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가상)와 세계(실재)
오늘은 대중 매체의 시대이다. 또한 이미지의 시대, 영상의 시대라고도 말한다. 대중 매체는 영상과, 이미지와도 깊은 연관을 가진다.
우리는 이미지를 통하여 이미지 너머의 저쪽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세계에 들어와서, 그 안에서 살고 있다. 이미지 세계란 가상의 세계이다.(이미지를 가상 또는 외양 이라고 번역한다.) 가상이라고 말할 때는 가상의 반대편에 ‘실재’가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세상을 가상과 실재의 이분법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가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실재는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미지는 실재일 수가 없다. 실재의 그림자라고 말한다.(불교에서 우리의 눈 앞에 전개되는 세상을 환(幻)이라고 하였다. 세상을 불교적 시각으로 보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이미지(가상)이고, 실재는 보이지 않는다. 플라톤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미술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미지(가상이고, 그림자)를 통해서 경험하게 한다. 문학에서 펼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미지가 환영과 다른 점은 실재에 다가갈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세계를 바라보는 통로이다.
작가가 이야기를 할 때는(문학 작품에서) 작가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미지를 통하여 감각으로 깨어나게 하여, 독자(감상자)가 실재 쪽으로 눈길을 향하도록 한다. 이런 이유로 문학 작품은 단순히 작품의 세계에서, 즉 이미지 세계에서 끝나는 거이 아니고 실재의 세계와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작품(소설)을 통하여 경험하게 함으로 우리가 실재의 세계와 직접 부딪힐 때 오는 긴장감의 부담을 덜어준다.
매체(주로 텔레비전)를 통하여 경험하는 영상 이미지는, 아득히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실재의 세계를 망각해버리는 위험에서 우리를 일깨워 준다. 화면 속의 영상 이미지와 나의 일상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세계에서 내가 살고 있다. 이미지(가상)와 현실(나의 삶)이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없애준다.
이미지(가상)는 진실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짓인 것도 아니다.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 실재를 환기시켜 주므로 현실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텔레비전에서 앵커가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사건 현장으루 영상으로 보여줄 때, 이 또한 실재가 아니고 이미지이다. 우리는 영상 이미지에 갇혀서 실재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문학에서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이미지이다. 가상이지민 감각기관을 통하여 실재를 경험하도록 해준다. 텔레비전이 시공간을 뛰어넘는 영상을 통하여 이미지화 한다. 텔레비전이 이미화하여 보여주면, 이제는 세상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가 곧 실재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코키도’를 응용한다면, ‘나는 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된다.
우리는 세상을 실재의 세계로 바라보지 않고 (영상이나 문학작품의 이야기로) 이미지 세계를 바라보면서 이미지 세계가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작가는 이미지 세게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야기는 원래 허구의 세계이다. 플라톤이 예술을 비판한 이유가 예술의 세계가 허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허구가 허구로 끝나버리지 않고 실재를 환기시켜 주면서, 현실 너머의 미지의 세계를 가리키는 이중의 역할을 한다. 이미지(특히 영상 이미지)는 가상과 현실로 나누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한편으로, 현실 너머의 이미지는 실재 이상이라는 듯이 말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 눈을 감도록 한다.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없도록 하였다.(이것을 잘 보드리야르는 무한의 시뮬라시옹 속에 우리를 가두어 버린다고 하였다.) 이미지와 실재의 차이가 지워지고, 우리는 증식을 거듭하는 이미지 속에 가두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