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형님 (tistory.com)
[2012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노숙/이영종
열차와 멧돼지가 우연히 부딪쳐 죽을 일은 흔치 않으므로
호남선 개태사역 부근에서 멧돼지 한 마리가
열차에 뛰어들었다는 기사를 나는 믿기로 했다
오늘밤 내가 떨지 않기 위해 덮을 일간지 몇 장도
실은 숲에 사는 나무를 얇게 저며 만든 것
활자처럼 빽빽하게 개체수를 늘려온 멧돼지를 탓할 수는 없다
동면에 들어간 나무뿌리를 주둥이로 캐다가
홀쭉해지는 새끼들의 아랫배를 혀로 핥다가
밤 열차를 타면 도토리 몇 자루
등에 지고 올 수 있으리라 멧돼지는 믿었던 것이다
사고가 난 지점은 옛날에 간이역이 서 있던 자리
화물칸이라도 얻어 타려고 했을까
멧돼지는 오랫동안 예민한 후각으로 역무원의 깃발 냄새를 맡아왔던 것일까
역무원의 깃발이 사라진 최초의 지점에
고속철도가 놓였을 것이고 밝은 귀 환해지도록 기적소리 들으며
멧돼지는 침목에 몸 비벼 승차 지점을 표시해 두었으리라
콧김으로 눈발 헤쳐 숲길을 철길까지 끌고 오느라
다리는 더욱 굵고 짧아졌으리라
등에 태우고 개울을 건네줄 새끼도 없고
돌아갈 숲도 없는 나는 오랜만에 새 신문지를 바꿔 덮으며
그때 그 역 근방에서 떼를 지어 서성거렸다는
멧돼지 십여 마리의 발소리를 믿기로 했다
당선소감 -재미와 비애 있는 詩 쓸 수 있도록 분투하겠다
2011년 크리스마스 저녁이었다. 마음의 모든 정물들을 설레게 했던 당선 통보를 받고, 나는 산양이 바위를 건너는 법을 생각했다. 약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해거름에 전화해도 그냥 한 잔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늘 거기 있을 것 같은 산양의 눈망울을 떠올렸다. 산양이 아니라면 건너기 힘든 바위를 딛고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나의 법을 알았다 했더니, 어느새 새로운 바위가 나를 기다리는 날이 지속되고 있다. 결국 바위를 건너는 법을 다 알지 못하고 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한 지속되어야 할 고통스럽고 즐거운 일이다.
내가 사는 곳은 눈이 많이 내린다. 겨우내 이 땅의 주인은 사실 눈이다. 내가 아끼는 나무를 부러뜨려 눈을 흘기면 "내 것 내 맘대로 하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라고 말하는 듯 처마에 고드름을 수십 개나 매달아 놓은 적도 있다.
나는 하루 종일 집에 갇혀 있거나 엉금엉금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 원래 만나려 했던 친구를 나는 늘 만나지 못한다. 그가 이 땅에서 살았던 자취를 거두어 자기 땅으로 망명해 버린 지 몇 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13권 대하소설 '마적'을 마치고 삶 또한 마친 친구 서 권은 지금도 눈 내리는 감나무 가지에 와서 내 집 개를 밤새워 짖게 한다. 나가 담배를 피워 그와 소통을 하는 일이 뜸해졌다. 그도 이제 돌아갈 곳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심사위원들께서는 관계를 성찰하여 희열 가득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면허증을 내주셨습니다. 재미와 비애가 있는 시를 쓸 수 있도록 분투하겠습니다. 오랫동안 시를 쓴다 하였지만 눈 뜨지 못한 나에게 점안을 해주신 안도현 교수님, 아낌없는 비판을 해주었던 우석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문우들께 금오도를 드립니다. 내가 살았던 날들을 빨래처럼 비틀면 흘러나올 물 색깔이 거의 똑같을 나의 친구들, 함께 젓가락 딸그락거리던 어머니와 아내, 식구들께는 무엇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 이영종1961년 정읍 출생 / 우석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재 / 호남제일고 교사
2012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불고기, 물꼬기/유빈
낱말들을 고르게 쓰다듬다 놓쳐버리는 혀
빈 밥상 위 문법책은 달아나는 발음을 따라잡지 못해요
귀퉁이 까매진 책갈피 사이로
나쨩 해변의 파도가 밀려와요
불고기는 불고기, 물고기는 왜 물꼬기일까요
언제나 고개를 끄덕여주는 선생님 그러나
센터 문만 나서면 불고기도 불고기,
물고기도 물고기, 책에 빨갛게 그려넣은
물결무늬 밑줄들, 어려운 차이들이
행간 사이를 꼬불꼬불 헤엄치고 있어요
발화(發話)되지 않는 더듬이
언제쯤 머리로 말하지 않아도 될까요
계약서를 다 채우려면 얼마큼 부드러워야 하나요
듣기연습을 위해 놓치지 않는 9시 뉴스데스크
화면에 떴다 사라지는 얼굴
전송되지 못한 채 들것에 실려나가는 비명소리
면사포 속에서 하노이 강이 부풀어올라요
방향도 통로도 모른 채 꿈에 젖은 갈매기들
셀 수 없는 물이랑을 넘을 때
순서를 따라 늘어서는 인터뷰 행렬
해본 적 없는 질문들, 나는, 너는…
기름에 잠겨 지글거리는 계란 프라이 한가운데
섬처럼 똬리 튼 노른자 한 알
하얀 거울에 노란 얼굴이 밤낮없이 비춰지고
강변의 모래알들 잊으면 될까요
맘 편히 흘러들 수 있는 틈새는 어디 있을까요
당선소감-시는 펄떡거리며 살아있는 것
외출에서 돌아와 얼굴에 폼 클렌징을 묻힌 채 통보를 받았다. 휴대폰을 미처 못 받았는데 곧바로 집 전화벨이 울려서 아, 꼭 받아야 할 전화구나 하는 직감으로 욕실에서 뛰어나왔다. 수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소식의 진상을 파악할 무렵, 손에서 뚝뚝 흐르던 물기가 다 말랐다. 이렇듯 대개의 소식은 일상의 아주 미세한 틈을 찢고 찾아온다. 시도 내게 익숙하고 평면적인 일상의 틈을 찢으며 불현듯 다가오는 ‘한 소식’일 터.
문턱을 넘다 발이 삐끗하며 새끼발가락이 뭔가에 찔린 듯 통증이 느껴질 때, 또는 몇 층 아래서 열심히 올라오고 있는 엘리베이터의 퉁퉁거리는 소리가 갑자기 시각화되며 아찔해질 때, 시는 온다. 시를 쓰면서도 그런 찰나와의 싸움에 매료당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시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펄떡거리며 살아 있는 것임을.
조급해 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의식이 다할 때까지 ‘그저’ 찰나와 싸우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충분히 호전적이다. 해도, 시라는 소식을 알아보는 눈이 많이 어둡다. 형상적 사유의 겸손과 깊이도 덜 갖추었다. 그래서 눈이 더 밝아지라고, 더 깊어지라고 초대해 주신 줄 안다. 과분하며, 감사하다.
그동안 시 쓰는 길에서 함께해 주신 스승님들 얼굴이 떠오른다. 하지만 소리 내어 이름 부르지 않는다. 마음에 도장 찍듯 다시 한 분 한 분 얼굴 생각해 본다. 초면에 성큼 등 떠밀어 주시며 한 획 긋게 하신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린다. 그리고 내가 시 쓰고 있을 때, 가만히 서재 문 닫아 주고 가는, 그래서 많은 시간 나의 바깥에 서 있어야 하는 남편 K씨에게도 정말 감사와 미안함을 동시에 전한다. 이 모든 분들께 최상의 보답은 좋은 시 쓰는 일일 것이다.
약력 ▲부산 출생▲덕성여대 독문과 졸업▲중앙대 예술대학원 전문가 과정 수료
심사평-정체성 담는 노력 담담히 그려내
2012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많은 예비시인들이 몰려왔다. 효율과 결과만을 요구하는 시대에 시인을 꿈꾸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희망적인 일이다. 보다 행복한 삶을 꿈꾸는 이들의 에너지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려 생각하면, 현재의 우리 삶이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시로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자 했을까? 너나할 것 없이 물질적 욕망에 휩싸여 정신없이 살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이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많은 시편들에서 시적화자가 과장되어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징징거리고 있거나, 울고 있거나,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형상이 아닌 격정의 토로에 매달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적 대상과 화자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구체적 형상을 통해 의미를 구축해가는 시편들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작품은 양은정의 '신발을 위한 레시피', 안준혁의 '검은 강의 기록', 유빈의 '불고기,물꼬기' 였다. 우선, '신발을 위한 레시피'는 삶의 내용과 요리를 결합시켜 시상을 전개했다. 시의 바탕에 깔린 삶의 쓸쓸함이 잘 묻어났지만, 이런 상상력은 신선하지 않다는 결점이 있었다. '검은 강의 기록'은 문명비판적인 시각으로 우리 삶의 음화를 잘 표현했지만 주제가 시적 형상을 압도하고 있었다. '불고기,물꼬기'는 이주여성의 삶을 ‘언어’를 통해 형상화했다. 언어로 동화되지 않는 현실의 틈새를 발견하고, 그 틈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노력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세 사람의 장단점을 비교한 결과, 시상을 전개시키는 솜씨나 발전 가능성의 측면에서 유빈씨의 작품에 믿음이 갔고,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앞으로 좋은 시인으로 성장하길 빈다. 아울러 양은정, 안준혁 두 분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신덕룡 문학평론가·시인·광주대 문창과 교수
[2012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 정영희
아무르 강 소인이 찍힌 항공우편이 도착했다
우표 네 귀마다 고드름이 박혀있는 흑갈색 편지에는
온난화 현상도 이곳에선 세계대백과사전에서나 읽어보는 호사라며
한낮에도 발가락을 날개 안쪽 깊이 파묻고 지낸다는 이야기였다
순천만에서 담근 농게 장을 벽돌 빵에 치즈대신
발라먹고 끼니를 때운다는 이야기며
새끼들로 인한 궁기窮氣때문에 늦은 저녁까지 시베리아 벌판에서
발품을 팔고 돌아온다는 행간에는 한숨이 진하게 배어났다
철새라고 부르는 비아냥 때문에 눈자위 진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대목에서는 먹빛 하늘을 갈기처럼 찢고 싶었다
허기로 눈밭에 시리도록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 이젠 지쳐
순천만의 텃새로 귀화를 결심하고 있다는 추신에 이르러서는
철 이른 폭설이 자작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갯가 짱뚱어의 눈알이 봉분처럼 튀어나온 이유를 알겠다
망둥어는 왜가리 공습을 기어코 막겠다며 전망대까지 벌써 올라와 있었고
칠게들은 뻘 구멍 속에 흑두루미의 식량을 비축하느라
열 발톱이 문드러질 정도였다
흑두루미의 귀환 아닌 귀화를 위해 탄탄한 움집이라도 예비해야 한다며
풍속을 온몸으로 가늠하고 있는 갈대의 심지도 깊었다
너울은 먼 바다에서 싱싱한 먹잇감을 데리고 오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지그재그로 물길을 오르내렸다
냉기가 옷깃을 쓸며가자 사람들이 탐조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깃털 스쳐가듯 달이 구름을 밀어 올리자
쿠르르, 쿠르르, 카아오, 카아오!
회색 부리를 비틀며 북쪽 하늘에 까만 점들이 펄럭거렸다
이백 스물여덟마리 대가족의 귀환 아닌, 귀화였다
당선소감-아궁이에 지핀 온기 나누고 싶어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워지는 날, 서걱거리는 갈대밭에 앉아 철새들의 비밀을 문구멍으로 염탐한다.
첫눈을 기다리며, 철새들의 몸짓이 함박눈이라면 갈대들도 일어나 바람의 숨결에 맞춰 함박눈을 불러 모으겠지. 그러면 철새들은 구름의 모서리를 찢으며 묵정밭에 내려앉아 추위를 쪼아대거나 덧난 생채기를 검불로 덮어줄 게야. 냉기일지라도 달무리처럼 힘껏 돌려 쥐불로 윗목까지 데워놓는다면 올 혹한은 봄물처럼 흘러가겠지. 그러니까 어디 있던 친구야, 바쁘다만 하지 말고 순천만에 가보게나. 함박눈이 불꽃처럼 흩날리는 날에는.
설렘이 녹아 흐르는 첫눈 같은 시를 써야겠다. 밤새 뒤척거리다 날을 꼬박 새더라도 고비 사막에 첫눈만 내린다면 온 누리가 환하게 따뜻해지는 그런 시 말이다.
생의 춘곤증도 같이 깔끔하게 걷어내는, 그 땐 폭설이 서 너 달 쌓여 무등(無等)에 내가 고립되어도 좋으리. 그래도 줄 게 있다면 철새들의 간식거리나 골목길 연탄재로나 서 있고 싶은데, 얼지 않고 견뎌낼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참, 또 한 번의 비상을 위해 발가락을 깊이 꺾는 흑두루미의 마법을 터득해야 하리.
아궁이에 지핀 온기를 두 심사위원님들과 함께 나눠가져야겠다.
기회를 놓친 분들께도 위로의 함박눈 한 잔 건네고 싶다. 가족, 교직원, 친구, 화요회원들에게 감사의 삼보일배를 올린다.
▲1957년 순천 출생, 필명 정도전 ▲광주교육대, 한국교원대 대학원 ▲여천초교 교장
심사평-철학적인 시세계 한폭의 그림 같아
예심을 거쳐 올라온 시를 읽었다. 문단에서 시 분야가 침체되어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출품작의 수에 비해 시의 수준이 높지 않았다. 실험정신이 살아 있는 시도, 삶을 치열하게 노래한 시도 드물었다. 이슈가 될 만한 시의 흐름도 눈에 띄지 않았고 전반적으로 시의 완성도도 낮았다. 세상을 들었다 놓을 절창을 만나고 싶은 기대를 안타깝게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의 ‘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과 권시은의 ‘프리다 칼로가 익어가는 팔월’을 놓고 고심한 끝에 정도전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권시은의 작품들이 완성도는 더 높았으나, 정도전의 시가 보여준 세계를 바라보는 깊이와 ‘철 이른 폭설이 자작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와 같은 수일한 이미지에 표를 던졌다. 정도전의 시는 다소 설명적 이여서, 행간에 이미지의 증폭이 없어 시의 맛이 반감되고 있다는 단점도 지적되었음을 밝힌다.
위의 두 명의 시 외에 선자들의 관심을 끓었던 작품에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황재운의 ‘운주사’와 치밀한 묘사가 돋보인 천선필의 ‘자화상’이 있었다.
당선자도 낙선자도 모두 분기하여 우리 문학사를 빛낼 시인이 되길 바란다.
곽재구 시인 함민복 시인
[2012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위풍당당 분필氏/정경희
강의실에 상주하는 분필씨는요
평소엔 친절함 속에 뿔을 감추고 있지만
앉기 거부하거나 행동지침을 어기면
밑줄 좍좍 그어가며 날 길들이려 하죠
동강동강 제 몸 관절 부러뜨리며
어김없이 날카로운 뿔을 꺼내 위협해 와요
나는 뿔이 무서워 의자에 몸 구겨 넣고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순한 양이 되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분필씨 생각대로 답하고
분필씨 습관대로 따라 행동하죠
가끔 경직되고 고루한 생각에
내 뿔 꺼내 맞서볼까 생각도 하지만요
그의 뿔은 워낙 완고해
내 같은 여린 뿔로는 감히 어림 없다나요?
그래서 나만의 대항 법을 터득했는데요
강의 내용 자장가 삼아
잠 계단에 비스듬히 앉아 있거나
창 밖 딴 세상 꿈꾸면서 그 뿔 숫제 무시해보죠
그러다가 뿔을 타고 밖으로 나가
강 건너고 구름 따라 달리기도 하고
발걸음 멈추고 비행기 접어 날리기도 해요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뿔을 먼저 달아준 건 나인지도 모르겠어요
지적이고 당당한 그 뿔이 멋스러워
스스로 닮아가려 애쓰는 건지도
쉿, 분필씨 다시 뿔을 꺼내고 있어요 세상이 갑자기 긴장하네요
당선소감-암흑 속에 반짝이는 별이었으면
오래도록 나무로 서 있었습니다. 사방으로 가지를 뻗었으나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해는 져서 어둠은 짙건만 걸음을 뗄 수 없는 시간들이 두툼한 낙엽으로 쌓였습니다. 자꾸 목이 마르고 뿌리 내릴 수 없는 조바심으로 올려다 본 하늘에 아, 총총히 박힌 별이라니…. 인적이 끊긴 어느 밤, 발자국 소리에 놀란 개 짖는 소리로 길을 잡아 새벽녘에야 사립문에 다다랐을 때의 안도감 같은, 아, 눈망울 맑은 별들의 반짝거림이라니…. 나의 시도 그렇게 위안 받고 또 그렇게 위안이 되었으면 하고 기다리던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던 날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며 선물이었으면 하고 되뇌이던 주문이 기적처럼 하얗게 날아왔습니다. 여전히 길 위에서 서성거리지만 가지 사이로 빠져 나가는 바람과 이야기 나눌 수 있고 속삭이는 별을 머리 위로 올려다 볼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시에 입문하도록 등 떠밀어주고 늘 힘이 되어준 남편과 당선 소식에 놀란 눈으로 나를 끌어안던 두 아들에게 먼저 사랑을 전합니다.
은유와 시의 본질을 깨우쳐주신 김영남 선생님, 덕분에 이름 없는 것에게 이름 붙이고 말 거는 일이 한결 쉬웠음을 고백합니다. 시가 곧 삶인 삶을 살라하시던 문학아카데미 박제천 선생님, 사람을 중심에 두고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이며 살겠습니다.
오랜 시간 시의 발등에 쓴 잔을 들이부을 때도 늘 곁에서 힘이 되어준 이기홍, 최가예 시인님, 덕분에 칠전팔기 할 수 있어 고맙습니다. 도반이 있어 외롭지 않게 길 떠날 수 있었던 정동진회원과 문학아카데미 문우들, 먼 길 돌아가는 뒷모습 지켜봐준 어우름 회원과 제 이름에 기쁨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에게도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드립니다.
그리고 하마터면 주저앉아 시의 끈을 놓아버릴 순간 손잡아주신 안도현 심사위원님께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미약하지만 암흑 속에 반짝이는 별처럼 그렇게 정진하겠습니다.
△1962년 목포출생△광주교대 국어교육과 졸업△2004년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학창작과 전문가 과정 수료
△현 서울목원초등학교 교사
심사평-기성세대 권위 상징 '뿔' 기발해
애매모호한 이미지를 구사하던 시들이 거의 사라졌다. 대신에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자분자분 이야기하는 시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아직도 시가 개인적인 고백의 양식이라고 생각하는 구태의연한 시들을 제외하고 나니 수준 높은 시들이 한 소쿠리나 되었다.
마지막까지 손에 들고 있던 시들은 6명의 작품인데 하나같이 읽을 만했다. 최영화 씨의 '갯고둥'은 시적 대상을 유심히 관찰해낸 뒤에 얻은 사유가 일품이었다.
하지만 이 시의 핵심어인 '길'이라는 단어를 이십여 차례 이상 등장시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양은정 씨의 '신발을 위한 레시피'는 참신한 소재로 단번에 시선을 끌어당기는 시였다. 시의 중반부 이후 동어반복이 지루해서 좀 더 다른 감동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주명숙 씨의 '꽃시계 좌담'도 의욕적인 출발에 비해 뒤가 약했다. 대비의 기법을 왠지 서투르게 구사하는 느낌이다. 김수예 씨의 '아토피'는 활기찬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역시 뒤쪽으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는 게 흠이었다. 나아름 씨의 '누가 냉장고를 열었을까?'와 정경희 씨의 '위풍당당 분필씨'를 놓고 고심을 거듭해야 했다.
두 작품 모두 독특한 발상, 거침없고 자유로운 표현 방식이 일품이었다.
앞의 작품은 상상의 보폭이 넓어 때로 엉뚱해 보이는 것도 매력이었다. 시는 이것이다, 라는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있다는 점, 적절한 대화의 삽입으로 시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점도 좋게 보았다. 그런 장점들이 이 사람이 응모한 시편에 지나치게 많이 구사되고 있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선작으로 고른 '위풍당당 분필씨'는 기성세대의 권위를 '뿔'로 설정한 상징적 장치가 매우 기발하다.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는 자의 난감함을 이처럼 능숙하게 표현하는 일은 범상치 않다.
게다가 함께 응모한 시들이 모두 만만치 않은 기량을 보여주고 있어 믿음직스럽기도 하다. 좋은 시를 당선작으로 뽑을 수 있어 즐거웠다. 부디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빛나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안도현 우석대 교수
[2012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노루귀가 피는 곳/최인숙
그래 그래 여기야 여기
신기해하고 신통해하는 것은 뜸이다
안으로 스미는 연기의 수백 개 얼굴이
아픈 곳을 알아서 나긋나긋 더듬는다
그러고 보면 뜸은 어머니의 손을 숨기고 있다
뜸과 이웃인 침을 권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침의 얼굴과 대적한 적 많아
보는 순간 심장부터 놀라 돌아서곤 한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뜸이 다 사그라지기를 기다리다 보면
어머니도 부엌에서 또 뜸을 뜨고 계셨다
아침저녁 굴뚝으로 하늘 한켠을
할머니 무덤 여기저기에
노루귀가 피었다
겨울과 봄 사이
가려워 진물 흐르는 대지에
아니 너와 나의 그곳에
누가 아련히 뜸을 뜨고 계시다
어느 세상의 기혈이 뚫렸나 하루도 환하다
[심사평]이질적 형상화로 작가의 시적 내공 고스란히 묻어나
응모작품들을 공들여 읽었다. 요즘의 한국시가 지나치게 난삽하면서 그 길이도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곤 하는데, 이번 응모작들도 그런 경향들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시인이 지니는 표현 의도는 최적의 언어로 구조화되고 형태화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표현 의도를 겉으로 드러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생략과 함축으로 끌어안을 때 견고하게 정제된 시를 만날 것이다.
<노루귀가 피는 곳>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이 시의 작자는 작은 풀꽃인 ‘노루귀’에서 환기되는 정서를 한방요법의 ‘뜸’으로 풀어내고 있다. ‘뜸’은 약쑥을 비벼서 인체의 혈 위에 놓고 불을 붙이는 치료행위이다.
연기를 내면서 쑥이 타들어가고 그 기운이 혈을 자극해서 막힌 기를 소통시킨다. ‘노루귀’의 식물이미지를 한방치료 요법인 ‘뜸’으로 병치시킨 시인의 착상도 새롭지만 아침저녁 굴뚝으로 연기를 피워 올리는 어머니의 노고와 ‘뜸’이 피워 올리는 연기를 합일시킨 상상의 능력도 두드러진다.
상호 이질적인 이미저리(‘노루귀’ ‘뜸’)를 연관시킨 시인의 상상력은 이 시의 작자가 상당한 시적 내공을 쌓은 분임을 미루어 알 수 있게 해준다. 같은 시인의 투고 작품 <무지개>도 선연한 이미지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이분의 역량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최종까지 남았던 작품들은 <우포의 달 외 2편>, <할머니의 기도 외 3편>, <다리가 잘린 소녀에게 외 2편> 등이었다.
이분들도 나름대로 시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분들이다. 정제된 시에 이르는 노력들을 계속한다면 좋은 시에 이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훌륭한 시인으로 우뚝 서 주기를 바란다.
이건청 / 1942년 경기이천 출생 /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 시집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 외
-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목월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다수 수상.
[2012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흰꽃이 지다/오영애
흰꽃이 진다 한꺼번에 진다 비를 맞으며 서서 수십 톤씩 진다 무더기무더기 진다 바야흐로 진다 가슴이 하나 진다 통곡하듯 진다 둥둥 떠서 진다 꽃상여로 진다 절뚝절뚝 진다 맨땅위에 진다 색 없이 진다 화 없이 진다 자식 없이 진다 원수 없이 진다 수의(壽衣) 없이 진다 실로 꽃 곁에 가까이 울며 서 있는 장바구니 든 나도 진다
[심사평] 오롯한 말솜씨와 창조적 가락
[2012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목련꽃/조영민
꽃이 문을 꽝 닫고 떠나 버린 나무 그늘 아래서
이제 보지 못할 풍경이, 빠금히 닫힌다
보고도 보지 못할 한 시절이 또 오는 것일까
닫히면서 열리는 게 너무 많을 때
몸의 쪽문을 다 열어 놓는다
바람이 몰려와 모서리마다 그늘의 알을 낳는다
온통 혈관이고 살인 축축한 짚벼늘이 느껴져
아주 오랫동안 지나간 것들의 무늬가 잡힐 듯한데…
꽃 진 그늘에는 누가 내 이름을 목쉬게 부르다가
지나간 것 같아
꿈이나 사경을 헤맬 때 정확히 들었을 법한 그 소리가
왜 전생처럼 떠오르는 것일까
그늘은 폐가다 그것은 새집이나 마찬가지
나는 폐가의 건축자재로 이뤄졌다
태양이 구슬처럼 구르는 정오. 꽃그늘에 앉으면
뒤돌아서 누가 부르는 것 같아
부르다 부르지 못하면 냄새로 바뀐다는데
뒤돌아서 자꾸만 누가 부르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나무를 꼭 껴안아 보는데
나무에선 언젠가 맡았던 냄새가 난다
[당선소감] “온갖 소재들, 詩로 화려하게 꽃피울 터”
날마다 출근하려면 정지용 시인의 생가 앞에서 차를 탑니다. 이곳으로 이사온 지 일 년 반이 넘어갑니다. 그동안, 나의 창으로 눈발이 날렸고 비도 내렸습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꿀벌이 무수히 다녀갔습니다. 벚꽃의 환한 빛이 너무나 좋아, 나에게 유실된 것들을 찾아갈 때가 많았습니다.
지용생가 곁에서의 삶은 행복했습니다. 옥천 구읍의 상점 간판들은 온통 지용의 시들이 적혀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닐 때면 그 시구에 감흥을 받았습니다. 이곳은 작은 시(詩)의 대도시입니다. 지병 같은 나의 불행이 치료를 받았습니다.
나에게 시를 쓰는 것은 꿀벌과 같습니다. 저 벚꽃의 환한 빛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가만있으면 벚꽃도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지… 어느 때는 갓 출판된 시리즈물 같은 꽃잎을, 한 장 한 장 번역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돌아보면 시의 소재들이 자신도 번역해 달라 아우성입니다.
계속해서 벚꽃의 환한 빛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 영남일보와 부족한 저에게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합니다. 아울러, 수원에 계시는 어머니, 그리고 봉화에 계시는 장모님, 나의 사랑 이길현, 금쪽같은 다녕 동하 이준이, 저를 아는 모든 이에게 감사합니다.
뒤늦게 배운 시인 만큼, 앞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화려하게 피워보고 싶습니다. 시의 쓴 맛, 단맛을 조금 겪어 보았으니 이제 길을 가는데 외롭지 않겠습니다. 길을 가다 꼭 한번 시 나라의 번화가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심사평] “활기찬 이미지 직조·신선한 묘사 뛰어나”
예심을 거쳐 올라온 이가 8명이었다. 전반적으로 과도한 수사와 진정성이 얕은 말놀음에 빠져 있어서 심사위원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으나, 이를 압축해들어가 마지막까지 논의된 몇 편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그러한 의구심이 떨쳐지는 듯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유진의 ‘내 침대엔 가끔 토끼가 자요’ 외 몇 편과 조영민의 ‘목련꽃’ 등 수편, 그리고 염민기의 ‘이식’ 등을 놓고 저울질을 했다. 그 결과 쉽게 ‘목련꽃’이 당선작으로 선택됐다. 다른 작품에 비해 아주 개성적이어서 단연 돋보인다는 평을 들었다. 함께 보낸 다른 작품의 수준도 고르게 느껴졌다. ‘이식’ 등은 새로운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의 과도한 학대로 메시지가 애매하다는 점에서, ‘내 침대엔 가끔 토끼가 자요’ 등 몇 편은 작품은 아주 개성적인 데다 일정 수준을 고르게 유지하고 있어 돋보였으나 주제를 부각하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제외됐다.
‘목련꽃’은 제목의 소박함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아주 짜임새 있는 이미지의 구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늘은 폐가다 그것은 새집이나 마찬가지/ 나는 폐가의 건축자재로 이뤄졌다’와 같은 단연 돋보이는 구절들로 유장하게 짜나가는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묘사도 정확하고 신선하다. 이미지의 직조 솜씨도 꾀죄죄하지 않고 상상력의 구사도 아주 활기에 차 있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꽃과 나무, 그늘과 밝음을 얽어 짜면서 ‘몸의 쪽문을 다 열어 놓는’ 그 고요한 시선이 눈부시다. 다만 이 시와 함께 보내온 그의 작품들의 미세한 부분에서 드러나는 겉멋과 자의적 이미지들이 걷어내졌으면 더 좋았으리라.
대성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문인수·이하석
[2012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얼룩진 벽지/ 성명남
독거노인이 사는 벽 귀퉁이에
어린 재규어 한 마리 숨어 산다
우거진 풀숲 사이로 자세를 낮춘
짐승의 매화무늬가 보인 건
열대우림 같은 우기가 시작된 며칠 뒤였다
지직거리는 TV속 동물의 왕국에선
재규어가 강물 속에 꼬리를 담그고
살랑살랑 흔들어 물고기를 잡는다
노인은 자신의 퇴화된 꼬리를 자꾸 만져보다
돌아누우며 TV를 꺼버렸다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렸다
하루가 다르게 짐승의 영역은 확대 되어갔다
영역을 표시하는 그 채취만으로
목덜미를 물린 듯 노인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짐승이 다 자랐을 때 닥칠지도 모를
치명적 위험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다
점점 몸집을 불린 수컷 재규어가
몸이 근질거릴 때마다 혀로 제 몸을 핥는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다
범람한 강물이 골목을 덮쳤을 때
노인의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맹수가 펄쩍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평원을 가로질러 노인을 물고 사라졌다
도배장이가 벽지를 쫙 뜯어내자
그 속에 무성한 열대밀림이 펼쳐졌다
[2012 신춘문예] 시 당선소감 / 상상 속에서 꿈꾸던 일이 뜻밖에 현실로
낯선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응모한 작품이 당선되었다는 전화기 속의 목소리가 하늘의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꿈만 같아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깜짝 놀라고 벅차오릅니다. 심장이 아직도 쾅쾅 뛰고 있습니다. 상상 속에서 꿈꾸던 일들이 현실로 이어져 기쁩니다.
시를 쓰는 일은 즐거운 고통이었습니다. 가족과 일과 시쓰기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맞추며 제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새로 사온 시집에서 좋은 시를 만나면 자꾸 꿈이 커갔습니다.
꿈은 꾸기만 해도 행복한데 이루면 더 행복하다는 걸 알려주신 '국제신문'과 부족한 제 시에 날개를 달아주신 심사위원 문정희 시인님, 최영철 시인님, 박남준 시인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시의 은유를 알게 해주신 존경하는 정일근 시인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함께 공부한 이팝시 동인 문우들, 삽량문학회 식구들, 오랫동안 묵묵히 지켜봐 준 사랑하는 남편과 든든한 아들 휘성이와 첫 번째 독자로 지목되어 기꺼이 작품평을 해준 딸 슬아. 그리고 공부방 꼬마친구들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노력하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새해도 모든 분들이 시를 읽으며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약력 1962년 충남 연기 출생. 현재 양산시 삽량문학회 편집장. 이팝시 동인.
[2012 신춘문예] 시 심사평 / 절제의 미학과 따뜻한 응시로 잘 표현
늦게 담은 동치미는 익지 않았고 이곳저곳 지인들의 집에서 보내온 김장김치도 아직 맛이 들지 않았다. 먼저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지 않고 밖에 내놓은 김치 역시 설익었다. 먹기에 마땅치 않다.
금방 담은 김치는 배추의 고소하고 싱싱한 맛과 양념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그 싱그러움으로 먹을 수 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그 맛을 잃게 된다. 양념이 고루 배고 익어서 맛이 든 김치가 밥상에 오를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몇 포기 남아있지 않은 묵은 김치를 꺼낸다. 역시 이 맛이야. 시를 쓰는 일도 그렇다. 한껏 기교를 부리며 은유와 비유로 멋을 부린 시들이 막 버무린 김치와 같다면 오래 묵어 양념들이 고루 배고 맛이 든 김치, 그러나 배추의 처음 싱싱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아삭아삭거리는 김장김치는 온몸으로 밀어올린 울림이 있는 시, 깊은 맛이 있는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종심으로 올라온 두 작품은 '얼룩진 벽지'와 '보도블록'이었다. 그러나 '보도블록'은 신선한 시선이 돋보였음에도 이를 받쳐줄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았다. 당선작으로 뽑은 '얼룩진 벽지'는 김치와 같았다. 푸른 배추의 싱싱함을 가진 잘 익은 김장김치와 같은 시. 긴장감을 잃지 않고 절제의 미학과 '동거'와 같은 다른 시에서 보여준 깊고 따뜻한 응시를 가진 이 시를 놓고 심사위원들은 즐겁게 당선작에 올려놓았다.
처마 끝에 걸린 곶감들이 잘 마르고 있다. 곶감은 제 몸의 수분을 햇빛과 바람 앞에 알몸으로 온통 내놓고 말라갔을 때 그 속에 비로소 떫은맛이 변하여 달고 붉은 속살을 갖게 된다.
이제 파도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인이 헤쳐 나갈 험난한 여정에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시인 김수영의 시 한 구절이다. 온몸으로 밀고 가는 시인정신으로 나는 그 표현을 읽었다. 적어도 시를 쓴다면 이 정도의 자세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목숨을 걸어보는 정도 말이다.
심사위원 문정희 최영철 박남준(이상 시인)
[2012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허영둘
젖은 잠을 수평선에 내거니 새벽이다
밤사이 천둥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다
예고된 일기였으나 어둠이 귀를 키워
여름밤이 죄처럼 길었다
생각 한쪽을 무너뜨리는 천둥과 간단없는
빗소리에 섬처럼 엎드려 나를 낭비했다
지난봄, 바다로부터 해고통지서가 날아왔다 세상은 문득 낯설어졌고 파도는 사소한 바람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코발트블루 바다는 손잡이 없는 창窓, 절망보다 깊고 찬란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나의 슬픔도 그토록 찬란했을까 나는 구름 뒤에 숨어 낮달처럼 낡아갔다 들판의 푸른 화음에 겹눈을 빼앗긴 나비를 기다리며 나는 오지 않는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바다가 깨어난다
졸려도 감을 수 없는 희망
돌아서는 파도의 옷자락을 따라가면
거룩한 경배처럼 엎드린 섬들
나는 존엄을 다해 아침 바다의 무늬를 섬긴다
희망이란 소소한 풀잎이거나
날 비린내 풍기는 고깃배의 지느러미 같은 것
풀잎도 계단도 허리까지 젖어 궁리가 깊다
밤새운 탕진에도 하늘이 남아 드문드문한
구름 송이들은 젖은 마음을 문지르는 데 요긴하겠다
마루 끝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담장 아래 칸나의 방에 볕이 붉게 들고
거미는 방을 훔치는 수고를 덜겠다
느슨하던 수평선도 다시 팽팽해져 나비를 부르고
고깃배 한 척 안개를 젖히며 희망처럼 돌아오고 있다
당선소감 "살아있는 동안 가슴에 나비를 품고
늦은 나이에 시작한 내 글쓰기는 내 속의 우울을 하나씩 끄집어내 세상과 눈 맞추게 하는 행위다. 형체 없이 스며 있던 상처와 욕망이 육체를 얻어 활동하게 하는 작업, 나무속에 들어가 가지 따라 솟구치고 햇볕에 몸 비비며 잎으로 팔랑거리게 하는 일이다. 바람의 팔과 햇살의 눈으로 고루 세상과 마주하는 일. 오래 바라보면 사랑하지 못할 대상이 없다. 세계는 평등하고 풀벌레 한 마리, 돌멩이 한 개의 삶도 눈물겹도록 진지하다.
보송보송 마른 마음으로는 시가 오지 않는다. 무언가 아련하고 아릿한, 나는 그것이 오랜 세월 내가 떨쳐내고 싶었던 우울이라는 것을 안다.
눈부신 날개를 팔랑이며 나비가 돌아온 아침이었다. 당선통보의 벅찬 감동은 한계에 다다른 것 같던 내 시력(詩力)에 대한 절망감에도 환하게 해를 비췄다. 살아 있는 동안 가슴에 나비를 품고 살 것이다. 언제나 최초의 시간을 쓰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참신한 상상력으로 시 쓰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신 김영남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동진 회원님들, 유진 시인님과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채우지 못한 한 줄을 붙들고 밤을 새울 때 따뜻한 차 한 잔 슬그머니 놓고 나가던, 내 시의 첫 독자이며 평자인 남편 이일상 씨, 시 쓰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며 응원해 준 동걸, 언젠가는 시인이 될 것 같은 다영이, 행운을 물고 우리 집으로 날아온 나현.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
허영둘/1956년 경남 고성 출생 /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수료.
심사평 "새로운 어법 통한 도전의식 돋봬"
본심에 오른 것은 총 6편이다. 최은묵의 '알', 권동지의 '늦은 귀가를 베껴쓰다', 권수진의 '과메기', 이주상의 '편두통', 손상호의 '시미즈 터널', 허영둘의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등이다. 이들은 수준에 올라 당선작으로 하여도 무방한 느낌이 들었다.
'알'은 발상이 참신해 눈이 갔으나 아직 관념이 형상화보다 앞선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늦은 귀가를 베껴쓰다'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감성의 풍부성이 주목되나 상상력의 허점과 문장의 완결성 부분에 문제가 제기됐다. '과메기'는 파란만장한 삶을 바다에 비유해 전개한 참신성이 돋보이나 주제가 너무 상식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흠으로 지적됐다. '편두통'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복잡한 심리를 번득이는 표현으로 포착한 점은 놀라우나 관념이 너무 앞서고 설명적이라는 점이 문제로 언급됐다.
그리하여 '시미즈 터널'과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이 종심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미즈 터널'은 쓸쓸한 삶의 내면을 더없이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표현한 점이 장점으로 두드러졌지만, 이 점이 오히려 완숙한 경지를 보여주어 신춘문예로서 가지는 발전 가능성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비해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은 새로운 어법을 통한 도전의식이 엿보이고 현실에 대한 인식의 깊이, 표현의 참신성도 갖춰 당선작으로 확정하는 데에 이의가 없었다. 당선자가 더욱 정진해 한국 시단의 중추가 되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김종해·천양희·김경복
시처럼 짜맞춘 시, 시로 보이기 위해 안달하는 시, 쓰는 사람 스스로도 재미 없을 그런 시를 읽는 일은 피곤하다. 해묵은 사회적 낭비. 기성 양복을 입은 듯한 말씨만 번잡스럽다. 이즈음 평균 취향이 그렇다며 넘기고 말기에는 씁쓸할 따름. 신춘문예 당선을 겨냥한 신인이라면 자기 목소리를 갖고자 고심한 흔적 정도는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 마지막까지 남은 세 편을 두고 뽑는 이는 그 점을 먼저 살폈다.
김혜경의 ‘진화론’은 변기에 앉는 삶에서 거미의 생태를 유추한 시다. 자신도 “발 대신 다리”가 “돋아날 듯” 쓰리다는 마무리까지 무리가 없다. 그러나 다른 거미 글감 시들과 나뉠 만한 확연한 울림은 얻지 못했다. 김혜강의 ‘비’는 제목 그대로 비에 대한 풍정시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엮은 직조술이 참신했다. 그럼에도 비를 빌린 땅과 하늘의 교감을 “옥황상제와 몸 섞는 소리”라 한 데서 평범에 머물고 말았다.
오영애의 ‘흰꽃이 지다’는 앞선 둘에 견주어 신춘문예용 시에서 멀다. 단형에다 담긴 속살 또한 막연하다. 감상적이기까지 하다. 짜임도 ‘ㄱ이 진다’는 월의 엮음과 되풀이로 한결같다. 그것을 받치는 몸말은 명사형에 갇혀 감각적 표현성을 지니지 못했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창조적이다. 자기 가락을 지녔다. 자신이 겪은 바를 자기 목소리로 뱉는 힘이 시인 되는 첫 조건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게다가 말솜씨까지 오롯하다. 이 시는 삶의 막연한 속살로 길게 이어진 앞과 “장바구니 든 나”를 내세운 짧고 구체적인 마무리 월, 두 매듭으로 짜였다. 그런데 둘 사이 단층이 지닌 뜻은 크다. 앞 매듭에 넘치는 감상이 삶의 깊이로 뒤바뀌는 놀라운 비약을 뒤 매듭이 마련한다. 한 여자가 겪은 아픈 간난을 단형의 가락으로 울림 크게 살려 낸 절창 ‘흰꽃이 지다’. 오 오 시인, 멀고 멀 창작의 길에서 독야청청 피고 피기를.
<심사위원 박태일·김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