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2.9.25) 말씀 /고전 12:31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오늘은 사랑의 은사에 대해서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자녀들이 컸을 때 어린 시절 기억나는 순간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거나 누군가에 사랑을 받았던 그 때만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호스피스들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어보면 돈, 공부, 운동, 출세 .. 이런 내용이 아니라 사랑하지 못한 것을 제일 많이 후히 한다고 합니다. 가족들을 좀더 사랑해주지 못한 것, 아내를 좀 더 사랑해주지 못한 것, 좀 더 자녀들을 사랑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가난하게 살았어도 사랑하며 산 사람은 후회하지 않는데 억만장자가 되었든, 세상이 알아주던 권력자가 되었든 사랑하며 살지 않은 사람은 마지막에는 눈물을 흘리며 후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학자이며 신학자인 토니 캄폴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을 때 자기가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면서 죽지 않고, 사랑하며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죽는다.“ 2011년 10월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난 스티브잡스 죽으면서 유언이 담긴 동영상을 남겼습니다. 그 동영상에는 부를 쫓는 삶의 끝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내용 일부가 이렇습니다. "나는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성공의 끝을 보았다. 타인의 눈에 내 인생은 성공의 상징이지만, 일터를 떠나면 내 삶에서 즐거움은 많지 않다. 결국 부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하나의 익숙한 사실일 뿐이었다. 병들어 누워 과거의 삶을 회상하는 이 순간,나는 깨닫는다. 자부심을 가졌던 사회적 인정과 부는 결국 죽음 앞에 희미해지고 의미 없다는 것을. 어둠 속 나는 생명 연장 장치의 녹색 빛과 윙윙거리는 기계음을 보고 들으며 다가오는 '죽음의 신'의 숨결을 느낀다. 이제야 나는 깨달았다. 생을 유지할 적당한 부를 쌓았다면 그 이후로는 부와 무관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예를 들어 관계 아니면 예술, 젊었을 때의 꿈과 같은 것 말이다 끊임없이 부를 추구한다는 것은 결국 나와 같은 비틀린 개인만 남는다. 신은 우리에게 부가 가져오는 환상이 아닌 만인이 가진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감각(senses)을 선사했다. 내 인생을 통해 얻은 부를 나는 가져갈 수 없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 넘쳐나는 기억들뿐이다. 그 기억들이야말로 나를 따라다니고, 나와 함께하고, 나에게 지속할 힘과 빛을 주는 진정한 부이다. 스티브스도 사랑만이 남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로마의 휴일로 유명한 여자 배우는 오드리 헵번은 오히려 은퇴 후 노후의 삶을 더 아름답게 산 사람입니다. 말년에 오드리 햅번이 유니세프 홍보대사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며, 굶주림에 허덕이는 전 세계의 어린이들을 위한 일에 모든 것을 헌신하였습니다. 심지어 대장암으로 인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치료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부족한 상황에서 아프리카로 달려갔습니다. 말기 대장암의 고통 속에서도 인류를 위한 봉사활동에 전념하던 오드리 햅번은 세상을 달리하기 1년전 크리스마스 이브 때 두 아들에게 Sam Levenson의 'Time-tested Beauty Tips'라는 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남겼습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야 하며,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명 배우였던 그녀를 아름답게 만들고, 그의 삶을 아름답게 한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잘 대변해주는 시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삶과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고 기적을 창조합니다. 가정이나 사회제도, 교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교회나 가정의 공통점은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모임이나 조직은 건강하고 오래가지만, 사랑을 배제한 모임이나 공동체는 언젠가 무너지고 후회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섬겼던 선교단체는 1:1 조직이 아주 강한 그런 단체였습니다. 말씀 그대로 순종을해서 본토 친척을 떠나고, 지도자가 제시하면 어디든지 순종하여 선교사로 떠나는 그런 단체였습니다. 저도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면 떠났고. 믿음의 결혼을 제시하자 얼굴도 보지 않고 제주도 자매와 순종해서 결혼했습니다. 당시 U.B.F는 한국에서 가장 많이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말씀 중심, 성경공부... 절대순종..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조직도 나중에 무너지고 분리되는 것을 보았는데 결국 그것도 사랑의 기초가 안 된 문제였습니다. 목회 30년 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올바른 신앙이 무엇이고, 올바른 사역이 무엇인가? 세상을 버리고 목회자가 되면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살 줄 알았는데 왜 인간적인 문제들이 또 생기는지.. 제 안에도 부흥이 좋고, 크고 많은 것을 탐내는 욕심이 생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교단체 두 번의 개혁의 진통을 겪으면서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저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면서 몇 년 동안 글을 쓰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저에게 가장 근본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고 보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처음 사랑’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한 게시록 2,3장 교회에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저는 에베소교회를 보면서 신앙의 빗나가게 된 문제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또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런데 4절에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모든 문제의 원인은 처음 사랑에서 빗나간 것이고, 문제 해결의 길도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나 가정, 일터 어디나 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식으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회복되면 기적적인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처음 사랑’이란 처음 예수님만 보였던 그 순수한 사랑을 말합니다. 저는 그 때 깨닫고 묵상했던 글들을 모아서 책을 한 권 내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리고 이어서 ’다윗의 열쇠‘. ’주님이 하십니다‘, 사랑을 주제로 묵상한 글들을 엮어서 ’행복 방정식‘을 출판했습니다. 저는 본래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인데 책을 출판했다는 것은 기적 이었습니다. 사랑이 기적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2장 3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여러 은사를 소개하면서 막지막으로 더 큰 은사를 구하라고 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그리고 13장 전체를 할해하며 사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한맏로 사랑의 하나님,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한마디로 사랑의 책, 모든 계명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이요, 모든 계명의 정신이요 핵심이라면 사랑을 소흘이 여길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몰라서는 신앙의 길을 바로 갈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모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유창한 글을 쓰며 아무리 아름답고 유창한 설교를 한들 사랑이 빠지면 그냥 울리는 괭과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해도, 불 속에 들어가는 그런 열심을 내고, 봉사를 잘 해도 그것 역시 역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nothing. 그리고 아무것도 얻는 것도 없다고 합니다. no gain!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은사 중에 무엇보다도 더 큰 사랑이 은사를 게속 구하고 찾고 알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은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평생 배워야 합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 사랑의 힘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저도 없고 우주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랑이 앞으로도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 2막의 역사를 확실히 열어줄 것입니다. 보기에는 작고 적지만 푸른초장교회는 이 사랑이 있기게 가장 부요하고 행복합니다. 할렐루야! 자 그렇다면 더 큰 사랑의 은사를 적극 구해야할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세 가지로 정리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사랑하게 되면 세상이 아름다워집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전도서 3:11)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가? 사랑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미운 사람은 모든 것이 밉게보이고, 이쁜 사람은 모든 것이 다 이쁘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동안 스쳐지나갔던 것들 하늘과 땅과 바다 나무 꽃,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세계가 내 안에 사랑이 눈을 뜨면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꽃을 보며 거리를 걷던, 산을 오르던 배를 타고 바다 여행을 하던 모든 것이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처럼 다가오게 됩니다. 사랑의 주님과 함께하는 그 어디나 천국이 됩니다. 그런 생각과 느낌이 떠오르고 글을 적으면 한 편의 시가 됩니다. 시인이 되는 것 별것 없습니다. 남이 봇 본 것을 보고, 남이 듣지 못한 것을 들으면 시인이 되고, 그것을 글로 옳기면 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또한 믿음과 소망이 생기고 삶도 아름답고 행복해집니다. 성공이란 에머슨의 말처럼 내가 태어나기 전보다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만들었다면 그게 성공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 적극 더욱 큰 은사를 구하라고 한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사랑이 모든 은사의 바탕이 될 때 각자 개개인에게 주어진 은사도 더욱 아름답게 빛을 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봉사하고 섬기는 일도 사랑이 뒷받침되면 더욱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섬기게 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도 사랑이 뒷 받침이 되면 더욱 생명의 말씀으로 증거됩니다. 믿음의 은사도 사랑이 뒷 바침이 될 때 크게 감동으로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래 참는 은사 소망의 은사도 사랑이 있어야 끝까지 변함없이 참고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아멘. 둘째, 크신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지식적으로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하시며 위대하시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 그 위대하심을 잴 수 있는 척도가 세상에는 없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을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내 안에 사랑이 컵만 하다면 하나님도 컵만한 것입니다. 사랑이 바다 같으면 하나님은 바다같은 것입니다. 똑같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마다 느껴지는 것이 다른 이유입니다. 사랑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사랑이 자랄수록 크신 하나님,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모르면 하나님도 모르게 되고, 사랑을 알면 알수록 나의 하나님이 위대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 모든 지식, 신앙의 비밀 모두 사랑만큼입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내 시야도 작아집니다. 내 가족, 내 교회, 내 양들만 보입니다. 사랑이 많으면 시야가 넓어집니다. 나와 우리를 벗어나 우주적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기도 폭도 넓어지게 됩니다. 내 가족 내 교회 내 성도를 넘어서서 세계를 위해 기도를 하게 됩니다. 사랑할 때 비로소 사람이 성장하고 변화가 옵니다. 다른 은사들은 기능적입니다. 아무리 큰 능력을 행하고 홍해를 가르는 큰 일을 해도 사람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본질과 존재의 문제로 사랑하는만큼 달라지고 성장하게 됩니다. 사랑 할 때 큰 인물도 되는 것입니다. 아멘! 셋째 한 영혼의 가치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잃은 영혼을 찾으시는 비유의 내용이 나옵니다. 99홉 마리 양을 두고 잃은 양 한 마리 찾는 비유, 드라크마의 비유.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눅 15장). 이 내용을 보면 그 하나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힘을 다하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찾은 후에는 너무나 기뻐서 잔치를합니다. 그러다가 다른 양들을 잃어버릴 수 있을 텐데 , 다른 양들의 생명도 귀한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 저는 처음에 이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모든 이유는 수의 가치가 아닌 영혼의 가치를 보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그 하나의 가치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물질이라 수로 계산됩니다. 어린 왕자에서 왕자는 처음에 자기별에 피어난 장미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몰랐습니다. 그런 장미가 지구에 와 보니 어느 정원에 5천송이나 피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똑같은 장미가 수천 송이가 있다고 생각하자 더욱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이 들고, 자신도 슬펐습니다. 그러나 여우를 통해서 관계 맺는 것, 길들이는 것에 대해서 배우고 사랑의 눈을 뜨게 되자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장미들을 다시 보러 가봐. 네 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라는 것을 알게될 거야. 작별의 인사를 하러 네가 다시 돌아오면 선물로 비밀 하나를 알려주지> 어린왕자는 실제로는 자신이 물주고, 바람막이를 해주고, 유리 덥개를 덮어준 그 장미가 유일한 나의 장미라는 것, 수많은 다른 장미는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도 모르고 장미와 다투고 떠나온 것을 후회합니다. 그리고 장미밭에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르는 행인은 내 장미도 너희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나 그 꽃 하나만으로도 너희들보다 더 소중해. 내가 물을 준 꽃이기 때문이야> 여우가 가르쳐준 비밀은 이것입니다.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 관심 거기에 들인 시간들 그리고 생명 다 보이지 않지만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한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요? 마태는 1만 달란트, 즉 6조원을 탕감해준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로 죽을 우리 한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이 탕감해주신 한 영혼의 값입니다. 그 가치 증명해 주신 분이 예수님 이십니다. 나의 한 생명을 위해서 소자 하나를 위해서 기꺼이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기 때문에 주님은 아십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한 영혼의 가치입니다. 이러한 가치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무관심하고, 함부로 상처주고 상해주고 죽이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가 투자할 수 있는 일 중에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가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평생에 살아가면서 한 사람만이라도 나로 인해서 예수님 믿고 구원을 받도록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것입니다. 부자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싸우고 다투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수적인 경쟁을 하며 사는 이유는 사랑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영혼의 가치가 안 보이기 때문에 몇 푼 안 되는 것 가지고 다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알면 영혼의 가치가 보입니다. 가치를 알면 사랑하지 않을 수없습니다. 또 온 천하를 주고라도 투자하여 얻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은사를 설명하면서 가장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저와 여러분들이 무엇과도바꿀 수 없는 이 사랑의 은사를 소유하여 주님의 아름다운 세상을 열고 생명의 열매를 맺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