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강물위로 흐르는 사연들
-파주 장파리를 찾아서
정성영
전동차가 정거장에 섰다. 종점에 가까워 올수록 자리가 많이 비었고, 그나마 얼마 남아 있지 않던 손님들 마저 너도나도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같이 떠난 우리 일행은 모두 열 명이었다.
“자, 우리도 모두 내립시다. 여기서 더 가면 평양입니다” 일행 한 분 농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차창밖을 살피니 <문산>이란 역명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아 여기가 종착역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황망 중에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던가, 녹슬은 기차길 분단의 아픈 역사 얘기만 나오면 귀에 젖은 그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지도를 보니 임진강을 건너 조금만 더 가면 얼마 안 떨어진 곳에 휴전선을 지나 개성이 있었으니 분단의 아픈 역사 현장이었다.
어쨌거나 좌우지간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조금 더 가야만 했다. 휴전선이 북쪽으로 굽어 위도상으로는 문산역보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야 했다. 역사를 빠져나오니 택시가 줄을 서서 있었다. 마치 우리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휴전선이 가까워도 사람사는 곳이야 뭐하나 다를 것이 없었다.
“버스도 있다지만 요새같이 좋은 세상에 택시 타는 것은 일도 아니지” 입담 좋은 한 분이 기사 몇 사람과 차비 흥정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택시 서너 대가 바람같이 일행을 임진강가 장파리의 터줏대감 유명한 민물 매운탕 집으로 데려다 내려놓았다. 오늘이 마침 22대 총선 일이라 모두들 새벽 일찍 투표를 마치고 서울을 떠나온 터였다. 구경도 좋고 문학도 좋지만 <코 아래 진상>이라니 우선 입 호강부터 하자는데 누가 마다 하곘는가? 옛 건물이라 겉보기에는 허름해 보여도 실내는 아늑하고 정감어린 풍경이 옛 시절을 떠 올리게 하는 낯익은 친근함이 있어 좋았다.
마침 다른 손님은 없어 전동차 한 칸 만한 기다란 방에 넉넉하게 자리잡고 앉으니 옛날 시골의 잔칫집 사랑방에 교잣상하나 들여놓고, 너비 안주에 푸짐하고 넉넉한 술상 대접을 받는 귀한 손님의 기분이랄까.
왁자지껄 시끌벅적한 서울의 음식점 분위기와는 다르게 조용하지만 무언가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분위기였다. 친숙한 이웃집 아주머니같은 낯설지 않고 특별히 이쁘지도 않은 평범한 얼굴에 넉넉한 인심으로 얼큰하고 푸짐하게 끓여낸 진한 민물 매운탕을 실컷 먹었다. 그 옛날 고향에서 꽃피는 봄철이면 개울가에 자리를 잡고 친구 몇 이서 가재 천렵에 화전놀이에 세월 가는 줄 모르던 그 시절이 파도처럼 밀려 왔다. 뿔뿔이 이산가족처럼 흩어진 친구들은 저 하늘아래 어느 곳에서 오늘의 나처럼 그 시절을 회상이나 할까 모르겠다.
맛있는 먹을거리를 앞에 두고 지나친 감상은 몸에 해로우리라. 먹을 땐 이 생각 저 생각 다 버리고 그저 먹는 일에만 열중하자. 술에 밥에 든든하게 속을 채우고 아직 씨앗이 뿌려지지 않은 논밭을 옆에 끼고, 장파리에서 금파리로 이어지는 한적한 시골길을 소화도 시킬 겸 걷기로 했다. 부지런한 농부가 깨끗하게 봄 갈이 해 놓은 네모반듯한 수 천평의 넓은 밭이 펼쳐진 자연 속에서 마음껏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걸었다. 대도시 서울의 복작복작한 속에서 체증처럼 느끼던 답답함이 속시원하게 뻥 뚫리는 심정이었다. 저 넓은 밭에 보리 심고 콩심고, 참외 심어 원두막 짓고 여름이면 친구들 불러모아 그늘에서 참외 깎아 먹으며 냇물에 미역감아 더위를 쫓으면 그 아니 신선이랴. 이런 저런 생각한다고 허물이야 되겠는가. 괜한 상상에 잠시 현실을 떠나 신선 세계를 넘나 든 기분이었다.
파주 장파리에서 젊은 한 때 청춘을 불사르던 어느 일행의 까마득한 그 시절 이야기를 들으니 고려말 조선 개국과 함께 흥망성쇠의 허무함을 시조 한수로 읊어 낸 야은 길재 선생의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하는 시조가 생각나서
<청춘의 꿈이어린 이땅에 다시서니// 저만치 어디엔가 내 발길이 머물던 곳// 이제야 부질없는 일 말해본들 뉘 알랴//>
이렇게 내 자신이 괜히 남의 이야기에 공감하여 어설프게나마 시조 한 수를 흥얼거려보니 조금은 웬지 민망하고 쑥스럽긴 하다.
서울의 집을 나설 때 아파트 단지내 벚꽂은 이미 져서 땅바닥에 흰눈처럼 쌓여 사람들의 인정사정없는 발길에 처참하게 뭉개져 내리고 있었다. 화려한 꽃이 좋아 환호하던 때가 언젠가 세월도 무심하지 그새 며칠이나 자났다고 푸대접이란 말인가. <낙화인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하리오> 옛 시조 한 소절이 무심히 떠 오르는데 북쪽으로 몇 십리 더 올라왔다고 장파리의 벚꽃은 아직 한창이었다. 바람이 분다. 벚꽃잎은 나뭇가지를 붙잡고 놓지 않을 만큼 아직 싱싱했다. 구름이 살짝 낀 하늘은 지나친 기분 탓인가 임진강에 흐르는 역사의 어두운 아픔을 말하려는 듯 조금은 찌푸린 듯 침통해 보였다.
곱게 갈아 엎어진 논밭은 주인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었고, 건너편 넓게 뚫린 자유로의 큰길로 거침없이 질주하는 차량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로 임진강이 유유히 흘러가리라. 멀리 보이는 산은 푸르고 푸르러 봄의 생동감을 주는데 임진강 지류로 흐르는 넓은 개울가 저편에 자그마한 동산이 보였다. 저 유명한 파평윤씨의 시조 설화가 전해 오는 곳이라고 이 지역 사정에 밝은 K시인의 설명을 들으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지금은 튼튼한 제방으로 수해 걱정이 없겠지만 지형을 둘러보니 그 옛날 자연 하천일 경우에는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큰 홍수가나면 주변 일대가 물바다가 되고도 남을 형국이었다.
산천은 의구하다 했지만 많이 변했고, 또 앞으로도 더 많이 변해 갈 것이다. 한 때 인구에 회자되던 <장마루촌의 이발사> 현장도 가깝게 바라보았다. 이곳 역시 파평윤씨 시조의 설화처럼 전설이 되어 세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 가겠지만 세월 따라 강물 따라 점차 역사 속으로 깊이깊이 묻혀가리라. 그러고 보면 오늘의 봄나들이가 그냥 먹고 보는 것만이 아닌 저 건너 흘러가는 임진강 강물만큼이나 그 의미도 한없이 깊고 깊어져만 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