다(1:43, 44;3:12;5:43).
침묵을 요구한 대상은 환자자신에게만 아니라 그 환자를 데리고 온 사람과 그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사람들에게 명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명성이 치병 기적과 함께 널리 퍼지게 됨으로써 문제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5:43 주석 참조).
특히 여기서 '경계하사'(디에스테이라토)란 당신의 금지의사가 매우 적극적이었음을 반영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의 명령을 어길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그들이 흥분된 상태로 당신에 관한 소문을 퍼뜨리는 것보다 오히려 조용히 그들 스스로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복(順服) 하고 또 그들 각자가 당신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 이 구절 역시 마가의 공통된 언급으로서 침묵 요청 다음에 목격자들은 침묵으로 비밀을 지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널리 소문을 내어 전파시켰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1:45).
이 같은 언급은 침묵 명령과, 그 명령을 어기고 전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감격적 기적의 체험을 잘 대비시켜 그들의 흥분된 환호가 지닌 부정적인 모습을 은연중에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막상 예수님께서 로마세력에 의해 체포, 처형당하실 때 극한 조롱으로 그 환호를 대신했던 것입니다. (마 27:22, 23).
*마27:22,23 “[22]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23]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이는 인간적 판단과 기대가 하나님의 생각과 배치(背馳)되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 준 단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치병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37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그것은 놀라 경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히'(휘페르페리쏘스)는 헬라어 문헌들에서 단 한번 나오는 단어로서 '심히 이상의', 곧 '극도로', '측량 할 수 없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그 이방지역의 주민들이 예수님의 존재와 능력을 충격적일 만큼 크게 느꼈고 또 그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음을 보여 준다고 봅니다.
이와 함께 마가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위를 '그가 다 잘했다'고 하는 말로 칭찬하며, 또 그분을 신뢰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평행 본문인 마 15:31에서는 그 감격의 표현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로 하면서 그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간접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 '그가 다 잘하였도다'란 말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
왜냐하면 깊은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 같은 기적은 메시야 왕국의 현존을 알리는 메시지일(사 35:5, 6)뿐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가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예수님의 메시야적 활동의 분명한 표시임과 동시에 이방인 거주지에서도 주의 복음과 주의 나라가 폭발적으로 확장(擴張)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묵상 Point
1) 유대인들에게 먼저 임한 하나님 나라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달라는 이방의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예수님은 개보다 자녀에게 먼저 떡을 주어 배부르게 하는 것이 마당하다는 말로 완곡하게 거절하신다.
구원은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먼저 임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유대인이 예수님을 거절하여 그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향한다.
구원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기 때문이다.
2) 이방 여인의 집에 임한 치유의 나라
여인은 자신을 개로 비유하는데도 물러서지 않는다.
이방인의 위치를 인정하고 나서 유대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만이라도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한다.
부스러기 은혜만으로도 자기 딸인 온전해질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예수님과 상관있는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어떤 수치도 감수하겠다는 겸손함과 간절함,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딸의 구원을 가져왔다.
3) 귀먹고 말 더듬는 자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근방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자의 간구에 응하여 ‘에바다’하며 고쳐주신다.
손가락을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어 고치신다.
강요된 침묵의 강고한 세계를 깨뜨리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극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경험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임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해방과 자유의 역사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다.
말씀 가이드
예수님은 모든 이들의 구주이시니 차별과 경계를 넘어 섬기고 사랑하자.
예수님은 이방 지역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어린 딸을 치료해주신다.
갈릴리 지역에 가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쳐주신다.
그분의 행적을 보면 매이지 않고 늘 경계를 넘나드셨다.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차별 없는 사랑.- 예수님은 정결법과 민족적 경계를 넘어 왕래하심으로 차별 없는 사랑을 보이셨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그어놓은 경계를 넘나들며 그 나라를 선포하는 자다.
성원권을 상실하고 고통 받는 이 시대의 이방인은 누구인가?
차별 없는 사랑으로 다가가 환대의 자리를 내어주자.
겸손한 믿음.-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족속 여인의 믿음과 절실함을 보시고 어린 딸을 고쳐주신다.
자격 없음을 인정하며 부스러기 은혜만이라도 구하는 믿음은 이스라엘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축복에 참여하는 길은 헛된 자부심이나 말씀 소유 여부가 아니라 겸손한 믿음이다.
하나님 나라 선포. - 주님은 귀먹고 더듬는 자를 데려가 고통과 억압에서 구원하신다.
주님의 탄식은 죄 아래 인간들에게 영적 자각과 자성을 일으켰고, 그분의 하나님 나라 선언은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열린 귀로 말씀 듣기를 즐겨하고 플린 혀로 기쁘게 복음을 말하자.
예수님은 이목을 피하기 원하셨으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등경 위에 빛과 같아 감출 수도, 가릴 수도 없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땅 끝까지 이르렀다.
듣고 놀라며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는 구원을 얻고, 심드렁히 여기는 이는 그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24,31절 유대를 넘어 온 세상의 주님이십니다.
유대인을 중심으로 사역하셨지만(27절), 이방인을 향한 관심도 그에 못지않으셨습니다.
전에 거라사를 찾아가신 것처럼, 두로와 시돈으로, 또 데가볼리로, 다시 갈릴리의 이방 지역으로 찾아가십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부정하게 여기고 멀리했지만, 주님은 외적인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는다는 가르침대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훗날 제자들에게도 유대를 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당부하심으로 예수님의 복음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주께서 우리에게 차별 없는 사랑으로 찾아가 사랑과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시는 이 시대의 ‘이방인’은 누구입니까?
32-37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자를 치유하십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쪽 귀에 넣으시고 침을 뱉어 혀에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후에 ‘에바다’(열리라) 하고 외치십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면서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보고 사람들은 ‘그가 모든 것을 잘 하였다’며 감탄합니다.
이는 마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31) 하신 하나님의 선언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이사야를 통해 예언하신 피조물의 회복, 곧 새 창조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사 35:5,6).
예수님의 치유를 통해 육체의 귀와 입이 열리듯이 영적인 귀와 눈이 열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25-30절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님의 냉소적인 반응에도 물러서지 않고 은혜를 구합니다.
‘자녀에게 줄 떡을 개들에게 줄 수 없다’는 말씀은 예수님 사역의 우선순위를 뜻하는 것인 동시에,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를 반영합니다.
그럼에도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런 냉대에 굴하지 않고 ‘상 아래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다’고 끈질기게 간청하여 예수님의 인정과 치유를 받습니다. 부스러기라도 구한 이방 여인의 믿음은, 자녀를 위해 준비하신 만찬을 거절한 유대인들의 불신을 더욱 부끄럽게 만듭니다.
겸손하면서도 기지가 넘치는 믿음, 끈질기게 간청하는 담대한 믿음이 우리 안에도 있습니까?
[기도]
공동체-자격 없는 저에게도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과 구원을 널리 전하며 살게 하소서.
열방-그리스도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로 인해 파키스탄의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자녀에게 이슬람식 이름을 지어주고 있다.
파키스탄 정부가 그리스도인을 향한 모든 차별과 탄압을 그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