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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명이 가고 나서 김달삼은 그에 대한 이력은 간단히 소개했다.
“그는 연안파 김무정 장군의 부관이오. 원래 중국에서 김원봉 장군의 휘하에 있다가 대장정까지 참여한 몇 안 되는 조선인이오. 김원봉 동지의 소개로 알게 되었는데 우리와는 격의 없이 지내는 관계가 되었소. 믿을만한 사람이니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오…”
수십 명씩의 대원을 태운 다섯 대의 트럭이 밤새도록 달렸다. 첫 번째 트럭을 낙준이 몰았다. 훈련소에서 틈틈이 차량 운전을 배웠다. 엔진이 꺼졌을 경우 시동 거는 법, 그 밖의 간단한 정비도 배웠다. 김달삼은 장거리 운전을 낙준에게 맡겼다. 어두운 산길을 운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길 같지 않은 길을 달릴 때는 등골이 오싹했다. 산허리를 끼고 도는 길은 잠시 한눈 팔면 낭떠러지로 구를 수도 있었다. 그가 인도하는 대로 운전해 나갔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돌고 돌아 몇개의 검문소를 지나 도착한 곳은 산세가 우람한 산악지대였다. 뿌연 먼동을 깨치고 떠오르는 태양에 산은 봄기운을 타고 푸르게 자라기 시작했다. 연록의 숲 사이로 연분홍 꽃들과 어디서나 흔히 보는 노란 개나리꽃이 겨울을 털고 일어서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생명체 같았다. 야산 어디에서나 흔히 보던 봄의 풍경이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생경해 보였다.
아침 안개 사이로 솟아나는 봄을 보며 낙준은 스스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 멀리 연록의 숲을 밀치고 수려한 봉우리가 솟아나 있었다. 봉우리 응달진 곳에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모습이 한폭의 풍경화를 이루었다. 한 대원이 손가락을 가리키며 비로봉이라고 말했다. 봄을 가득 머금은 수려한 산, 바로 금강산이었다.
대원들은 재빨리 산개해 숲속으로 이동했다. 김달삼은 산개하기 전 마지막 지시사항을 하달했다. 이곳이 여전히 38선 이북 지역이지만 어느 민간인의 눈에도 띄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분대 단위로 나뉜 대원들은 각자 목표지점을 확인한 후 흩어지기 시작했다.
왼쪽으로 동해를 끼고 종주할 때는 야행을 해야했다. 비록 이곳이 북한 땅이지만 게릴라 대원들의 이동경로를 밝히는 우를 범하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치도 가름할 수 없는 어둠에서 보이는 건 앞에 이동하는 대원의 모자 뒤에 색칠한 형광색뿐이었다. 그 희미한 색을 등대 삼아 발바닥은 곤충의 촉각이 되어 신속하게 움직였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행군을 멈추었다. 분대 단위로 흩어졌던 대원들이 약속한 지점으로 합류했다. 간단한 점검을 마친 후 날이 밝을 때까지 수면이 허락되었다.
대원들은 서너명씩 서로의 등을 의지해 잠을 청했고, 어렵지 않게 잠의 늪에 빠졌다. 어슴푸레한 새벽에 깨어나 보니 눈앞에 커다란 암벽들이 펼쳐졌다. 한 대원이 대청봉이라고 말했다. 어느덧 그들은 설악산 계곡에 들어와 있었다. 다시 설악산을 끼고 남쪽으로 향했다. 한참을 가다가 산등에 올라 보니 저 멀리 푸른 바다가 보였다. 목표지점에 이르러 분대 단위로 산개해 걷던 대원들이 차례대로 모이기 시작했다. 조별로 간단한 점검을 마친 후 김달삼이 앞에 나섰다.
“동지들, 여기서부터는 38선 부근이요. 언제 남반부 군경과 조우할지 모르오. 각자 대원들을 확인한 후 낙오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오.”
각자 지도에서 위치를 확인했다. 그들의 3차 집결지는 오대산 사령부였다. 그곳에 일찌감치 진지를 구축한 빨치산 아지트 중 하나가 있는 곳이었다. 김달삼의 이번 남하의 주목적 중 하나는 태백산맥 근처에 활동하는 하준수 부대에게 유격 대원을 보충하고 군자금을 전달하는 작전이었다.
김달삼과 하준수는 각별한 인연으로 얽혀 있었다. 두 사람은 일본 중앙대학에서 같이 수학한 동문이었지만 당시는 서로의 존재를 몰랐다. 하준수는 일찍이 일본의 강제 징병에 반발해 학교를 중퇴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과 함께 보광당이라는 조직을 규합해 일제에 항거했다. 합기도 등 무술에 능한 그의 활약상은 마을과 마을을 돌아 고향에까지 알려졌다.
해방 후 그는 고향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고 곧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에 참여하며 여운형과 인연을 맺었다. 그런 연유로 하준수는 처음부터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에 동화된 인물이 아니었다. 한때 서울에서 여운형을 도와 정치 일선에서 활동했지만 여운형 사후, 그는 우익의 테러에 항거한 열혈 청년이 되었다. 결국 미군정과 당국에 의해 급진주의자로 낙인찍히고 월북하였다.
그에 비하면 김달삼은 일찍부터 공산주의 혁명에 뛰어든 정통 남로당원이었다.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 공산주의 사상을 가르치며 정통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다. 곧이어 그는 장인의 뒤를 이어 남로당 제주도 지부장이 되었다. 제주사태 때 미군정과 토벌대에 대항해 유격전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하준수는 일제 때 정식으로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한 독립투사인 반면, 김달삼은 일본 예비사관학교 출신의 일본군 장교였다. 장인으로 인해 공산주의 혁명에 개안한 후 열렬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두 사람의 상반된 이념은 비슷한 시기에 월북하여 동지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두 사람은 강동정치학원에서 유격대 특별 교관으로 있으며 남다른 친분을 쌓았다.
그 후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강릉, 인제를 거쳐 대구 팔공산에 이르는 빨치산 세력을 구축하여 왔다. 작년 가을부터 그들이 삼팔선을 번갈아 넘나들며 지리산 빨치산과는 별개로 태백산 인근에 인민유격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지리산과 태백산을 양분하여 유격 활동을 전개하고 궁극적으로 남한을 무장투쟁으로 전복한다는 원대한 전략이었다. 비록 이들 빨치산이 박헌영 휘하의 남로당 조직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북한의 김일성조차 대외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월북 후 노동당 서열 2위를 차지한 박헌영이었지만, 남로당을 기반으로 한 박헌영의 정치적 입지는 점차로 위축되어 갔다. 남로당 고위층에서는 이같은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조선로동당에서는 지리산의 이현상을 제 2병단 사령관에, 김달삼을 제3병단 사령관에 임명하고 하준수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 같은 조치는 남로당의 위계와는 다른 조치였다. 남로당 안에서는 여전히 이현상이 남한 유격대 총사령관이었다. 이런 위계는 남로당 안에서 통용되는 실질적인 서열이 되었다.
<계속>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
헉...
설악 대청까지 밤새 내려오다니!
그 험악한 지형을 그것도 밤에 ㅠ
앞으로 펼쳐질 활동들이
그 어려움들이 눈 앞에 아른 아른
그저 함께 마음이 이리저리 동합니다~~
고맙습니다
울 카페 홧팅!
1. "아침에 한시간이라고 공부하라. 해마세포를 죽이지 말라." 90이 넘어도 짱짱한 이시형 박사의 말이다. 그 양반은 젊은 시절 미군부대 의사를 했다. 미군부대 잔반을 한국인들이 끊여 먹는다는 말을 미군군목에게 하고, 군목은 직접 시장에 가서 그 음식을 맛 보았다.
그리고 사령관에게 가서 보고 하고 전 미군부대에 이런 공문이 나갔다. "한국인들이 다시 먹으니 이쑤시개같은 거 버리지 말고, 깨끗하게 먹을 것."
2. 식당을 하는 선배와 후배가 대화를 했다. 실화다.
식당선배: 미국에게 고마와할 것 없어. 모두 자기들 이익 때문에 도와준거야.
후배: 그러면 선배는 식당에 오는 손님 안 고맙네. 모두들 배고파왔지 형도와 주기 위해서 온 것 아니잖어?
식당선배: .....
3. 오늘 새벽 나는 미국의 경제 대공황의 처절한 상황을 파헤친 책을 읽었다. <The Hungry Years>
1930년대의 스토리. 그들이 참전한 것이 1950. 경제공황은 1930년대 계속 관통을 해서 1930년대 말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전쟁특수로서 배고픔의 시대가 끝난다.
그러니까 한국에 왔던 미군 어린 미국 병사들은 어렸을 적에 배고픔의 고통을 처절하게 경험한 사람들일 것이다.
1930년에 태어나면 1950년에 20살이니 징집됐네.
미국도 말단 육군은 가장 낮은 계층의 자식들로 이뤄진다. 귀족층은 아예 빠지든지, 장교 혹은 행정쪽으로 가는 것이고. 남북전쟁 때는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합법적으로 군대 안 갈 수도 있었다.
4. 밤에 일찍 잠드니까 새벽에 깨게 된다.
"나는 오늘 새벽 슬픔으로 가는 길을 홀로 걸으며
평등과 화해에 대하여 기도하다가
슬픔이 눈물이 아니고 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저 새벽별이 질 때까지
슬픔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말라.
슬픔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으며 기도하라
슬픔의 어머니를 만나 기도하라."
5. 그 때 미군들의 풍요로움을 철조망 넘어로 구경한 가난했던 백성들은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넘어왔는지 전혀 상상되지 않았을 것이다.
책의 장 제목들이 심각하다. "재난의 경계선" "희망의 공동묘지" "자급자족이라는 춤" "천천히 닥아오는 운명"
새벽에 깨게 된다.. 공감 엄지척 ^^
미국의 궁핍에 대한 다큐들을 보며
기브미쪼꼬렛.. 외치던 맨발의 한국아이들
그들에게서 느꼈을 궁핍했던 미국청년들의 기시감을 봄..
한 시간 열공 중입니다~~^^
6. 식당 선배는 미국이 자기들 이익 때문에 한국에 도와주러 온 것이다란 주장을 했고, 사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 의문은 1950년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면 어떤 이익이 있었을까?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익될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식당선배 집에 찾아가서 막걸리 한잔도 마실겸 물어보고 싶다. 내가 모르는 참신한 이유가 있는지...
전투에서 서로 대치하게 되면 방어선을 형성하고 되도록 최단거리 방어선을 만들려고 한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미국측은 한국을 소외하고 일본열도를 방어선으로 생각했다. 방어선이 오키나와까지 일직선으로 나오고 육군이 부딪힐 일이 없이 해군과 공군으로만 방어가 가능하다. 육군을 피하는 이유는 사상자가 많이 나오니까. 물자와 기술력으로 승부보려고 하는 것.
그것이 애치슨 라인이다. 그 방어선에서 한국이 제외되면서 북한 남침을 불러왔다고 하는 것은 뻥이다. 일성이는 그 라인을 선언하기 전에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에게 살살 대면서 남침 허가를 이미 받은 상태다.
7. 일성이는 왜 남침했나? 그것은 반에서 힘센 애가 힘약한 애를 괴롭히는 것과 같다. 아무 이유없다. 그냥 해도되니까 하는 것이다. 이길 것 같으니.
8. 미군 방어 계획에도 우리나라는 없었고 개전초 밀리면서 바로 포기 모드로 들어갔다. 그것을 워커 장군의 낙동강 분전으로 막아내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서 밀고 올라가고, 모딱똥이게 밀리면서 다시 포기 모드로 들어가서 철수하려고 했는데 난데없이 릿지웨이 장군이 나타나서 역전시키고 대한민국이 살아남는다.
워커장군은 성격이 급해서 운전병에게 과속을 늘 요구하고 빙판길에서 사고 나는 바람에 전사한다. 그를 기념한 것이 워커힐이다.
릿지웨이 장군은 <밴드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미군 공수부대 사령관으로 2차대전에 활약한 맹장. 밴드오브 브라더스는 101사단, 릿지웨이는 82사단장. 늘 가슴에 수류탄 두개를 매달고 다녀서 유방장군이란 별명. 영어로는 조금 다른데 대충 그런 뜻이다.
사단장으로 직접 적진에 낙하해서 소총으로 독일군과 싸우고 관통상 입고 출혈을 하면서도 후방 후송 거부, 몇일을 싸워낸 용감한 장군.
그가 맥아더도 철수하려고 한 한국전에 투입된 것은 대한민국의 운. 그를 한국을 구한 장군이라고 한다.
9. 애친슨 라인에도 제외되어서 한국 방어가 미국 국익이 보탬이 되지 않는데 왜 5만명이 죽으면서 참전했는가? 그것은 미국 국익이 걸린 것은 맞는데 한국이 아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유럽은 이태리, 그리스내전, 독일분단 등으로 공산주의 세력의 개입으로 극한 혼란에 빠진 상태에서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침입이 일어난 것. 유럽의 모든 나라가 미국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에 이목이 집중되고, 만약 미국이 한반도 포기하면 유럽도 포기할 것으로 간주, 소련이 노골적으로 유럽에 작업을 걸 것을 우려한 상황.
그래서 미국이 참전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유럽에게 우린 이렇게 공산주의를 막는 보루라는 것, 인명 손실을 감수하고 희생하면서 참전한 것은 유럽 때문.
10. 한국전에 대해서 미육군이 내린 정의는 아직까지 너무 유명해서 베트남전까지 그것을 끌어다 쓴다.
The wrong war, at wrong place, at wrong time. 브래들리 장군. 1951 의회 증언.
11. 한국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는 채로 여러가지 국제관계가 얽혀서 미국과 우리의 인연이 지금까지 연결되었다.
이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 도움없이 잘 지켜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