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204>
□아! 킬리만자로
산이 좋아 산에 다닌 지 40여 년, 나는 내가 몸담고 있는 숭악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9차례 해외산행을 했다. 백두산, 일본 북알프스,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페루 마추픽추, 네팔 칼라파타,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2회), 뉴질랜드 밀포드 트랙, 캐나다 로키에 갔다.
다음 글은 25년 전 킬리만자로(Kilimanjaro) 등반 때 쓴 기록이다. 어느새 세월이 많이 흘렀다. 추억 소환이다.
#1. 1999년 1월 16일 일행 18명(남13, 여5)은 4계절 옷과 먹을 것, 등산장비가 든 큰 짐을 갖고 꿈에 그리던 킬리만자로 등반을 위해 멀리 아프리카로 간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요하네스버그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아프리카 대륙을 종단하여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공항에 착륙했다. 김해공항에서 여기까지 비행기 탑승시간 16시간 15분.
지금부터는 미니버스를 타고 킬리만자로 자락에 있는 탄자니아의 아루샤로 간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산이라곤 보이지 않는 광활한 대지에는 건기라 잡초도 말라있다.
국경 마을 나망가에서 출입국 수속을 밟는 1시간여 동안 조잡스런 조각품과 액세서리를 팔고자하는 마사이족의 집요함에 시달려야 했다.
밤 9시, 긴 여정 끝에 최고급 호텔인 노보텔(NOVOTEL)에 짐을 풀었다. 산에서 고생하는 만큼 숙소는 좋은 곳을 사용한다. 늦은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환영의 뜻으로 여가수가 기타 반주에 맞추어 민속노래와 함께 ‘킬리만자로 송’을 불러주었다. 낭만이 가득한 밤이었다.
#2. 해발고도 1,350m 휴양지 아루샤의 아침은 상쾌한 공기, 정원에 핀 아름다운 꽃으로 너무나 좋다. 오전 9시 30분, 버스를 타고 킬리만자로 등반기점인 마랑구게이트로 향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 정상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세로 50㎞ 가로 30㎞, 산자락을 감싸는 둘레가 무려 580㎞인 방대한 규모의 산이면서도 산맥을 형성하지 않은 유일한 산, 고도에 따라 4가지 기후대가 공존하는 산, 모든 산악인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 그래서 전 세계로부터 매년 1만 명(우리나라는 1백 명) 정도 찾아오지만 정상 등정 확률은 30%선에 불과한 힘겨운 산에 나는 도전하는 것이다.
산장 숙소의 한계로 매일 60명만이 입산할 수 있고, 적어도 6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엄청난 입산료를 받는데 산장을 더 지으면 더 많은 수입이 생기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킬리만자로는 영원한데 사람이 많이 오면 자연이 훼손된다.”고 관리자가 대답했다. 킬리만자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탄자니아 정부의 여유로운 정책이 부러웠다.
#3. 우리들의 산행을 도와줄 수석가이드 1명, 가이드 3명, 포터 36명 등 모두 40명이 확정되어 우리 일행은 무려 58명으로 불어났다.
킬리만자로(Kilimanjaro)는 킬리마(Kilima 산)와 은자로(Njaro 위대함)의 합성어로 ‘위대한 산’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모든 준비가 끝나 산을 오르기 시작한 것은 오후 1시 50분. 5박 6일 간의 본격적인 등반이다. 포터들은 꽤나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메고 앞장서서 올라가기 때문에 산행 중 요긴한 겉옷, 비옷, 수통, 비상식 등은 자기 배낭 안에 있어야 한다.
내려오는 사람들과 마주치면 그들은 “잠보! 뽈레 뽈레!”라고 인사하면서 행운을 빌었다. 잠보는 ‘안녕하세요?’ 뽈레는 ‘천천히’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뽈레 뽈레는 등산구호이다. 빨리 오르면 고소 적응이 힘들어 실패하기 쉽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를 1시간 동안 맞으며 천천히 걷고, 밀림을 통과하여 첫날 숙박지 만다라산장에 도착했다. 먼저 온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쉬고 있다. 젊은 연인들도 있고 노부부도 있다.
키 작은 풀이 곱게 자란 둔덕에 자리 잡은 이곳 산장은 모두 목조 건물로, 식당을 중심으로 4~6인용 A자형 방갈로가 15채 늘어서 있다. 산장 취침시간은 9시, 태양열로 켠 희미한 백열등 불빛아래서 오지 않은 잠을 청했다. 킬리만자로 품속에서의 첫날밤이다.
#4. 식빵, 버터, 잼, 계란 프라이, 삶은 감자, 과일, 커피 등으로 기분 좋게 아침식사를 하고, 매점에 가서 1.8ℓ짜리 생수 두 병을 샀다. 한 병 5천 원. 나는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그 만큼 보충해야 하고, 고산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도 물을 많이 먹어야 한다.
아침 8시 25분 산장을 떠나 원숭이들이 놀고 있는 숲길을 30분 정도 걸어 언덕에 오르니 멀리 흰 모자를 쓴 듯한 킬리만자로가 버티고 있다. 언덕을 내려오니 길은 다시 완만해지며 초원지대가 끝없이 펼쳐진다. 연두색 수염이 있는 ‘노인수염’이라 불리는 나무와 파인애플 같은 열매가 달린 ‘세네시오스’라는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차양이 넓은 모자를 썼는데도 목덜미와 귀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다. 다시 선크림을 짙게 바르고 스카프로 가렸다. 대기가 깨끗한 고지대여서 자외선이 강해 피부가 노출되면 뜨겁지 않은 데도 화상을 입게 된다.
둘째 날 숙박지 호롬보 산장에 7시간 걸려 도착했다. 이곳은 베이스캠프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산장으로 오르는 사람이나 내려가는 사람이 반드시 묵는 곳으로써 숙박시설이 가장 크다(120명 수용). 밤이 되니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잠 못 이루는 밤에 방갈로를 때리는 세찬 바람은 고독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5. 어김없이 6시 기상. 해맑은 아침. 간밤에 내린 눈으로 킬리만자로 정상은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 오늘은 고소 적응일. 킬리만자로의 외로움을 달래주듯 동쪽에 높이 솟은 마웬지봉(5,100m) 쪽으로 다녀왔다. 눈밭에서 끓여 먹은 라면은 꿀맛이었다. 저녁 미팅 후 날씨도 포근하여 산장 밖에서 쏟아지는 별빛을 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6. 7시 45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무인산장인 키보산장(4,703m)을 향해 출발한다. 길가에는 불에 탄 관목 사이로 에버레스팅(에델바이스와 비슷)이라는 하얀 꽃이 즐비하다. 이름 그대로 생존의 의미를 초극한 듯 억센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실개천이 흐르는 Last Water Point(4,080m)를 지나 4,200m 고지에 이르니 보이는 것은 검붉은 색깔의 대지와 드문드문 놓인 바위 덩어리뿐, 광활하고도 황량한 황무지 길이 펼쳐진다. 마치 화성에 온 듯한 느낌이다. 대원들은 말을 잊은 지 오래다. 바람과 구름 사이로 그저 걷고 또 걸을 뿐이다. 끈질긴 인고를 요구하는 수행길과 같은 산악사막지대를 통과하고, 마지막 오르막길을 걸을 때는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정말 힘들었다.
악전고투 7시간 만에 마지막 산장인 키보에 도착했다. 일찍 온 대원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 해 주었다.
정상에 오르려면 밤 11시에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저녁을 4시에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옷을 겹겹이 입고 침낭 속에 들어갔다. 수면 중에도 체온을 유지해야 하고 특히, 머리 부분의 체온을 뺐기면 치명적인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여 방한모까지 썼다. 그러나 시간 리듬도 맞지 않고 고소현상으로 잠이 제대로 올 리 없다. 어쩌면 누워서 쉰다고 하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7. 밤 11시에 일어나 간단하게 식사하고 12시 10분, 산장 앞마당에 모였다. 같은 방을 사용한 2명의 스웨덴인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 바로 내려간다고 하면서 여전히 누워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산에 가면 죽을 각오로 정상에 오르지만, 서구인들은 산을 즐기는 경향이 강하여 굳이 무리를 하지 않고 키보 또는, 길만스 포인트까지의 등정만으로도 만족한다고 한다.
우리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정상 등정의 결의를 다짐했다. 바람도 없고 춥지도 않은 너무나 좋은 날씨다. 행운이다. 기후가 급격하게 변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가이드가 진지하게 주의사항을 전달한다. “지금부터는 가이드만 동행한다. 땀이 안 날 정도로 천천히 걸어라. 누구도 자기 앞으로 나서지 말라. 킬리만자로는 오만한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지금도 누군가를 부르고 있다. 그 부름에 대답하면 살아서 내려오지 못한다.”고 한다. 적도 하늘의 희미한 달빛과 별빛을 받으며 어둠을 뚫고 정말 천천히 걸었다.
한스 마이어 동굴(5,151m)을 지나 화산재로 덮인 지그재그로 된 70도 경사의 지옥길과 같은 가파른 길을 오른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현기증이 날 때는 걸음을 멈추고 스틱을 두 손으로 잡고 그 위에 머리를 떨구곤 했다.
화산재 길이 끝나고 암릉에 오르니 분화구 가장자리인 길만스 포인트(5,685m)가 눈앞에 보이고 먼동이 텄다. 잠시 후 지평선이 오렌지색으로 변하고 하늘에 깔린 구름도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 점점 진해지고 넓게 퍼진다. 태양은 엷은 구름 속에 있으나 광채는 찬란하게 쏟아졌다. 이곳에서 바라본 일출의 장엄한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평소 산행 때는 일행의 후미에서 걷던 나였지만, 이때는 어찌 된 일인지 가이드 바로 뒤에서 걸었고, 앞서 가던 그가 길을 내 주어 길만스 포인트에 맨 먼저 첫발을 내딛는 기쁨을 맛보게 해주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정상 우후루피크까지 가기로 했건만 3명은 여기서 심한 고소증세로 하산했다. 안타까웠다.
#8. 우후루피크로 가는 길, 비교적 완만하였고 눈으로 덮였으나 아이젠을 찰 정도는 아니었다. 오른쪽 아래는 거대한 분화구, 장구한 세월 동안 형성된 빙원지대가 한 눈에 보인다. 헤밍웨이는 ‘킬리만자로의 눈’ 프롤로그에서 이곳에 얼어붙은 한 마리의 표범 시체가 있다고 했는데 찾지 못했다. 천근 같은 발걸음, 이제부터는 신의 뜻이다. 킬리만자로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기를, 그리고 그 부름에 대답하지 않기를 빌 뿐이었다.
드디어 킬리만자로 정상, 해발 5,895m 우후루피크에 서다. 1999년 1월 22일 오전 8시 48분. 나는 해냈다. 태양이 달구어 놓은 검은 대륙에 우뚝 솟은 하얀 지붕, 더 오를 곳이 없는 아프리카의 최고봉에 선 것이다. 킬리만자로의 신은 모진 시련을 안겨 주며 철저한 경배를 요구했고, 꾸준히 인내한 나에게 정상 등정을 허락해 주었으리라.
우리들은 서로 서로 얼싸안고 감격에 겨워했다. 지난 2년 동안의 준비와 체력 강화를 위한 등반 훈련, 가족들의 걱정하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광활하게 펼쳐진 분화구와 깎아지른 빙하벽, 눈부신 설원이 신비롭고 장엄하다. 태극기와 숭악회기를 흔들고,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르고, 만세 삼창을 했다.
1시간(늦게 온 사람은 20분 정도) 머무른 뒤, 눈 아래 펼쳐진 운해를 보면서 하산을 시작했다. 대원 전체가 상당히 지친 상태였지만 고소에 대한 부담이 없어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 키보 산장에서 포터가 준비해둔 따끈한 차를 마시고, 라면을 끓여 먹고 다시 출발, 좁쌀 같은 우박이 떨어지는 광야 지대를 지나 오후 5시 20분 호롬보 산장에 도착했다. 오늘의 산행 시간은 17시간 10분이었다.
산장 양지바른 풀밭에서 실로 오랜만에 대원들과 맥주를 마시며, 산 아래의 광활한 조망을 즐기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담소를 나누었다.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저녁 짓는 연기는 산장과 조화를 이루어 한 폭의 그림 같다.
#9. 호롬보를 떠나 만다라를 거쳐 마랑구게이트로 직행, 이틀 올라간 길을 6시간 40분 만에 내려왔다. 구조대가 급히 산을 오르고 있다. 가이드 한 명이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한다. 수없이 오르내린 그들에게도 킬리만자로는 높고 먼, 오르기 힘든 곳이었던 모양이다.
탄자니아 국립공원청장, 킬리만자로 국립공원관리소장, 수석가이드가 연서한 우후루피크 등정증명서를 받았다. 그동안 동고동락했던 가이드, 포터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팁도 그들이 만족할 만큼 주었다. 엿새간의 중노동의 대가로 포터들은 5~6만원 받는다고 하니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우리들이 쓰던 스카프와 여분의 옷을 기념으로 주었더니 무척 좋아했다. 공원 입구에 있는 술집에 들려 맥주를 마시면서, 그들로부터 틈틈이 배웠던 킬리만자로 송과 우리가 가르쳐 주었던 아리랑을 함께 부르면서 아쉬운 이별의 순간을 보냈다. 흑인의 고향에서 이루어진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적인 만남이었다. 아루샤로 돌아가는 길, 운해로 뒤덮인 킬리만자로가 우리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보내고 있다.
#10. 호텔에 짐을 풀었다. 오로지 정상에 오르기 위해 금기사항을 지키느라 머리 한 번 안 감고 면도까지 안 했는데, 목욕하고 나니 새 모습이 되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뜻밖에도 자랑스러운 한국인 정성훈씨를 만났다. 그는 서강대 역사과를 졸업하고 아프리카 여행을 하다가 이곳이 좋아 눌러앉게 되었고, 지금은 5년 임기의 킬리만자로 구조대장을 맡고 있다. 그는 우리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쌀밥과 김치찌개, 멸치볶음 등 귀한 음식을 대접했다. 그는 바나나 농장을 갖고 있으며 하인을 7명이나 두고(한 명 월급이 100달러) 넓은 정원이 있는 좋은 집에서 왕처럼 살고 있었다.
#11. 오늘은 케냐로 가서 사파리 하는 날. 우리가 가는 곳은 킬리만자로가 한 눈에 보이는 암보셀리 국립공원. 헤밍웨이가 작품을 구상하고 사냥을 하고 인생을 즐긴 곳. 한때 텐트 200여 개를 세우고 영화 ‘모감보’를 촬영하기도 했던 곳이다.
코끼리 버팔로 누 얼룩말 영양 하마 기린 원숭이 하이에나 사자 톰슨가젤 등을 보았다. 염소 머리와 소의 몸과 말 꼬리를 가진 동물인 ‘누’가 제일 많았고, 하이에나가 가장 무서웠다. 지평선의 일몰이 장관을 이룬다. 밤에는 로지에서 마사이족의 쇼를 관람했다.
갈 때와 역순으로 비행기를 타고 1월 27일 밤 8시 45분 김해공항 도착, 마중 나온 산우와 가족들의 환영을 받으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우리들은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만큼의 비행거리로 킬리만자로를 다녀왔다. 총 비행시간 43시간 05분, 총 산행시간 48시간 40분, 총 산행거리 111㎞.
첫댓글 25년전 킬리만자로 여행기록 잘봤습니다. 25년전 젊었을때의 모습이라 아주 좋아 보입니다.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여행! 축하드립니다.
나는 1999년 유럽을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한 해이었다. 우리들은 8월에 다녔는데 겨울이었네. 국내외 산행을 즐기는 모습 너무나 좋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