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김희준(1994~2020)-
장면을 스케치한다는 건 문구점에서 연필을 슬쩍하는 것만큼 스릴 있다는 얘기지
가령 실직한 아빠를 공원에서 마주칠 때의 동공이라거나 내가 사실 세탁소 아저씨의 딸이라 말하는 엄마의
성대라거나 길에서 여자에게 뺨을 맞는 오빠를 본다거나 그 여자와 같은 산부인과를 공유하는 언니가 비밀이
라며 나에게 5백 원을 쥐여주는 사실을 연필로 그리는 순간들 말이야
둘러앉은 식탁에서 우리는 비어버린 가족과 허기진 소통을 나누어 먹지
그러면 나는 부러진 연필을 깎고 쓰다만 일기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어 최대한 둥글게 색을 칠하고 완성된
일기를 북북 찢었지 기겁하는 엄마가 소리를 지른다
―엄마 우리는 콩가루야 삼류도 못 돼 바람 부는 날 콩처럼 굴러가버릴 거야 저 밑으로 더 밑으로 새파랗게 어
린 년이 말 많다 하지 마 공부는 연필이 알아서 하거든 지금 내가 그린 우리 가족처럼 말이야
연필 밑으로 스케치로 된 풍경이 어그러지고 나는 연필을 깎고 닳은 연필을 보다가 문구점으로 향하지
오늘은 어떤 순간을 그려볼까 고민하며 연필을 슬쩍하는데 눈이 마주쳤어 그래서 말인데 문구점에서 전화가 와
도 그 아줌마를 믿지 말았으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