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서 본 한성에서 서울까지 130년 역사
한성에서 경성으로
'서울視, 공간의 탄생 : 한성, 경성, 서울'을 주제로 1876년 개항 이후 한성에서 경성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도시경관 변화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외국인의 조선 여행기, 사진첩, 정부와
서울시의 기록사진 아카이브, 관변 간행물, 매체사진, 사진가들의 작품사진 등 다양한 맥락에서 생산된
사진들이 보여주는 서울의 경관을 통해 각 시대의 도시이미지와 그 변화 과정을 읽어본다.
특히 서울 도시경관 변화의 주요 원인인 도시계획, 근대 여가문화, 전쟁, 근대화, 산업화 정책 등의 요소들을
돌아보며 서울 공간을 다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는 도시경관 형성과 변화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주요 요인들을 연대기적으로보여줌과 동시에 역사기록물로서의 사진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대한
가치를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한성의 원형경관을 가늠할 수 있는 1880년대의 사진을 시작으로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생산된 사진자료를
통해 당시의 도시경관은 물론 생활상과 역사적 상황 등 경성의 시대상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원형 경관과 그 변동
1394년 천도한 조선의 수도 한성은 유교적 합리주의와 풍수지리적 원리에 기초하여 형성된 성곽도시였다.
당시 만들어진 한성의도시경관은 조선 왕조 500여 년간 큰 변화 없이 원형경관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해 왔다.
이러한 도시의 모습은 전통적인 재현방식인 회화와 지도 속에 고스란히 담겨졌으며 그 도상들을 통해 한성이라는
공간에 대한 당대인들의 이해와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구미각국과 외교관계가 맺어지고 한성 내 고지대를 중심으로 첨탑형의 각국 공사관과 선교학교
그리고 종교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서구의 도시경관적 요소들이 한성의 스카이라인에 중첩되기 시작했다.
이어서 1897년 ㅡ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본격적인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황권을 강화하고 독립국가임을
천명하기 위해 세운 원구단과 황궁우 그리고 독립문 등 정치적 기념물들과 한성부 도시개조사업에 의해 새롭게
구축된 경운궁 중심의 환상방사선 가로망에 의해 원형경관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도시경관의 근대화가 촉진되는 시점인 1882~1883년은 이 땅에 사진술이 도입된 시기이기도 한데 따라서
변모하기 시작한 한성의 모습은 근대적 시각매체인 사진에 담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다수의 도시경관 사진이 서양인과 일본인에 의해 촬영되었으며 도시개조를 위한 주체적인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인의 시선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 풍경으로 존재했다.
본 섹션에서는 1876년 개항 이후부터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기 전까지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과 일본인이
남긴 여행기와 사진첩을 통해 서울의 원형 경관을 살펴본다. 또한 대한제국기의 주요 건축물과 정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외교관 거리의 모습들을 통해 점차 변모해 가는 도시경관의 변화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
![](https://t1.daumcdn.net/cfile/cafe/21090F4E546483E905)
서울 전경, 1888-91년, <조선국진경>(1892),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이 사진은 1888년부터 1891년까지 재조선 일본공사관 직원으로 근무했던 하야시 다케이치가 촬영한 것으로
일본인 사진사 후지다 쇼자부로(藤田庄三郞)가 운영하던 옥천당(玉川堂)에서 바라본 서울 전경이다.
책 원문에는“일본인 거류지에 있는 사진사 옥윤당(玉潤堂) 누상에서 바라본 시가 풍경”이라고
나와 있으나 옥천당의 오기로 보인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161D4A546484172D)
서울 전경, 무라카미 텐신, 꼬레아 에 꼬레아니, 1902-1903, 개인 소장(이돈수 제공)
카를로 로세티 (Carlo Rosetti)가 무라카미 덴신의 사진관에서 구입하여 자신의 책 Corea e coreani에 수록한
사진으로 경운궁을 중심으로 각국의 공사관 건물과 교육기관, 경복궁과 원구단 등을 볼 수 있다. 무라카미 덴신은
1894년 청일전쟁 때 종군한 일본인 사진사로 1895년 남산 주동에 생영관 (生影館)이라는 사진관을 개설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6697249546484380C)
경복궁 일대, 1894-1897년, 이사벨라 비숍, <Korea and Her Neighbors>(1898),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영국의 여행가이자 여성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광화문을 중심으로 경복궁과 육조거리를 촬영한 사진으로
궁궐을 제외하고 단층구조의 가옥과 관아 건물들이 낮은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37C6C4E5464844E1B)
남대문로, 1894-1897년, 이사벨라 비숍, <Korea and Her Neighbors>(1898),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남대문 문루에서 명동성당 방향으로 바라본 남대문로의 풍경으로 길 양쪽으로 가가(假家)가 즐비하게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다. 1899년 종로-남대문 간 전차노선이 개통되면서 가가들은 철거되었고 거리에는 전신주와 전찻길이 부설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236D24D5464851733)
건축 중인 원구단, 1897년 독립기념관 소장.
![](https://t1.daumcdn.net/cfile/cafe/267055495464853F04)
홍교(1902년 완공, 1908년경 철거), 1902 - 1903년, 로쎄티, 꼬레아 에 꼬레아니(1904), 이돈수 소장
1902년 10월 완공된 홍교는 경운궁과 경희궁을 연결한 육교로 경운궁 ~ 경희궁으로 이어지는 양궐 체제의
복원을 상징한다. 러시아공사관 옆을 지나 건너가도록 설치된 홍교는 1908년경 철거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7B2F4E5464855420)
탑골 공원, 1910년경 <한국사진첩>(1910) 사진아카이브연구소 소장.
![](https://t1.daumcdn.net/cfile/cafe/226FE050546485A829)
프랑스 공사관(1889년 완공) <힌국풍속인물사적명승사진첩> 국립중앙도서관
여기서는 문제의 프랑스 공사관 건물에 대해서만 간단히 알아보기로 하죠.
조선과 프랑스 간에 외교관계가 정식으로 수립된 것은 1886년 6월 6일입니다.
첫 프랑스 공사관은 종로구 관수동 126번지 소재 한 한옥집에 개설되었습니다.
이후 공간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현 창덕여중 자리에 새 청사를 지었습니다.
창덕여중 교정에 남아 있는 정초석(定礎石)에는 ‘RF 1896'으로 기록돼 있는 걸로 봐서
새 공사관 건물의 건립연도는 1896년으로 보는 것이 정확해 보입니다.
신축한 프랑스 공사관 건물은 붉은 벽돌의 프렌치 르네상스식의 화려한 모습이었습니다.
지하 1층 지상 2층에 5층 규모의 옥탑을 두고 있었는데 당시 국내에서 가장 높은 탑이었습니다.
건평은 415평 규모로 옥탑에는 물탱크를 설치하여 각 방에 급수장치까지 하였으며
실내장식도 최고급으로 하여 당시 서울의 양관(洋館)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다고 전합니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늑약'으로 한~불 관계가 단절되자 공사는 이듬해 철수하였으며
그 후 공사관이 합동으로 옮기고 그 건물은 총독부 산하 기관으로 사용되다가
1919년 서대문고등소학교가 들어서면서 총독부에 의해 1935년에 헐리고 말았습니다.
(이 프랑스 공사관 터는 2010년 10월 중순 경에 발굴되었다더군요. 무려 75년만의 일입니다.
창덕여자중학교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의 옛 러시아 공사관<지금의 러시아 대사관>을 지나
옛 문화방송국 건물 못 미처서 이화여자고등학교 옆에 위치해 있으며 이 학교 운동장에서
그 터가 발견되었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3573848546485D224)
버튼 홈스, 러시아 공사관 (1890년 완공)과 정동 일대 1901년 <The Burton Holmes Lectures> (1901), 서울역사박물관.
![](https://t1.daumcdn.net/cfile/cafe/2464ED49546485EF1C)
벨기에 공사관 (1906년 완공) <한국풍속인물사적명승사진첩>, 국립중앙도서관.
벨기에 공사관은 1901년 정동에 처음 개설되었으나 1905년 회현동에 건물을 신축해 이전했다.
현재는 다시 남현동으로 이전되어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백수십 년이 흘러갔건만 그 흔적은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고스란히 그 격동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41174B5613C48924)
조선의 5대 궁궐의 하나로 원래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궁호를 '덕수(德壽)'로 정하면서 덕수궁(德壽宮)으로 개칭되었다.
첫댓글 격동기의 외국인들에 의해 보전된
우리역사 사진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