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하얀 에그 스탠드에 반숙한 달걀을 올리고 하얀 커피잔에 갓 내린 커피를 천천히 따른다. 마치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 양 진중하고 엄숙하게 행동하는 한 남자(레이프 파인즈 분). 하지만 서류 더미가 있는 책상에는 커피잔만 갖고 오는 것으로 보아 삶은 달걀은 그의 몫이 아닌 것 같다.
그때, 지난 밤 그와 함께 밤을 보낸 것으로 보이는 여인의 뒷모습이 전라의 상태로 스크린에 비춰진다. 곤히 자는 것 같아 깨우지 않았다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아침을 같이 먹기 싫어서겠지”라는 대답을 던진다. 그들 사이에서 진정 차가운 건 남자일까, 여자일까? “달걀 반숙해놨어. 같이 먹기 싫으면 그랬겠어?” 남자는 다정하게 말하지만 어깨 너머로 보이는 그의 공간을 보면 주인이 한치의 빈틈도 없는 남자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책상 뒤의 벽면 가득한 책꽂이에 한 권도 흐트러지지 않고 가지런히 꽂힌 책들, 위아래로, 또는 옆으로 정렬해 벽에 걸린 흑백 작품들은 모두 그 간격이 꼭 자로 잰 듯 동일하다. 게다가 이 집의 부엌과 거실, 서재의 가구와 조명, 소품들은 대부분 약속이나 한 듯이 네 가지 색의 영역 안에 있다. 블랙, 화이트, 실버, 그리고 자연 그대로의 나무 색. 군데군데 나무를 사용한 덕분에 차가워 보였을 공간에 그나마 생기가 돈다.
침실에서 바스 가운을 걸치고 나오는 여자 뒤로 보이는 의자는 ‘아르도이 체어(Hardoy Chair)’다. 가늘지만 단단한 철제 다리에 온몸을 포근하고 유연하게 감싸주는 양가죽 시트가 올려진 이 의자는 스웨덴 브랜드, 라 마리포사(La Mariposa)의 제품이다.
1938년에 디자인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현대적이고 유목민의 텐트 안에 놓여 있을 것 같은 자유로움마저 느껴지는 노매드 스타일(Nomad Style)의 이 의자는 온통 직선적인 그의 집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이 의자는 버터플라이 체어, 그러니까 나비 의자로도 불리는데 아마 시트의 사방이 살짝 위로 솟은 모양이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편 모양 같아서 그런 별명이 붙었을 것이다).
여자가 집을 나간 후 남자는 텅 빈 침대를 바라본다. 천장과 바닥이 온통 하얀 침실에는 잿빛 침구가 깔린 커다란 침대와 스탠드가 있는 나무 탁자뿐, 아무것도 없다. 남자는 그렇게 정리되지 않은 침대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본다. 무척이나 여리고 슬픈 눈빛으로. 이런 눈의 남자가 빈틈 없이 반듯한 인테리어를 한 집의 주인이라니 아이러니하다.
침실을 바라보던 눈빛 그대로 창 밖 어딘가를 내다보던 남자는 어느새 1958년, 서독에서 비를 맞고 있는 한 소년(데이빗 크로스 분)과 오버랩된다. 아마도 그 소년은 남자의 과거일 터. 어느 건물에서 잠시 비를 피한 소년은 무슨 영문인지 구토를 하기 시작하고 그 건물에 사는 한 여인(케이트 윈슬렛 분)이 우연히 그를 도와 집으로 데려다 준다. 어느새 비는 눈으로 바뀌었다.
집에 돌아온 소년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히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한다. 소년의 집은 고풍스러운 앤티크 스타일로 꾸며져 있다. 바닥에는 클래식한 패턴의 두툼한 카펫이 깔려 있고 식탁 위에는 하얀 식기에 소박한 음식들이 놓여 있다. 독일식 가구는 직선적인 형태가 많아 남성적인 느낌이 드는데 이 집의 가구들은 세부 장식들이 꽤 많아 프랑스 가구처럼 여성스러워 보인다.
테이블 위에 얌전히 깔린 작은 꽃무늬 자수의 테이블보와 창에 걸린 레이스 커튼, 벽에 걸린 골드 프레임의 잔잔한 풍경화와 장식장에 올려진 작고 단아한 장식품들도 그 분위기에 일조하고 있다. 며칠 후, 비 오던 그날의 심상치 않던 징후는 성홍열로 밝혀진다. 전염병인 탓에 소년은 몇 달 동안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자신이 수집한 우표를 뒤적이며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소년의 나무 책상 옆 벽에는 블랙 스틸 프레임과 나무 패널로 구성된 선반이 걸려 있는데 스웨덴 브랜드 스트링(String)이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네덜란드 브랜드 토마도(Tomado)의 제품으로 보인다. 스트링은 최근에도 새로운 제품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토마도 선반은 간혹 이베이(Ebay)에서 거래될 뿐 유럽 빈티지 마켓에서도 찾기 힘들 정도로 희귀하다.
병세가 호전되자 소년은 가장 먼저 꽃 한 다발을 들고 자신을 도와준 여인을 찾아간다. 인기척을 하며 대문을 열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문은 이미 열려 있다. 사실 얄팍한 유리 문이라 닫혀 있었다 해도 그리 견고해 보이진 않았겠지만. 그녀의 집은 대문을 열면 작은 부엌과 욕실이 먼저 보이는 독특한 구조다. 욕실과 부엌은 배관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작은 욕조도 파티션 하나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혼자 사는 집이어서 그런지 얇은 꽃무늬 샤워 커튼으로만 욕실 쪽을 가려놓았다.
길고 커다란 창마다 붉은 리넨 커튼을 걸었는데 커튼을 걷지 않았는데도 반투명한 소재 때문에 아스라한 햇살이 집 안에 스며들고 있다. 붙박이 나무 장을 비롯한 집 안의 가구들은 색이나 장식 하나 없이 투박하기만 하고 그나마 작은 꽃무늬 벽지와 레이스 베개가 여성스러운 아이템이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붉고도 가느다란 햇살이 이 집에서 볼 수 있는 색의 전부다.
고상한 앤티크 가구로 가득한 소년의 집과는 영 딴판이다. 여인은 다림질을 하려던 참이었나 보다. 무슨 영문인지 예상치 못한 방문자임에 분명한 소년의 등장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오히려 마치 올 거란 걸 짐작했다는 듯이 투박하게 굴고 있다. 그녀의 흐트러진 침대며 욕조를 슬쩍 훑어보던 소년의 눈빛은 어느새 그녀가 다리고 있는 브래지어에 닿는다. 출근할 거니까 함께 나가자며 옷을 갈아입을 테니 나가 있으라고 무심하게 말하는 그녀. 하지만 혈기 왕성한 사춘기 소년이 얌전하게 기다릴 리가 없다. 그는 옷을 갈아입는 그녀를 훔쳐보다 서로 눈이 마주치고 만다.
왠지 부끄러워진 소년은 그대로 밖으로 내달린다. 하지만 왠지 모를 끌림은 그를 다시 그녀의 집 앞으로 가게 만든다. 그날 오후, 붉은 집에서 짧고도 긴 만남을 가진 후 돌아온 소년은 여느 때처럼 가족들과 똑같이 저녁을 먹고 있지만 어쩐지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아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소년에서 어른으로. 그 이후로 두 번을 더 만난 후에야 그들은 서로 통성명을 한다. 소년은 마이클, 여인은 한나.
이제 소년의 하굣길은 자연스레 한나의 집이 목적지다. 마이클이 독일어 시간에 배우는 희곡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한번 읽어보라는 마이클에게 한나는 읽어달라고 한다. 그날 이후로 사랑을 나누기 전에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이 이 은밀한 만남의 수순이 된다. 호머의 〈오디세이〉부터 안톤 체호프의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까지, 그들의 독서 리스트는 나날이 늘어만 간다.
이제 그들만의 방식과 언어를 가지는 사이가 됐지만 어쩐 일인지 한나는 마이클에게 여전히 차갑다.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냐”라는 말도 서슴없이 한다. 마이클 외에 다른 사람은 발을 들여놓지 못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자신만의 성지 같은 한나의 집에 연인처럼, 아니 연인으로 출입하는 마이클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한나가 그럴수록 마이클은 “당신 없이는 이제 못 살 것 같아요”라며 비 맞고 돌아온 강아지처럼 그녀의 품을 파고든다. 그럴 때면 별 볼일 없는 공간인 한나의 집은 그에게 포근한 낙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어느 날 그녀는 꿈처럼 멀리 떠나고 없다.
그 순간, 늘 작은 모서리 정도에 집중하던 카메라는 처음으로 그녀의 집을 가장 넓은 앵글로 비추는데, 이렇게 넓은 공간이었나 싶다. 문득 카메라는 그동안 공간에 집중한 게 아니라 두 연인에게 집중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이 떠나고 나머지 한 사람만 홀로 남은 이 상황에서 더 이상 이전의 집중 같은 건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는 모든 생각과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로 텅 빈 그녀의 침대에 하염없이 누워 있다. “돌아올 줄 알았다”는 소년의 아버지의 말로 짐작하건대 그 시간이 하루 이틀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제 마이클은 변호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남부럽지 않게 꾸며진 집에 사는 남자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붉은 커튼을 한 그녀의 집 침대에 홀로 누워 있던 그 시간을, 그는 기억한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일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화는 그 후로도 많은, 어쩌면 과거보다 더 깊은 일들을 스크린에 펼쳐놓는다.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무척 어렵게 두 사람이 서로를 목도하는 순간도 그 말미에 있다. 그들이 그렇게 만나기까지 벌어지는 수많은 찰나와 말들을, 그리고 ‘이유 있는’ 공간들을 관객들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마음에 녹진하게 남을 그 장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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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