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동 풍선
조 정 은
내가 여섯 살쯤이었을까. 아랫집으로 나나 네가 이사를 왔다. 나나 네는 읍내서 포목점을 했는데 엄청나게 부자였다. 정원이 우리 집 텃밭만이나 했고, 간간히 택시도 불러오고 축음기도 있었다. 나나엄마는 화투를 좋아했다. 십리사탕(하얀색 단단한 눈깔사탕인데 입 안에 넣고 녹여 먹으면 십 리를 가도록 먹을 수 있다고 해서 고향에서는 그렇게 불렀다.)도 많이 가지고 있어 가끔씩 내게도 주었다.
엄마랑 아버지는 읍내 노점에서 사과 장사를 했다. 그날 비가 와서 엄만 장에 가지 않았다. 공연히 들뜨고 신명이 나 어깨를 우쭐대며 사립문을 나섰을 때, 아랫집 나나엄마가 나를 손짓해 불렀다.
“느이 엄마 좀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해라.”
다소 쌀쌀맞은 목소리였지만 난 그녀가 내게 말을 붙여 준 게 마냥 반가웠다. 이사 온 그 집에 한 번 가보고 싶었지만 마당에 송아지만한 시커먼 개가 으르렁거려서 그때까지 얼씬도 못해봤다. 옳지,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손을 잡고서 쉭쉭 그 커다란 개에게 흙덩이를 던지면서 잔디가 깔린 정원을 지나 파란 대문 안으로 들어갈 일을 상상만 해도 근사했다. 그러면 나나도 더 이상 나를 깔보지 못할 것이다. 엄만 이불 호청을 꿰매고 있었다. 나나 엄마의 말을 전했더니,
“흥! 첩년 주제에 뉠 오라가라 건방을 떨어. 내 원 참 눈꼴셔 못 보겠네.”
혼자 두런거릴 뿐 쉽게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낭패였다. 졸라봐야 야단만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사립문 밖만 종일 들락거렸다. 한나절이 지나서야 나나엄마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녀는 아침나절의 일을 까맣게 잊은 듯이 동네 아줌마들과 어울려 즐겁게 떠들면서 이웃집에서 돌아오고 있었는데 내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의 명랑한 웃음이 부러웠다. 그리고 나를 본체만체하는 그녀가 몹시 섭섭했다. 그 때 내 안에서 불현듯 어떤 오기가 일어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집엘 한 번 가봐야겠다. 허겁지겁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엄마! 나나엄마가 빨리 와 보래애!”
단지 나는 그 집안을 한 번 구경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나를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또 낭패였다. 아랫집으로 내려가는 다리목에 앉아서 엄마가 들어간 파란 대문만 억울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큰소리가 나고 얼굴이 빨개진 엄마가 파란 대문을 나와 부리나케 내 쪽으로 걸어오며 소리쳤다.
“살다 살다 별꼴 다 보겄네. 아 모다 뼈 빠지게 한 푀기라두 더 심어 볼라구 야단인디 저누므 예펜네는 무신 심속이랴. 이깟 잔디는 공동묘지 가먼 지천인디 뭐더러 돈 잔뜩 들여서 마당을 다 덮어 놓고 저깟 꽃덜은 뭐헌다구 저렇게……, 으이구 쯧쯧쯧! 아 꽃이서 밥이 나와 국이 나와, 아니 저깟 꽃모가지 몇 개 분질렀다구 넘이 달기새끼(닭)를 가두라 마라 혀. 참 별꼴 다 보네.”
뒤이어 나나엄마가 달려 나왔다. 그녀는 사나운 수탉처럼 엄마에게 달려들어 엄마의 쪽진 머리채를 낚아챘다. 엄만 또 그녀의 짧게 파마한 머리채를 틀어잡았고,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다리목에 이르러서 엄마가 그녀를 다리 밑으로 던져 버렸다. 그날 싸움은 우리 엄마가 완전히 이겼다. 정말 엄마가 존경스러워 나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나나엄마처럼 예쁘고 부자인 사람을 이기는 것을 보니 우리 엄마는 누구든지 다 이길 것 같았다. 나나엄마가 수채에서 기어오르는 것을 보니까 그다지 예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얼굴이며 옷이 진흙투성이가 되어서 괴물처럼 보였다.
그 후 나나엄마는 입원을 했다고 했다.
어느 날 저녁때 이상한 아저씨가 찾아왔다. 아저씨는 마당에서 새총을 다듬고 있던 셋째 오빠에게 아버지의 도장을 가져오라더니 쪽지 한 장을 전해 주었다. 집안이 술렁댔다. 고소란 말을 나는 그때 처음 들었다. 셋째 오빠는 엄마가 이제 감옥에 가게 된다고 내게 귓속말을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엄만 누구든지 다 이길 수 있는데.”
오빤 엄마가 얼마나 힘이 세고 용감한지 모르는 것 같았다. 정말 바보 같은 오빠였다. 하지만 그것은 우울하고 슬픈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열두 명의 식구가 저녁으로 수제비를 먹으면서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아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해서 아래윗집 간에 송사가 시작되었다.
송사는 거의 2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엄마는 경찰이 나나엄마 편만 든다고 수면제를 사들고 경찰서에 가서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단다. 평소 조용하시던 아버지가 그 무렵 자주 엄마와 말다툼을 하셨다.
“내가 때려서 그년 몸뗑이가 그렇게 된 게 아니래유. 그 전날 서방이 밤새 개 패듯 팼대잖유. 아 증인이 있잖유. 복순어매(그 집 입주 가정부였다)를 증인으루 세우면 될 것 아뉴.”
“넘 부끄럽잖여. 지발 조용히 점 살게.”
아버진 고함을 지르셨다.
결국 엄마는 서울에서 국회의원을 하신다는 당숙에게 이 억울한 사건을 하소연하러 갔다. 당숙은 우리 집안에서 제일 성공한 분이었다. 아버지와는 한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촌 간이었는데, 나이가 차서 동경으로 유학을 가면서 헤어졌다고 했다. 몹시 추운 겨울 아침에 첫차를 타야 한다며 집을 나서던 엄마의 뒷모습은 아직도 뇌리 속에 시골집의 풍경과 함께 남아 있다. 큰 언니가 짜 드린 갈색 털스웨터를 입고 쌀자루를 이고서 뒷동산을 넘어가실 때 회색 무명치마가 소리 나게 펄럭였다. 나 혼자만 엄마가 사라진 산길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왜 아무도 먼 길 떠나시는 엄마를 배웅하지 않았을까?
엄마가 떠난 후 아버지는 집에서 기르던 토끼를 잡아 큰언니에게 토끼 탕을 끓이게 했다. 나나 네 아빠가 노란 주전자에 맑은 술을 담아 와서 모처럼 화목하게 아버지와 나나아빠는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그땐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그날 밤은 참 흥겨웠다. 나나아빤 유난히 반짝거리는 빨갛게 힘줄이 솟은 대머리를 흔들며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면서 노래까지 했고 아버지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려! 한번 잘 지내 보자구. 그려, 여자덜이 소견이 잘어. 그려!”
아버진 그날 밤, ‘그려’만 연발하셨다. 간혹 소견이란 말이 들렸지만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지간히 크도록 소견이란 단어에는 영락없이 토끼탕이 연상되곤 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날 밤 아버지는 나나아빠에게 방죽 밑의 논문서를 내어주고 합의를 하셨던 것이다.
서울에서 엄마가 돌아왔을 때, 이미 아버지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을 떠난 것은 며칠 전이었던 것 같은데 우리 중에 아무도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신 것을 심각하게 생각한 사람은 없었던 모양이다. 엄마가 돌아와 아버지 어디 가셨느냐고 물었을 때에서야 고갤 갸우뚱하면서 아버지가 어디 가셨나 하고 생각을 자아냈던 기억이 난다.
이튿날 아침 엄만 머리를 감아 빗고 쪽진 머리에 고드름이 열리도록 장독대에 앉아 있었다. 멍석을 깔고 조그만 상에다 냉수 한 사발을 떠 놓고서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내가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앉아만 있었다. 그리고 눈부시게 하얀 옥양목 치마저고릴 꺼내 입고서 또 산길을 걸어 나갔다. 엄마는 간간이 소복을 하곤 했었다. 눈이 왔었던가? 나는 손을 호호 불며 부비며 공연히 심술을 내고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떼를 썼다. 하얀 치마저고리가 눈부시게 예뻤다. 그런 엄마 손을 잡고서 어디 사람들이 많은 곳을 막 돌아다니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나를 달래던 엄마가 갑자기 회초리를 꺾어 들었다.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짚 누리에 엎드려 한나절을 울었다. 후에 알게 된 일인데 엄만 아버지의 고향인 예산으로, 진외가가 있는 홍성으로, 아버지 친구 분이 살고 있는 당진으로 봄이 되도록 아버지를 찾아다녔지만, 아버지는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한참 후에 돌아 온 엄마는 몸져누웠다. 장에도 가지 않고 텃밭에는 아무것도 심지 않아서 달개비 꽃만 무성하게 피었다.
달개비 꽃이 마당까지 들어와 토방을 기웃거릴 때쯤, 동네 이장이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집으로 왔다. 그는 처가에 다녀오다 덕산장에서 엿을 파는 아버지를 만났다고 했다. 엄마랑 큰 오빠가 그곳으로 가서 아버지를 모셔 왔다. 나는 그런 자세한 내용들이야 그땐 알아차릴 수 없었을 테니 아마도 훨씬 뒤에 누군가의 이야기로 모자이크된 기억일 것이다. 내게 가장 선명한 기억은 엄마가 장에 가지 않던 날, 내가 엄마에게 한 그 하찮은(하찮다고? 그것은 결코 하찮은 게 아니었다) 거짓말뿐이다. 한동안 그 때의 거짓말이 탄로날까봐 두렵고 불안했다. 그 날의 기억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졌지만 난 숨을 죽이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비밀의 무게는 무거워져갔고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 나였다는 자책으로 남몰래 두렵고 슬퍼지곤 했다.
어쨌든 아버지는 돌아와 할아버지께 큰절을 올리셨는데 아버지의 양말 뒤꿈치가 뻥 뚫려 있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뻥 뚫린 양말을 신은 것을 나는 처음 봤다. 엉뚱한 색의 천으로라도 항상 기워져 있었는데……. 구멍 사이로 드러난 아버지 발도 새까맸다. 나는 소리치고 말았다.
“아버지 양말 빵구 났어어어. 그러구 발두 닦아야 돼. 안 그러면 엄마한티…….”
누군가가 내 입을 틀어막았고 나는 발버둥 치며 울었다. 아버지 양말이 구멍 난 것 때문도 아니었고, 내 입을 틀어막은 누군가 때문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울고 싶었다. 울음을 그치기가 싫었다. 이상한 곡조로 나는 힘을 조절하며 울었다. 쓰러져 잠이 들었다가 깨어서도 울고 밥을 먹다가도 울었다. 그냥 그렇게 마냥 울었다. 간간이 쉬면서 아주 오래도록.
아버지가 보따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여러 가지 물건이 있었지만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작은 종이 봉지에 대한 기억뿐이다. 크고 작은 오색의 풍선이 하얀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거기서 쏟아져 나왔다. 참 좋았다. 동네 아이들을 데려다가 우쭐대며 그 풍선을 보여줬다. 그 중에 색동 풍선은 잘만 불면 되들잇병만 해지는 참말 멋진 풍선이었다. 나는 무지갯빛 풍선을 손에 잡고 뛰어다닐 때면 아버지가 다녀온 곳이 꼭 그 풍선 색깔처럼 아름다운 곳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은 내가 아버지만큼 어른이 되었을 때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나나 네가 곧바로 이사를 가고 이어서 앞을 못 보는 할머니가 그 집으로 들어왔다. 할머니는 비록 앞을 못 보셨지만 보이는 사람들보다 아는 것이 더 많았다. 내게 재미있는 얘기도 들려주고 찐 감자나 개떡을 내 소꿉놀이터인 울타리 밑으로 갖다 주셨다. 세월이 많이 지난 뒤에 그 할머니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글쎄 아버지가 그랬다는 것이다. 덕산장에서 엿 장사할 때가 당신의 일생에서 제일 마음이 편안하고 좋았다고, 읍내 과부들이 줄을 섰었다고……. 우스갯소리였다지만, 거기엔 어떤 진실의 저릿한 울림이 있다. 착각이었다 해도 한 번 모든 것을 벗어던져 보았다는 것, 그것은 자유로 한 걸음을 들어 서 본 것이다. 아버지의 가출에 난 갈채를 보낸다.
아버지는 고향인 예산에서 방앗간을 하시다가 불이 나서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이불보따리만 짊어지고 낯선 땅 서산으로 떠났다. 겨울엔 염전 일도 하고 봄부터 어물을 받아 지게에 지고 내륙으로 들어가 팔아서 연명을 했다. 그러다가 겨우 읍내 노점에 자리를 잡으면서 막 땅을 조금씩 사기 시작했을 무렵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어렵사리 장만한 땅을 뚝 잘라서 나나아빠에게 주고 아버진 집을 떠난 거였다. 어쩌면 엄마가 당숙에게만 가지 않았어도 아버지는 집을 나가진 않았을지 모른다. 살아보니까 아버지가 그때쯤 얼마나 지쳤을지 가늠이 된다. 가끔은 홀가분하게 털어버리고 모든 현실에서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때도 약간의 돈을 벌어 오셨단다. 집에 버려둔 가족 생각에 당신 자신을 뭐 변변히 챙기셨을까? 야윈 아버지 얼굴에는 수염이 보기 싫게 자랐었다.
오늘은 아버지가 이승의 옷을 벗은 지 10년째 되는 날이다. 과연 아버진 모든 것을 홀가분하게 다 벗으셨을까? 당신께선 내가 새삼스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부끄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세상 어느 누가 자신의 한평생이 자랑스럽기만 하겠는가. 아버지가 가신 곳은 색동 풍선같이 곱고 아름다운 세상이면 좋겠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당신의 일생 중에 가장 찬란한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고, 어머니는 그 사건을 계기로 서울 당숙 댁과 교류가 시작되었다. 결국 서울의 당숙 댁은 우리 육남매를 모두 서울로 올라가게 하는 교두보가 되었고 그 교두보는 우리 가족에게 꿈과 신화의 상징이었음과 동시에 영원히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열등의 강이기도 했다. 부모님이 모두 먼 길을 떠나신 지금에도 육남매 중 아무도 귀향의 용기를 내지 못하면서, 또 이 거대하고 고독한 도시에 당당한 안주의 깃대도 세우지 못했다. 그래서 모두가 이방인인 채로 우리 육남매는 모이면 말다툼을 한다. 서로 상대방을 가리키면서 “넌 엄마를 닮았다. 그래서 절대로 고향으로 가기는 어렵다”는 것이고, 아버지를 가장 많은 닮은 자기가 곧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세 오빠와 두 언니는 아무래도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저들은 약간의 열등이 있다. 그러나 죽어도 그 열등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걸 밟고 힘껏 구르며 그 반동으로 더 치열하게 튀어 오른다. 그들은 개미처럼 일하면서 재산을 알뜰하게 모으려고 억척스럽다. 하지만 정작 모은 것은 없다. 역시 나야말로 누구와도 경쟁하고 싶지 않으니 열등을 느낄 이유도 없다. 어느 정도 열등에선 자유로운 편이다. 난 언제라도 경쟁에서 물러설 자세가 되어 있다. 나에게 가난보다 고독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이 도시가 요구하는 쉼 없는 경쟁과 복잡하기만한 규율들이다. 문득 동전 한 닢 없이 집을 나섰던 아버지의 용기가 내 속으로 전이된 듯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하는 마음이 솟는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바로 그 모습이, 일테면 만날 현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언제나 대담하게 모든 것을 벗어던질 수 있다고 큰소리 뻥뻥치는 모습이 어머니를 닮았다고, 언니 오빠는 소리를 높인다.
어떤 재치 있는 과학자의 농담이 생각난다. 빛은 사흘은 파동으로 존재하고 나흘은 입자로 존재한다고. 나도 사흘은 아버지를 닮고 나흘은 엄마를 닮은 것일 게다. 나뿐일까. 우리 모두가 사흘은 꿈을 꾸고 나흘은 현실에 투쟁하고 그런 것이 삶은 아닐까?
첫댓글 글 감사합니다.ㅎ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조정은님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색동풍선~~
시간 가는줄 모르게
읽고 또 음미해봅니다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