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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5장 불교공예
■ 1. 의식법구
■ 2. 의식구
■ 3. 공양구
■ 4. 장엄구
■ 5. 사리장엄
탑, 부도, 석등, 석비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래 사원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의례로부터 수행자로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갖가지 용품 및 도구로서 쓰임새와 아름다움에 더하여 종교적 의미가 내포돼 있다. 즉 신앙의 태두리 안에서 법구 또는 불구라는 신앙적 의미를 지니고 조성 되었다. 이들 불교 공예품 중에는 성물(聖物)로서 탑상(塔像)과 같이 예배 또는 귀의의 대상이 되는 것도 있고 값비싼 재료와 정성을 기울여 제작했기 때문에 예술품으로서도 뛰어난 조형미를 가진 것들도 많다.
불교공예(佛敎工藝)의 종류(種類)
조각, 회화, 건축을 제외한 온갖 것을 다 포함할 정도로 범위가 넓으며 종류도 다양하다. 여기에는 쓰임에 따라 의식법구(儀式法具), 공양구(供養具), 장엄구(莊嚴具),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석공예품(石工藝品) 등으로 분류된다.
1. 의식법구(儀式法具)
범음구(梵音具) 의식구(儀式具), 의장구(儀仗具), 수행구(修行具) 등으로 설명 하고자한다.
1) 범음구(梵音具)
의식의 절차와 방법에 따라 장엄한 분위기를 한껏 북돋워주고 심금을 울리고 신묘한 소리를 내고 감동을 주게 된다. 소리를 내는 의식 법구로는 범종(梵鐘), 법고(法鼓), 운판(雲板), 목어(木魚)등의 사찰사물을 비롯하여 쇠북(金鼓), 바라, 경쇠(磬)등을 들 수 있다.
범종(梵鐘)
사원의 필수품 중의 하나로 맑고 깨끗한 은은한 그 소리를 통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든 중생에게 이르기까지 널리 펼쳐지라는 뜻을 지녔다. 여기서는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의 예를 들기로 한다. 이의 본명은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라하며 봉덕사종(奉德寺鐘), 에밀레종으로 애칭 되고 있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이 종은 우리겨레의 보배일 뿐만 아니라 온 세계 인류의 보배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 생김새가 큰 까닭에 보는 이로 하여금 풍성한 감격을 안겨 주며 그 모양이 아름답고 조각된 문늬가 화려하여 무한한 기쁨을 안겨 준다. 또한 이 종소리는 사람의 정신을 맑고 높은 경지에 이끌어 주는 거룩한 소리로 신기로운 종이다. 사원의 범종은 사람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다. 각 부분을 들어 알아보자.
당좌(撞座)
종을 치는 자리를 말한다. 당좌는 앞면과 뒷면 두 곳에 있는데 종 높이의 3분의1(밑에서) 되는 곳에 보상연화(寶相蓮花)로 장식되어 있다. 연꽃은 흙탕물 속에 뿌리박고 있지만 꽃은 맑아 부처님을 상징한다. 범종의 소리도 부처님 말씀을 한데 합쳐서 나타내는 부처님의 음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꽃처럼 맑은 소리가 온 누리에 퍼지라는 소원이 담겨 있다 고려시대 이후의 종에는 당좌가 네 곳에 있게 되었고 둘레를 장식 상으로 비천상(飛天像)을 새겼다.
비천(飛天)
범종의 소리는 부처님의 거룩한 음성이기 때문에 천인 네 사람이 꽃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범종 둘레를 돌면서 향로를 들고 공양하는 모습이다.
종명(鐘銘)
비천과 비천 사이에는 이 범종을 조성한 내력과 찬미하는 축문이 새겨져있다.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리신 성덕대왕(33대)께서 세상을 떠나신 다음 부왕을 그리시는 경덕대왕(35대) 께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구리 12만근을 들여 종을 만들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경덕 왕비이신 만월부인께서 아드님 되시는 혜공왕(36대) 께 권하여 종을 완성하니 혜공왕 7년(771) 12월이었다라고 새겨져 있으며 그 이면에는 축시가 새겨져있다.
축시(祝詩)
천궁에 달려 있는 형상이나 황금수레 드나들 길목 마다 열려 찬란하네
곱게 펼친 강산은 누리에 나누어 끝없이 펼쳐지고
동해 위에 떠 있는 뭇 신선의 나라도 누리의 지경은 해 뜨는 나라 부상(扶桑)까지도 이에 합하여 우리
나라와 한 고을이루 었 네
높고 높은 대왕님의 성덕은 전대에도 예 없을 만큼 새롭게 높아 지 셨 네
묘하고 맑은 다스림은 멀리까지 빛나게 이르옵고
크신 은혜 만물 위에 비 뿌리듯 골고루 입히시니 번성하다 천대 자손들
평화롭게 길이길이 웃음 짖더라.
근심 구름 하늘을 덮어 문득 슬프니 밝은 해는 어두워지고 따스한 봄도 가고 없어라
공손한 아드님께서 위를 이어 받으시니 그 다스리는 풍속은 예나 다름 없더라.
임금이 바뀐들 성스러운 그 풍속은 어찌 다르리오
날마다 아버님을 생각하옵고 항상 어머님의 빛난 사랑을 그리워하며
다시 마음 닦으오며 하늘 종에 기도 하소서.
위대하셔라 우리 임금님이시어 성덕은 온 누리에 감응 하셨네
보배로운 상서가 자주 비추고 신령스러운 보람이 매양 나더 라
임금이 어지시니 하늘이 도우시고 때가 태평하니 나라가 평안하여라.
선대를 사모하는 꾸준하신 그 정성 그 마음 조차서 소원이 이루어 져 셨네
이에 남기시고 가신 말씀 돌아보아서 종에 글로 새기니 사람과 신이 모두 도와 주 셨네
보배그릇이 얼굴을 이루니 능이 마귀의 항복을 받고 어룡(魚龍)을 구하리로다.
위엄은 양 극에 까지 펼쳐지고 소리는 삭봉(北極)에 까지 울리네.
들은 이나 보는 이나 모두 부처님과 한 마음 되니 꽃다운 인연 바르게 심었 네
둥글고 빈 몸은 바야흐로 부처님 모습 나타남 일세
큰북은 누리를 깨우치며 기리기리 퍼짐에 변함 없으리
한림랑 급찬 김 필 해 봉 조찬
유곽(乳郭)
범종의 윗부분에 젖꼭지 처럼 생긴 유가 박혀있는 테두리를 유곽이라 한다. 한 개의 종에는 유곽이 네 개가 있다. 3단 3열로 9개씩 모두합해서 36개 된다. 이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지키는 신이 36신인 까닭에 36개로 했다. 또 연꽃과 보상화 당초문(寶相華 唐草紋)으로 장식 했다.
용뉴(龍紐)
종의 꼭대기에 종을 달아매는 고리를 말한다. 이 고리가 용처럼 생겼다고 용뉴라 하나 실은 용이 아니고 포뢰(蒲牢)라는 가상의 동물이다. 포뢰의 소리는 맑고 깨끗하며 멀리까지 울려 퍼진다고 한다. 이 종소리도 멀리까지 퍼져달라는 염원에서 이렇게 만들었다. 또 이밖에 우리나라의 범종에는 용(甬)이라는 관이 있어 공명하도록 고안돼 있다.
종구(鐘口)
성덕대왕신종의 지름은 227cm이며 여덟 입의 연꽃 입으로 장식 했다. 가장자리에는 구슬을 늘어 장식한 넓은 띠를 돌리고 화려하게 뻗어나는 보상당초문을 새겼고 꽃잎 마다 활짝 핀 연꽃을 새겨 매듭을 지었다.
종견(鐘肩)
종의 위쪽으로 보상당초문(寶相唐草紋)을 새겼다.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의 연기(緣起)
경덕왕은 성덕대왕의 두 째 왕자이시고 큰 왕자가 효성왕이시다. 효성왕(34대)은 부왕이신 성덕대왕을 위하여 봉덕사를 짓고 돌아 가셨다. 그다음 효성왕의 동생되는 경덕대왕이 즉위하시어 이종을 만들기 시작하였다면 겨덕왕이 왕위에 게신 23년 동안 이 종을 위하여 일하셨고 혜공왕이 계승한 후에도 7년이 더 걸렸으니까 이 종이 완성하기까지는 약 30 년의 세월이 소요된 셈이다.
이 종은 봉덕사에 있다가 어느 해 홍수로 봉덕사는 폐사가 되고 영묘사에 있었는데 조선조 때 에는 봉황대 밑에 종각을 짓고 성문을 열 때 시간을 알리는 종으로 사용했었다.
1915년 종각과 함께 구 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가 1975년 5월 26일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2) 법고(法鼓)
법고는 법을 전하는 북이라는 뜻이다. 북소리를 들음으로써 모든 생령들이 고통을 벗어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해준다고 믿는다. 조석 예불이나 의식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치는데 법도에 맞게 치도록 돼 있다.
3) 목어(木魚)
나무를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고 안을 비게 파내어 두드리면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다. 목어 소리를 통해서 수중의 생령들이 제도 된다.
4) 운판(雲板)
청동이나 철을 판판하게 한 다음 구름형태로 만든다. 조석 예불 때 친다. 공중을 날으는 생령들을 예불의식에 참석하여 부처님의 교화를 받게 하기 위해 친다.
5) 금구(金口) 쇠북 금고(金鼓)
조석예불 때 동참 하도록 알린다.
6) 경쇠(磬)
에불을 올릴 때나 독경할 때 염불할 때 친다. 경쇠소리는 범종 운판 요령 징쇠와 함께 동물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다섯 가지 쇠 소리라 한다.
2. 의식구(儀式具)
의식을 집전하는 사람이 직접사용 하는 법구(法具)이다.
금강저(金剛杵)
호법 신장들이 지니는 무기로서 무명번뇌를 굳세고 날카로운 지혜로 부수어 버리는 것을 비유했다.
금강령(金剛鈴)
요령이라 불리오며 의식 때 쓰였다. 송광사의 금강령이 알려져 있다.
목탁(木鐸)
목어가 변해서 소형으로 만들어 졌고 우리나라는 휴대용으로 널리 쓰인다.
소통(疏筒)
발원문을 보관하는 기구였으나 지금은 사용하는 사찰이 거의 없다. 이 소통의 벽면에는 여러 가지 문양이 새겨져 화려하다.
3. 공양구(供養具)
의식할 때는 향을 비롯해서 꽃, 차, 등, 과일 등의 다섯 가지 공양물을 올릴 때는 오공양게(五供養偈), 운심공양진언(運心供養眞言), 운심게(運心偈)등을 독송하면서 공양의 뜻을 아뢴다,
향로(香爐)
향을 사르는데 쓰이는 법구이다. 마음속의 번뇌나 티끌을 불살라 정화하는 것을 상징하다.
향을 사르는 것은 기본예절이다.
화병(花甁)
생화나 조화를 꽂아두는 병이다. 재료는 금, 은, 동, 도자기 등으로 품위 있게 비치한다.
정병(淨甁)
물을 담는 물병이다. 형태가 독특하고 토기나 도자기로 만들었지마는 오동(烏銅)으로 만든 것의 표면에 금이나 은을 박아 무늬를 새긴 입사기법을 베푼 품이 높은 정병이 알려져 있다.
등(燈)
무명 번뇌의 중생에게 지혜와 자비의 광명을 준다는 뜻으로 일직 부터 불교의식에는 필수로 등장했다. 재료에 따라 종이 등, 베 등 ,나무 등, 구리 등, 석등, 자기 등, 옥등, 등으로 구분되며 쓰임새에 따라 수 등(手燈) 현 등(懸燈) 고정 등(固定燈)으로 나뉘며 모양에 따라 4모, 6모, 8모, 원형 등, 수박 등, 팔각석 등, 고부석 등, 이형석 등,등 다양하다.
다기(茶器)
다기(茶器)는 헌다의식(獻茶儀式)에 사용되는 불구이다. 고려시대까지는 다기에 차를 달여 불보살 전에 올렸으나 조선시대부터는 다 대신 맑은 물을 담아 공양하게 되어 오늘 날에 이르고 왔다. 놋쇠그릇을 이용했었다.
발우(鉢盂)
수행자가 지니는 밥그릇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발우가 한 개 뿐이었으나 지금은 4개가 한 벌을 이루며 큰 그릇에 작은 것을 포개어 담도록 되어왔다.
원시불교에서는 부처님도 제자들과 같이 밥을 빌리려 다니시었고 이를 탁발(托鉢)이라 하고 받아 온 것을 모아 함께 분배하여 공양하는 것을 발우공양이라 한다. 발우공양은 음식에 깃든 고마움과 공덕을 의례화한 것이다. 그래서 발우공양도 수행의 한 과정으로 삼는다. 예배, 감사, 자비의 가르침이 담긴 반야심경과 오관게(五觀偈)를 외우면서 절차에 맞춰 공양을 한다. 그리하여 평등, 청결, 절약, 화합의 뜻이 깃든 수행을 한다.
4. 장엄구(莊嚴具)
법당을 장엄한 분위기가 되도록 꾸미는 여러 가지 불구를 이른다. 법당은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미고자 한다.
불단(佛壇), 천개(天蓋), 불감(佛龕), 법상(法床), 목폐(木牌), 번(幡)등에 이르는 모든 불구들이 이에 해당되며 분위기를 불국정토로 꾸며야 한다.
1) 불단(佛壇)
불단은 불상이나 탱화를 모신 곳을 일컫는 말이다. 기본구조는 상대 중대 하대의 삼단으로 구성된다. 하대는 불단의 몸체를 받드는 부분이며, 중대는 불단의 몸체에 해당하고 여기에서는 여러 가지 장식무늬가 베풀어져 있다. 상대는 중심부에 불보살상을 모시고, 앞쪽에는 공양물인 불기, 향로, 촛대, 화병 등을 놓기 위해 턱을 덧대기 했다.
영천 은해사의 산내 암자인 백흥암(百興庵) 극락전 수미단 보물 제486호는 유명 하다.
2) 천개(天蓋)
산개(傘蓋), 보개(寶蓋), 화개(華蓋), 현개(懸蓋)라고 한다.
고구려의 안악 3호분 벽화 가운데 서쪽측실에 있는 동수(冬壽)라는 인물상 그림에서 장막형의 천개가 있다. (357년)
삼국유사에서는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중국에서 귀국할 때에 장경 일부와 여러 가지 번당(幡幢)과 함께 화개(華蓋)로 덮어 왔다고 한다. 또 통일신라 때 송림사 5층 전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구의 외함에 붙어 있는 천개(天蓋)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천개는 전각의 내부에서 불단 위 천장에 닫집이라는 형식으로 바뀌어 화려해 졌다.
3) 불감(佛龕)과 법상(法床)
전각을 축소해 놓은 모양의 불감은 이동하기 쉽도록 닫으면 동그랗게 되는 것과 집 모양으로 된 것이 있다.
법상은 설법하는 법사가 부처님을 대신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곳이므로 장엄하게 꾸며야 하는 것은 다연하다.
4) 번(幡)
원래는 장방형의 천으로 탑 위에 매 다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점차 여러 형태로 발전했다. 지금까지 남아 전하는 것은 없으나 일본의 예복사(叡福寺)란 절에 전한다고 한다.
이를 증번(繒幡), 당번(幢幡)이라고도 한다. 불보살의 위덕을 표시하는 장엄 도구인 깃발이다.
5) 화만(華鬘)
꽃을 실로 꿰거나 묶어서 만든 꽃다발을 말하다 . 수행자는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목에 걸 필요는 없다. 다만 부처님께 공양할 때나 방안에 걸 수는 있다.
6) 업경대(業鏡臺)
지옥 염라왕(閻羅王)청에 잇는 거울로 여기에 죄인을 비추면 생전의 선악 행업이 그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는 명부전에 설치하는 법구 중의 하나이다. 받침대는 연화좌 사자형의 상스러운 짐승의 형상을 새겼으며 거울면은 화염문으로 태두리를 했고 동판으로 만든 거울을 끼우거나 목판에 금칠을 하기도 한다.
7) 업칭(業秤)
사람이 죽어 명부에 가면 그를 심판할 때 사용하는 법구로 업의 경중을 다루는 저울이다. 해인사의 명부전에 있다.
5.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불사리(佛舍利)나 승사리(僧舍利)를 신비스러운 영물로 여겨 존중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자장율사(慈藏律師)는 당나라에서 부처님의 머리뼈 사리를 모셔와 통도사 금강계단과 황룡사 탑, 정암사 탑의 세 곳에 나누어 봉안했다.
또 삼국유사에는 의상법사가 중국으로부터 부처님의 치아 사리를 모셔와 궁중에 모셨다고 한다. 사리는 탑신기단, 상륜, 심초석 아래 땅 밑 등에 모셔진다. 그 안에는 사리만을 넣지 않고 겹겹으로 차림새를 갖추어 모신다. 아울러 장엄을 겸한 여러 복장 공양물도 함께 넣는다.
사리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끝없는 가르침을 알려주고 선근공덕을 심는 복전으로서 사리장엄구의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 불탑(佛塔)
탑이란 원래 “무덤”을 의미 한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는데 제자들은 시신을 다비하니 수많은 신골(身骨)과 사리(舍利)가 나왔다고 한다. 신골과 사리는 공평하게 분배되어 8기의 대탑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것을 기본 8탑(基本八塔)이라한다. 탑이 곧 부처님의 무덤이므로 생전의 부처님을 대신하여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로부터 300년 후 아쇼카 왕(BC 272~232)은 이 탑을 헐고 사리를 다시 나누어 전국 방방곡곡에 팔만사천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 산치(BC 3세기) 부다가야(BC 3세기) 아마라바티 등지에 남아있는 고탑 들이 아쇼카 왕이 조성한 탑 들이다. 이 탑 들은 돌이나 벽돌을 이용하여 둥그런 몸체를 거대하게 조성하고 그 꼭대기에는 일산(日傘) 모양의 보륜장식을 했다. 또 탑의 둘레에는 난간을 두르고 사방에는 탑문이 있고 여기에는 부처님의 행적 전생 설화 공양도 등이 새겨지고 아울러 보리수 법륜 발자국 금강좌 등이 부처님의 몸체를 대신하는 상징물로 나타낸다. 당시는 부처님의 모습을 함부로 새기거나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은 불경하므로 금기시 되었다. 탑만이 부처님과 동등한 숭배대상이 되었고 사원의 공간 배치에도 탑이 중심부를 차지하였는데 이는 불상이 등장하기 까지 약 50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불상이 조성하게 된 뒤에도 탑은 여전이 신앙의 핵심대상으로 오늘 날 까지 지속되어 온다.
목탑(木塔)
인도에서는 목탑조성의 예는 드물고 중국에서는 성했다. 우리나라는 선덕 여왕 때 건립된 황룡사 9층탑이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으며 그 높이는 약 80m나 되어 놀라왔다고 한다. 백제나 고구려의 목탑은 많았다고 하나 현재는 1기도 없으며 유지만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는 법주사 팔상전 쌍봉사 대웅전 등을 제외 하고는 남아 있지 않지 만 당시에는 상당한 수에 이르렀다고 생각 된다. 이 들은 모두 조선조의 작품들이다.
석탑(石塔)
견고한 재질로 탑을 세워 오래도록 탑이 보전되기를 기원하였고,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석재를 이용하여 석탑을 세우게 되었다. 석탑은 목탑 보다 견고 하고 풍화에도 잘 견뎌 영구적으로 보전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양질의 화강암이 흔하기 때문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석탑들이 많이 만들어 졌다. 현재까지 남아 있어 잘 알려 진 것만도 천기가 넘는다. 가장 오래된 것은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탑이며,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 경주의 감은사지 동서 3층 석탑, 고선사지 3층석탑등이 있다.
전탑(塼塔)
전탑은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탑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흔치 않으며 안동 동부동 전탑이 대표적이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처럼 잘라 층층이 쌓아올려 탑을 세웠는데 이러한 축조방식은 중국의 전탑을 본뜬 것이다. 백제는 목탑을 본떠 석탑으로 재현했고 신라는 전탑을 모방하여 석탑을 조성함으로써 백제와 신라는 석탑조성의 성향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게 되었다.
특수형 석탑
불국사의 다보탑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 정혜사지 3층석탑등은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의 수준 높은 조탑술로 창작된 새로운 양식의 석탑이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기단부가 둥글게 조성된 석굴암 앞 3층석탑, 기단이 연꽃무늬 불상대좌를 닮은 철원 도피안사 3층석탑, 기단부 위에 탑신 괴임대를 끼운 보령 성주사지 중앙 3층석탑등이 특수형 석탑으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이 석탑들은 신라 하대에 들어 다소 침체된 석탑의 조형미를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일반형 석탑에 약간 변형된 조형미를 부가한 것으로 보인다.
- 부도(浮屠)
덕망 높은 스님이 입멸하게 되면 제자들과 신도들이 스승의 묘탑인 부도와 탑비를 세우게 되었다. 부도와 탑비는 왕명으로 탑호가 붙여지며 탑비의 비문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가 글을 짓고 명필가가 글씨를 써서 비석에 행적을 새겼다. 우리나라에서는 절의 외각에 따로 탑원을 마련하여 부도와 탑비를 안치하고 있다.
우리나라 부도의 모양은 조선시대 이전까지 대부분 불탑과는 별개의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극히 일부의 부도만이 석탑 모양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후기 이후로는 석당형부도, 석탑형부도, 석종형부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는 간단한 석종형부도가 크게 유행했다.
- 석등(石燈)
석등의 일반적인 구조는 기둥의 밑에 댓돌을 놓고 중간부는 기둥을 세우며 상단에는 연꽃 받침대를 장식하고 그 위로는 불발기집(火舍石)을 얹게되어 있다. 기본적인 평면형태는 팔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기둥은 팔각기둥 사자모양, 장구모양, 등으로 표현되고 고려시대 부터는 사각형, 육각형석등도 등장한다. 불발기집은 양면, 사면 혹은 팔면으로 불빛창(火窓)을 내고 그 테두리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하여 종이나 베를 씌운 창틀을 고정하도록 못구멍을 내었으며 창 주위에는 사천왕이나 보살상을 조각하기도 하였다.
- 석비(石碑)
우리나라 석비들 중에는 큰스님들의 행적을 기록한 고승비와 사찰의 내력을 새긴 사적비들이 많다. 석비는 우리에게 네 가지 중요한 문화적 요소를 전해 준다. 첫째는 비문 자체가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써 역사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둘째는 석비는 제작연대가 확실한 작품으로 당시의 시대적 예술역량을 정확히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셋째는 비문에 세겨진 내용은 그자체가 명문장으로 기술된 문학 작품이다. 넷째는 새겨진 글씨는 명필가의 작품으로 서예사 연구의 자료가 된다. 이처럼 석비는 조영사의 전통이 깊으며 문화재적 가치로서의 중요성도 매우 높다는 것을 재인식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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