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주엽은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어느 때보다 몸 상태가 좋다며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사진 김수홍)
한국의 찰스 바클리’ ‘플라잉 매직 히포(하마)’. 현주엽(33,195cm)은 1990년대 초반 서장훈(34,207cm,전주 KCC)과 함께 한국 남자농구의 미래를 이끌고 갈 기대주로 꼽혔다.
그러나 현주엽은 프로 무대에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지 못했다. 두 번의 무릎 부상이 그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현주엽은 2008-09시즌 개막을 앞두고 “어느 때보다 몸 상태가 괜찮다. 새로운 시즌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10월 7일 서울 방이동에 있는 창원 LG 전용 체육관에서 현주엽을 만났다.
미국프로농구(NBA)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 뛰고 있는 르브론 제임스(24,203cm)는 2003년 오하이오주 아크론에 있는 세인트 빈센트-세인트 메리고교 졸업반이었다.
제임스는 그해 1월 “프로에 직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제임스는 고교 2학년 때부터 ‘NBA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한다면 전체 1순위로 뽑힐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고교선수였지만 농구 전문지 〈슬램〉과 스포츠주간지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 등 각종 매체의 표지를 장식했고 NBA 드래프트 참가 발표를 하는 날에는 여러 대의 TV 카메라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의 소속팀 경기는 스포츠전문 케이블방송인 〈ESPN2〉를 통해 미국 전역에 중계됐다.
제임스는 2003년 6월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신인 드래프트에서 예상대로 클리블랜드의 전체 1순위 지명을 받고 프로에 데뷔했다.
제임스가 갖가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기자회견을 하기 10년 전 한국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휘문고 졸업반이던 현주엽(33,195cm,창원 LG)은 제임스처럼 진로 문제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화려한 등장
“연세대냐, 고려대냐. 가능성은 반반이었습니다. 두 학교 가운데 한 곳으로 진학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현주엽은 당시를 그렇게 기억했다.
현주엽은 휘문고에서 1년 선배 서장훈(34,207cm,전주 KCC)과 함께 고교 코트를 휩쓸었다.
당시 국내 농구선수 가운데 최장신이었던 서장훈이 골 밑에 버티고 있었고 현주엽은 내, 외곽을 가리지 않고 골을 넣었다. 서장훈이 연세대 유니폼을 입게 되자 현주엽의 진로가 농구계의 최대 화제로 떠올랐다.
“처음에는 ‘연세대로 갈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현주엽의 마음이 신촌에서 안암골로 움직인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해 3월 대학연맹전에서 고려대가 8강 진출에 실패했어요. 그때 ‘고려대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당시 연세대는 신입생 서장훈을 비롯해 문경은(37,190cm,서울 SK), 이상민(36,183cm,서울 삼성), 우지원(35,192cm,울산 모비스) 등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즐비했다.
고려대도 전희철(35,SK 2군 감독), 김병철(35,185cm,대구 오리온스), 양희승(34,195cm) 등 고교 코트를 주름잡던 선수가 여럿 있었다.
그러나 고려대는 1993년 MBC배 전국남녀대학농구선수권대회 결선에 오르지 못하는 등 연세대에 밀리고 있었다.
현주엽의 아버지가 고려대를 나온 것도 현주엽이 진로를 결정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만약 아버지가 연세대를 나왔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그래도 고려대 유니폼을 입었을 것 같아요.”
현주엽(오른쪽)은 기능이 많은 포워드다. 그동안 어시스트에 재미를 느꼈지만 2008-09시즌에는 득점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한다.(사진 제공=KBL)
현주엽은 1993년 3월 31일 대한농구협회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고려대행을 발표했다. 서장훈이 떠난 휘문고에서 현주엽은 펄펄 날았다. 그해 경기당 평균 45점을 기록했다.
당시 농구는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부럽지 않은 인기를 자랑했다. 농구대잔치는 농구가 겨울 스포츠의 꽃으로 자리 잡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청소년들은 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일본 만화 〈슬램덩크〉에 열광했다. 마이클 조던(46)과 시카고 불스로 대표되는 NBA는 요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인기를 누렸다. 현주엽은 체격이 비슷한 찰스 바클리와 종종 비교됐다.
주전자 그리고 유니폼
현주엽은 1992년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남자청소년농구선수권대회에서 서장훈과 더블 포스트를 이뤘다. 전통적으로 골 밑이 강한 중국이 한국의 포스트 플레이에 긴장할 정도로 두 선수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때부터 서장훈과 현주엽에게는 ‘한기범(44)-김유택(45,국가대표팀 코치)의 뒤를 이을 한국농구의 기대주’ ‘한국 농구의 미래’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현주엽은 우연찮게 농구를 하게 됐다. “초등학교 시절 저희 집이 휘문고와 무척 가까웠어요. 천천히 걸어도 10분이 안 걸렸거든요.”
서울 도성초등학교 6학년이던 현주엽은 휘문고 농구부원들의 연습을 지켜보다가 어느 날 문득 농구를 해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곧장 집으로 달려간 현주엽은 부모에게 ‘농구를 하고 싶다’고 졸라 댔다.
현주엽은 휘문중 코치가 지켜보는 가운데 테스트를 받았다. 의욕만 앞섰지 몸이 따르지 않은 현주엽이 들은 말은 “집에 가라”는 것이었다.
당시 현주엽은 또래보다 키가 큰 편이 아니었다. 공을 다루는 재주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어요. ‘테스트를 괜히 받았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현주엽이 배정받은 학교는 휘문중이었다. 현주엽은 다시 농구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농구부원이 되는 길은 멀고도 힘들었다. 1년 동안 유니폼도 없이 농구부원들의 뒤를 쫓아다녔다. 농구공보다 주전자를 들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비로소 코트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서장훈은 그때 이미 키가 197cm까지 자라 농구 관계자들과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농구선수로 성장
현주엽의 어머니 홍성화씨는 농구 국가대표선수 출신이다. 현주엽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 어머니는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아들의 뜻에 반대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봤다.
“중학교 2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날 경기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체육관에 찾아오셨어요. 제가 농구부에 들어간 뒤 처음이었습니다.”
당시 현주엽을 지도하던 코치가 경기가 끝난 뒤 “(현)주엽아, 너희 어머니 어디서 많이 뵌 분 같다”며 어머니가 농구선수 출신이 아니냐고 물었다. “어머니가 농구를 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는데 제 자신이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농구를 잘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력이 늘고 있었다. 현주엽은 휘문중, 고 2년 선배인 석주일(35,전 서울 SK)을 본받기 위해 열심히 땀을 흘렸다. 서장훈은 석주일에 대해 “고등학교 때 실력을 놓고 보면 우리 학교에서 가장 농구를 잘한 선수”라고 말했다.
현주엽은 “(석)주일이 형은 훈련이 끝날 때마다 저와 (서)장훈이 형에게 ‘농구 잘하는 후배들과 뛰고 싶다’고 한마디를 했어요. 그게 저에게는 큰 자극이 된 셈입니다”라고 말했다.
(SPORTS2.0)
현주엽과 서장훈은 코트 안팎에서 가깝게 지냈다. 훈련을 빼먹고 학교 근처에 있는 수영장으로 달려가 물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그때 장훈이 형과 무척 친했어요. 손발이 척척 맞는 게 운동을 하는 게 정말 즐거웠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선수는 라이벌이 됐다. 연세대(서장훈)와 고려대(현주엽)로 갈리면서 두 선수의 경쟁 구도에 농구팬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두 선수의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현주엽은 “그런 얘기가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인터넷 보급이 안 돼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현주엽은 서장훈과 불화는 없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서로 다른 팀 소속으로 뛰었으니까 오해가 생길 수도 있었을 겁니다. 중, 고등학교 때처럼 가깝게 지내지는 못하지만 지금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걸요.”
고려대와 형님 부대
고려대는 1993년 3월 MBC 대회가 끝난 뒤 ‘현주엽 효과’를 누리기 시작했다. 현주엽이 아직 입학을 하지 않았지만 팀은 상승세를 탔다.
1993-94시즌 농구대잔치 직전인 10월에 열린 제30회 전국대학농구연맹전에서 당시 대학 최강 전력의 연세대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연세대는 3위에 그쳤다.
당시 연세대를 맡고 있던 최희암(53,전자랜드) 감독이 먼저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다. 문경은, 이상민, 서장훈 등도 최감독의 뒤를 따라 짧은 머리를 했다. 현주엽이 없는 고려대에 졌기 때문이다. 1년 뒤 현주엽이 가세할 고려대는 연세대의 가장 큰 라이벌로 꼽혔다.
‘삭발 투혼’을 보인 연세대는 1993-94시즌 농구대잔치에서 대학팀으로 처음 우승을 차지했다. 신입생 서장훈은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당시 많은 농구팬은 다음 시즌의 라이벌전을 기대했다. 현주엽이 뛰게 되는 고려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대는 현주엽과 함께 당시 고교 최고의 포인트가드로 평가받은 송도고의 신기성(33,180cm,부산 KTF)의 영입에 성공했고 서장훈을 막기 위해 재미동포 박재헌(35,전 서울 SK)까지 데려오면서 탄탄한 전력을 갖췄다.
그러나 고려대는 농구대잔치에서 연세대가 이뤘던 대학팀 우승을 달성하지 못했다.
“고려대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많습니다. 우승이 가능한 전력이었는데 성적은 그렇지 못했거든요.” 고려대는 당시 실업 최강이던 기아자동차와 삼성전자에게 번번이 발목을 잡혔다.
그러나 인기는 연세대에 못지않았다. 연세대가 이상민, 우지원 등 실력과 곱상한 외모를 지닌 선수들 때문에 ‘오빠부대’를 포함한 여성 팬들의 응원을 받았다면 고려대는 ‘형님부대’를 이끌었다. 현주엽과 전희철의 고공 농구와 시원하고 힘이 넘치는 덩크슛이 청소년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현주엽은 고려대 1, 2학년 때인 1994년과 1995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영맨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케빈 가넷(33,211cm,보스턴 셀틱스) 등 미래의 NBA 선수들과 함께 코트를 누볐다.
세계영맨선발팀에 뽑혀 미국청소년대표팀과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현주엽은 그 무렵 국제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 해외 진출에 관련된 이야기도 흘러 나왔지만 흐지부지됐다.
“해외 진출에 대해서는 지금도 별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원한다고 해서 쉽게 (해외로)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병역 문제도 걸려 있었고. 무엇보다 저를 믿고 스카우트한 고려대를 떠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지금 대학 1, 2학년 선수였다면 해외 진출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 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현주엽에 대해 미국쪽의 스카우트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2006년과 지난해 NBA 관련 행사를 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한 미국 스카우트는 “1994년과 1995년 그에게 ‘미국으로 오라’고 한 팀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가 뛰는 경기를 본 적이 있다. 미국 대학 1부 팀에서 경기 경험을 쌓으면 NBA 진출도 가능한 선수라고 평가했었다”고 현주엽을 기억했다.
현주엽의 적극적인 의지와 주변 상황이 뒷받침됐다면 김진수(19,205cm,메릴랜드대)보다 앞서 미국 대학농구 1부 팀에서 뛸 수 있었다.
트레이드 그리고 부상
현주엽(왼쪽)은 예전보다 점프 높이가 낮아졌으나 골 밑에서 제 몫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선수다.(사진 제공=KBL)
현주엽은 1998년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했다. 그해 3월 9일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드래프트에서 현주엽은 전체 1순위로 청주 SK(현 서울 SK)의 지명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SK에는 서장훈이 있었다. 두 선수는 대학 4년 동안 다른 유니폼을 입었으나 프로에서 팀 동료로 다시 만났다.
1998-99시즌 현주엽-서장훈이 뛰게 된 SK에 농구팬들의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정규시즌에서 받은 성적표는 기대 이하였다. 외국인선수가 부진한 이유도 있었지만 현주엽과 서장훈이 따로 뛰는 듯한 인상을 시즌 내내 보이면서 19승26패로 8위에 그쳤다.
플레이오프는커녕 3승42패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대구 동양 오리온스(현 대구 오리온스)가 없었다면 13승32패를 기록한 광주 나산 플라망스(현 KTF)와 탈꼴찌 경쟁을 할 뻔 했다. 현주엽의 프로 데뷔 시즌 기록은 뛰어났다.
34경기에 경기당 평균 23.94득점과 6.35리바운드, 4.6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신인왕 후보로 평가받았지만 부진한 팀 성적 때문에 원주 나래 블루버드(현 동부) 신기성이 신인왕이 됐다.
현주엽은 “(신)기성이가 더 잘했습니다. 팀 성적도 좋았고요. 신인왕에 대한 미련은 없습니다. 신인 때 저는 조금 자만했던 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프로에 오자 목표 의식이 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경기를 뛰어도 흥이 나지 않았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SK에서 서장훈과 계속 더블 포스트를 꾸릴 것으로 보였던 현주엽은 1999-200시즌 도중 나산으로 트레이드됐다.
199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나산이 전체 1순위로 뽑은 조상현(32,189cm,창원 LG)이 현주엽의 트레이드 상대였다. 1999년 12월 24일 스포츠전문 일간지 1면은 현주엽의 이적 소식으로 도배됐다.
“신문사 기자에게 트레이드 소식을 처음 들었어요. 구단의 결정에 크게 섭섭하지도 않았고 낙담하지도 않았어요. ‘새로운 팀에 가게 됐구나’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현주엽의 트레이드가 발표되기 전날까지 SK는 14승4패로 정규시즌 1위를 달리고 있었고 나산은 4승14패로 최하위였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현주엽의 트레이드는 당시 SK를 맡고 있던 최인선(58) 감독의 결단에 따른 것이었다.
대전 현대 다이넷(현 KCC)과 1위 경쟁을 하고 있던 최감독은 서장훈-현주엽-재키 존스(37,201cm)로 구성된 골 밑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현주엽은 SK에서 스몰포워드 자리로 뛰었는데 세 선수 모두 스피드에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최감독은 현주엽을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해 외곽슛이 뛰어난 조상현을 데려왔다.
“홀가분했습니다. 나산에는 제가 평소 존경하던 이인표(65) 단장이 있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안했어요.” 스타급 선수가 없어 관중 동원에 애를 먹고 있던 나산은 팀 이름을 골드뱅크 클리커스로 바꾸고 현주엽까지 데려와 새 출발을 했다.
현주엽은 골드뱅크 유니폼을 입고 27경기에 나와 경기당 평균 23.67득점 6.04리바운드 7.63어시스트로 제 몫을 했다.
골드뱅크는 정규시즌에서 18승27패로 9위에 그쳤지만 현주엽이 합류한 뒤에는 14승13패를 기록했다. 현주엽은 새 팀에서 두 차례 트리플더블〈표 참조〉을 작성했다.
이듬해 현주엽은 무릎을 크게 다쳤다. 수술과 재활 때문에 2000-01시즌에는 코트에 나서지 못한 경기가 더 많았다.
27경기 출전에 그쳤고 경기당 평균 득점이 16.70점으로 떨어졌다. 팀 성적도 곤두박질쳤다. 전 시즌보다 1승이 줄어든 17승28패를 기록했다.
“경기를 할 때 집중이 잘 안됐어요. 연습을 게을리 하거나 운동을 쉬지도 않았는데 정신 자세가 나태해진 것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무릎을 다친 것 같고요.”
2001년 상무에 입대한 현주엽은 2002년 12월 또다시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수술대에 올랐다. 치료와 재활에 1년의 시간이 걸렸다.
현주엽은 올 시즌 익숙했던 등번호 32번 대신 9번을 달았다.(사진 김수홍)
무관의 꼬리표
현주엽은 2003년 8월 전역했다. 그동안 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골드뱅크에서 KTF로 팀이 바뀌었고 연고지도 여수에서 부산으로 이동했다. 상무 시절 인연을 맺은 추일승(45) 감독이 사령탑을 맡았다.
팀이 달라진 만큼 현주엽의 경기 스타일도 이전과 달라졌다. 대학 시절부터 동료들의 득점 기회를 살리는 날카로운 패스를 간간히 시도했지만 2003-04시즌부터 어시스트에 본격적으로 재미를 붙였다.
그러나 현주엽은 두 번의 무릎 수술 때문에 전처럼 높이 뛰어 오르지 못했다. 골 밑보다는 외곽에서 슛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대와 프로 1, 2년생일 때 현주엽의 플레이를 기억하는 팬들은 바뀐 그의 경기 스타일에 실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주엽은 “전역을 앞두고 농구에 다시 재미를 붙였습니다. 내가 득점을 할 수 있어도 동료들이 더 쉬운 득점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쪽으로 패스를 해야겠지요. 동료들을 살릴 수 있는 플레이가 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현주엽은 그때부터 ‘포인트 포워드’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2004-05시즌이 끝난 뒤에는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었다. 변화를 원했던 현주엽은 KTF를 떠나 창원 LG로 이적했다.
그러나 LG에서 지난 3시즌 동안 현주엽은 보통 선수가 됐다. 선수의 출전 시간과 기용 방식에 대한 권한은 감독이 갖고 있다.
지난 시즌까지 LG를 이끈 신선우(52) 감독과 현주엽은 호흡이 맞지 않았다. 현주엽은 매 경기 20분 정도 출전 시간을 얻었으나 코트에 나올 때마다 뛴 시간은 길지 않았다.
신감독은 현대와 KCC 시절부터 특정 선수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선수를 고루 기용했다. 현주엽은 지난 3년이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코트에 나와 경기 감각을 잡을 만하면 벤치로 돌아갔습니다. 출전 시간이 줄면 힘이 남아돌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숙소에서 ‘내 문제가 뭘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20점대는 아니었지만 꾸준히 두 자릿수를 기록하던 현주엽의 득점은 2005-06시즌부터 한 자릿수로 줄었다.
LG는 현주엽이 입단하기 전인 2004-05시즌 17승37패로 9위를 기록하면서 1997-98시즌 프로농구에 참여한 이후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현주엽이 온 뒤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우승까지 늘 한 걸음 또는 두 걸음이 부족했다.
현주엽에게 ‘우승과 인연이 없는 선수’라는 꼬리표가 붙기 시작했다. 현주엽과 함께 농구대잔치에서 활약한 선수 대부분은 프로에서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서장훈은 청주 SK와 서울 삼성에서 우승 반지를 꼈고 전희철과 김병철은 대구 오리온스에서 챔피언 팀의 일원이 됐다.
이상민과 문경은은 각각 현대와 KCC, 삼성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대학시절 농구대잔치 우승 이후 챔피언 반지와 인연이 없었던 우지원도 2006-07시즌 울산 모비스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 얘기 정말 많이 듣고 있습니다. ‘이대로 우승 한번 못 해 보고 은퇴하는 게 아니냐’고 걱정하는 분들도 있고요. 저도 우승을 한번쯤 해보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절실하지는 않아요. 이렇게 말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웃음). 코트에서 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맙고 농구가 재미있습니다. 동료들과 즐겁게 운동을 하다 보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승에 대해 부담을 갖고 뛰기보다 마음 편하게 먹고 열심히 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요.”
등번호 교체 그리고 LG 세이커스
(SPORTS2.0)
현주엽은 2008-09시즌 개막을 앞두고 등번호를 32에서 9로 바꿨다. 두 번호 모두 현주엽에게 의미가 있다. 32번은 NBA의 명 포인트가드 어빈 매직 존슨(49,전 LA 레이커스)이 현역 시절 사용한 번호다.
현주엽은 “매직 존슨이 뛰는 경기를 TV로 보면서 농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존슨은 동료들의 능력을 살리는 농구를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정말 해 보고 싶은 농구입니다”라고 설명했다.
현주엽은 휘문중 시절부터 32번을 달았다. 현주엽하면 32번이 곧바로 떠오를 정도로 팬들에게 익숙한 등번호가 됐다.
그러나 올 시즌 현주엽은 32번을 잠시 달지 않는다. “고3 때 잠시 9번을 단 적이 있습니다. 당시 춘계연맹전에서 경기당 평균 45점을 기록했어요. 고교 경기를 성인 무대와 비교하기 어렵겠지만 그때는 슛을 던지면 그대로 림에 꽂혔습니다. 그때의 좋은 기억을 이번 시즌 되살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2002년 부산아시아경기대회 대표팀에 뽑혔을 때도 9번을 달았고요. 그때 결승전에서 연장전 끝에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땄습니다. 9번도 32번만큼 의미가 있는 번호입니다. 2009-10시즌에는 다시 32번을 달 겁니다.”
현주엽은 프로 9년째를 맞는다. 어느덧 팀 내에서 박규현(34,185cm)과 함께 최선참급이 됐다.
LG는 오프시즌에 변화가 있었다. 계약 기간이 끝난 신선우 감독의 후임으로 명지대 사령탑을 맡고 있던 강을준(43) 감독이 왔다. 강감독은 현주엽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현주엽은 9월 필리핀 전지훈련에서 치른 연습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42분을 뛰었다. 필리핀은 NBA와 마찬가지로 쿼터당 12분 경기를 한다.
강감독은 현주엽에게 적극적인 공격 가담을 지시했다. 현주엽은 시야가 넓어 어시스트에도 재능을 보이지만 원래 내, 외곽을 가리지 않고 득점을 올리는 선수다.
“득점보다 패스를 하자는 마음이 앞섰던 것을 인정합니다. ‘드리블이나 패스를 할 때 자세가 높다’는 지적에 대해서 저도 잘 알고 있고요. ‘외국인선수 때문에 골 밑에 잘 들어가지 않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현주엽은 강감독의 지시대로 올 시즌 변화된 플레이를 기대해도 좋다고 했다.
“예전에는 제가 득점을 많이 하면 ‘혼자 농구 다 한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왜 공격을 안 하느냐’는 말을 듣지요. 생각해보면 우스워요.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올 시즌에는 좀 더 공격적으로 플레이를 하겠다고.”
현주엽의 어시스트가 줄어도 강감독은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박지현(29,183cm), 이현민(25,178cm) 등 기존 선수 외에 FA 시장에서 검증된 포인트가드인 전형수(30,180cm)를 데려왔기 때문이다. 현주엽이 득점에 신경을 더 써도 되는 이유다.
현주엽은 언제까지 선수 생활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답하기가 무척 힘들다”며 이렇게 말했다. “LG에서 오래 뛰고 싶습니다. 은퇴 계획은 아직 세우지 않았습니다. 선수 생활을 그만두더라도 동호회 농구를 하면서 40살, 50살이 돼도 코트에 서고 싶습니다. 농구가 정말 재미있습니다.”
첫댓글 오빠야 특집,,,^^ 저도 이 기사 네이버에서 봤어요,,,,흐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