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기사들의 축제, 그리고 난장판.
에르시안과 헤어진 후로 이틀이 지났다. 위다의 서쪽 평야를 걷고 있는
지난 몇일동안 시야는 온통 녹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 전 지나온
조그마한 숲이 그러했고, 지금 눈앞에 펼쳐있는 밀밭이 그러하다. 여름
이 가까워옴에 밀들은 짙은 녹색을 띄고 있었는데, 바람에 따라 출렁이
는 모습이 가히 장관이다.
큰길을 따라 동남방으로 나가던 이날 오후. 일행은 큰 길이 가득찰 정
도의 커다란 마차와 조우했다. 마차는 고아한 나무 색의 몸체에 흑색으
로 장식이 되어 있었는데, 마차를 끄는 말이 네 마리나 되는 것을 보아
꽤 지체 높은 귀족의 마차인 듯 했다.
그런데.... 파이러스는 그 마차를 보며 욕을 해댔다.
"제길헐! 뭐하러 여기까지 기어 나온 거야?"
그 말을 들어서인지, 마차가 파이러스의 앞에 멈춰 선다. 마부 보조석
과 마차 뒤쪽, 그리고 마차 안에서 네 사람이 뛰어내려 파이러스에게 다
가왔다. 흠, 시비라도 걸려는 것인가?
응?
네 사람이 돌연 허리를 깊이 숙여 파이러스에게 인사한다.
"라만트 후작각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뭐, 뭔작? 모노녀석도 순간 의아해 하는 눈빛을 지우지 못한다. 파이러
스는 무덤한 얼굴로 네 사람에게 손을 휘젓는다.
"여기는 또 어떻게 알고 나온 거야? 아무에게도 내가 돌아온다고 이야
기하지 않았는데."
파이러스의 말에 네 사람 중 마차 안에서 나온 노인이 허리를 굽실거리
며 답한다.
"카에스 항구에 사적인 일로 갔었던 영지 출신의 상인이 파이러스 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영지로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신들은 그 소식
을 전해 듣자마자 이렇게 직영지 국경선에서 기다리기를 언 사흘째 해왔
습니다."
파이러스가 헛웃음을 터트린다.
"제길. 두 다리 다 멀쩡해 걸어가면 될 것을.... 어련히 알아서 대문을
두드리지 않을까 봐 이렇게 찾아까지와 마차로 압송하겠다는 건가?"
그의 말에 그 노인은 어쩔 줄 몰라하며 서둘러 답한다.
"압송이라니요. 농담을 거두어 주십시오. 신들은 다만 신하된 이로서
예의를 갖추려 했을 뿐입니다."
"됐어. 그만하고 성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마차로 반나절이나 걸릴 테
니, 이야기를 할 시간은 충분할 꺼야."
파이러스의 말에 네 신하들은 허리를 한번 굽실거리더니 마차 쪽으로
다가가 마차 문을 열었다.
"오르십시오. 각하."
노인이 마차 곁에 바로 서서 파이러스를 향해 말했다. 그에 파이러스는
고개를 슬쩍 끄덕이곤 모노와 유리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 먼저 마차에 타거라."
유리카는 두말 않고 당연하다는 듯 마차에 올랐으나, 모노는 아직도 어
안이 벙벙한 듯 멍하니 그 커다란 마차를 바라보았다. 이전에 아이나가
타고 있던 마차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마차였기에, 모
노가 저러는 것도 이해가 간다. 모노와 파이러스, 그리고 그 노인까지
마차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마차 지붕에 내려앉았다. 마차
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차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간 영지는 평온했고, 이렇다할 큰 일도 없었습니다. 저희 신하들은
각하께서 훈시하신 데로 영지를 통치함에 조금의 어긋남도 없었습니다.
올해의 조세는...."
노인의 목소리였다. 아마도 파이러스에게 이런 저런 보고를 하려는 모
양이었다.
"그만 둬."
하지만, 파이러스는 노인의 말을 막았다.
"오래간만에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그런 이야기를 들어야 해? 제길, 평
온해 봤자 평민들은 밤낮 할 것 없이 일을 해야 하고, 귀족들은 밤낮 할
것 없이 놀아야 하는 건 마찬가지야. 그보다, 좀 재미있을만한 일없어?
꽤 오래 머무를 것 같은데."
"아! 머무르시러 오셨군요."
....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영지를 떠나있었기에....
"빌어먹을! 내 영지에 내가 머물겠다는데 왜 놀라는 거야? 불만이야?
여관비라도 받아먹겠다는 거야 뭐야?"
대뜸 내뱉는 시비조의 말에 노인이 당황해 하며 변명한다.
"시, 신은 결코 그런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너무
오래간만이라 기쁜 나머지...."
"기쁘긴 어느 얼어죽을 놈들이 기쁘다는 거야? 여우놈들이야 늑대가 숲
을 떠나있어 왕노릇에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웠을 텐데, 늑대의 귀
향을 반길 리가 있겠어?"
"가, 각하! 그런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신들은 어디까지나 충심을
품고 있을 뿐으로, 밤낮 할 것 없이 각하의 안녕을 기원하고, 언제나 성
으로 돌아와 현명함과 지혜로움으로 영지를 통치해...."
파이러스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닥치지 못해? 경이 나를 알고 지낸 지 몇 년인가?"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소리다.
"신이 각하를 모신지 이십 년째이옵니다. 선친 때까지 합쳐 삼십 년 넘
게 라만트 집안에 충성을 받쳐 왔습니다."
"그런데도 그따위 입발른소리가 나와? 내 이 더러운 성질머리를 모른단
말인가?"
한참이 지나도록 노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흥, 내가 왜 영지로 돌아왔는지나 아는가?"
노인이 대답하지 않자 파이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바로 영지 내에 불온한 무리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야. 뭐,
후작자리 쯤이야 뛰어난 검식과 바꾸자면 언제든지 줘 버릴 수 있지만,
아무것도 내게 주지 않은 주제에 멋대로 가져가게 둘 수는 없는 일이
지."
노인이 놀라는 목소리로 답한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불온한 무리라니요? 신은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파이러스가 웃으며 말한다.
"혹시 경이 주도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듣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털썩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마차
바닥에 둔탁히 부딪히는 소리다.
"신은 언제나 가문에 충성을 바쳐왔습니다. 의심하신다면 지금 당장 목
숨을 끊어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각하께서는 조금도 의심을 품지 말아
주십시오. 각하께서 워낙 먼 곳에 계셔 불순한 자들이 각하의 귀를 어지
럽힌 것일 뿐입니다. 부디 충신의 말을 믿어 간악한 이들이 영주님 근처
에 맴돌지 못하게 하옵소서."
그의 말에 돌연 파이러스가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하하하. 언제나 재미있단 말이야."
재미? 뭐가 말이야?
"어서 일어나라. 가뷰온 경. 모두 농담이었으니 마음에 담지 말아. 담
담하게 마차로 돌아가게 되어 내 잠시 심통을 부린 것 뿐이야."
"각하...."
"나의 이런 농담에 한 두 번 속아봤나? 고지식한 것도 적당히 하란 말
이야. 자자, 이제 됐으니까, 내가 돌아가자 마자 해야 할 일이나 죽죽
읊어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정말 장난을 친 것인가? 표정을 보지 못했으니
더더욱 알 수 없다.
"각하.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옵니까? 이 늙은 신하는 각하의 이야기에
흰머리가 예전의 두 배는 된 듯 하옵니다. 정말 단지 장난을 치신 것 뿐
이옵니까?"
파이러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노인의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를 받는다.
"농담일지 아닐지는 경의 행동에 달려있는 것 아니겠는가. 경이 내게
불온한 마음을 품는다면, 내 말은 농담이 아닌 것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단지 농담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말하더니, 그가 다시 근엄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두 마음을 품고 영지를 손에 넣더라도, 목숨까지 그렇지는 못할 것이
라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도록. 성의 경비병을 지금의 두 배로 늘린
다고 해도, 나의 이 검을 막을 수는 없을 거야."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파이러스 님의 말씀, 이해했습니다. 신은 영원히 라만트 가문의 종일
뿐 감히 두 마음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으음.... 언제나 영지를 비우고 있기에 이렇게 가끔 겁을 주는 모양이
다. 흠, 만약 아이나가 파이러스 정도의 능력이 있었더라면 결코 에미타
영지에 반란 같은 것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노인이 입을 연다.
"각하, 얼마전 위다 왕실로부터 친서가 도착했습니다."
파이러스가 묻는다.
"편지가? 무슨 내용이었지?"
가뷰온 노인이 대답한다.
"파이러스 님 앞으로 온 서신이기에 감히 열어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서재 위에 놓여져 있습니다."
파이러스가 가볍게 책망한다.
"쳇, 국왕의 친서라면 나의 부재여부를 따지지 말고 편지를 개봉해 보
라고 말하지 않았나. 중요한 명령이라면, 그대로 이행하지 않았을 때 미
치는 화가 엄청나단 말이야. 재수 없으면 반역죄까지 뒤집어쓰니까. 언
제 도착한 거야?"
"보름쯤 되었습니다."
"보름이라.... 아, 아마도 무투회 때문일 것이야. 아참, 이쪽은 모노라
고 한다. 당분간 영지에 손님으로서 머물 거야. 유리카는 익히 알고 있
겠지?"
"아! 유리카 아가씨 시군요. 뵙지 못한지 1년이나 지나 언뜻 알아보았
으나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가씨는 나날이 아름다움이 꽃피듯
자라나시네요."
저 노인은 말끝마다 아첨의 말을 붙이는군. 파이러스가 썩 좋아하지 않
을 만도 하다.
"모노님,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라만트 가문의 집사로 영지의 영주 대
리를 맡고있는 가뷰온이라고 합니다."
"모노 라사라고 합니다."
모노가 인사를 받는 사이에도 마차는 계속 남동쪽으로 향했다. 평야와
조그마한 숲이 번갈아 마차 곁을 지났는데, 하나같이 탐스럽고 비옥했
다. 역시 일곱 대륙 최강국다운 모습이다.
반나절동안 마차는 꼬박 동남쪽으로 치달아, 결국 한 성채에 도착했다.
성은 언덕 밑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외성 밖에까지도 가옥이 즐비한 것
이 굳이 숫자를 들먹이지 않아도 상당한 규모인 듯 했다. 멀리 외성 사
이로 보이는 내성 역시 굉장히 웅장하며 수려했다. 하늘높이 뾰족이 솟
은 첨탑들의 창문이 거의 져 가는 태양의 빛에 붉은빛을 반사하고 있다.
영지로 돌아온 파이러스는 영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성 입구
에 서있던 수십 명이나 되는 근위기사 들이 마차의 앞뒤를 호송했고, 성
정 중앙의 내성으로 통하는 대로가에는 사람들이 잔뜩 나와 파이러스의
걸음에 환호를 보냈다.
"이런 멍청한 것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야? 저 사람들 중 내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업을 하루 쉬게 만든 거야? 차라리
휴일을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영주 같지도 않은 사람 하나 돌아왔다고
저 난리를 피우게 만들어?"
파이러스가 힐난한다. 아마도 노인은 쩔쩔매는 표정을 지었을 테지.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어느덧 내성 안으로 접어들었다. 해자
위에 눕혀진 개폐식 성문을 덜컹거리며 지나 도착한 내성 안은 온통 녹
색 빛이 그윽한 정원이었다. 성 입구, 정면에 수많은 하인인 듯한 사람
들이 나와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흠, 위세가 대단하군.
한번 움직일 때마다 저 많은 사람들이 동원된단 말인가? 하긴, 전에 로
스 여왕이 성에 도착했을 때 더했으면 더했지 이보다 못하지는 않았으니
까.
파이러스와 유리카 등은 마차에서 내려서자 마자 건물 안으로 들어섰
다. 모노 역시 성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성안을 한바퀴 둘러보겠다는 마
음이 들었고, 마차에서 몸을 날려 창공으로 떠올랐다.
부산스럽던 한때가 지나자, 성안은 한층 한가했다. 하지만 내성 밖, 외
성 안의 마을은 오히려 조금전보다 흥청거렸는데, 상점들 때문인 모양이
었다.
막 성안을 한바퀴 돌고 다시 내성 안의 정원으로 돌아올 무렵. 파이러
스가 서둘러 성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노와 유리카도
함께나.
"이런 제길! 어서 말을 세 마리 끌고 와! 젠장! 이래서 편지를 미리 뜯
어보라고 일렀건만...."
서두르는 꼴이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까 이야
기한 왕의 편지 때문인 듯 했다.
곧바로 뒤쫓아온 기뷰온이 당황해 변명을 늘어놓는다.
"정말 죄송합니다. 신은 충심으로 함부로 편지를 보지 않았는데...."
"됐어. 그런 변명은 필요 없으니까, 어서 말이나 대령해. 수도까지 이
틀이면 그다지 무리도 아니니까. 말을 달리면 하루하고 반나절이면 도착
할 수 있는 거리야. 지금 출발한다면 하루의 여유를 두고 닿을 수 있
어."
어느덧, 말이 여섯 마리 준비되었고, 파이러스와 유리카, 모노가 각각
한 필에 몸을 실은 채 성을 빠져나갔다. 모든 일이 쉴틈없이 이루어졌기
에, 나는 위에서 바라보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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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음.... 또 무투회냐?;;;; 통산 세번째로 써먹는 무투회군...;;;
물론, 제대로된건... 한번뿐이었지만..;;;;
그럼...;;;
아그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