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양도성 걷기길이 한 바퀴 완전히 연결되었다.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을 에워싸고 있는 성곽으로 내사산(內四山)이라고 부르는 인왕산 338m, 북악산(백악산) 342m, 낙산 125m, 남산 262m의 능선을 따라 축성됐고, 그 길이는 장장 18.6km에 이른다. 이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 왕조 때 꾸준하게 정비되고 보수돼 왔지만 일제강점기 때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여러 곳의 성벽이 헐렸다. 또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주변도 훼손됐다.
광복 후 한국전쟁과 무분별한 도시화의 여파로 성곽 훼손이 계속됐다. 그러다가 1975년부터 1982년까지 서울 한양도성 복원사업이 대규모로 이루어졌고 이후에도 혜화문과 광희문의 복원을 비롯해 부분적으로 보수 공사가 계속됐다. 2000년 이후 서울 한양도성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재조명되면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서울 한양도성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양도성 길을 다음과 같이 6회에 걸쳐 소개한다.
1 순성놀이의 즐거움
2 1구간(숭례문~정동거리~인왕산~창의문)
3 2구간(창의문~북악산~숙정문~혜화문)
4 3구간(혜화문~낙산~흥인지문~광희문)
5 4구간(광희문~남산~숭례문)
6 서울성곽 주변의 걷기명소들(부암동과 성북동)
서울성곽은 600년 그 자리를 지키고 솟아 멀고 모호했던 조선과 근현대사의 시간을 손에 잡힐 듯 눈앞에 끌어다 준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시작된 조선의 개국역사와 한양을 수도로 낙점하며 서로의 의견이 갈려 고심했던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활기 넘치는 이야기가 그 안에 오롯하다. 임진왜란, 인조반정, 중종반정, 병자호란 등 수많은 역사적 사실과 비사가 그 공간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풍수지리와 유교 교리에 맞춰 설계되고 지어진 서울성곽은 조선을 통째로 에워싼 화수분 같은 이야기 샘이나 다름없다.
파면 팔수록 더 진귀하고 신기한 역사이야기들이 성곽 돌덩이 사이와 사대문, 사소문 사이로 쏟아져 나왔고, 알면 알수록 내밀한 역사가 솟구쳐 걷는 이의 마음속으로 흘렀다. 도무지 얼마나 많은 역사, 비사, 야사가 그 안에 숨어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조선을 알게 되니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찾게 되고, 고려와 삼국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진다. 결국 순성하는 이들은 핍박과 설움의 시대를 거쳐 희망과 극복의 역사를 써내려간 내 나라 조국을 사랑하는 데까지 이르고 만다.
필자가 가끔 걷기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성곽을 걸으며 그곳에 담긴 이야기를 하면, 같이 걷던 중년의 회원들은 어느새 할아버지 무릎에 앉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되어 구슬 같은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이야기에 집중한다. 시간만 다를 뿐 같은 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을 들으니 그때의 현장이 상상 속에서 그대로 살아나는 것이다. 그렇게 서울성곽을 걷는 일은 옛 것을 비추어 새 것을 알게 하는 힘으로 걷는 이들을 기쁘게 한다. 각 구간의 성돌이 품은 그 시간의 흔적들과 공간감은 오늘날에도 수백 년간 지속된 순성놀이로 그대로 살아나고 있다.
순성놀이는 수백 년간 내려온 전통 걷기문화
순성놀이란 서울성곽을 따라 도성 안팎을 걷는 놀이를 말한다. 실학자 유본예(1777~1842)의 ‘한경지략’과 유득공 (1748~1807)의 ‘경도잡지’를 통해 순성놀이가 오래된 한양의 풍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순성놀이를 ‘봄과 여름철에 성안 사람들이 짝을 지어 성 둘레를 따라 한 바퀴 돌면서 성 안팎의 경치를 구경하는 멋진 놀이’로 설명한다.
산악지형을 따라 자연스럽게 축성된 서울성곽을 걷다 보면 각 산의 정상 부근에서 눈부신 조망을 만난다. 또한 조선시대 도성의 5대 명승지로 알려진 삼청, 인왕, 백운, 청학, 쌍계 등을 거쳐 가게 되므로 진정한 산천유람의 의미를 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양을 사방에서 둘러싼 내사산(인왕산~북악산~낙산~남산)의 자연적인 지형을 따라 축조된 한양도성은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수도 방어형 산성이다. 이러한 희귀성과 역사성을 앞세워 서울시에서는 서울 한양도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현재 서울시청 내 여러 부서로 나누어진 서울성곽 관리기능을 새로운 전문팀으로 합쳐 좀 더 체계화된 관리를 하려 한다.
사적 10호로 지정된 서울 한양도성은 길이가 총 연장 18.6km에 달한다. 이 중 약 5km 구간이 완전 멸실되었고, 13km 구간이 온전히 남아 있거나 복원 중이어서 실감나는 성곽걷기를 돕는다. 끊임없는 난개발의 소용돌이로 점철된 서울의 근현대사를 비추어보자면 성곽의 7할 이상이 남았다는 것도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다.
구간별 책임자를 성돌에 새긴 공사책임제 실시
태조 5년(1396)에 축성을 시작한 서울 한양도성은 49일 만에 공사를 마무리했다. 당시 평지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며 산악구간만 돌로 쌓았다. 하지만 워낙 공사기간이 짧았던 탓에 몇 개월 후 다시 2차 공사를 했으며, 이때 사대문과 사소문도 함께 완공됐다.
성곽을 지을 때는 전체를 97구간으로 나누어 북악산 정상부터 동쪽으로 돌아가며 천자문의 하늘 천(天)부터 조상할 조(弔)까지를 각각의 구간이름을 붙여 각 군현별로 공사책임을 맡겼다. 이때 공사를 담당했던 고을의 이름, 공사일자, 책임자의 이름 등을 성돌에 새겨 넣었는데, 지금도 곳곳에서 그러한 각자성석을 살펴볼 수 있다. 이후로 세종(1422) 때 흙으로 쌓은 구간을 모두 돌로 고쳐 쌓았으며, 숭례문을 완전히 해체하여 새롭게 지었다. 또한 숙종 30년(1704)에도 약 5년간에 걸쳐 대대적으로 고쳐 쌓았다. 지금도 성곽을 걷다 보면 태조, 세종, 숙종 당시의 축성기법이 혼합되어 있는 성벽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외의 왕조 때에도 치세가 편안할 때는 성벽을 고쳐쌓거나 문을 보수하고 고쳐짓는 일이 다반사였다. 비교적 근대에 고쳐진 것으로는 흥인지문(동대문)으로 고종 5년에 완전히 새롭게 보수했다. 이 때문에 흥인지문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목조건축물로 꼽힌다.
서울 한양도성에는 풍수지리에 입각해 각 방향으로 네 개의 대문과 그 사이에 소문을 두었다. 각 방위별 대문의 이름은 남대문(숭례문·崇禮門), 서대문(돈의문·敦義門), 북대문(숙정문·肅淸門), 동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덕목으로 꼽는 오륜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따서 이름을 지었으나 북대문인 숙정문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그 대신 숙종 때 축성된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의 홍지문(洪智門)에 ‘지’자가 들어갔고, 도성의 중심인 보신각(普信閣)에 ‘신’자를 넣어 이를 완성했다.
조선시대 전통을 따르려면 시계방향으로 순성
50리에 가까운 성곽을 한 바퀴 순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구한말과 지금이 많은 차이가 있다. 1916년에 있었던 순성놀이 기록에는 7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지금은 11시간 정도 걸린다. 성곽이 끊어져 돌아가게 되고, 건널목을 건너는 등의 도심구간 통과 시간이 추가된 이유도 있을 것이고, 걷기가 주요 이동 방식이었던 당시에 비해 문화적, 인류학적으로 크게 달라졌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서울성곽 순성을 할 때는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을 출발점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어느 방향으로 순성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딱히 정론이 없지만 조선시대 전통을 따르면 시계방향으로 걷는 것이 맞고, 반대방향은 오르막 경사가 조금 낮지만 내리막 경사가 급하다. 하루에 전 구간을 걷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각 구간의 성벽과 성문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를 짚어가며 걷는 것이 좋음을 감안하면 보통 네 구간으로 끊어 걷는다.
첫 번째 구간은 숭례문~소의문~돈의문~인왕산~창의문을 거치며 5.3km를 걷는다. 서울 한양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에서 출발하면 곧 걷게 되는 정동길에는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의 잔재가 곳곳에 남아 있다. 월암근린공원을 지나 홍난파가옥~권율장군 집터를 지나면 인왕산 성곽구간을 만나고 이곳을 지나면 인조반정 당시 반란군이 난입한 창의문이 나온다.
두 번째 구간은 창의문~북악산~숙정문~혜화문을 지나며 4.7km에 이른다. 창의문에서 북악산 정산인 백악마루까지는 꽤 급한 경사를 그리며 성곽이 놓여 순성구간 중 가장 힘이 든다. 다만 정상 백악마루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아름다움은 많은 사람들의 찬탄을 끌어낸다. 일부 구간인 창의문안내소에서 말바위안내소 사이는 신분증이 있어야 통행이 가능하다.
세 번째 구간은 혜화문~낙산~흥인지문~광희문을 거치는 3.2km이다. 네 개로 나누어진 순성놀이 구간 중 가장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곳으로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 성곽을 따라 걷는 야간걷기의 명소라고 추천할 수 있다. 또한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면서 발견된 성곽과 이간수문을 복원해 색다른 정취를 전한다.
네 번째 구간은 광희문~남산~숭례문으로 5.4km에 달한다. 장충동 구간은 최근 신라호텔에서 점유하던 구간의 일부를 성곽 탐방로로 내놓음으로써 걷기가 한결 편하고 자연스러워졌다. 반면 국립극장 부근부터 시작되는 남산 구간은 계단이 많아 무릎이 편치 않은 순성꾼에게는 스틱 지참을 권장한다.
순성놀이의 난이도를 보자면 내사산의 경우 등산 초급 수준이며, 걷기로는 일부구간을 제외하면 대체로 초중급에 해당한다. 운동화만 신어도 별 무리 없이 길을 걸을 수 있지만 인왕산과 북악산 구간은 비교적 경사가 있는 편이어서 옷차림이나 신발, 식수에 신경을 써야 한다.
다음 편에는 첫 번째 구간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서울성곽 각 부분 명칭과 축조기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사)한국의 길과 문화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서울 한양도성 걷기’ 소책자 PDF를 국, 영, 일문으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또한 발견이의 도보여행 www.MyWalking.co.kr 에서 서울성곽 탐방로 및 전국의 걷기여행 코스 상세지도를 볼 수 있다.
- 글·윤문기 (사)한국의 길과 문화 사무처장·발견이의 도보여행 운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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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을 네 구간으로 나누어 걸을 때 가장 이야깃거리가 많은 길이 숭례문에서 창의문 사이다. 한양도성을 처음 설계할 무렵 이성계, 정도전, 무학대사의 뒷이야기부터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UPI 통신원 테일러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구한말의 뼈아픈 시간이 고스란히 남은 정동거리도 수많은 이야기가 흐른다. 그래서 걷는 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시간의 흐름을 온전히 파악하며 걷겠다는 생각으로 여유롭게 일정을 잡는 것이 좋다. 대중교통 접근성은 지하철 서울역 3번 출입구가 편하다.
숭례문 다시 일어나라 조선의 대문이여!
숭례문(崇禮門)은 서울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도는 순성놀이의 출발점이다. 한양도성의 정문이 바로 숭례문이므로 이곳에서 시작과 종착을 하는 것이 명분과 사리에 맞을 것이다. 비록 2008년 어이없는 방화사건과 더 어처구니없었던 화재 진압으로 허물어져 내렸지만 이후 복원작업에 박차를 가해 새로 지어지는 숭례문은 지난 3월 8일 상량식을 가졌다. 하지만 숭례문은 이미 500년 전에도 새로 만들었다는 뜻으로 ‘신작 숭례문(新作崇禮門)’이란 호칭을 가졌던 적이 있다.
이는 태조 5년(1396)에 지어진 숭례문을 세종 30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쳐지으면서 붙여진 별칭이다. 세종 30년의 숭례문 공사는 단순한 보수 차원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남산과 인왕산의 지맥을 연결하기 위해 기존의 문루와 기초석까지 완전히 들어내고 땅의 지세를 높인 후 새롭게 쌓고 세운 것이다. 이는 지세가 낮아 도성의 정문이 볼품없어 보이던 것을 타파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에 걸쳐 숭례문 보수공사는 간간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전차를 지나게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숭례문의 좌우 성벽을 허물어내기에 이른다. 비록 지난 화마에 처참하게 허물어졌지만 2012년 말까지 완료된다는 이번 복원작업으로 동쪽 성벽을 상당부분 복원한다니 그나마 다행이지 싶다.
지하철 서울역 3번 출구를 나와 복원 공사 중인 숭례문을 보고 성곽의 흔적을 따르기 위해 상공회의소 방면으로 커브를 틀면 바닥에 낮게 세워진 ‘남지(南池) 터’ 표지석을 만난다. 숭례문 앞에 있었다는 이 연못은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남지 연못은 불이 타오르는 모양을 띤 관악산 봉우리의 화기(火氣)로부터 숭례문과 도성을 지키는 방책의 하나였단다. 실제 이 연못 터에서는 1926년에 건물을 짓던 도중 ‘청동용두의 귀’라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 중인 이 유물은 음양오행에서 물을 상징하는 현무(玄武)로 추정되어 이런 설을 뒷받침한다. 또한 이 ‘청동용두의 귀’와 함께 발견된 팔괘도안 그림도 물이 불을 감싸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밖에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기 위한 비방으로 숭례문의 현판이 세로로 쓰였다는 점, 광화문 앞에 불을 먹고 산다는 해태를 세운 것, 경복궁 경회루 앞 연못에 ‘금동제 용’을 넣은 것도 모두 이와 연관성을 갖는다고 본다.
숭례문~소의문~돈의문
구한말 이야기가 활보하는 거리
숭례문부터 인왕산 자락을 만나는 지점까지는 성곽이 대부분 멸실된 상태여서 그 흔적을 따라 걷는 수밖에 없다. 먼저 서소문에 해당하는 소의문 터로 가기 위해 대한상공회의소 방면으로 길을 건넌다. 그곳에는 성곽의 흔적을 따라 체성이 약 2~2.5m 높이로 200m 정도 복원되어 있다. 이 체성의 성돌을 보면 수백 년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아 누렇게 변색된 것도 있고, 쪼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하얗게 빛나는 화강암이 서로 어울리며 직사각형의 대열을 이룬다.
각기 다른 세월을 겪어온 이 성돌들이 하나의 색으로 조화를 이루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서소문로가 걷는 길을 가로 막는다. 우리의 중간 기착지인 소의문(昭義門)은 순성꾼들의 길을 막아선 서소문로 찻길 바로 위에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서소문(西小門)이라고도 불렸던 소의문의 정확한 자리는 시청에서 충정로 방향 찻길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서울성곽의 성문들은 물이 갈라지는 분수령이 되는 곳에 세웠기 때문에 이 점을 감안하면 사라진 성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소의문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석은 서소문로에서 코너를 돈 직후 오른쪽 주차장 담장 위에서 힘겹게 찾을 수 있다. 옳은 것을 밝힌다는 뜻을 지닌 문의 흔적은 그렇게 누추함을 넘어 애처로움마저 자아내는 곳에 외롭게 서 있다.
소의문 터에서 향할 곳은 서쪽의 대문이었던 돈의문이 있었던 곳이다. 소의문에 연결됐던 성곽은 옛 배재학당 안쪽과 이화여고, 창덕여중을 관통해 돈의문(敦義門)이 있던 지금의 정동사거리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전 구간의 성곽이 소실되었고, 흔적을 따라 걷는 것도 근대에 지어진 여러 건물들이 가로막아 난망하다. 따라서 옛 배재학당 앞을 지나 정동거리를 걷는 것이 지금의 순성꾼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이다.
정동이란 지명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가 묻힌 정릉(貞陵)이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현재의 자리로 옮기기 전에 최초로 이곳에 자리 잡았다는 것에서 유래됐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와 연관된 지명을 가졌지만 정동은 안타깝게도 조선이 끝내 문을 닫고야 마는 비운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먼저 정동거리에 진입하기에 앞서 만나는 배재학당 동관 건물은 1916년에 지어진 것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의 유구한 역사를 가늠케 한다. 이후로 만나는 정동거리는 1897년에 준공된 정동교회 건물과 1915년에 건축된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1930년대의 구 신아일보 별관 등이 거리 곳곳에서 서구열강과 동북아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란했던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그대로 드러낸다.
한국을 무대로 각축전을 벌이던 서구 열강의 외국공관과 신식 병원, 학교 등이 집중적으로 들어섰던 정동거리를 구한말에 방문했던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은 “경운궁(현 덕수궁)이 없었다면 이곳은 조선이라고 볼 수 없다”고 평했을 정도로 이곳은 외국문물이 넘쳐나던 곳이었다. 지금도 미국 대사관저와 캐나다대사관, 영국대사관, 러시아대사관, 노르웨이대사관 등이 가까운 곳에 자리한다.
이 거리에서도 특히 살펴볼 곳은 지금 정동극장 왼쪽 골목 안에 자리한 중명전(重明殿)이다. 대한제국의 황실도서관으로 1901년에 지어진 이곳은 을사늑약(1895년)으로 명명된 비운의 사건 현장이기도 하다. 중명전은 현재 구한말을 중심으로 한 역사박물관으로 조성되어 일반에 개방되었다.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며 내렸던 교지와 박영효 선생의 태극기 원형,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여러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관람은 주로 해설사를 동반한 관람을 진행하므로 사전에 연락을 취하고 찾는 것이 좋다(문의: 문화유산국민신탁 02-732-7524).
서대문~옥경이슈퍼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앨버트 테일러를 아는가!
돈의문(敦義門)은 서쪽의 큰 대문으로 새문, 혹은 신문(新門)이라고도 불렸다. 그 이유는 태조 5년에 지었던 애초의 서쪽 대문이 지금과 다르게 사직단 부근에 최초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후로 태종 때 이를 허물고 서전문(西箭門)이라는 서쪽 대문을 다시 지었으나 결국 세종 때 서전문도 허물고 지금의 자리에 돈의문을 세우게 되어 새롭게 세운 문이라는 뜻의 별칭이 붙은 것이다. 지금도 그 유래가 새문안, 신문로라는 지명으로 남았음을 알 수 있다.
애석하게도 돈의문은 일제강점기 당시 도시계획이라는 명목으로 도로확장을 위해 완전히 철거됐다. 지금은 그 흔적을 정동사거리 강북삼성병원 앞에 설치된 공공미술작품 ‘보이지 않는 문’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돈의문이 정동사거리에 있었다는 증거는 동서로 낮아지는 이곳의 지세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집무실로 사용하다 암살당한 경교장을 강북삼성병원 안에서 잠시 둘러보고 서울시교육청 방면으로 길을 잡는다. 서울시교육청 앞을 지나 100m 정도 더 찻길을 따라가면 ‘홍난파가옥’ 이정표가 오른쪽 언덕을 향한다. 곧바로 만나는 오른쪽 돌계단을 오르면 몇 년 전에 노후주택들을 허물고 조성한 월암근린공원과 새롭게 복원된 성곽을 만난다.
이 공원 끝 부분에는 서양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아담하고 귀여운 집 한 채가 홀연히 나타난다. 바로 홍난파 선생이 6년간 말년을 보낸 ‘홍난파가옥’이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이 집은 홍난파 기념박물관으로 직계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다만 평일 낮에만 개방하므로 그 외의 시간에는 건물 외관만 보고 가야 한다. 또 2007년에 건물과 그 주변을 개보수하면서 야외공연장과 실내 소규모 공연장을 만들어 계절마다 다채로운 음악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홍난파가옥을 오른쪽에 두고 골목길을 쭉 걸어 가다보면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거목을 만난다. 바로 권율 장군 집터라는 곳에 심어진 수령 420년 은행나무다. 권율 장군이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진 이 나무의 밑동을 잘 살펴보면 ‘001’이란 작은 표찰이 있다. 이 표찰은 종로구에서 보호하는 1번 보호수라는 증표로서 이 나무의 가치를 환기시킨다.
나무에서 대각선으로 보면 서양의 전통을 따라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오래된 건물 한 채를 보게 된다. 힌디어로 ‘희망의 궁전, 이상향, 행복한 마음’이라는 뜻을 가진 ‘딜쿠샤’가 이 집의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미국식 주택으로 당시 UPI의 서울특파원으로 활약했던 앨버트 테일러가 살았던 집이다. 앨버트 테일러는 1919년 3월 1일 한국 민족대표 33명이 작성 낭독한 독립선언서를 입수, 뉴스로 통신사에 타전해 3·1운동을 세계에 알렸다. 이로 인해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조선총독부의 주요 감시인물이 되었다. 결국 가족과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다 다음해인 1920년 5월에 조선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미국으로 추방된 인물이다. 이 집의 역사는 아무도 모르게 잊히는 듯했으나 그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가 2006년에 90세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서울을 방문하면서 비로소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순성꾼들은 은행나무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가서 연립주택 뒷문을 통해 서울성곽의 본격적인 인왕산 구간이 시작되는 옥경이슈퍼까지 가야 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연립주택 뒷문에 ‘외부인 통행금지’ 플래카드가 붙었다. 이 루트를 종로구에서 ‘교남동 역사문화 기행길’로 소개하면서 연립주택 안을 통과하는 이들 때문에 주민들이 불편을 겪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이곳을 지나야 한다. 50m만 조용하게 지나가면 된다. 이 플래카드가 붙은 이후로 필자가 서너 번 지나가 봤지만 별다른 마찰은 없었다. 다만 야간에는 홍난파가옥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을 이용하길 바란다(지도참조).
옥경이슈퍼~인왕산~창의문
인왕에서 바라본 서울은 ‘기막혀 정말!’
인왕산 자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에 옥경이슈퍼(식품)가 있다. 딱히 부를 만한 지명이 없기도 하거니와 그 이름이 정겨워서 순성꾼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곳이다. 옥경이슈퍼부터 성곽을 왼쪽에 두고 걷는다. 즉, 도성 안쪽을 걷게 되는 것이다. 성곽이 잘 복원된 이 길은 공원화되어 걷는 데 무리가 없다.
공원 중간에 있는 전망데크에 올라서면 높지 않은 곳인데도 도심에선 쉬 볼 수 없는 서울의 전경이 극적으로 펼쳐진다. 청와대 경비 목적으로 초고층 빌딩들이 들어서지 못해 먼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왼쪽으로 경복궁의 배치가 한눈에 들어오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마천루의 숲이 이어진다. 그리고 마천루의 종지부를 찍듯 남산의 N타워가 방점으로 우뚝하다. 대기가 맑은 날 저녁에 올라오면 환한 빛으로 피어나는 서울의 야경을 볼 수 있다.
전망데크에서 인왕산 성곽 계단길 입구까지는 길이 두 갈래다. 성곽 안쪽과 바깥쪽 모두 길이 나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추천하자면 낮에는 도성 바깥쪽을 걷는 풍치가 좋고, 밤에는 서울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도성 안쪽 조망이 우수하다. 전망데크에서 도성 바깥쪽으로 가려면 데크 뒤쪽으로 나 있는 암문을 통과해서 오른쪽으로 가면 된다.
본격적으로 인왕산 능선을 타고 오르는 성곽은 편도 1차선 찻길 건너편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곳부터 성곽길은 급격하게 가팔라진다. 하지만 계단으로 성곽 옆길이 정비되어 있으므로 오르는 데 기술적인 난이도는 없다. 다만 성곽 보수공사로 인해 인왕산 성곽 남쪽 구간의 출입은 당분간 안 되므로 우회로를 선택해야 한다. 인왕산 성곽구간 복원공사는 몇 차례 연기되어 2012년 5월 말에 완공예정이지만 다시 미루어질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초 축성 당시 인왕산 성곽노선에서 장삼을 입은 스님처럼 보인다고 해서 신성시 되던 ‘선바위’를 포함해서 성곽을 쌓을 것인지 여부를 놓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라서 태조 이성계가 고민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결국 이성계는 초봄에 눈이 먼저 녹는 자리를 따라서 성을 쌓게 했고, 그에 따라 선바위는 도성 밖에 위치하게 됐다. 이를 두고 무학대사는 “앞으로 조선의 중들은 화를 면치 못하겠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렇게 눈이 녹은 자리를 따라서 지어진 성곽이었기 때문에 한양도성을 별칭으로 설성(雪城)이라고 불렀고, 이 말이 변해서 눈울타리라는 뜻의 설울로, 다시 이것이 지금의 서울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지금의 서울 지명 유래로 풀이되곤 한다.
복원공사 중인 인왕산 성곽구간의 우회로는 걷기에 안성맞춤인 인왕스카이웨이다. 나무그늘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걷는 인왕스카이웨이 산책로는 걷기도 편하고 창의문까지 길찾기도 쉽다. 그러면 인왕산 성곽 복원공사가 끝나고 개통된 것을 가정해서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인왕산 정상 부근까지는 대체로 계단으로 이어진다. 그늘이 없기 때문에 햇볕 강한 여름에는 조금 고역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면 서울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조망점이 있다. 뒤로는 삼각산이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의 말갈기 같은 연봉을 줄지어 세우고 앞으로는 북악산을 출발한 내사산의 지맥이 낙산, 남산으로 이어져 인왕산을 거쳐 다시 북악마루로 향한다. 세계 어느 나라의 수도도 갖지 못한 천혜의 자연조건을 내사산과 외사산으로 겹두른 서울은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하다. 또한 능선을 따라 구불거리며 인왕산을 타고 오르는 성곽의 유려한 곡선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인왕산 정상에서 성곽을 따라 내려가는 길도 대체로 계단이 많은 편이다. 북소문에 해당하는 창의문(彰義門)까지 연이어서 성곽을 걸으면 좋겠지만 군부대가 주둔하는 탓에 후반부는 인왕스카이웨이로 내려와서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거쳐 창의문에 다다르게 된다. 윤동주 시인이 이 부근인 누상동에 살았다는 것에 착안해서 만든 이곳의 조망점은 성벽 가까이 올라서 삼각산과 북악산의 경치를 한눈에 담는 것이다.
창의문 입구에는 1968년 1월 21일에 있었던 김신조 침투사건 당시 교전에서 숨진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있다. 그날의 사건으로 북악산 일대는 40여 년간 통행이 금지되다 2007년에야 비로소 북악산 성곽을 온전히 두 발로 걸어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