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천] 신품무제神品武帝(1권) 2. 서원(書院)에서 생긴 일

[해시시]

第二章 서원(書院)에서 생긴 일




1



이튿날 아침.
진 총관과 저잣거리로 나간 제갈천과 추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모습에
너무도 신기해 하며 경서서원으로 가고 있다.
"공자님, 그렇게 두리번거리시면 지나가던 사람이 촌놈이라고 놀려요."
"흥! 놀리고 싶으면 놀리라지. 그런데 진 총관, 저기 이상하게 삐쩍 마르고
누더기 같은 옷은 입은 사람은 뭘 하는 사람이기에 저런 걸 입었어? 에이, 옷
 좀 빨아 입지."
"공자님, 저 사람은 거지입니다. 금전이 없어서 집도 없고, 옷도 한 벌밖에
없어서 빨아 입질 못해서 저런 겁니다."
"집이 없으면 그럼 밥은 어떻게 먹어?"
"밥도 해 먹을 게 없어서 길거리에서 동냥을 하거나 남의 집에서 얻어먹지요.
"으음, 너무 불쌍하다!"
"공자님, 너무 불쌍해요. 저렇게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집이 없어서 길에서
자면 겨울엔 얼어죽을 텐데……."
추하는 눈물을 글썽이며 제갈천에게 말한다.
"진 총관, 이따가 저 할아버지를 우리집으로 불러 배부르게 먹게 해 줘. 옷도
 새로 주고, 그리고 잠잘 자리도 알아봐 주고……."
"예, 공자님. 그러나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으니, 북경의 모
든 거지를 다 부르라고는 하지 마십시오."
"알았어. 얼른 가."
약 한식경을 걸어 제갈천 일행은 경서서원에 도착하였다.
진 총관은 큰소리로 외쳤다.
"여보게, 방 원주! 얼른 나와 보게. 여기 원주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우리 소
주께서 오셨네."
서원 안쪽에서 다소 몸집이 뚱뚱하고 키가 작달만한 사람이 먼지를 잔뜩 뒤집
어쓴 채 나왔다.
"아이고, 장군부의 공자님 오셨습니까? 저희 경서서원에 오신 걸 정말 환영합
니다. 공자님께서는 정말 잘생기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공자님께 보내 드릴
책을 정리하고 있던 중입니다. 이번엔 서역에서 보내 온 거라 공자님이 못 보
신 책이 꽤 있을 겁니다. 이번엔 직접 골라 보시죠. 소인은 이제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해서 책 고르는 게 너무 힘이 듭니다. 그리고 공자님께 보낼 책들
은 너무도 어려워서 고르기가……."
"진 총관! 나는 하 누이하고 안으로 가서 책을 고를 테니까, 방 원주하고 나
가서 술이나 한 잔 하고 와."
"아이고! 공자님, 고맙습니다. 아직도 어리신데 마음 쓰시는 걸 보니 참으로
훌륭하게 성장하실 겁니다. 책은 저 안쪽 궤짝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지하로
 내려가시면 소인이 미처 골라 내지 못한 것들이 있으니, 마음껏 골라 보시지
요."
"응, 알았어! 자, 하 누이! 안으로 가 보자."
"예, 공자님."
경서서원은 겉으로 보기보다 상당히 깊었다.
이곳은 현 원주인 방태원의 팔대 조부 때부터 장사를 시작한 꽤 유서가 깊은
서원이다.
양쪽으로 세워진 서가에는 대략 이십만 권 정도의 책이 꽂혀 있었고, 서가의
길이만도 이십여 장 정도 되는 것 같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궤짝 이십여 개가 포개어져 있었다.
"음, 이 안에 든 게 전부 책이란 말이지? 이걸 다 헤쳐 보려면 시간깨나 걸리
겠구나."
제갈천은 추하와 약 세 시진 동안 골라서 사십여 권의 책을 골라 냈고, 이제
아직 풀지 않은 궤짝은 하나만 남았다.
"하 누이 이제 하나만 더 풀어 보면 대강 끝날 것 같다. 이거 마저 풀어 보고
 조금 쉬자."
마지막 궤짝은 지금껏 풀어 보았던 궤짝의 약 두 배 정도 되는 크기로, 높이
가 제갈천의 키만 했기에 제갈천은 아에 궤짝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이거? 이건 거의 파지 아냐?"
궤짝 안에는 제본이 거의 풀어헤쳐진 책들로 그득했다.
제갈천은 궤짝 안에 앉아서 책의 내용을 일일이 읽어 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늘 읽을 거리에 굶주려 하던 처지라 한 장이라도 그가 읽어 보지
않은 걸 더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음, 이건 갑골문으로 쓴… 그거 뭐냐? 병마절도사 일기? 음, 말이 병들어서
병졸들과 잡아먹었다고? 에이, 이건 그저 그렇고. 어, 이건 과두문이잖아? 과
두문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데… 좋아, 이건 챙기고… 이건 또 뭐야? 이건 파
사국 문자인 것 같은데… 좋아, 이것도 챙기고…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
거의 한 시진 동안 챙긴 제갈천이 궤짝 밖으로 나왔을 때 추하는 밖에서 쭈그
리고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보던 책을 등 뒤로 감춘다.
"하 누이! 뭘 보다가 감춘 거야? 이리 내놔 봐."
"아무것도 아녜요, 공자님."
"아니긴 뭐가 아냐? 빨리 안 내놔? 안 내놓으면 다음부터 밖에 나올 때 나 혼
자 올 거야."
"안 되어요, 공자님. 아이, 정말 안 되는데……."
다음부터 안 데리고 나온다는 제갈천의 협박에 못 이긴 추하는 얼굴이 빨개지
며 할 수 없이 등 뒤의 책을 내놓는다.
"이건 또 뭐야? 아니,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벌써부터 이런 책이나 보고
……."
추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창피해서 어쩔 줄 모른다.
그 책은 남녀간의 방사(房事)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책이었다.
한참 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어쩔 줄 몰라하던 추하가 고개를 들자… 아니,
이럴 수가?
제갈천은 완전 독서삼매(讀書三昧)에 빠져 있었다.
"공자님!"
"으흠, 으흠!"
추하의 소리에 놀란 제갈천은 헛기침을 하며 책을 덮고 책을 추하에게 넘겼다
"이거 잘 보관해. 알았지?"
"……!"
추하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자, 제갈천은 혀를 낼름 내민다.
"자, 여긴 다 골랐고… 아까 방 원주가 아래에도 책이 있다고 했으렷다? 하
누이, 아래로 가 보자."
어두컴컴한 계단을 내려가는 제갈천의 뒤를 따르던 추하가 다소 겁먹은 표정
을 지으며 말했다.
"공자님, 저는 여기가 컴컴해서 무서워요. 저는 위에서 아까 골라 놓은 책들
을 챙기고 정리해 놓을 테니까, 공자님 혼자서 고르세요."
"알았어. 하지만 아까 보던 책, 또 보면 안 돼!"
추하는 아까 보았던 남녀간의 방사를 묘사한 그림이 생각나서 얼굴을 붉혔다.
"알았어요. 다시는 안 볼게요."
제갈천이 지하실로 내려와 보니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서가가 줄줄이 서
있었고, 그 크기가 엄청나게 컸다.
"우와… 이렇게 크다니! 한 백만 권은 훨씬 더 되겠다."
한 줄 한 줄 서가를 돌아보던 제갈천은 실망을 했다.
"이거 거의 그저 그러네. 하지만 이 책 냄새는 너무나 좋아."
지하실을 거의 다 둘러본 제갈천은 지하 한쪽 구석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파
본들을 보았다.
"흠, 이중에 분명히 쓸 만한 게 있을 거야. 어디 보물찾기 한 번 해 볼까?"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책들은 경서서원이 생긴 이래로 들어온 책들 중 파본들
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둔 것이었다.
"어? 이건 무슨 숨쉬는 법에 대하여 써 놓은 것 같은데? 숨쉬는 것도 무슨 특
별한 방법이 있나? 제목이 뭐지? 음, 무극양심심법(無極兩心心法)이라… 이름
은 그럴 듯한데? 응? 숨을 들이마실 때 아랫배에 힘을 주고 가능한 천천히 들
이쉬고, 다 들이마신 다음엔 숨을 멈추고… 항문의 괄약근(括約筋)에 힘을 주
고, 내쉴 때도 가능한 천천히 숨을 내쉬고 또 멈추고… 그 동안에 괄약근에
또 힘을 주라고? 어디 한 번 해 볼까?"
제갈천은 책에 적힌 내용을 따라 그대로 해 보았다.
"흐으음… 끄응……!"
그러나 생각대로 쉬운 것은 아니었다.
"휴, 숨쉬는 게 이렇게 힘들어서 어디 살겠어? 이 책을 집으로 가져가서 제대
로 한 번 해 봐야지. 가만 있자… 이 책 나머진 어디 있지?"
제갈천은 뒤적거리며 손에 쥔 책의 나머지를 찾았다.
"응? 이건 또 뭐지?"
제갈천은 숨쉬는 법에 대하여 쓰여진 책의 나머지를 찾으려니까, 할 수 없이
모든 조각들을 일일이 읽어 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무슨 의학에 관한 책인 것 같은데… 어디 보자. 흠, 이건 무슨 고질병
을 고칠 때 쓰는 약방문 같다. 그렇지 않고야 어디 그 구하기 어렵다는 만년
설련실(萬年雪蓮實), 인형설삼(人形雪蔘), 구지자엽설란(九枝紫葉雪蘭) 같은
걸 쓸 리가 없잖아? 좋아, 이것도 챙긴다."
제갈천은 파본들 속에서 약 이십여 종의 서적들을 골라 냈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하고 다음에 와선 이거 전부 제대로 골라 봐야지. 이제 집
으로 가 볼까?"
제갈천이 골라 낸 책들을 들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고개를 들다 의혹 어린 음
성을 발했다.
"응? 계단이 어디쯤 있더라?"
지하실이 너무 넓은데다 서고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어 시야가 막혀 어디로 들
어왔는지가 헷갈리고, 한참 동안 책을 뒤적거린 후라 제갈천은 순간적으로 방
향 감각을 잃었던 것이다.
'이럴 땐 서고 위로 올라가서 보면 금세 찾을 수 있지.'
천재는 뭐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다가 한참을 헤맨 후에야 입구를 찾을
 텐데, 제갈천은 서고 위로 올라가서 보면 금방 입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제갈천은 생각과 동시에 앞에 있는 서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맨 위칸에 오르려 손을 짚었을 때 무언가 이상한 촉감을 느꼈다.
'응? 이건 뭐지?'
맨 위칸에 오른 제갈천은 흑단(黑檀)으로 만든 상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또 뭘까?'
뚜껑을 열려고 하자 그 상자엔 정교한 시건장치(匙鍵裝置)가 붙어 있었다.
그래서 계단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본 후 상자를 들고 밑으로 내려왔다.
상자는 십이 세 소년이 들기엔 너무나도 크고 무거웠다.
'뭐가 들었기에 이렇게 무겁지? 대단한 보물이 들었나 보다. 무슨 꼬챙이 같
은 게 있어야 이걸 열어 볼 텐데 여긴 책밖에 없으니… 그래, 어차피 다음에
여길 또 와야 하니까 그때 열어 봐야겠다.'
제갈천은 상자의 시건장치를 주의깊게 살펴보고 상자를 다시 서가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곤 아까 봐 두었던 길로 해서 계단을 올라 경서서원 일층으로 올라왔다.
그를 본 추하는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깔깔깔… 공자님, 공자님 모습 좀 보세요. 어디 굴(窟) 속에라도 갔다 오셨
어요? 까마귀가 보면 형님이라고 부르겠어요."
"굴 속? 우리 서원엔 굴 같은 게 없는데?"
경서서원의 방 원주는 진 총관과 오랜만에 낮술을 마셔서 코가 뻘건 채로 고
개를 갸웃거렸다.
진 총관 역시 제갈천을 보며 웃는 것이었다.
"공자님, 얼른 장군부로 가셔서 목욕을 하셔야지 안 되겠어요. 꼭 아까 본 거
지 영감처럼 보입니다."
"내가 아까 본 거지 할아버지처럼 보인다 말야?"
제갈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추하가 겨우 웃음을 그치며 대답했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걸요."
"하 누이, 너… 한 번만 더 날 놀리면 아까 책 본 것 다 말한다."
제갈천이 짐짓 으름장을 놓자, 추하는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녜요, 아녜요. 공자님, 다신 안 놀릴게요. 어서 집으로 가요."
"좋아, 진 총관. 이 책들 전부 들고 가. 참, 원주 할아범. 지하실에 있는 책
들 중 아직 못 고른 게 있으니까, 다음에 다시 와서 골라 가도 괜찮지? 그리
고 구석에 파본들 쌓아놓은 것들은 건드리지 마. 다음에 와서 또 고르려면 너
무 힘들거든."
"예, 알았습니다. 어느 분 분부라고 건들겠습니까? 사실은 그걸 건들래도 먼
지가 너무 많이 나고, 너무 양이 많아 갖다 버리기도 제겐 힘이 들어요.  하
여간 그냥 둘 테니, 다음에 또 오세요. 그리고 오늘 공자님 덕분에 진 총관하
고 진탕 마셔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갈천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진 총관과 추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서 한
바탕 목욕을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곳엔 오늘 경서서원에서 힘들여 골라 낸 책들이 책상 위에 수북히 쌓여 있
었다.
'후후… 오늘 고생한 보람에 앞으로 한 오 일 동안은 심심치 않겠구나. 어디
한 번 보기 시작해 볼까?'
그때 방문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목마르실 텐데 차 드세요."
추하가 차를 가지고 방안에 들어와 책상 위에 찻잔을 공손히 내려놓으며 말했
다.
"공자님, 오늘부터 며칠 동안 또 꼼짝도 안 하고 방안에만 틀어박혀서 책만
보시면 안 돼요. 매일 조금씩 운동도 하시고 산책도 하셔야 돼요. 아셨죠?"
"응, 알았어. 알았다고. 참, 진 총관한테서 낚싯줄 하고 낚싯바늘 구해 놨어?
"그럼요. 어느 분 분부신데, 제가 안 해 놨을까 봐요?"
"알았어. 그럼 이따 낚시하기로 하고, 지금은 책이나 보자. 자, 하 누이 넌
이거 봐. 아까 보던 건 내가 압수한 거니까, 보여 달라고 하지 마. 나중에 하
 누이가 더 크면 줄게."
그 말에 추하는 얼굴을 붉혔다.
"피, 공자님은 나보다 더 어리면서… 공자님도 그 책 보지 마세요. 아셨죠?"
"으응? 알았어."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제갈천의 내심은 달랐다.
'내가 안 보긴 뭘 안 봐? 아까 보니까 누가 그렸는지 그림도 무지 잘 그렸던
데, 하 누이 없을 때 혼자 봐야지.'
둘은 마주 앉아 책을 보기 시작했다.
사실 추하의 학문도 대단한 수준에 올라 있다.
제갈천이 맨 처음 글선생한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같이 배워 왔고,
제갈천이 책을 읽을 때에는 매번 독서삼매에 빠져 옆에서 뇌성벽력(雷聲霹靂)
이 쳐도 모르기 때문에 추하도 할 일이 없어지므로 늘 제갈천의 곁에서 함께
책을 읽고 공부를 하였기 때문이다.
추하는 제갈천의 방안에 있는 책들 중 거의 대부분을 읽었다.
따라서 추하도 제갈천 만큼은 아니지만 웬만한 진식을 설치하고 파훼할 수 있
는 수준이다.
다만 제갈천과 추하의 수준이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것을 모를 뿐
이다.




2


"흠, 대라내경(大羅內經)이라… 이책은 의학서적인 것 같은데… 어디 보자."
이 책은 구백 년 전 성수신의(聖手神醫)가 저술한 진본기서(眞本奇書)로, 그
는 화타(華陀)나 편작을 능가하는 신기에 가까운 성수(聖手)를 가진 의원이었
다.
그는 비록 무림인은 아니었으나 일평생을 장백산(長白山)의 깊은 골짜기에 살
면서 수많은 종류의 약초를 직접 맛보고 시험해 가며 약효에 대한 연구를 하
였고, 혈도(穴道)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면서 세상의 어떤 의생도 모르는 수많
은 세맥(細脈)과 잠맥(潛脈)을 찾아 내어 고치기 어렵다고 소문난 각종 난치
병도 침 몇 방으로 치료를 하였고…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폐맥(閉脈)과 절맥
(絶脈)의 치료도 가능하게 했으며, 가장 고치기 어려운 광증(狂症)까지도 치
료하게 되었다.
하여간 그를 만나면 죽은 지 삼 일도 안 된 시체는 벌떡 일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모든 의생들의 신이다.
그는 또한 모든 독(毒)에 대하여도 일가견이 있어 각종 해독 방법에도 깊은
연구를 하였다.
그리하여 산중에 널려 있는 풀들을 이용하여 해독을 하고, 이독치독(以毒治毒
)의 원리만으로도 어떤 독에 중독되든 전부 해독할 수 있게 하였다.
다만 한 가지 무색, 무미, 무취의 독중지독(毒中之毒)만은 그의 사후에 개발
된 것이라 이에 대한 해독법만이 없다.
그가 남긴 대라생사신침술(大羅生死神針術)은 침술의 집대성(集大成)이다.
노환으로 당장 죽게 생긴 노인이 끄르륵 소리를 내며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도
 대라생사신침의 비법으로 침을 몇 방 맞으면 벌떡 일어남은 물론, 새장가 보
내 달라고 자식들을 조른다나, 어쩐다나?
대라생사신침술의 장점은 특별히 만들어진 침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 침으로나 효과를 발휘할 수 있고, 침이 없을 때에는 뾰족한 것이
면 무엇이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흠, 이 책만 제대로 공부하면 신의(神醫) 소리 듣는 것은 시간 문제겠구먼.
자란원에 아무렇게나 자라 있는 이름도 모르는 풀들이 모두 훌륭한 약효를 가
진 약초란 말이지? 하 누이! 내일부터 마당에 있는 풀 아무도 건드리지 말라
고 해. 이 책에 쓰여진 게 진짠지 가짠지 내일부터 시험해 봐야겠어."
"예, 공자님. 그런데 무슨 시험을 해 볼 건데요?"
"응? 으응, 여기 이 책을 보니까 저기 우물 옆에 있는 노란꽃 보이지?"
"예."
"그걸 처녀한테 달여서 먹이면 처녀가 애를 가진대. 그래서 내일 저걸 달여서
 하 누이한테 먹여 보려고. 애가 진짜 생기나 안 생기나 보려고."
추하는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뾰족한 교성을 질렀다.
"뭐… 뭐라구요? 공자님, 또 소녀를 골탕먹이시려고 그러는 거죠?"
그러면서도 그녀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흥, 그깟 풀 아무리 달여서 먹여도 애 안 생긴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요. 얼
마 전 혼례를 치른 소취 언니가 말해 줘서 어떻게 해야 애를 가질 수 있는지
쯤은 나도 안다고요.'
그녀는 제갈천이 대답을 하지 않자, 아미(蛾眉)를 상큼 치켜올렸다.
"소녀가 또 당할 줄 아시나 보죠? 내일 당장 장칠에게 말해서 마당에 있는 풀
들 전부 뽑아 버리라고 할 거예요."
"하하… 하 누이! 조금 전엔 농담이고, 사실은 저 풀이 여인들 달거리가 불순
할 때 달여 먹으면 그게 일정해진다고 여기 써 있어. 그런데… 하 누이! 여인
들 달거리가 뭐야? 그게 뭔지 알아야 시험을 해 봐도 시험을 하지."
추하는 잘 익은 홍시처럼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흥! 공자님, 또 소녀를 놀리시는 거죠? 이제 공자님하고는 다시는 말도 안
할 거예요."
그리곤 잽싸게 제갈천의 방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갔다.
사실 추하는 몇 달 전부터 달거리가 시작되었고, 처음 그게 시작되었을 때에
는 거기서 피가 계속 나오자 무섭고 놀라서 죽는 줄 알고 하루 종일 울었다.
울고 있는 추하를 본 의천장의 다른 시비 중 얼마 전 혼례를 치른 소취는 추
하에게 다가가서 그게 모든 여인들이 겪어야 하는 일이며, 앞으로 그런 일이
매달 있을 거란 얘기, 그리고 그걸 시작해야만 앞으로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얘길 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아기를 가질 수 있는지는 추하가 아직 어리기에 자세히는
 말을 안 해 주고, 다만 남자와 같이 자야 한다고 말해 주었기 때문에 추하는
 요즘 들어 제갈천 옆에서 자지 않고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잔다.
사실 전에는 제갈천과 같이 놀거나 공부를 하다가 밤이 늦어지면 그냥 제갈천
의 방에서 자곤 하였다.
왜냐하면 자기 방으로 가려면 어두운 회랑을 통해 가야 했기 때문에 혹시 가
다가 귀신을 만날까 봐 무서워서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소취에게서 얘기를 들은 이후부턴 한 번도 제갈천의 방에서 자지 않았
다.
처녀가 애 가졌단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제갈천 앞에선 한 번도 달거리에 대하여 얘기해 본 적이 없다.
왠지 부끄럽고 창피하단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런데 오늘 제갈천이 달거리에 대해서 말을 하자, 혹시 제갈천이 자신이 달
거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놀라고
당황을 해서 이 자리에서 빨리 나가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제갈천은 추하가 갑자기 나가 버리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 누이가 왜 저럴까? 하여간 여인들은 이상하단 말이야!'
그는 다시 옆에 있던 책을 집어들었다.
'아, 이건 숨쉬는 법에 대하여 쓰여져 있는 책이지? 아깐 중간 부분만 봤는데
, 어디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봐 볼까?'
"흐음, 무극양의심법(無極兩意心法)이라고?"
<동진(東晋) 숙종명제(肅宗明帝) 육 년, 무극동(無極洞)에서 무극자(無極子)
가 남기노라.>
'동진 숙종명제면 천 년 전 사람이잖아? 무지하게 오래된 책이네.'
<본인은 중종원제(中宗元帝)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위의 두 형님이 패권을 차
지하기 위해 피 튀기는 암투를 벌이는 것에 환멸을 느껴 궐(闕)을 떠나 천하
를 유랑하던 중, 강한 자만이 살 수 있다는 무림에 우연히 몸담게 되었다.
본인은 궐의 무고에서 각종 무공을 익힌 궐내 최고수였으므로 당연히 무림의
제일고수라고 생각하여 대궐에서 익힌 무공(武功)이면 백전백승일 것이라 생
각하고 천하에 산재한 고수들을 상대로 비무를 하여 본 결과, 놀랍게도 본인
은 중원의 무학이 결코 범상치 않으며 본인의 수준이 겨우 서열 오백 위밖에
안 된다는 걸 깨닫고 매우 실망을 하였다.
그러나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처음 이 땅에 무공을 선보인 이후, 수많은 무림
인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무공을 발전시켜 온 것을 생각하고 그 동안 익힌 무
예를 바탕으로 새로운 무예를 창안하려 서천목산(西天目山)의 깊은 골짜기에
서 삼십 년을 고심한 끝에 그 동안 본인이 갖고 있던 무공이 예(藝)의 수준밖
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藝)가 극에 이르면 도(道)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삼십 년을 고련하
였을 즈음, 도(道) 위에 다시 법(法)이 있음을 알고 이 법을 깨우치기 위하여
 고뇌하기를 다시 삼십 년… 법(法)을 깨우치면 그것이 끝인 줄 알았는데……
법 위에 또 무극(無極)!
아아, 무(武)의 길은 정녕 끝이 없구나!
법을 느꼈으나 내 나이 어느 새 일백 하고도 사십. 무극에 도달하기 위하여
앞으로 적어도 오십 년…….
세월은 유수(流水)처럼 흐르고, 내 청춘도 사라지고 남은 것은 오직 늙어 버
린 육신과 허무(虛無).
또다시 정진하기엔 너무도 지쳤고, 이 나이에 무슨 욕심으로 강호에 다시 나
가 천하제일을 탐하랴?
인연이 닿아 이것을 보는 사람은 세월을 허비해 가며 무극을 구하지 말고, 현
세에 만족하길 바라노라.
하지만 지나온 내 청춘이 너무도 아쉬워 내 평생의 심득(心得)을 남긴다.>
"이 할아버지 너무 웃긴다. 뭐? 세월을 허비해 가며 무극을 구하지 말라고?
그러면서 남기긴 뭘 남겨? 누구 청춘 쓸데없이 허비되는 거 보고 싶어서 남긴
 거지. 하여간 남 잘 되는 꼴 못 보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애. 그리고
결국 영감은 무극을 못 봤다는 거 아냐? 그런데도 자기가 무극자래. 참, 이름
 한 번 잘 지었네. 그럼 난 무극자 말고 뭐라고 지을까? 나도 지금부터 열심
히 무공을 익히면 언젠간 무극을 볼 테니까. 그래! 무극을 보면 결국 법을 넘
어섰다는 뜻이니까… 무(無)… 법(法)… 자(子)! 좋다!"
제갈천은 내심 쾌재를 부르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그런데 남들이 무법자(無法者)라고 놀리면 어쩌지? 으음, 외호는 다음에 지
어야겠다. 어쨌든 삼십 년 더하기 삼십 년, 그리고 거기다 삼십 년을 더하니
까… 으음, 구십 년이구먼. 햐! 내 머리 좋다. 그 구십 년에다가 맨 처음 궐
에서 한 십 년쯤 무공을 익혔다면 딱 백 년이네? 좋아! 이 영감이 백 년을 익
혀 얻은 게 뭔지 볼까?"
그는 다시 책자의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무극양의심법(無極兩意心法).
무(武)에는 술(術), 예(藝), 도(道), 법(法), 무극(無極)의 다섯 단계가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도 법(法)의 단계에 오르기까진 적
어도 오십 년은 걸린다. 그 윗단계인 무극(無極)의 단계까지 가려면 또 얼마
나 많은 세월을 요구할 것인가?
나도 감히 단언하지 못한다.
노부는 이렇게 세월이 오래 걸린다면 다 늙어서는 회의감과 허무감 때문에 아
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생각을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
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면 보통의 두 배 속도로 진전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었다.
생이지지(生而之知), 동명부동(瞳溟不動), 혈행이완(血行弛緩) …….
… 중략(中略)…….
이렇게 하면 생각을 두 갈래로 나눠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을 할 수도 있으며,
한 가지만을 집중하여 생각한다면 본래보다 두 배의 속도를 낼 수가 있다.
다음은 법의 단계에서 노부가 창안한 삼(三) 초(招)의 장법(掌法)과 일(一)
초(招)의 지법(指法), 그리고 경공술(輕功術)이다.
아무래도 힘들겠지만 후인의 능력으로 만일 무극의 단계에 이른다면 이보다
뛰어난 무공을 창안하기 바란다.
무극동(無極洞)에서 무극자(無極子) 남김.>
<무극장(無極掌).
무극장은 모두 삼 초식이다.
제일초 천허지허(天虛地虛).
내공이 이(二) 갑자(甲子)의 경지가 되지 않으면 펼치지 못한다.
제일초 천허지허는 이(二) 갑자(甲子)에 이른 내공을 장(掌)에 모았다가 극에
 이르렀을 때 마치 용수철이 튀어나가듯 폭발되어 나가는 장법으로, 이를 펼
치면 글자 그대로 하늘과 땅 삼십 장 내에는 남아나는 게 없다.
어떠한 자세로도 펼칠 수 있는 이 장법의 특징은 절륜쾌속(絶倫快速)과 무음
무성(無音無聲)이다.
제이초 무극겁륜(無極　輪).
내공이 육(六) 갑자(甲子)에 이르지 못하면 펼치지 못한다.
제이초 무극겁륜은 육(六) 갑자(甲子)에 이른 내공으로 몸 주위에 상, 중, 하
, 세 개의 강기륜(　氣輪)을 만들고… 이것이 늘었다 줄었다 하면서 쾌속으로
 회전하기에, 마치 칼(刀)로 허리를 베인 듯한 상처가 난다.
호신강기도 파훼되며 내공이 높을수록 륜의 두께가 두꺼워지는데, 팔 갑자에
이르면 몸 전체에 륜이 형성되므로 완벽한 방어 초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다.
간장이나 막사 같은 신병(神兵) 외의 보통의 청강검 등은 수수깡처럼 잘라지
고, 이는 다수를 상대로 할 때 사용하면 효과가 크다. 보통 이십여 장의 범위
의 적을 베어 넘길 수 있는데, 내공이 높을수록 살상 범위가 늘어나고 회전
속도가 빨라진다.
제삼초 무극만리(無極萬里).
십(十) 갑자(甲子)의 내공이 없으면 펼치지 못한다.
제삼초 무극만리는 한 마디로 심즉살(心卽殺)이다.
죽이겠다는 마음만 먹으면 십 갑자에 이르는 내공이 적의 몸 속에 순식간에
전이(轉移)되어 폭발하기에 시체조차 온전히 남길 수 없다.
이론적으론 십 리 밖의 적도 살상할 수 있다.
노부조차 십 갑자의 내공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창안만 됐지, 실제로 시전해
본 사람이 없었다.
사람의 마음은 수시로 변하기에 후인(後人)은 이를 함부로 사용치 말라.
무극지(無極指).
무극지는 단 일 초로 이루어져 있다.
무극지는 어느 손가락으로도 시전이 가능한데, 내공이 높을수록 지풍(指風)이
 가늘게 응집되는데… 천잠사처럼 가늘게 되면 상처가 보이지 않게 된다.
지풍이 나선형으로 강하게 회전되므로 각종 호신강기를 효과적으로 파훼하며,
 섬점(閃電)처럼 발사되므로 경공신법이 고절하지 않으면 피하기 어렵고, 설
사 적이 이를 피했을 경우에도 손가락으로 적을 계속 겨냥하고 있으면 휘어지
거나 되돌아와서(回旋) 적을 공격하게 되므로 절대로 피할 수 없게 된다.
내공이 높을수록 살상 범위가 커지는데, 백 장 밖의 적도 죽일 수 있게 된다.
무극미리보법(無極迷離步法).
우모보법(羽毛步法)이라고도 한다.
무극미리보법은 내공의 소모가 거의 없다.
그리고 일정한 형식이 없다. 미묘한 공기의 파동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물러서
거나 비켜 서게 만들므로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시켜 준다.
이 보법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의 깃털의 움직임을 보고 창안하였다.
공중의 깃털에 강한 장풍을 시전해 보았는가?
나뭇잎이나 돌멩이들은 멀리 날아가나 깃털은 장풍의 범위 바로 밖으로 나간
후 서서히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하므로 한 번의 도약으로도 높이 올라가거나 멀리
갈 수 있다. 이 보법은 초상비(草上飛)나 육지비행(陸地飛行)보다 빠르며, 답
설무흔(踏雪無痕)이나 무력답수(無力踏水)보다도 몸을 더 가볍게 하므로 능공
허도(能功虛蹈)처럼 허공을 걸을 수 있다.
그러나 내공이 이 갑자가 되질 않으면 시전할 수 없다.>
"흐음, 너무도 어렵다. 나는 아직 일초반식의 무공도 익히지 못한 백면서생이
고, 변변한 좌납심법조차 몰라 내공이 하나도 없으니… 장법, 지법, 보법, 다
 환상적인데… 이건 완전히 그림의 떡(畵中之餠)이구먼. 이것들을 일 성쯤은
이해하겠는데, 지금은 무슨 수를 써도 익히질 못하니… 일단 외워나 두자. 훗
날 나의 내공이 정심해지면 그때 익혀야겠다."
그는 일단 거기에서 책을 덮었다.
"그나저나 내공이란 게 일 년 내내 운기행공(運氣行功)을 하여야 겨우 일 년
내공인데, 무극만리는 무려 십 갑자의 내공이 있어야 한다고 하니… 그럼 육
백 년 내내 앉아서 운기행공을 해야 겨우 시전할 수 있다는 얘기 아냐? 앓느
니 죽지. 하긴 그래서 이를 익힌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거지!"
그의 생각은 끝없는 날개를 폈다.
"참! 아까 본 대라내경에 음양신과(陰陽神果), 공청석유(空淸石乳), 인형설삼
(人形雪蔘), 만년하수오(萬年何首烏), 천년설련실(千年雪蓮實), 만년금구내단
(萬年金龜內丹)과 묵린독각괴룡(墨鱗獨角怪龍)의 내단(內丹) 등을 복용하거나
… 지극한천(至極寒泉)과 지극열천(至極熱泉)에서 교대로 운기토납심법(運氣
吐納心法)을 하면 내공이 급속도로 늘어난다고 그랬지? 흐음, 내일 아버님께
사 달라고 해야겠구나."
제갈천의 생각은 너무 큰 비약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지금껏 무(武)는 문(文)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여 거들떠보지도 않았는
데, 무(武)도 문(文)만큼 심오하구나. 내일부턴 아버님께 무공을 가르쳐 달라
고 해야겠구나! 그리고 무림이라는 곳이 어떤 곳이길래, 한 나라의 왕자가 그
곳에 발걸음을 들였는지 진 총관한테 말해서 그곳에 데려다 달라고 해야겠다.
"
그렇다! 제갈천은 모친인 선화대부인이 마냥 유약하다고만 생각되는 아들이
무예를 익히게 되면 남편처럼 전장으로 나가 가정을 등한시할까 봐 본인은 무
림인이었으면서도 무예에 대하여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기에, 글자 그대로
무예에 대하여서만큼은 문외한인 것이다.
그래서 의천장의 연무장에서 무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무예를 익히다가 다
치기도 하고 목숨을 잃기도 하는 것을 보고… 학문을 닦지 않는 사람들은 저
렇게 힘들게 연습을 하여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였기에 무림이 어떤 특정
장소를 지칭하는 곳인 줄 알고 있는 것이다.
부친인 제갈휘도 제갈천이 무예보다는 학문에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바랐기에,
 지금까지 무예를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무신(武臣)들이 전장(戰場)에서 수없이 목숨의 위협
을 받아 가며 공을 세워도, 황궁의 문신(文臣)들은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서
전장에 있는 무사들에게 이래라저래라만 하면서도 더 큰 공(功)을 인정받아
왔다는 것을 제갈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뿐인 아들 제갈천이 이름
 높은 학사가 되어 천하의 존경을 한몸에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긴 해도 내일부터 호국대장군 제갈휘는 무척 바빠질 것만은 틀림없었다.
음양신과에 공청석유, 인형설삼에 만년하수오, 그리고 만년금구 내단에 묵린
독각괴룡의 내단까지 사러 다니려면.
제갈천은 장원 안에서만 자라 세상 물정을 몰라도 정말 한참 모르는 것이었다
"흠, 이 책은 과두문(　　文)에 관한 것이구나. 그 동안 과두문에 관한 서적
이 너무 없어 완벽한 과두문 해석에 자신이 없었는데… 잘 됐다."
제갈천이 한참을 독서삼매에 빠져 있다가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에 무릎
을 탁! 쳤다.
"아참! 아까 무극양의심법대로 하면 한 번에 두 가질 할 수 있다고 했지? 정
말 되는지 해 보자. 으음, 천변만화제종경(千變萬化諸宗經)? 이게 뭐지? 얼굴
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좋아, 재밌겠는데! 이거 하고 이거 두 가질, 한
꺼번에 익혀 봐야지."
천변만화제종경.
이 비급은 백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바탕 휘저었던 괴도(怪盜) 무영공공
(無影空空) 기유옥(奇儒沃)이 저술한 비급이다.
무영공공은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는 고관대작의 저택만을 골라 그의 장
기인 신투술을 유감없이 발휘해 많은 금은보화와 골동품, 그 밖의 기진이보(
奇珍異寶)의 위치를 이동시킨 후 그것들을 남몰래 빈민촌에 풀어 그들을 가난
에서 구휼(救恤)하여 고관대작들에겐 죽일 놈이나 빈민들에겐 천신으로 받들
어졌다.
기진이보들을 위치 이동당한 저택에서는 이상하게도 도난신고를 하는 고관대
작이 한 명도 없었다.
무영공공이 워낙 신출귀몰하고 무공이 높아 웬만한 고수가 아니면 그를 잡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기도 했지만
, 세인들은 아마도 위치 이동을 당한 기진이보들이 부정한 방법에 의하여 수
집된 것이기에 세상에 알려지면 곤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무영공공도 인간인지라 간혹 실수하여 침투한 저택의 식솔들에게 발각
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럴 경우 무영공공은 참으로 다양하게 위기에 대처하여 지금까지 잡힌 적이
없다.
먼저 저택 내의 호위무사 등 남자에게 발각되었을 경우엔 그의 특기인 동영인
자들의 인술보다도 뛰어난 은법의 최고봉인 무영은법(無影隱法)과 섬전 같은
무영보법(無影步法) 등을 사용하여 무조건 도망가거나, 태양곡(太陽谷)의 제
십구대 곡주인 열화태세(熱火太世) 군위명(君偉命)에게서 단순히 위치만 이동
시킨… 태양곡의 곡주만이 익힐 수 있다는 태양진결(太陽眞訣)상의 무공을 사
용하여 격퇴한 후 도주를 하였다.
여인들에게 발각되었을 경우에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미모가 뛰어
난 여인에게 발각되었을 경우에는 무영미혼대법(無影迷魂大法)상의 염정환희
소(艶情歡喜笑)를 펼쳐 여인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웃음을 각인시킨 후
매향방중술(梅香房中術)로 완전히 녹여 버렸다.
염정환희소와 매향방중술에 당한 여인들은 무영공공을 고발하기는커녕 그녀들
이 밤새 몸으로 직접 겪었던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황홀경(　惚境)을 잊
지 못해 평생을 무영공공만을 그리며 살아야 할 정도로 그 위력이 컸다.
이 매향방중술의 특징은 방사 후 은은한 매화 향기가 여인의 몸에 배게 된다
는 것이다.
그런데 매향방중술을 겪은 여인들끼리 은밀히 모여서 무영공공의 외모에 대하
여 말하는 걸 들어 보면 그의 외모가 출중하다는 것엔 대체도 인식이 같으나,
 세세한 윤곽을 말할 때 들어 보면 똑같은 얼굴이 한 번도 없다.
사실 무영공공도 하도 많이 얼굴을 바꿔 사용하였기에 본인도 자기의 본얼굴
을 모른다 한다.
반면에 미모가 현저히 뒤떨어지거나 나이가 많은 노파의 경우에는 미혼섭혼술
(迷魂攝魂術)을 사용하여 환상정사(幻想情事)를 일으켜 밤새도록 무영공공과
격렬한 방사를 나눈 걸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 경우에는 다소 비릿한 내음 외에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너무나 깊었던 열락을 인세에서 느낄 수 있게 해 준 공공무영이 너
무도 고마워 아무도 고발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인들은 거의 한 달 동안 거동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은연중에 매화향이 나는 여인은 그렇지 않은 여인에 대하여 미모가 뛰
어나다는 우월감을 갖도록 하였으며, 무영공공에게 기진이보의 위치 이동을
당했다고 소문난 저택에선 매화를 무더기로 구입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
나곤 하였다.
후일담이지만 매화향이 나는 여인들 중 유부녀는 한 사람도 소박을 맞지 않았
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장안에 매화향을 내는 향수가 너무도 유행하여 거의 모든 여인이
사용하였기에 남편들이 구별을 할 수 없었대나 뭐라나?
덕분에 남자들은 장안의 모든 여인들 몸에서 매화향만 나자, 매화향에 질려
버렸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다만 한 가지, 많은 처녀들이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매일 밤 무영공공이 다시
 한 번 오기를 눈이 빠져라 기다려서 많은 총각들이 애를 태웠다고 한다.
천변만화제종술은 온갖 잡학의 총집합체인데, 이 안에는 역용약이나 인피면구
를 사용하지 않고 얼굴의 근육을 움직여 마음대로 모습과 안색(顔色)을 바꾸
는 천변역용술(千變易容術), 골격(骨格)을 세 살 난 아이처럼 줄이는 축골공(
縮骨功), 십 척 장신으로 늘리는 확골공(擴骨功), 목소리를 바꿔 주는 변성술
(變聲術), 입을 열지 않고도 말을 하는 복화술(複話術), 말하는 사람의 입술
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는 독순술(讀脣術), 내공으로 다른 사람
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전성술(傳聲術), 한꺼번에 여러 사람에게 의사
전달을 할 수 있는 전음밀입(傳音密入), 그리고 전음을 하되 어디에서 전음을
 하는지 알 수 없게 하는 육합전성술(六合傳聲術) 등과 잠입 및 탈출 시에 요
긴하게 사용되는 무영은법(無影隱法), 천시지청술(天視地聽術), 귀식대법(龜
息大法), 무영보법(無影步法), 벽호공(壁　功), 무영공공의 본업인 금약개폐
술(金　開閉術)과 신투술(神偸術) 등이 실려 있다.
또한 태양진결에서 유래한 각종 무공이 있는데…….
태양도법(太陽刀法).
이 도법은 모두 연환사십팔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연환해 펼치면 일 초
의 도초가 되는 뛰어난 도법으로, 도세(刀勢) 주위로 은은한 홍광이 어리며
화염이 파생되므로 그 위력이 매우 크다.
십이 성을 이루면 도인(刀刃 : 칼의 날 부분)에서 뜨거운 화염이 동반된 도강
(刀　)이 나오게 된다.
불(火)은 독(毒)과 상극이므로 독공을 펼치는 자에게 특히 강한 도법이다.
태양곡의 곡주를 상징하는 신물인 열화강석(烈火鋼石)을 특별히 제련하여 만
든 태양신도(太陽神刀)를 사용하였을 때 그 위력이 가장 크다.
태양장법(太陽掌法).
태양장법에는 전삼식과 후삼식, 여섯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일초 태양순수(太陽純粹),
제이초 태양붕벽(太陽崩壁),
제삼초 태양쇄혼(太陽碎魂),
제사초 태양회륜(太陽回輪),
제오초 태양폭격(太陽爆擊),
제육초 태양파천(太陽破天).
전삼식은 태양과 같이 뜨거운 극양기류가 섞여 있는 보통의 장법인데 반해,
태양회륜은 태양강기를 마치 륜처럼 만들어 고속으로 회전시켜 적의 허리나
목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초식이다.
상처를 입을 때 너무도 뜨거운 열기에 살점이 지져져서 혈액이 증발되어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게 된다.
다행히 태양회륜의 초식에 목숨을 잃지 않게 되더라도 화상으로 인한 흉터는
영원히 남는다.
태양폭격은 극양의 강기를 허공에 분사시켜 방원 십 장의 범위에 떨어지게 하
는 초식으로, 마치 화탄을 터뜨린 것 같은 위력을 보인다.
태양파천은 글자 그대로 하늘을 찢어발길 듯한 위력을 보이는데… 태양파천이
 시전되면 극양의 열기에 방원 삼십 장의 범위 안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
루는 물론 바위까지 온통 녹아 내려 아무것도 살 수 없는 땅이 돼 버린다.
태양지(太陽指).
태양지는 극양의 열기를 수반한 지공으로 섬전의 속도로 시전되며, 시전할 때
 쇄애액!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지법에 격중되면 살이 타는 내음과 노릇한 냄새가 나 적으로 하여금 공포
감을 느끼게 하여 대결 의지를 현저히 떨어지게 만든다.
태양보(太陽步).
태양보는 쾌속함을 위주로 창안되었기에 적과 조우 시 순식간에 여덟 개의 환
영을 만들어 내 적으로 하여금 어떤 것을 공격해야 할지를 모르게 한다.
적이 어리둥절할 때 태양장법이나 태양도법, 태양지로 공격을 하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태양신공(太陽神功).
태양신공은 제일대 태양곡주인 태양대제(太陽大帝) 군범추(君凡秋)가 창안한
무공이다. 그는 어릴 적에 이름 모를 과일을 잘못 먹은 후 늘 추위에 떨면서
지냈다.
이 추위를 이길 방법이 없는가 생각하다 용암이 용솟음치는 활화산 근처에 있
으면 일 년 사시사철 추위에 떨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천지사방을 헤맨 끝에
지금의 태양곡 내 활화산의 화구(火口) 부근에 용암동굴이 있는 것을 발견하
여 그곳에 머물다 무릇 남자가 가진 양기를 극대화시킨다면 추위를 이길 것이
란 생각을 하였고, 그 방법을 연구하여 창안된 무공이다.
태양신공을 속성하기 위해선 극양열지(極陽熱池)에서 천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 태양신목의 과실인 태양신과(太陽神果)나 이화삼안괴룡(裏火三眼怪龍)의
 내단 등을 복용하여야 한다.
또한 하늘이 내린 기연을 얻을 수만 있다면 속성을 할 수가 있다.
태양신공을 십이 성 이루게 되면 체내로 들어온 독이 체내에서 저절로 반응하
는 순양열기에 타 버리므로 만독불침지체(萬毒不侵之體)를 이루게 된다.
다만 몸 안의 양기가 너무 강해, 기연을 얻어 극음신과(極陰神果)를 복용한
여인이 아니라면 일처(一妻)만 두었을 경우엔 여인의 몸 속에서 음양의 조화
가 너무 양으로 기울게 되므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므로 최소한
 삼처사첩은 두어야 한다.
태양신공을 익히는 사람은 몸 안의 양기가 늘 들끓고 있게 되므로 모든 독에
는 강하나, 다만 최음제(催淫製)나 춘약(春藥) 종류에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므로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색마(色魔)의 누명
을 쓰기 쉽다.
태양신공을 익혀야 태양도법과 태양장법, 태양지, 태양보법을 익힐 수 있다.
"음, 이 비급에 있는 무공들을 익히면 정말 세상을 희롱하는 신투가 될 수 있
겠구나. 그리고 이제 어떤 과두문이라도 다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 무극양의
심법대로 하니, 정말 두 가지를 한 번에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거야말로 내게
 있어서 하늘이 내린 기연이다. 내일부턴 오늘 골라 온 책들을 본격적으로 공
부해야겠다."
제갈천은 점점 무공에 대해 심취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날씨가 제법 쌀쌀하여 한기가 드는 듯하니, 태양심법대로 운기행공을
 해 봐야겠다."
제갈천은 태양심법을 운용하여 대주천을 해 보니, 몸 안에서 훈훈한 양기가
들어 한기를 잊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3


"공자님, 소녀 추하이옵니다. 어제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낚싯줄을 가져왔사옵
니다."
추하가 낚싯줄을 가져왔다 이르자, 제갈천은 방문을 나서며 환한 웃음을 지었
다.
"하하… 우리 하 누이가 어제처럼 또 손맛을 보고 싶은 게구나? 좋아, 지금
한 번 잡아 보자!"
추하와 제갈천이 굵은 낚싯대와 낚싯줄을 준비하여 낚싯대를 드리우고 약 반
각의 시간이 흐르자, 다시 낚싯대에 신호가 왔다.
"하 누이! 물렸어, 물렸다고! 빨리 와서 이것 좀 잡아!"
제갈천과 추하가 낚싯대를 잡고 씨름을 시작한 지 약 일각의 시간이 흘렀다.
제갈천과 추하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흘러내렸으나 낚싯대는 좀
처럼 들어올려지질 않았다.
"으응? 이게 도대체 뭔지 몰라도 엄청나게 큰 놈인가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힘이 좋을 수가 없잖아?"
"공자님, 조금만 더 힘을 써 봐요!"
추하가 말하는 순간 낚싯줄은 어제처럼 팽!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져 버렸고,
 제갈천과 추하는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에이, 힘만 들고 오늘도 잡질 못했어! 옷도 다 버리고… 어떤 놈인지 몰라도
 내 이놈을 언젠간 꼭 잡고 말겠어."
제갈천은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면서 다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하 누이! 오늘도 틀렸으니까, 진 총관한테 말해서 제일 굵은 낚싯대와 낚싯
줄, 그리고 낚싯바늘을 준비해 달라고 해!"
"알았습니다, 공자님. 저도 그게 뭔지 꼭 잡아서 보았으면 좋겠어요. 지금 당
장 준비하라고 할까요?"
"아니야.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준비하라고 해!"
다음 날 아침, 제갈천은 아버지 제갈휘에게 아침 문안을 하기 위해 자란원을
나서서 가고 있었다.
"소주!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자란원 안의 연못에 뭔가 큰 고기가 있나 봅니
다. 추하 아가씨가 굵은 낚싯줄을 구해 오라 해서 아침에 고래를 잡을 때 쓰
는 심해교룡의 힘줄을 꼬아 만든 교룡삭을 준비하였으니, 다시는 끊어지지 않
을 겁니다. 잡으시면 제게도 보여 주시지요."
"응? 진 총관도 안녕히 주무셨소. 교룡삭이라면 다시는 끊어지질 않을 테니,
그놈을 잡으면 내 진 총관에게 꼭 보여 줄게."
"공자님! 어제 공자님이 먹을 것과 입을 것, 잠잘 곳을 마련해 줘라 했던 거
지 영감이 너무도 고맙다며 공자님께 인사를 드리겠다고 떼를 쓰니… 한 번
만나 보시겠습니까?"
"아냐. 자고로 성현 말씀에 선행을 베풀 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
게 하라고 했으니, 괜찮아."
그때 신태비범하고 비쩍 여윈 노인이 흰 수염을 휘날리며 제갈천에게 다가왔
다.
"공자님께 감사드립니다."
"할아버진 누구세요? 누구신데 제게 인사를 하십니까?"
"공자님 덕분에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삼십 년 만에 처음 목욕이란 걸
했습니다. 그리고 어젯밤엔 처음으로 편안한 비단 이불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럼 할아버지가 어제 본 그 거지 영감입니까?"
"그렇습니다."
"으와… 옷이 날개라더니 정말 못 알아보겠네. 어디 가서 유림의 대학자라고
말해도 누구나 믿겠어."
사실 눈빛이 형형한 이 거지 영감은 개방(　　)의 매듭이 아홉 개인 개방 배
분 최고의 전임 방주로, 현 방주인 철혈신개(鐵血神　)의 사조이며 그의 외호
는 천지신개(天地神　)이다.
그는 십여 년 전 개방의 소식통으로부터 호국장군부인 이곳 의천장에 남들이
알지 못하는 한 명의 천고기재가 자라고 있음을 알아 내곤 십여 년 간 계속하
여 북경성 내에 머물러 왔다.
그의 성격은 해학적이며, 무공은 현 무림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높으며, 천기
를 헤아리는 혜안을 갖고 있어 의천장 내의 기재가 앞으로 다가올 천하의 겁
난을 해소할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제갈천과 인연이 맺어지기를 기다려
왔다.
어제 우연히 경서서원을 향하던 제갈천의 눈에 띄어 의천장으로 들어온 천지
신개는 본래 질색인 목욕을 오로지 제갈천을 만나기 위하여 진 총관의 명령에
 따른 시비들의 시중을 들어 가며 목욕을 하였는데, 수십 년 동안 목욕을 하
지 않아서 무려 사십여 통의 더운 물을 구정물로 만들고서야 본색을 찾았다.
갈색 수염은 선풍도골의 백색 미염(美髥)으로 바뀌었고, 입었던 누더기를 벗
어 던지고 유림의 유생들이 즐겨 입는 백삼으로 갈아입자 꾀죄죄했던 외모는
유림의 대학자처럼 고아하고도 위엄이 넘치는 풍모로 바뀌었다.
그래서 진 총관조차도 목욕을 하고 시비들의 안내를 받아 온 천지신개를 유림
의 대학자인 줄 알고 최고의 예의를 갖춰 접견을 하였던 것이다.
"할아버지! 앞으로도 배가 고프거나 잠잘 곳이 없으면 여기 와서 진 총관한테
 달라고 그러세요. 이렇게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으니까, 정말 멋있네요."
"공자님! 공자님께서 보잘것없는 이 노인에게 아렇게 후의를 베풀어 주셔서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보잘것없지만 제가 공자님께
드리는 선물이니, 받아 주십시오."
천지신개는 아직 무림에 대하여 하나도 모르는 제갈천에게 경어를 써 가며 조
그만 묵죽으로 만든 패를 건네 주었다.
이 묵죽패는 개방의 최고 배분을 의미하는 묵죽령(墨竹令)이었다.
이를 지닌 자는 개방의 방주에게도 명령을 내릴 수 있으며, 육십만 개방 제자
들의 생사여탈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개방 최고의 영패이다.
흘깃 묵죽패를 본 진 총관은 눈빛이 변하고 얼굴색이 변했다.
사실 의천장의 총관인 천유환사(天儒幻師) 진수명(珍秀明)은 젊은 시절 제갈
휘에게서 목숨을 구원받은 후, 그의 인품에 이끌려 자칭하여 가신(家臣)이 된
 무림의 고수였다.
그의 출신 문파는 한때는 천하를 호령하였으나 이제는 쇠락해 버린 전진교(全
眞敎)이고, 그는 전진교의 일맥을 이어오는 제삼십팔대 전진장교(全眞長敎)의
 신분이다.
그는 제갈휘의 가신으로 들어와 제갈휘와 수없이 전장을 누비는 틈틈이 전진
교를 부흥시킬 천하 기재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선화대부인 설부용이 의천
장을 사들일 때 의천장으로 돌아와 의천장의 중건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제갈휘의 아들인 제갈천이 성장함에 따라 제갈천이 그가 그렇게도 찾아
헤메던 천고의 기재임을 알아 내곤 너무도 기뻐 은연중 전진교의 모든 것을
물려주려 하였다.
그러나 제갈천이 무(武)에는 뜻이 없고 문(文)에만 정진하기에 안타까워하고
있던 중이다.
그런 그가 제갈천에게 개방 최고의 묵죽령이 전해지는 것을 보자, 이제는 제
갈천에게 무공의 연(緣)이 열리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여 너무도 기쁜 나머지
 그만 눈빛이 변하였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던 것이다.
진수명은 너무도 바쁜 일이 많아 장원의 하인에게 거지 영감에 대한 것들을
일임하여 그가 개방의 구결제자 신분이란 걸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진수명은 묵죽령을 보고 천지신개의 신분을 파악하고 아무 조건 없이
묵죽령을 전하는 천지신개의 호기에 감탄을 하여 그를 대하는 태도가 종전과
는 판이하게 정중해졌다.
그렇지만 제갈천 앞에서는 천지신개가 무림인이고 개방의 전임 방주인 것을
밝히지 않길 원하는 것 같아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노인장, 저희 공자님에게 선물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지신개도 곧 그의 의중을 알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허허… 공자님이 이 거지 노인에게 베푼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제갈천은 이리저리 묵죽령을 뒤집어 가며 살펴보았다.
"응? 앞에는 <령(令)>이라고 한 글자만 크게 쓰여 있고, 그 아래에는 눈으로
잘 안 보이는 아주 작은 점이 몇 줄 있고, 뒤에는 노인의 그림이 그려져 있네
. 누가 그렸는지 정말 잘 그렸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제갈천에게 묵죽령을 넘겨 인연의 끈을 만든 천지신개는 제갈천과 헤어져 돌
아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진 총관도 장내 다른 일로 바쁘다며 돌아섰다.
아버지 제갈휘를 찾은 제갈천은 문안인사를 올렸다.
"아버님!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오늘 아버님께 드릴 청이 있습니다."
"오, 우리 천아가 왔구나. 그래, 청이 무엇이냐?"
"예, 아버님. 소자는 무공과 무림이라는 곳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버님! 소자에게 음양신과, 공청석유, 인형설삼, 만년하수오, 천년설련실,
만년금구의 내단, 묵린독각괴룡의 내단을 사 주세요."
"……!"
이 말을 들은 제갈휘는 무림과 무공이라는 말에는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뒤
의 말을 들을 땐 눈이 점점 커지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으며, 나중엔 어이없다
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제갈휘의 표정이 바뀌거나 말거나 제갈천은 태양심법이 생각나서 다시 청을
했다.
"그리고 아버님! 태양신과 하고 이화삼안괴룡의 내단도 사 주세요."
제갈휘는 둥그렇게 커진 눈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 뭐라고? 음양신과, 공청석유, 그리고 묵림독각괴룡의 내단?"
"그렇습니다."
"하하하… 이 녀석이 아침부터 아비를 놀리는구나. 이 녀석아, 그런 것들에
대해서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모르나… 그런 귀한 것들은 인세 삼천겁에 단
한 번, 한 가지라도 만나는 게 얼마나 큰 하늘의 기연인 줄 알고나 하는 소리
냐?"
"……?"
"이 녀석아! 그건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물건들이다. 이 아비가 비록
대명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는 하나 결코 구해 줄 수 없는 귀물(貴物)이
니, 단념토록 하여라. 대신 진 총관에게 말해서 네게 강호무림과 무공에 대하
여는 말해 주도록 할 테니, 자란원에 가서 기다리도록 하여라."
아버지 제갈휘에게서 일언지하에 자기가 말한 물건들 중 단 한 가지도 구해
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실망하며 돌아서는데.
"흠, 천아야! 어쩌면 황궁비고(皇宮秘庫)에는 네가 말했던 것 중 한 가지쯤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 말에 제갈천은 환한 얼굴로 얼른 되돌아섰다.
"아버님, 그럼 아버님이 황상폐하께 말씀드려 그걸 얻어 주실 순 있죠?"
"흠, 그건 어려울 거다. 그것들은 워낙 귀한 보물이라 황상께서도 쉽게 허락
하진 않으실 것이다."
"그럼 그런 것들은 정말 얻기가 힘들겠군요. 알았습니다. 그럼 소자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물러서는 제갈천의 눈에 희미한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진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후후… 이번에 치러지는 어전시(御前試)에 장원을 하면 어쩌면 소원을 이룰
수도 있겠구나.'

[덕산]

잘 보고 갑니다.

[얼음골]

즐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수퍼맨]

잼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