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철비라는 책에서 발췌하였으므로 옮길시에는 반드시 출처를 표기하세요
강원도에는 6개의 철비가 있지만 경상북도에 속한 울진이 원래는 강원도 였기에
철비는 8좌로 보아야 한다.
그 중에 하나인 원만춘의 철비로 외부 비석군에 있었지만 현재 보존 차원에서 홍천 향토전시관 내부로 옮겼다.
비는 두껍게 만들어 졌으나 새긴 글이 삐뚤하여 판독이 어려웠다.
그렇지만 필자가 돋보기를 들고 여러 궁리를 한 끝에 풀이를 하였으며, 풀이가 어색하고 틀린부분도 있을 수 있다.
이 철비의 특징은 상부에 총각머리 모양의 뿔이 있는 것이고 장인의 이름이 새긴 것이다.
앞면
縣監元公萬春淸白善政不忘碑
현감원공만춘청백선정불망비
뒷면
順治六年辛丑四月日
순치 육년 신축 사월 일
1661년 4월
匠人 奈金伊 장인 내금이(만든 사람 내금이)
찬시
莅官四載 霅熅思..........廉潔
借冠末由 ...................... 表諸短碣 증략 함--원문은 한국의 철비라는 책에 있음
풀이
4년 동안 벼슬길에 있으면서
빛나고 따뜻한 덕이 그립다네
정치에 있어 폐해를 먼저 없애고
다스림은 청렴하고 깨끗하였기에
다른 지방으로 가는 이유를 알지 못하네
떠나는 것을 잡지 못함이 후회스럽네
어찌 은혜를 잊을 수 있는가
표문을 지어 단갈을 세웠네
해설
원만춘의 철비는 홍천군 홍천읍 희망리 홍천군청 앞 도로가에 서 있었으나, 연봉리 마을에 이건하였다가 보호 차원에서 홍천향토사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철비의 상태는 두껍고 좋으나 명문은 마모가 많이 되었고, 새긴 글의 필체가 삐뚤하여 판독이 힘들었다.
지방의 벼슬아치 재임 시기는 보통 2년이나 원만춘의 철비 명문에는 4년이나 재임 하였다. 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주민의 과중한 역을 조종하여 부담을 들어 주었다. 선정비는 1661년에 세웠기에 이임 후로 생각되며, 철비 뒷면에는 설립 시기가 잘 보이지 않으나 승정원 일기를 참조하였다.
금속유물에 장인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은 극히 드문 것인데, 불량으로 인한 책임을 묻기 위하여 새긴 것으로 추정 되지만 철비 명문에 보이는 설립 시기는 연호와 간지가 맞지 않아 의아스럽다. 또 한 ‘奈金伊’이라는 명문은 이두식 표기를 빌려 쓴 것으로 국어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비의 상부 향 왼편에는 나비, 벌의 모양으로 추정되는 무늬가 보이고, 상투 모양이 두 개가 있으며, 상부 향 오른 편에도 무늬가 있다. 철로 만든 원만춘의 선정비는 기록된 간지로 보아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비로 생각되며, 고흥에 흥양 현감을 지낸 도거원 비가 추정으로는 최고의 비가 되나, 이 부분은 따로 글을 써 놓는다.
원만춘(元萬春, 1629년~1697)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군시(君始). 수군절도사 원호(元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원유남(元裕男)이다. 아버지는 좌의정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 원두표(元斗杓)이며, 어머니는 사간 최동식(崔東式)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침착하였다. 17세 때 두 형을 대신하여 질자(質子)로 심양(瀋陽)에 가서 2년 동안 머물다가 귀국하였다. 특히, 홍천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주민의 과중한 역(役)을 조종하여 부담을 덜어주었다. 타고난 성품이 질박한 데다 올바른 태도와 행실을 보였다. 특히, 상사(喪事)에는 더욱 근신하였고, 그 절차의 일체는 주자의 『가례』에 따랐다.
어머니와 두 형을 극진히 섬겼으며, 항시 엄연히 자세를 단정히 하여 행동에 방자함이 없었고 세상의 이욕을 멀리하였다. 만년에는 특히 『논어』 읽기를 좋아하였다.
★ 순치6년이라 명문이 있고 그 뒤는 간지가 신축이라 하여 12년의 차이가 난다. 연도와 간지가 서로 달라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보인다. 필자는 연도를 잘못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 찬시의 역문은 철비에 새겨진 글이 마모가 되어 정확하게 판독이 되지 않으나, 실력은 없지만 필자 나름대로 풀이를 하였고, 보이지 않은 명문 추정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