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타기 6/이성부-
바위벼랑은 사람을 밀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이면 붙잡아주려 합니다
바위의 튼튼한 손길을 찾아 잡고, 천천히 부드럽게
오르는 사람에게는 바위도
그 마음을 열어 내어주는 것 같습니다
바위와 사람이 한몸을 만드는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위는 거칠게 다급하게
힘만으로 오르는 사람이 딱 질색입니다
상처를 입기 마련이고, 그 상처는
마음에서 더 크게 아프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바위는
어떤 손길도 마음도 주지 않습니다
바위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외롭지요
쓰다듬고 다독거리며
함께 바람 이는 세상을 가야 합니다
-매혹, 갈라진 바위/손현숙-
이 칸에서 저 칸으로 건너가는 일 밖에서 안으로 드는 거다 금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갈라진 얼굴, 한 번도 다문 적 없는 입
술 같다 등 뒤로 천 길 낭떠러지 나를 따라 올라오거나 말거나 손끝으로 짚어가는 불협화음처럼 북한산 만경대 피아놋길
치고 올라 섰는데 협곡, 바위와 바위 사이로 하늘 시퍼렇게 쏟아진다 아차, 순간 발 빠뜨린다면 오늘이 내 길의 완성이겠
다 다리를 멀리 뻗어 훌쩍, 날아야 할까 보다 누가 자꾸 뒷골 잡아당기는 여기! 최후의 결심인 듯 최초의 문장처럼 가볍게
남쪽으로 바람의 등을 타야 하는
-바위/노정분-
열꽃을 앓았을까
타오르다가 식어버린 외로움 덩어리이다
그저 차갑기만한 뺨을 훈풍이 어루만지며
지나가고
시간의 수레바퀴가 할퀴고 간 자욱 깊이
글썽이는 눈물망울 하늘 한 자락 담아두고 있다
오늘을 오늘에 잡아둘 수 없는데 뱓고 싶은
말 꿰매고 네 역사 이전의 함구령 풀지 않아
아무에게도 상처 주지않는 경애로구나
네 속 여울지는 희망 한가닥
풀어내며 낯익은 세월의 목소리에 묵묵히
제 살 소멸해 가는 육신이여
얼마나 찔레 가시 씹어 왔기에 솔잎보다
향기로운 문신을 품었음인가
애잔히 마음잡아 흔드는 네 앞에
겹쳐진 내 염원이 무릎 끓는다
-삼랑진 만어사 물고기 바위들/황동규-
차곡차곡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것도 아닌
혼자 사는 너럭바위도 아니고
언덕 아래로 함께 굴러내리는 몽돌들도 아닌
그런 삶을 본 적이 있는가?
한 골에 그냥 모여 살고 싶어서
모여 서로 몸 비비며 살고 싶어서
만어산9부 능선까지 만 마리 물고기가 기어오르다
저 멀리 낙동강 가을 물빛이 불렀던가
한번 모두 뒤돌아보아
소금기둥 대신 바위들이 되어
두드리면 생각난 듯, 잘들 있지? 종을 치고
두드리지 않으면 달개비 구절초와 함께 질펀히 살고.
일으켜 세우려 들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저도 몰래 주지(住持) 되어 만나고
다음 순간 손 털면 범종 소리
범종 소리.
-바위/문태준-
풀리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다
새의 붉은 부리가 쪼다 오래전에 그만두었다
입담이 좋았던 외할머니도 이 앞에선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나뭇짐을 내다 팔아 밥을 벌던 아버지도 이것을 지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덧 나도 사랑을 사귀고 식탁을 새로 들이고 아이를 얻고 술에는 흥이 일고
이 미궁의 내부로부터 태어난 지 마흔해가 훌쩍 넘었다
내가 초로를 바라볼 때는 물론
내가 눈감을 그날에도 이것은 뒷산이 마을에게 그러하듯이 나를 굽어볼 것이다
나는 끝내 풀지 못한 생각을 들고 다시 캄캄한 내부로 들어갈 것이다
입술도 귀도 사라지고 이처럼 묵중하게만 묵중하게만 앉아 있을 것이다
집 바깥으로 내쫓김을 당해 한밤 외길에 홀로 눈물 울게 된 아이와도 같이
그리고 다시 이 세계에 새벽이슬처럼 생겨난다면 이것을 또 밀고
당기며 한마리 새가 되고, 외할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마흔 몇 해가 되고……
시간은 강물이 멀리 넘어가듯이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마당바위/이성부-
나는 바위이므로 할 말이 너무 많아 아예 입을 다물었다
벙어리의 길만 찾아 걷다가 여기까지 왔다
사람들의 속내를 다 보았으므로 눈 감고 귀 막아도
솔바람소리에 얼핏 고개 돌리는 그대 모습 잘 보인다
높은 데서 하늘을 마주보며 혼자 누워 있어도
저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나는 늘 마음에 걸린다
갑오년이던가 관군에 쫓기던 동학패가
산을 넘어 사라진 뒤
모두 잡혀 효수되었다는 소식을 소나기가 전해 주었다
내 몸도 천둥처럼 찢어질 듯 떨었다
저녁 무렵 혼자 서서 지는 해 바라보던 혁명가도
소년 병사도 토벌대도 나무꾼도 경배자도
지금은 모두 사라져 산에 보태는 흙이 되었다
나는 밤새도록 검은 울음을 참느라 가슴에 큰 응어리가 생기고
굳어질 대로 굳어져서 단단한 살결로 남았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일 험하고 어렵지만
사람들은 퍼질러앉아 쉬거나 노닥거릴 때 있느니
누군가는 웃고 떠들고 누군가는 한숨짓고 누군가는
울음을 터뜨려도 내려가면 언제 그랬냐 싶게
부지런히 살며 또 희망을 걸며
조금씩 조금씩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을 알겠다
나는 모두 알아버렸으므로 나는 바위이므로
사람들이 남긴 숨결로 언제나 나를 가득 채운다
나는 예민해져서 인기척에 자주 놀라지만
끝내 그대를 노려보거나 각을 세우지는 않는다
-둔각의 바위/이기인-
땅을 덮은 바위의 귀는 온몸이다
쑥이 쑥쑥 나오다 바위와 만났다
둔각의 바위가 둔하게 웃어서
쑥이 쏘옥 자기 빛을 그 사이에서 키웠다
더 이상 바위를 밀지 않았다
바위 옷은 둔각으로 조용했다
쑥 빛은 예각으로 흔들리고
지평의 초록은 평면을 둥글게 감았다
둔각의 바위는 들 뜬 벌판을 누르고
정확하지 않은 구름의 그늘이 왔다
외투를 벗어 바위에 올려놓은 구름이었다
까닭 없이 아름답게 누운 그림자였다
-바위들/유종인-
큰물이 나고
못 보던 바위들이
계곡 중간에 내려와 있다
거구들이다
계곡 상류 어딘가
붙박이 가구처럼 살던 거구들이
내려와서는
다시 붙박이가 되어간다
민달팽이가 타 올라가고
계곡물이 옆구리로 흘러간다
거무튀튀한 바위들 위로
하얀 진돗개가 올라가 혀를 빼물다
암자 쪽으로 내려간다
원래 그랬다
신갈나무 그림자가 어룽지는 바위들
누구 말을 듣고 내려왔을까
이렇게 무거운 침묵을 앉히기까지
큰물을 떠내려 보낸 계곡물 소리,
큰물을 다 따라가지 못하고
잔 물소리에 얹혀사는 거구들, 다시 귀가 어둡다
귀가 어두워 멀리 출타하지 못한다
-바위/김동리-
사막이 바다에 다다라 목마른 길가
내 여기 하나 이름 모를 바위로 누웠나니
가고 싶은 고향은 푸른 하늘,
아아, 일어나지 못할 바위로다.
일어났으면 일어났으면
천만년도 누워 앓는 가슴 속 거울이로다.
곁에는 보리수, 차고 맑은 샘
나그네는 목 축이고 피리 불기를,
<굳은 껍질 열면은 가슴은 거울
소리 없는 가락도 어리이나니
못 들으랴 못 가랴, 어느 하늘 위라도>
아아, 일어났으면 일어났으면
일어나 훨훨 날아갔으면
날으다 차라리 숨이 다하면
눈 감고 바다 위로 떨어졌으면……
가슴 속 거울에사 별빛도 어리이고
차디찬 은하도 굽이쳐 흐르지만
누가 알리, 천만년도 누워 앓는 이 가슴
일어 못날 마련의 바위로다.
누가 부나 피리를, 소리 없는 저 가락,
내 귀는 가 없는 허궁에 차고
아아, 일어났으면 일어났으면
차라리 강물되어 흘러갔으면……
-부엉이 바위/손택수-
부엉이가 울었다는 산
부엉이 울음이
바위귀 속으로 들어가
바위가 되었다는 산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침을 놓듯
막힌 혈을 뚫어주던,
어둠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그 눈
이제 부엉이는 보이지 않는데
부엉이 울음이 다시 들린다
아직 어둠이 다 새지 않았다고
이 어둠을 뭉쳐 한 종지 이슬을 만들어야 한다고
바위처럼 굳어버린 사람들
귀속으로 들어간 울음소리
-바위/김춘수-
바위는 몹시 심심하였다. 어느 날, (그것은 우연(偶然)이었을까,) 바위는 제 손으로 제 몸에 가느다란 금을 한 가닥 그어 보았다. 오, 얼마나 몸저리는 일순(一瞬)이었을까, 바위는 열심(熱心)히 제 몸에 무늬를 수(繡)놓게 되었던 것이다. 점점점 번져 가는 희열(喜悅)의 물살 위에 바위는 둥둥 떴다. 마침내 바위는 제 몸에 무늬를 수(繡)놓고 있는 것이 제 자신(自身)인 것을 까마득히 잊어 버렸다. 바위는 모르고 있지만, 그때부터다. 내가 그의 얼굴에 고요한 미소(微笑)를 보게 된 것은……{바위야 왜 너는 움직이지 않니, } 이렇게 물어 보아도 이제 바위에게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새 아침 바위에서/이성부-
그대 힘겹게 가는 길
잠시 멈추어 숨돌리는 때 있어도
두려워 망설이는 일 없구나!
한발 한발 천천히
부드럽게
때로는 재빠르게
천길 낭떠러지 기어오르는 그대
해와 하늘을 잡아 묶어두고 싶은 그대
온몸을 솟구쳐 바위자락 틀어쥐고
그대 잠시 귀기울여 듣는구나
그리움으로 가는 달음박질 소리
새 아침 열리는 소리
백두에서 한라까지 한길 만드는 소리
아 우리 이렇게 외로움이
혼자서 가는 길 아님을
내 비로소 깨달았거니!
-바위/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 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