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지명유래(地名由來)-개곡 1. 2리(開谷里)
개곡리(開谷里)는 크게 개곡1리지역인 개곡 또는 개이동과 개곡2리지역인 대성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곡리(開谷里)는 동대산맥의 마루금인 성령(‘바디령재’라고도 하며, 현지에서는 ‘가뫼골재’라고도 한다)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항상 맑은 물이 흐르며 넓은 들판을 안고 있는 천혜의 마을이다.
남쪽으로는 입실리에 맞닿아 있고, 북쪽에는 말방리, 서쪽에는 연안리와 이웃하고 있다. 동쪽은 동대산맥을 사이에 두고 양남면 효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깊은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라 ‘개곡(開谷)’이라고 했다는 이 마을은 예로부터 비옥한 토질과 풍부한 물로 질 좋은 쌀을 생산해 왔다. 2003년부터는 ‘부농쌀작목반’을 결성하여 우렁이농법으로 친환경 쌀 생산에 노력하고 있다. 최근 개곡1리의 ‘쉿골’입구에는 쉿골과 성지골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농업용수로 활용하기 위해 100만 톤의 물을 담을 수 있는 개곡저수지 (開谷貯水池)공사가 한창이다. 2007년도에 저수지가 완공되면 이 일대 들판에 안정적인 물 공급이 가능할 것이다.
개곡리(開谷里)에는 또 7번 국도에 인접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최근 공장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현재까지 44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연안리(淵安里)의 동쪽에 있는 ‘개곡’이 개곡1리, 개곡 서북쪽의 ‘대성’이 개곡2리를 이루고 있으며, 주로 벼농사와 축산업으로 한우 700여 마리가 사육되고 있다.
개곡1리는 아파트를 포함해 307가구에서 822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이중 남자는 406명, 여자는 416명이다. 개곡2리는 98가구에 남자 127명, 여자 124명으로 251명이 생활하고 있다.
개곡리(開谷里)는 보기 드문 충효의 마을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견천지, 오경우, 이눌, 김응하, 오심, 오열, 김흡 등 많은 의사(義士)들이 분연히 일어났던 충의의 마을이다.
또한 이 마을은 지극한 효심과 3년간의 시묘(侍墓)살이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효자(孝子) 오무용의 이야기로 유명한 마을이기도 하다. 효자 오무용은 강원도 영월에 살다가 어머니가 고향으로 가자는 말 한마디에 가산을 모두 정리하고 고향에 내려와 살았다. 봄·가을로 어머니를 업고 들 구경을 시키는 효자였으며, 1959년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을 꼬박 시묘살이를 했다. 3년간 머리를 감지 않아 머리가 나무뿌리처럼 뻣뻣했다고 한다. 효성에 감복한 범(호랑이)이 그를 태우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지금도 그가 시묘살이 했던 곳에 집터가 남아 있다.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해 효자 오무용을 표창하고 격려금을 전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주민들에 따르면 대통령의 하사금(下賜金)으로 집안이 일어나고, 아들이 취직이 되고, 어렵던 집안이 폈다고 한다. 또 이 마을은 주민숙원사업(住民宿願事業)이 없는 마을로 소문이 나 있기도 하다. 다른 마을에서 한 만큼은 다 했기 때문에 특별히 주민들의 불만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개곡리(開谷里)는 또 인물 많기로 단연 돋보여 요즘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있다.
외동읍 개곡리 위치도
2006년 현재 오도필(83·전 천북초등 교장), 오병학(80 부산 계림화학), 오민필(72·전 울산정보고 교장), 오보필(72·전 감포읍장), 견학필(72·전 경성대 대학원장), 오상필(71·부산 동광목재), 최병훈(71·전 신라고 교장), 이수일(71·전 구로구의원), 오용문(66·전 계림초등 교장), 오진필(63·전 대구시의원), 김치행(63·경북도의회 사무처장), 오용찬(60·경주시농업기술센타 소장), 김문조(55·예비역 육군준장), 견종필(40·인천지법 판사), 오선희(35·서울고법 판사), 최호식(38·포항지원 판사), 이상조(50·경북보건환경연구원)씨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이들 중 개곡1리 출신 김문조 예비역 육군준장은 연안초등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 2006년 제3군수지원사령관직에서 예편되었다. 개곡리(開谷里)의 자연부락과 명소들을 살펴본다.
[개곡(開谷)] 개곡1리에 소재하는 부락으로 지난 1492년경 당시의 영천(永川) 신녕에 살던 해주인 견중근(堅重根 신녕현감)이 머루와 다래넝쿨을 치고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뒤에 경주부 천북 모아에서 대호군(大護軍) 오두원(吳斗元)이 이곳으로 이거(移居)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처음에 ‘개국(開局)’이라 불렀으나, 150여 년 전 해주견씨, 고창오씨, 김해김씨, 청안이씨, 학성이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서 마을이 깊은 골짜기를 끼고 이루어졌다고 ‘개곡(開谷)’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마을 동편에 쇠가마가 있어 ‘부동(釜洞)’ ‘개부동(個釜洞)’이라 불렀고, 조선 초기에는 손님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빈자촌(賓者村)’이라 불리다가 일제시대에 ‘개곡(開谷)’으로 고쳐 불렀다고도 한다. ‘낙의재실기’, ‘송호실기’등에는 ‘개곡(開穀)’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대보름에 동제(洞祭)를 지낸다. 당목(堂木)은 마을 가운데 있는 당집 옆에 선 50년생 느티나무다. 본래 이곳에는 오래된 회나무가 있었으나 6.25전쟁 때 미군(美軍)들이 사격연습을 하여 나무가 말라 죽었다고 한다.
[대성(大城)] 개곡2리에 소재하는 마을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적을 막기 위해 큰 성(城)을 쌓기로 계획한 곳이었다고 하여 ‘대성(大城)’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옛날 어떤 사람이 이 마을에서 크게 부자가 되었다고 하여 ‘대성(大成)’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외동휴게소가 있는 국도변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가야재(伽倻齋)] 옛날 이곳에는 고창오씨(高敞吳氏) 종중에서 세운 강신재(講新齋)라는 성당이 있었으나 오래되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고창오씨(高敞吳氏) 후손들이 1961년도에 새로 세운 재실이 있다. 4칸 맞배지붕으로 최근에 덧창을 설치하고 축담을 시멘트로 새로 단장해 놓았다. 개곡1리 56번지에 있다.
[오체정] 경주인 이규태(李圭泰)의 5형제가 우애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로 1958년에 3칸 2칸의 팔작지붕으로 세웠다.
[회헌정(悔軒亭)] 개곡에 사는 김해김씨(金海金氏) 후손들이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1965년에 지은 정자다. 4칸 접집에 팔작지붕을 얻었고 솟을삼문을 세웠는데 지금은 그중 동쪽 문과 담장이 허물어져 있다.
[죽계사(竹溪舍)] 임진왜란 의사(義士)이며 조선 선종 때 현감(縣監)을 지낸 김영인 김흡(金洽 1550~)을 추모하여 2004년 6월 금녕김씨 죽계공파 후손들이 지은 사당이다.
[백운암(白雲庵)] ‘가라골’에 있던 암자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義兵)들의 군량미(軍糧米)와 병기를 비축하고 ‘누름진평전’에서 결진(結陣)할 때까지 군사기지 역할을 하였으나, 왜적(倭敵)들의 습격으로 소실되었다.
[누름진평전] 가뫼골의 중심 평원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견천지(堅川至), 오경우(吳敬友), 이눌(李訥), 김응하(金應河), 오심, 오열(吳悅) 등 의사(義士)들이 이곳에 모여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함께 무예를 익힌 곳이라 하며, 견천지 의사는 의병 500명을 이끌고 기박산성으로 가서 울산 의병들과 합진(合陣)하였다고 한다.
[가라골] ‘쉿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다래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추곡(楸谷)’이라고도 한다. ‘신산등’, ‘시이골(때때골)’, 은행수등, 안산등, 삼시곡, 소암자곡, 독자곡 등의 골짜기가 있다. 견씨(堅氏)의 문중산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병사들의 훈련기지였다고 한다.
[암자골] 백운암(白雲庵)이 있었던 골짜기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군량미와 병기 등을 보관하였다고 한다. 임란 때 병사훈련기지였다.
[불선골] 불을 밝히고 치성을 드리면 소원 성취된다고 하는 골짜기로 ‘가라골’ 남쪽에 있다.
[성짓골] ‘개곡(開谷)’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쉿골] 개곡(開谷)에서 가장 큰 골짜기로 ‘가매골’ 북동쪽에 있다. 이 골짜기를 중심으로 개곡저수지가 들어서고 있다.
[중산] ‘쉿골’ 안쪽 등성이로 스님들의 다비식을 했던 자리로 이곳에는 불에 검게 탄 흙이 있다고 한다.
[가뫼골] 개곡(開谷)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가마골’, ‘부곡(釜谷)’이라고도 한다. 이 골짜기에 ‘약물내기골’, ‘놀기미골’, ‘대성골’, ‘절테골’, ‘마시미기’, ‘누름진평원’ 등이 있다.
[평풍골] ‘소붓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골짜기가 병풍을 두른 형국이다.
[한삼밭골] ‘평풍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영지 바른 곳에 집터가 있었다고 ‘집테양달’이라고도 한다.
[가뫼골재] 개곡(開谷)에서 경주시 양남면(陽南面) 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서(古書)에서는 성령(筬嶺) 또는 ‘바디령재’라고도 한다. ‘가뫼골’ 위에 있다.
[개야골] 마을 동쪽 ‘가야산’에 있는 골짜기로, 재실인 가야재(伽倻齋)가 있다.
[재탯골] 절이 있었던 골짜기라 하여 ‘절탯골’이라고도 부르며, ‘불선골’ 북쪽에 있다.
[고지골산] 지금은 공장지대가 들어선 산으로 속명은 ‘지선’이라고 한다.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주거한 흔적이 있으며, 돌도끼,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되었다.
[낙뫼골] ‘솔선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현재 마을 동산이다.
[방아선골] ‘낙뫼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놀기미기] ‘큰모밭’ 남쪽에 있는 고개로 노루가 많이 서식하였다고 한다.
[두북골] 마을의 뒤쪽에서 ‘순못’ 밑에 걸쳐 있는 들판 이름이다.
[뒤깔밭] 개곡(開谷)의 뒤쪽에 있는 갈밭으로 본래 띠풀이 무성한 황무지 야산을 일부는 개간하였다. 7개 문중이 참여한 계중산(契中山)이었으나 지금은 분할했다.
[마시미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곳에서 군마(軍馬)를 먹였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멎절들] 개곡(開谷) 북쪽에 있는 들로, 원사평(遠寺坪)이라고도 한다. 절이 있던 곳으로 탑 개석이 마을 앞까지 떠내려 온 것을 한 때 마을 표시(4H) 돌로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는 국립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밸못] 배 모양으로 생긴 못으로 ‘배못’이라고 불리다가 ‘밸못’이 되었다. ‘대성들’ 일부와 ‘장구시미들’에 농업용수(農業用水)를 공급했으나 덕동댐 물이 공급되면서 못이 없어졌다. 현재는 경지정리로 논이 되었다.
[개못] 개곡(開谷) 북쪽에 있는 못으로 2001년 농지정리 때 없어졌다. 지금은 덕동댐 물을 쓴다.
[보름이] 개곡(開谷) 동남쪽 언덕 위에 있는 들로 지금은 공장이 많이 들어섰다.
[숯못] ‘개못’ 북쪽 ‘뒤깔밭’ 앞에 있는 못으로 1991년 글래디스 태풍 때 붕괴되고 말았다.
[장구시미] 장구소리가 났다는 들판이름이다. 조선(朝鮮)시대 이 마을 김순(金筍)이라는 장사가 죽어 장구시미 뒷산에 묻었는데, 이때 들판에서 장구소리가 나서 가보니 용천수(湧泉水)가 솟았다고 한다. 이 물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사시사철을 그침이 없었다고 한다. 김순(金筍)은 인근 말방(末方)에 동창(東倉:면사무소)을 지을 때 얼마나 힘이 세었던지 혼자서 하루만에 그 많은 건축 자재를 다 옮겼다고 한다.
[용천(湧泉)] ‘중마을’ 대보둑 밑에 있는 샘으로 깨끗한 찬물이 늘 솟아난다. 옛날에는 이물을 식수 사용했으나 지금은 빨래터로 사용하고 있다.
[약물내기] 약물이 났다고 하는 골짜기로 ‘큰모밭골’ 남쪽에 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늘 같은 량의 물이 나오고 있다.
[택구바댓들] 개곡(開谷) 서쪽에 있는 들로, 마치 토끼처럼 생겼다고 하여 ‘토끼평’이라고도 한다. 마을 뒷들이다.
[황새밭] 마을 밑에 있는 들로, 황새가 많이 날아온다. ‘용천’ 아랫들을 말한다.
[개곡쉼터] 이 마을은 마을회관 일대에 800여 평의 넓은 마을공원을 1987년에 조성하여 마을 주민들의 쉼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외동읍 개곡리 개곡쉼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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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좀 지난 글이나...언제 봐도...언제 알아도...언제라도 알고 있어야 될 것들이라 생각되어 좀 옮겨다 놓앗습니다. 계속 이어서 옮겨놓으면 좋으련만.....
역사책에서 못보던 숨은 엿를 발굴하신 선배님께 깊은감사를 드립니다,..어렷을때는 그깟역사 좀 모른들 어때,역사가 밥미게주나 켓는데 지급메와서 귀중함을 느낍니다,.선조들의 업적이나 쇳골을 만든 지혜를보면 자랑스럽고 어께가 우쭐해지며 자부심을 갖게 합니다,..후손들이 귀한 역사를 잘 살려서 보존하며 자부심을 키워 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