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딴지일보에 급하게 넘기는 기사 원본입니다.
메일링 리스트 가입하신 분만 특별히(!) 드리는 겁니다.
당연히 좀 급한 사안이라 편집 결코 없습니다.
그리고, 꽤 깁니다. 워드 6장 분량이니까요.
대충 보시면 이번 사태에 대한 이해가 되시리라 믿습니다.
이쯤 노가리 깔사람이 없을테니까요.
딴지일보로 넘기는거라, 딴지식 말투와 약간의 욕설이 있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보시고 소감이나 의문 자유게시판에 올려주시면 8시간 투자한거 무지 보람있겠습니다.
2002년 3월 1일 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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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말도 많도 탈도 많은 나라다.
작년말에 파키스탄과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면서 전세계 사람들의 똥꼬털을 오그라들
게 만들던 인도(이때 배치한 국경병력은 아직도 자대로 귀환 안하고 국경에서 떠돌며
파키스탄과 총싸움을 일삼고 있다.), 이번에는 또 종교갈등이란 말이더냐?
지금은 사건 발생 3일째고,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아요디야란데서 힌두사원 재건립 시위를 벌이고 지들 집으로 기차타고 귀환하던 극
우 힌두들이 지들집 거의 다온 지점인 고드라역 근처에서 무슬림들이 열차를 강제로
세우고, 기차에 불을 질러 얼라15명 포함해서 57명이 죽어따’
니들 보는 신문에 나온거는 요게 다일꺼다. 조금더 친절하면 이 문장을 덧붙여 준다.
‘1992년 아요디야의 이슬람 사원을 힌두 극우주의자들이 허물면서, 종교간에 벌어진
충돌로 약 3000여명이 죽었었다’
아…..이 씨바들은 얘기를 해줄려면 끝가지 해주던가. 도통 알수가 없다. 뭐하다 밑
안닦은거 같은 이 궁금증을 어떻할까? 이런 생각 했지? 그치? 하지만 니들의 궁금중
을 그대로 묵혀둘 본 민족정론 딴지가 아니잖냐? 먼저번 본 특파원 기사인 ‘카쉬미
르’문제와 함께 인도 종교분쟁의 가장 큰 뇌관 중의 하나인 ‘아요디야’라는 뇌관까
지 이번에 벗겨주께……..니덜은 이제 신문에 인도에서 종교분쟁 나면 그게 왜 나는
지,니덜 친구들에게 아는체하면서 썰을 풀수있는 기회가 생긴거야.
이 기사는 최근세에 벌어진 갈등인 카쉬미르 문제와는 달리 신화시대까지 날라댕겨야
한다. 당근 멀미 날수 있으나 꽉 잡으라구!
1. 라마야나
인도넘들이 제일 좋아하는 2대 서사시가 있는데, 그거뜰의 제목은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라고 하는 것이다. 이중 마하바라타는 이 사건과 상관없는거고 ‘라마야
나’얘기를 잠깐 해야겠자.
‘라마의 이야기’라는 뜻의 라마야나에서 느낄수 있듯이, 이 신화의 주인공은 바로
라마다. 현재 힌두교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신중에 하나인 라마는 인도인들에게는
정의, 덕의 군주로 이름높은데, 역사적인물이라는 설과 함께, 힌두교에서는 3대 쌈잘
하는 신중의 하나인 비쉬뉴신의 7번째 화신으로 믿어지고 있는 인물(신)이다.
신화의 내용을 간추려 보자면,
‘야요디야 왕의 큰아들인 라마는 활쏘기로 따지자면 영국의 윌리엄텔이나, 한국의 고
주몽과 맞먹을 정도의 명궁이었다. 그리고 내기에서 아주 이쁜 부인 시타를 얻은 행운
아였다. 하지만 역시 영웅의 앞날은 험난한 것인지, 예전 왕의 목숨을 살려준 대가로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얻어낸 계모의 농간으로 숲에서 14년간의 유배생
활을 해야겠다. 원래 왕이 되야하나, 왕도 못되고, 숲속에 14년간 갇힌 라마, 니나 나
같은 사람이었다면 당근 하루에 108번씩 씨바거려야 겠으나 그러지 않고, 부인인 시타
와 동생인 락쉬만, 그리고 따르는 무리와 함께, 나름대로 잼있게 살았더랜다.
하지만 숲에서도 덕과 정의의 상징은 라마는 불의를 보고 분기탱천하는 특유의 성깔
을 버리지 못했는데, 마녀 수르파카나의 코와 귀마저 잘라버리면서 정의숲구현에 앞장
서게 된다. 코하고 귀짤린 마녀는 현재 스리랑카에 있는 머리10개달린 마왕 라바나에
서 도움을 청한다. 라마의 부인 시타 무지 이쁘다는 말을 살짝 흘리면서……..
예나 지금이나 마왕이라는 이름을 가진넘들은 무지 밝힌다. 라바나도 이런 부류에서
벗어나지 못했더랬나 보다. 라바나는 라마의 부인 시타를 납치하고, 라마는 마눌을 찾
으러 동생 락쉬만, 그리고 원숭이 장군 하누만을 델구 스리랑카원정길에 나선다. 원숭
이 장군 하누만은 인도와 스리랑카 사이를 한달음에 뛰어넘는가하면, 라마의 동새 락
쉬만이 화살에 맞자, 이를 고칠수 있는 의사의 집을 통채로 달랑 들어다가 치료도 받
게끔하는등의 혁혁한 공을 세우며 결국 머리10개달린 마왕 라바나를 라마가 물리칠수
있게 도와준다.
마왕을 물리치고 돌아온 라마와 시타는 계모의 아들이 다스리던 아요디야왕국을 통채
로 헌납받고, 왕이되어 아요디야를 다스렸다. 전설적인 군주로 덕의 화신으로 군림하
면서, 결국에서는 비쉬뉴신의 7번째 화신으로까지 추앙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 아요디야가 많이 나오지? 이 아요디야는 바로 인도인들이 생각하는 전설적 명군인
라마가 다스렸다고 믿어지는 곳이라는 얘기다. 당연히 힌두교인들에게는 중요한 성지
가운데 한군데라 할수 있겠다. 이 라마야나 신화에서 파생된 신은 덕의 상징인 라마
를 제외하고라도, 충성과 헌신의 상징인 원숭이 하누만역시 신으로 승격되어, 인도 길
거리의 버릇 없는 원숭이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종교적 기원이 되고 말았다.(이 하누만
과 라마야나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중국의 ‘서유기’가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을정도
로, 동남아시아네서 라마야나가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이 신화에서 인도의 가장 대
중적인 신 이 2명이나 나올만치 라마야나도 중요하지만, 라마가 현실정치에 뜻을 핀
아요디야도 중요한 곳인 셈이다.
2. 아요디야
아요디야라는 지명을 가장 중요하게 만든것은 라마야나지만, 아요디야는 이 외에도 크
고작은 주변국 신화의 무대가 되고 있다. 심지어는 우리나라까지………
안믿어진다고? 그럼 본 기자와 함께 삼국유사를 함 따라가보자.
한국에서 제일 많은 성씨인 김해김씨, 시조는 김수로왕, 그의 부인은 신화에 따르면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후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허황옥은 2명의 신하와 부인, 그리고 20여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배로 금관국에 도착하
여 조용히 이르되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부왕의 명을 받아 수로왕에게 시집왔노라’
하였다 한다.
어떄 죽이지? 당근 아유타국은 아요디야의 한자식의 음차이다.
아요디야를 수도로 삼은 왕국은 여럿이 있다. 그중에 붓다가 생존했을 당시인 기원전
600년경에는 코살라국이라는 나라의 수도였는데, 이 코살라국은 자신들의 기원을 태양
신의 자손, 즉 바랏트 족이라 믿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는 Republic of India이지만 얘들말로 하면 Bharat Ganarajya이
다. 즉 바라트족의 국가라는 뜻이다. 그리고 인도인들은 지들은 바라트족(태양족)의
후예라고 믿고 있다.
이제 좀 감이 오는가?
아요디야라는 동네는 현재의 인도를 상징하는 곳이라 할수 있다. 그 땅에서 발생한 바
라트족의 나라 코살라국이야 말로 현재 인도의 기원이고(우리가 우리 기원을 단군조선
이라 하듯이……) 그 코살라 국의 수도였던 데가 아요디야이다. 한때 얼마나 강성했냐
면, 멀고먼 동방땅 가야에까지 세력을 떨치던 국가였다. 어찌보면 삼국유사의 기사를
봐도 알수 있듯이, 김수로왕이 자신의 정치적 타당성을 부인인 허황옥의 고향인 아요
디야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결정타로 이들이 이상정치의 화신으
로 믿고있는 라마신이 실제 정치를 폈던 곳이기까지 하다.
이 힌두 부동의 성지에 뭔일이 벌어진다………..자 이제 세월을 뛰어넘어 중세인 무굴
시대로 가본다.
3. 부시 같은 넘 ‘아우랑제브’
니들이 알고있는 타지마할이 바로 무굴시대의 작품이다 라고 알려주면 좀 이질감이 없
을라나? 이슬람 왕조기는 했지만, 무굴은 다른 아랍의 무슬림과는 달리 종교적 햇볕정
책을 피던 나라였다. 20%도 채 안되는 무슬림들이 힌두의 나라를 다스릴려니 별수 없
었을수도 모르지만 말이다. 대대로 힌두왕조와 결혼도 하고, 힌두교도 인정해주면서
종교간 화해를 실천하는 역대 무굴의 황제들을 제끼고, 무지 ‘부시’스러운 황제가
등극하니 그의 이름은 아우랑제브였다.
자기 형제 다 죽이고, 아버지까지 7년간 가둬놓고 죽인뒤 왕위에 올른 이 아우랑제브
는 그전까지의 무굴황실의 전통인 힌두교 햇볕정책을 버리고, 힌두교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간 폐지되었던 비 이슬람교도에 대한 인두세(지즈야)를
부활시킨것은 기본이고, 각종 힌두사원을 뽀개고, 그자리에 회교의 모스크를 세우게
된다. 그중에 라마사원이 집중적으로 걸리면서 뽀개지게 되는데, 당근 라마사원의 본
산인 아요디야도 걸리게 된다. 아요디야의 라마사원은 이 부시스러운 아우랑제브때 뽀
개진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비브라 모스크라는 회교사원이 건립되게 된다. 아…..이
제 좀 현실로 돌아올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4 오늘의 인도
인도의 국교는 뭐게?
라는 질문에 열이면 아홉은 ‘힌두교요’ 하는데, 이거는 틀린답 되겠다. 인도는 비
록 힌두교가 80.3% 숫자로 8억이나 되지만, 헌법상 국교가 없는나라다. 이런걸 유식
한 말로 세속주의 국가라 하는데, 인도 독립의 아버지인 간디나, 초대수상 네루는 특
정 종교에 매몰되던 양식없는 정치가는 아니었다. 오히려 법적으로 공립학교에서는 종
교교육조차 시키지 못하게 할 정도로 인도가 힌두의 나라가 되는 것을 막는 각종 제동
장치를 만들었던 사람이다.
. 간디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단 과정에서 통일 인디아를 주장하다. 극단적 힌두주의
자 총에 맞아 죽는데, 그 넘 조직의 이름을 RSS라 한다.
그리고 이 RSS를 비롯한 힌두 극우세력 뭉탱이들이 다시한번 대형사고를 치는데, 이
제 1992년으로 가보자.
현재의 집권당을 줄여서 BJP라고 하는데, 한국말로 하면 인도 인민당쯤 된다. 그리고
사고뭉치 RSS조직원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당이다. 1991년 벽두부터 인도는 총선의 열
풍이 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때 분위기를 좀 보자면, 그동안 1969년과 79년을 제
외하고 한번도 야당이 되어본적이 없는 만년 집권당 인도국민회의는 만성적인 부정부
패로 인해 더이상 집권의 가능성을 기약할수 없었다. 민심이 등을 돌린것이다. 이해
5월 23일 치러진 총선에 몇개의 변수가 등장하는데, 첫째는 전 수상이자 네루가문의 3
대손인 라지브 간디가 선거 직전인 5월 21일 암살당한다. 이틀후 벌어진 선거에서는
네루가문에 대한 동정표가 국민회의를 쏟아지면서 국민회의가 기사회생하는 전기를 마
련한다.
두번째 변수는 ‘종교’가 인도정치의 주요변수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인
도 인민당의 약진인데, 얘들이 내세우는 강령중에 ‘힌두트바’라는 것이 있다. 즉 힌
두들의 국가건설이었던 거다. 얘네들이 선거운동을 어떤 식으로 했냐면, 라마와 함께
가장 인기있는 신인 크리슈나신이 죽었다고 믿어지는 곳이자, 인도에서 가장 큰 사원
이자, 무슬림에 의해 초토화되었던 적이 있는 솜나트라는 곳에서 행진을 시작했다. 이
른바 종교정당으로서의 색깔을 분명히 하는 행진이었다. 그리고 이 행진의 종착지는
아요디야였다. 분명 BJP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요디야에 회교사원인 비브리 모스크
가 있었다는 사실을……..
종착지인 아요디야에 도착하니, 라마신의 사원이 있어야할 곳에 이슬람에 모스크가 있
다는 것을 힌두교도들은 발견했다. 바로 선동은 시작되었다. 그 내용은 무슬림에게 침
략당했음을 유난히 강조했던 행진의 출발지 솜나트에서의 선동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덕의 화신이라 믿고있는 라마신전이 무굴의 황제 아우랑제브에 의해 헐린것이
강조되고, 힌두트바를 위해 이 곳에 라마사원을 짓자는 선동이 있었음은 뻔한것이다.
결국 이 비브리 모스크는 1992년 12월 6일 일단의 힌두교도들에 의해 폭파되고 만다.
이를 기해 인도 전국에서는 힌두와 무슬림의 쌍방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때 사망자는
대략 2000-3000으로 추산한다.
회교사원이 부서지자, 집권당 국민회의는 즉각적으로 회교사원을 재건할것을, BJP는
라마사원을 이자리에 짓겠다고 공약했으나, 아무리 철심장 국민회의라도 인구의 90%가
량이 힌두인 나라에서 모스크를 제건할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이 아요디야 사태라는
것 자체가 전혀 종교적인 문제는 아니다. 순전히 선거운동의 와중에서 나찌같은 BJP정
당의 선동에 의한것이다. 어찌되었건 이 사태를 계기로 지역정당이던 BJP는 전국정당
으로 도약할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 이건 인도사에 있어서 정말 불행의 시작이었다.
97년 다시 총선국면이 되는데, 이때 BJP의 선거운동은 정말 가관이었다. 수십필의 말
이 끄는 마차를 탄 라마와 락쉬만,하누만,시타가 하늘로 부터 재림한것이다. 바로 라
마신이 본격적으로 선거판에 끼어들게 된다. 물론 배우들과 정치인의 분장이었지
만……..
인도인들은 열광했고, BJP는 한술 더떠 선거공약으로 ‘라마신의 정치재현’을 걸었
다. 당시 BJP보다 더한 힌두교 또라이 사브세나라는 넘들이 있는데 이 넘들은 공공연
히 유세장에서 ‘이 곳에 무슬림이 있다면 꺼져라! 니들의 표는 필요없다!’라고 연설
했다. 이들의 선거공약중에 ‘아요디야’라마사원 재건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들은
이 문제를 중앙정부의 총선에 끌고 들어왔고, 여기에 승부수를 걸었다. 선거결과 집권
당이던 국민회의는 260석에서 140석으로 주는 대패를 했고(투표율29.77%), BJP는 161
석을 확보 제1당이 되었다.(23.5%) 여기서 득표율은 국민회의가 높은데, 왜 BJP가 의
석이 더 많냐고?
인도역시 한국과 같은 소선거구제다. 국민회의는 주로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를 받은
반면, BJP를 이른바 힌두벨트라고 하는 힌두교우세지역에서 싹쓸이를 했다. 씨바….소
선거구제 이거 진짜 안좋은 거라니까!!!
자! BJP는 96년 총선에는 승리했지만, 제1당이지 과반수를 차지해서 내각을 구성할
수 있는 당은 아니었다. 그리고 극우 또라이 일부 정당을 제외하고는 이들과 아무도
연합하려 하지 않았다. 96년, BJP정부는 단지 12일만 집권했을뿐이다.
하지만 BJP를 배제한 연립정부는 너무나 가지가 많았다. 97년 11월 연립정부는 사퇴하
고 대통령은 또다시 하원을 해산했다. 2년만에 다시 총선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인도 최초의 히틀러 정권이 탄생했다. BJP는 170석으로 불과 10석을 늘리는데
그쳤지만, 이제 BJP가 앞으로 인도 정치계의 강자가 되었다는 것을 두눈으로 확인한
군소정당들은 재빠르게 BJP아래로 헤쳐모여를 실시했다. BJP연립정권은 265석을 확
보, 정권을 인수했다. 신정권이 들어서자마자 BJP는 대형사고를 쳤다. 바로 인도의
핵실험이 그것이다. 결국 98년 5월 인도는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고, 미국과 일본의 경
제제제가 잇따랐다.
이글을 쓰는 2002년 3월 1일 현재 인도는 BJP치하다. 그동안 많은게 바뀌었다. 불과
15루피 하던 타지마할의 입장료는 외국인에 한해! 750루피로 급상승했다. 물론 다른
유적지도 이보다는 덜하지만 대략 50-100배 정도가 올랐다. 극우정권의 힌두선민정치
탓이다.
하지만 선동밖에 잘하는 것이 없는 BJP정부는 정책을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
제정책의 실패로 인해 민심은 뒤로 돌아섰다. 먼저번 ‘카쉬미르를 알려주마’에서도
언급했듯이, 절묘하게 2001년 12월 국회의사당테러가 났다. 올 2월 얼마전에 끝난 4개
주 지방의회선거는 BJP의 경제실정에 대한 심판과, 이제는 BJP가 파놓은 힌두극우주의
의 함정에 BJP가 빠졌음을 의미한다. BJP는 아요디야 사원재건을 공약으로 했지만, 집
권 여당으로 국정을 책임지는 위치에서 다시 인도를 혼란에 빠져들게 할 자신은 없었
을 것이다. 또 원하지도 않을 것이고……그때는 야당이었지만, 이제는 난리나면 지들
이 책임져야 하는 여당이자네??
차일피일 미루는 BJP에 연립정권의 한 당사자인 VHP가 깽판을 치고 들어왔다.
‘니들 자꾸 밍기적 거리면 이젠 우리가 니들처럼 사고친다!’
선거직전, VHP는 3월 15일부터 자기들의 손으로 아요디야의 라마사원을 재건하겠노라
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를 거부한 BJP정권은 올 2월 지방선거에서 대패했다. 그들의
텃밭이자 아요디야가 속해있는 우타르프라데쉬주에서도 주정권을 잃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BJP의 성공담을 답습하는 VHP에 의해 연일 아요디야는 라마사원 재
건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다.
2월 27일 구자라트에서 벌어진 회교도들의 열차습격은 이 와중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 기차에는 아요디야에서 라마사원 재건 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과격힌두들이 타
고 있었다.
쓰고보니 거의 아요디야가 예루살렘이구만?
이글을 쓰는 3월 1일 이제 다수파인 힌두에 의한 무차별 보복이 인도 곳곳에서 벌어지
고 있다.
아……어떤 씨바가 인도가 정신과 명상과 평화와 비폭력의 나라라 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