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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문화관 광장 입구에 우측 자연보호헌장 탑 옆에 C형 간판으로 탄금대라는 제목으로 충청북도 기념물 제4호인 탄금대에 대하 안내 간판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충청북도기념물 제4호 소재지 :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는 대문산에 위치하여 남한강과 달천이 만나는 곳에 있다. 이곳은 신라 진흥왕 때 가야국에서 망명한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탄주한 곳이라고 하여 탄금대라 부르며 임진왜란 때 도순변사 신립장군이 8,000여 명의 군사로 왜장 고시니 유끼나가가 이끄는 수만은 왜적을 맞아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전적지이다. 또한 이곳에는 정상부에 토석이 있으며 문화원 야외음악당 대흥사 산장 휴게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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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탄금대 육각정이 새로 이층 콘크리트 건축으로 단장된 후 이름까지 탄금정으로 바뀌었다. 탄금정이란 정자는 2층으로 누각형태의 정자다. 탄금대 열두대 가는 길목 전망이 좋은 곳에 서 있다. 탄금정의 1층은 2단의 기단을 만들고 한 변의 길이가 7m의 정방형 위에 한 변의 길이가 80cm이 정방형의 주초석(柱礎石)을 놓고 그 이에 사방 50cm크기의 사각기둥을 각각 280cm 거리에 4개를 놓아 2층 누각을 지탱하고 있으며 폭 120cm의 계단을 만들어 2층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만들었다. 2층은 720cm를 한 변의 길이로 하는 정방형으로 가운데 일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가에는 난간을 둘러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으며 네 기둥사이에는 지름 60cm의 원형콘크리트 기둥을 세워 초익공(初翼工) 계통의 공포를 구성하였다. 이 정자의 내력을 보면 본래 천운정(天雲停)으로 1903년(광무7년) 충청북도 관찰사 김양규씨가 자기조부가 충주목사로 재임당시 지금의 교육청자리에 있던 연못(당시는 상연당이라고 했다)가운데에 석가산을 쌓고 그위에다 육각정을 세우고 천운정이라 이름짓고 매년 7-8월이 되면 수령과 유생들이 모여 시를 짓고 즐기던 곳이었다. 광무10년(1906)에 충주공립보통학교(현교현초등학교)를 이곳에 건축하고 운동장으로 사용키 위해 상연정을 메우게 되며 육각정은 사직산으로 옮기고 임시 석영으로 사용하다가 , 1955년 당시 충주읍장이었던 박승두가 이 정자가 사직산에 이건되어 있던 것을 탄금대 열두대 위로 옮긴 것이다. 목조로 된 이 정자는 낡아서 1976년 6월 이 자리에 현재의 탄금정을 세우고 6각형이던 천운정은 1977년 호암지 3번 국도 옆 동산에 콘크리트 건물로 6각정 정자가 다시 지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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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곳 :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 크기 : 전체높이 376cm 만든때 : 서기 1981년 충장공신립장군순절비(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는 탄금대 대흥사 뒷편에 있다. 비의 받침돌으 거북 형태로 만들고 앞 뒤 길이가 260cm에 달하고 폭이 147cm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거북 형태로 조각한 수법은 간단하며 치졸하다. 빗돌은 높이가 197cm이며 너비가 79.5cm, 두께는 28.5cm로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앞면에는 한자로「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라 쓰고 뒷면에는 전부 한글로 비문을 쓰고<>안에 한자를 넣어 뜻을 명확히 하였다. 대체로 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띄어쓰기는 하지 않았다. 비(碑)의 우측면에 사람(서번 박재륜), 글자를 쓴 사람(유재 김성규), 세운사람(충주시장 김태수)을 기록하였다. 蓋石(개석)은 이수형태로 너비 100cm, 두께 51cm, 높이 100cm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앞면과 뒷면에 각각 용 두 마리를 양각하였으나 그 조각 수법이 치졸하다.
조선(朝鮮)조(朝) 선조(宣祖) 二十五年인 서기 一五九二年 四月二十 대군으로 부산(釜山)에 침입하여 부산성(釜山城), 동래성(東來城)이 함락되고 계속해서 영호남 일대의 패전 급보가 조정에 전해지자 평소에 유비무환의 국가적 시책 없이 동서 당쟁에 펴할 날이 없던 정국과 민심은 큰 동요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시 두 갈래의 방어책이 있었으니 그 하나는 도성을 수호하는데 맹장인 한성판윤(漢城判尹) 신립(申砬)이어야 하겠다는 것이 선조대왕의 뜻이요. 다른 하나는 조정대신 일부에서 신립장군이야 말로 그의 온성 ,경원 동북방면에 있어서 뛰어난 지모 방약으로 야인을 소탕하여 백년강의 변환을 평정한 공으로 미루어 마땅히 그를 도순변사로 삼아 적의 기세를 새제의 요충에서 막아야 한다는 대립된 의견이었으나 여러번 왕에게 주청하게 되어 왕도 그의견을 따라 신립(申砬)을 팔도도순변사(八道都巡邊使)로 삼아 병마를 갖추어서 의주목사(義州牧使) 김여물(金汝 )을 종사관으로 하고 왕이 친히 상방보검(上方寶劍)을 하사하여 출전케 하였다. 신립장군이 충주에 도달하기는 四월 二十七일로 병사 八천여명을 인솔하여 충주 단월역에 진을 치고 천연의 요새 새제를 정찰케 하였으나 적의 노도 같은 기세로 봉아 그 선봉이 새제를 침범하였을 것이 확실한 사태이므로 차라리 달천강에 배수진법으로 훈련이 미흡한 병사로 하여금 최후의 일병까지 싸워서 적세를 꺾기로 결정하였다. 다음날 二十八일 적의 무리는 산허리와 들판으로 밀어 다치니 칼을 번쩍이고 총포소리 요란히 터지는 가운데 창검궁시등 불리한 무기로 아군의 병사를 몇 번이고 적진에 직격시겼으나 저세가 불리함을 판단한 신립장군은 단기로 적진에 돌입하기를 몇 차례 수십명의 목을 베고 혈전사투하다가 왕에게 장계를 올리게 하고 결국 탄금대 위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아아 슬프도다. 장군의 나이 四七세로 호국의 초석이 되니 뒤에 영의정(領議政) 평양부원군(平壤 府院君)에 추증되고 시호(諡號)는 충장(忠壯)이며 三八九년이 지난 오늘 비로소 민족의 한이 서린 이 자리에 돌을 닦아 비문을 새겨 그 순국충의를 천추만대에 길이 저하고자 한다. 一九八一년 十월 十五일
서번 박재륜 짓고 유재 김성규 쓰고 충주시장 김태수 세우다.
신립장군순국지지비(申砬將軍殉國之址碑)는 귀부와 이수의 형태를 갖춘 비이다. 화강암의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폭 140cm, 길이220cm, 높이65cm의 귀부대좌를 화강암으로 만들고 육각형의 구갑(龜甲)을 새기고 연화문 받침 위에 비공(碑孔)받침을 만들었다. 비석은 오석으로 폭 85cm, 두께47cm, 높이200cm의 크기로 전면에는 예서체로 '악성우륵선생추모비'를 글자크기 26cm의 크기로 새겼다. 뒷면에는 작은 글자로 그내용을 기록하였다. 이수는 폭 100cm, 두께67cm, 높이75cm의 화강암으로 용을 양각하였으나 조각이 치졸하다. 탄금대 입구에서 산으로 올라가 문화관 앞 주자광장 입구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을 전부 개재한다.
있는곳 :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 크기 : 전체높이 158cm, 너비 133cm 만든때 : 서기 1978년
신립장군순국지지비(申砬將軍殉國之址碑)는 신립이 왜적과 싸우다 전세불리(戰勢不利)하여 투신했다는 열두대 바로 위에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5cm높이의 콘크리트를 맨 밑에 두고 34cm 높이의 화강암 받침돌 이에 높이 99cm, 너비 133cm, 밑의 두께 24cm, 위의 두께 15cm로 화강암의 돌을 곱게 갈아서 만들었다. 때문에 그 면이 유리같이 반짝이다. 개석(蓋石)은 없다. 따라서 이 비의 모양은 직사각형의 거울을 옆으로 놓고 거울 면에 글자를 새긴듯하 느낌을 준다. 비의 상단 좌행하여 申砬將軍殉國之碑)신립장군순국지비라고 예서풍의 글자를 크게 새기고 자경은 약13cm 이다.
宣祖二十五年(一五九二年) 四月 二十八日 八道都巡邊使 申砬將軍이 從事官 金汝 과 더불어 鳥銃砲火의 數十萬 倭賊을 槍劍弓矢의 八千軍士로 맏아 싸우다가 戰勢不利하자 金公과함께 敵陣에 突入하여 數十賊을 擊殺한 뒤 彈琴臺 이곳 열두대에서 享年 四十七를 一期로 哀惜하게 爲國殉節하시다.
글 朴載崙 글씨 竹史 朴忠植 國會議員 李鍾根 判事 金平祐 平谷石材社長車珠元 忠州文化放送社長柳浩 平山申氏忠州中原花樹會 藝總忠州支部長 權泰成 建立除幕하다. 西紀一九七八年十月二十六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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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꽃 노래비 감자꽃 노래비는 135×180cm의 지대석과 그위에 120×162cm의 2중 지대석 위에 높이 360cm 폭60cm의 반원통형의 화강암을 세우고 지름 110cm의 반구형에 감자꽃을 새겨 돌기둥의 25cm 상단에 배치하고 감자꽃 조각 위에 45×60cm의 검은돌(鳥石)을 붙이고 거기에 글자를 새겼으며, 글자파 위 10cm 상단에 10×45cm의 오석에 노래비라는 제목을 음각하였다. 노래비 옆면에 30×35cm의 오석에 부착하여 여기에 감자꽃 노래비의 설립에 관한여 기록하였다. 탄금대의 동쪽 충혼탑 옆에 위치하고 있다.
감자꽃
자주 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감자 비의 좌측면에는 권태응 선생의 약력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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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4. 20 충주시 칠금동 태성 1932. 3. 25 충주공립보통학교졸업 1937. 3. 4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1938 재일 유학생서클 조직 및 항일투쟁 1939. 5. 일본 관헌에 의해 투옥 1940. 6 이병으로 보석 중 작시하면서 요양 1951. 3. 28 충주시 칠금동에서 작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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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 : 김증한, 이우영, 정범구, 김영호, 권태성, 나상정, 임병구, 이사학, 이병제, 김동원, 주영덕, 조각 : 백문기 후원 : 새싹회 1968년 제86회 어린이날 노래비 건립 당시의 동판 글씨판은 어느 이해 없는 이의 소행으로 잃어 버려졌던 것을 충수회 및 시내 초중고등학교의 재정 지원에 힘입어 예총충주지부의 주관으로 이전의 모습을 애석(돌) 글씨판으로 박어 되찾게 되었음을 첨가 기록함. 1974년 5월
탄금대에는 많은 유적들이 있는데 권태응 노래비는 아담하기는 하나 비교적 작은 시설(높이 330cm)이기 때문에 작은 것 같다. 그러나 이 나라 민족 특히 식민정치치하에서 울분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뼈져리게 음미해야 할 동요가 새겨진 노래비이다. 이 비의 주인공인 권태응 선생은 1918년 4월 20일 충주 칠금동 362번지(구 탁아소자리)에서 출생했고 어려서는 조부님께 서당공부를 하다가 9살 때 충주공립보통학교(현 전신전화국자리)에 입학해서 1932년 3월 25일 졸업하고 서울 제일 고등 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해서 1937년 3월 4일에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그 해 4월 1일 일본 조도전대학 전문부 문학과에 진학하였으나 민족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입건되어 1학년을 못 마치고 중퇴 당하고 말았다. 권태응 선생은 가정도 부유한 편이고 조부께서는 한학자였고 부친은 일찍 개화되어 1920경 도일(渡日)해서 일본인들의 압제(壓制)를 무릅쓰고 유학을 한 분이다. 당시의 이 사정을 잘 아는 권태응 씨(氏)의 말에 의하면 그 집 서재에 가보면 일본문학전집을 비롯한 많은 책이 방안을 메우고 있었다고 하며 권태응이 항일의식이 싹튼 것. 문학을 좋아한 것, 일본을 가게된 것 등이 모두 선대(先代)로 부터 물려받은 하나의 유산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제일고등보통학교재학당시부터 성적도 우수했지만 특히 문학에 특출했고 음악도 좋아하고 운동[정구(庭球)]도 좋아하는 다정다감한 성격이었으나 정의심이 강한 편이어서 한국인이으로서 당당치 못한 행위가 있을 경우 폭력으로 제재를 해 주는 일이 가끔 있어서 일본인으로부터 요주의 인물이라고 지목을 받고 있었다. 어느날 가정방문을 온 일본인 교사에게 한 장의 사진이 발각되어 문제된 일이 있었다. 사진은 북악산에 올라 총독부(전 중앙청)을 내려다보며 큰돌을 들고 쳐부수려는 형용의 사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등생이었기 때문에 관용(寬容)을 받았던 것이다. 일본서 유학할 때 입건이 되고 중도(中途)를 당한 후 부터는 (1938년) 재일 유학생들을 규합해서 써클(독서회)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본격적으로 하였다. 그때 일본경찰(내선계형사)에 연행된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다행히도 그때 일본인중 궁교(宮僑)라는 유력이사의 노파와 잘 알게되어 특수청탁으로 어려운 고비를 여러차례 도움을 받았으나 결국은 진상이 밝혀지자 1938년 5월 형무소에 투옥되어 모진 옥살이를 하다가 몸이 나약해지고 폐결핵으로 판명되자 1940년 6월에 출옥하게 되었다. 귀국후 황해도 은양원을 찾아갔으나 여의치 않아 다시 인천에 있는 결핵요양원(체신부에서 경영하던 병원)에 입원치료를 받았다. 입원중에도 작품활동을 계속하였고 병세가 좋아지자 결혼도 하고 농장생활을 하며 작품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면서도 당시 동민(洞民)들을 모아 야학을 구실로 항일사상을 강의하고 때론 각본을 만들어 소인(素人劇)을 하는 등 민족운동에만 전념하다가 1945년 해방 후 신약에 효과 얻어 병이 좋아지더니 1950년 6.25사변으로 약을 얻기 힘들자 1951년 3얼 28일에 별세하였다. 그는 아동문학가였으나 주로 토속적인 것을 소재로 하 작품이 많고 그 맥(脈) 속에서 반드시 항일을 내용으로 부각시키고 있었다 한다. 그의 유교(遺敎), 주로 동요로는 「고추밭」「율무」「옹달샘」등이 있으며 당시 창씨개명을 반대하던 작품으로「감자꽃」이 남아 있다.
[감 자 꽃] 자주꽃 핀건 자주 감자 /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 하얀꽃 핀건 하얀감자 / 파보나마나 하얀감자
청사(靑史)에 빛날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은 일정 때이기 때문에 발표할 기회도 없거니와 골방에 쌓아 두었다가 빛을 못 본 채 없어져 간 것이 부지기수(不知其數) 였을 것이다. 권태응 선생은 지상(紙上)을 통하여 윤석중 선생과 서로 편지연락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서로 면불지중(面不知中) 절차탁마(切磋琢磨)하다가 해방후 비로소 얼굴을 뵙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 노래비도 윤석중(새싹회장)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게 된 것이다. 때를 같이 해서 충주에서 이의 제일고등보통학교 동기인 이해곤 선생이 선두에서 서둘러서 이 비석을 건립하고 1968년 5월 5일(제86회 어린이날)을 기하여 제막을 보게된 것이다. 조각 : 이대교수 백문기 후원 : 새싹회의 윤석중 회장(대담자 : 권태갑, 권태성) 충주가 낳은 유명한 사람인데 동요를 만들어 이를 빛나게 하는 작곡가도 나올만 하거니와 그렇지 못할 경우 부지하세월로 기다리느니 고명한 작곡가에게 의뢰해서라도 전국에 보급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현재 권태응선생의 생가 흔적은 없이 사라 졌으며 그 옆에 있던 농장 자리에 새로 지어진 탁아소(구 칠금동 사무소 인근)로 새로 지어 운영되어 오다가 현재는 현재 칠금동 362-5번지 빈 건물로 남아 있다.(아래 오른쪽 사진) | ||||
권태응 선생의 묘소는 현재 파라다이스 웨딩홀에서 팽고리산을 오르는 곳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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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충주를 대표하는 향토가요로 37년 동안 시민의 사랑을 받아 온 ‘탄금대 사연’ 노래비가 29일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 야외음악당 앞에 세워졌다. 국제로타리 3740지구 3지역(충주) 소속 7개 로타리클럽은 올해 국제로타리 창립 100주년을 맞아 도비와 자부담 등 3600여만원을 마련, 노래비 건립을 추진해왔다. 2005. 6. 29(수)14:00 제막식을 가졌다.〈사진〉 제막식에는 로타리클럽 회원과 가요계, 국악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탄금대 사연’은 1968년 당시 KBS 충주방송국에 근무하던 이병환씨가 가사를 쓰고 향토작곡가 백봉씨가 곡을 붙인 노래. 충주 지역의 대표적 관광지인 탄금대를 소재로 한 노래여서 40년 가까이 충주의 대표적인 향토가요로 애창돼 오고 있다.
특히 이 노래는 1998년 대한민국 향토음악인협회가 충주를 중심으로 결성되는 계기를 마련했고, 매년 충주에서 열리는 대한민국 향토가요제의 태동에도 기여했다. 주현미씨 등 모두 6명의 가수가 이 노래를 취입했으며, 노래방 애창곡으로도 꼽힌다. 제막식에는 이 지역 로타리클럽 회원들을 비롯해 반야월, 남백송, 금사향씨 등 가요계 원로들과 국악인 이은관씨 등이 참석했다.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탄금대는 신라 때 악성(樂聖) 우륵이 가야금을 타고 풍류를 읊으며 후학을 양성했고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이 왜적을 맞아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곳으로 이 사연이 ‘탄금정 구비 돌아 흘러가는 한강수야, 신립 장군 배수진이 여기인가요…’라는 가사에 아련하게 표현돼 있다.
탄금대사연
노래비 건립에 즈음하여 삼국의 중심인 중원(中原)땅에 자리한 탄금대(彈琴臺. 지방기념물4호)는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가 꽃핀 곳이다. 서기2005년 6월 29일
네가지 표준 The Four-way Test 국제로타리 3740지구 3지역
작사가 : 이병환(李炳煥) 작품 수상 작곡가 : 백봉 (본명 : 李鍾學) 작품 수상 가수 : 주현미 수상
향토가요후원회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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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사연 /주현미
노을진 남한강에 님부르는 탄금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