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다른 아홉은 어디 있느냐? |
본문 | 눅 17: 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
일시 | 2024 07 07 주일예배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와 갈릴리지방 사이를 지나시는데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과 만나게 됩니다. 우연히 만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소문을 듣고 자기의 병을 고치려고 예수님을 찾아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나긴 만났지만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큰 소리로 예수님에게 자비를 구했습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나병환자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나병이 고쳐짐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를 입어 병에서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단 한 명 사마리아인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로 돌아와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하시고는 사마리아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을 너를 구원하였다”고 죄 사함의 복을 내려 주십니다.
1, 감사할 줄 모르는 이들
여기서 저는 예수님이 찾으셨던 아홉 명의 그 후 삶을 조명해 봅니다. 그들은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그저 자기 병이 고쳐진 것에 대해서만 기뻐했지, 아무런 대가 없이 자기를 저주에서 건져준 이에게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니 예수님께로 돌아올 생각도 못 한 것입니다.
이런 만들어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병을 고쳐주거나 죄를 사하여 준 사람들이 어찌 살고 있는지 돌아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앉은뱅이 거지로 있다가 나음을 받은 한 남자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는 술주정뱅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아, 왜 이렇게 사는가?" "주님, 내가 주님 앞에 큰 은혜를 입어 고침을 받고 새 사람으로 바로 살아보려고 했는데, 막상 살아보니 마음대로 안 됐습니다. 내가 앉은뱅이로 구걸할 때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먹는 것은 해결이 되었는데 성한 몸으로 살려니 더 고달파서 술을 한 잔씩 마시다 보니 이렇게 중독이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창녀로 있다가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된 여인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여전히 창녀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자여, 왜 이렇게 사느냐?" "주님, 죄송합니다. 내가 주님을 만나서 새사람이 되었는데 바로 살아보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창기 출신이라고 상대도 해 주지 않고 나를 따돌립니다. 그럴 바엔 편하게 살자고 하여 이렇게 몹쓸 짓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소경으로 있다가 눈을 뜬 청년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이 젊은이가 불량배가 돼 있었습니다. "청년이여, 왜 이렇게 사는가?" "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본래 장님이 아니었습니까? 눈을 떠서 세상을 살아보니 너무도 나를 실망시키는 일이 많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세상에 못 돼 먹은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때려주고 싶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세 사람을 만나보니 그 지경이 되어 있었습니다. 앉은뱅이가 걷는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소경이 눈을 뜬 것은 은혜입니다. 창기가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된 것도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은혜 받은 후에 주어지는 삶을 감당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나병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그 후의 삶도 계속 이런 은혜가 주어졌을까요? 아니요. 인생은 그렇게 달콤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 병이 떠나갔다고 해서 내일도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님은 우리의 경험으로 이제는 압니다. 중요한 것은 내 병이 떠나간 것이 아니라 내 병을 떠나가게 한 분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2. 은혜 위에 은혜
요한복음 1장 16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은혜 위에 중복해서 받는 은혜, 거듭 받는 은혜라는 의미도 되지만, 처음 받은 은혜를 넘어서는 더 큰 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헬라 원어로 보아야 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이 말을 '안티'라는 말로 썼습니다. ‘안티’라는 말은 영어에 대신한다(instead of)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가 무슨 뜻입니까? 과연 은혜를 대신할 것이 있는가? 은혜는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물을 대신할 다른 선물이 있는가? 의미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은혜가 아닌 것이 없는 은혜의 뜻입니다. 은혜가 아닌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 되게 하여 최종적으로 은혜가 승리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더 쉬운 말로 풀이하면 은혜를 받은 후에 은혜롭지 못한 일들을 은혜롭게 하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은혜로운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나면 갈등이 오고 장애물이 오고 시험이 옵니다.
은혜를 받았는데도 은혜를 다 까먹어버리게 하는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도저히 은혜가 되지 않는 그런 일들이 발생이 됩니다. 그와 같은 것들을 '은혜 되게 하는 은혜'가 바로 ‘은혜 위에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은혜를 받았을 때는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누가 주었는지 살펴보고 그 분에게 감사할 줄 알고 그 분께 경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준 것은 병 고침의 은혜도 은혜지만, 은혜 위의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것은 나병이 고쳐졌음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이 있게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이분에게 돌아서서 발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펼쳐지는 삶의 굴곡은 은혜를 다 잊어먹게 하더라도 그 조차도 은혜로 여기는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거지
마틴 루터가 임종 시에 말한 유명한 한 마디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지다' 그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그 말을 그냥 들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곱씹어 새겨보면 새겨볼수록 의미가 큽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지입니다.
한평생 살았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 줄로 믿습니다. '주여, 내 인생은 거지였습니다. 그러나 내 일생 동안 내가 먹고 입고 누리고 오늘의 이 영광스러운 내 삶의 모든 것은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고백을 가능하게 하는 고백이 '인생은 거지'라는 고백입니다.
오늘 '주님, 나는 거지입니다'라는 빈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시고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내가 뭐가 된 자처럼, 내가 무엇을 가진 자처럼 내 것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빈 마음에 거지와 같은 나의 손에 모든 것에 충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아들이 수영장에서 빠져 식물인간이 되어 금식하며 기도했지만, 건장했던 아들이 소천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고 그 권사님은 자기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갔으니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밧세바로부터 낳은 아들이 금식기도를 했음에도 죽고 말았을 때 행했던 다윗 왕의 모습과 같습니다.
또 어떤 분은 남편이 말기 대장암에 걸려 죽어갈 때 또한 기도로 아뢰었지만 결국 소천하고 말았습니다. 죽어가는 남편의 귀에 대고 “ 여보 그동안 나와 같이 살아줘서 고마웠어. 이제 하나님 곁에서 아프지 말고 평안하게 지내. 하나님! 이렇게 좋은 사람을 제 남편으로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 곁으로 갑니다. 우리 남편을 받아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것은 고난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로 알 수 있듯이, 내가 가진 믿음이 얼마 만한 믿음인지는 은혜를 다 까먹는 고난 앞에서 내 믿음이 감사할 줄 아는가, 모르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고문, 조롱,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힘, 돌로 치는 것, 톱으로 켜는 것, 칼로 죽임을 당하는 것, 궁핍하고, 가난하고, 환난과 학대를 받을 때 믿음으로 이기는 자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 좋은 일만 있는 것 아닙니다. 형통하게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을 내팽개치고 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럴 때는 ‘예수 믿고 사는데 왜 이런 고난이 닥치는가?’ 하고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받으려면 고난도 함께 겪어야 하는구나!’ 하고 고난 받은 것을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은혜 위에 은혜를 아는 자, 그에게는 은혜 아닌 것도 은혜로 받아들여지며 ‘아멘’하며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 은총을 입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은혜 위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보지 않고 그 은혜를 주신 주체가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내게 어떤 분이신지를 알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은혜 위의 은혜는 감사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운명론에 매여 살아가거나, 아니면 인본주의적 사고에 매여 살아갑니다. 운명에 매여 사는 사람은 사람의 운명은 사주팔자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인본주의적 사고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생은 내가 하기에 달렸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럴 듯 하지만 틀렸습니다. 인생 어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집디까?
저는 인본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가를 압니다. 처음에는 가장 사람을 위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사탄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힘으로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내 인생 내 맘대로가 됩니까? 이런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 곁으로 올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의 말로는 비참 그 자체입니다. 그야말로 헛 된 일, 허업의 인생인 것입니다.
이들과 반대로 내 인생을 하나님의 은혜에 전부 의탁하고 사는 은혜 위에 은혜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우리 같은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이 말씀이 곧 은혜 위에 은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나의 나 된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울 사도의 일생이 좋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참으로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었건만, 예수님의 붙드심으로 매 맞고 갇히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러고도 믿는 자들로부터 사도가 아니라고 따돌림을 당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리 고백하렵니다. 나이 70이 되도록 험한 일을 하고, 십수 년 교회를 섬겨도 부흥이라고는 ‘ㅂ’자도 찾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렵니다.
며칠 전 제 아내와 함께 차를 타고 오면서 지난 십수 년의 제주 삶을 생각할 때 그저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서로 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삶이 어떤 삶이든, 구겨지든, 찢어졌던, 어쨌든 간에 나의 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2024년도 벌써 반이 지나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금년을 살아오면서 은혜 되는 일만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은혜로운 일보다 은혜롭지 못한 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아멘 할 수 없습니다.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무거운 짐들을 금년 한 해의 반을 살아내는 동안 많이 겪어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반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되지 못하는 그것을 은혜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위에 은혜라는 뜻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했음에도 그 기도를 한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곁을 떠나 살거나, 내 믿음의 무게를 가벼이 하거나 변질시키지 말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주셨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랍니까?
내 병이 고쳐진 것도 은혜이지만, 진정 은혜 위의 은혜는 바로 내 영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날 불같이 녹아 없어집니다. 그러니 진짜 내가 중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내가 당하는 고난이나 역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게 됩니다.
'주여, 저는 가진 것이 하나 없는 거지입니다. 그러나 여태껏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은혜롭지 못한 고통도 있었지만, 주님 지금 생각해 보니 다 은혜였습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서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말씀 생각하면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