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살이의 끝 무렵을 가리키는
말로는 노년(老年), 만년(晩年), 말년(末年) 등 여러가지가 있다.
내 생각에, 셋은 미묘하게 첫 느낌이 다르다.
노년이 단순히 늙어서 병들고 쇠약함을 떠올리게 한다면,
만년은 한껏 무르익어 성숙함을 떠올리게 하고,
말년은 다가오는 죽음 앞에 홀로 버티는 비장함을 떠올리게 한다.
같음에서 다름을 생각할 때, 스타일이 생겨난다. 세월이 쌓여 죽음에 이르는 건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남들과 다르게 인식하려 애쓰는 사람들만이 남은 시간을 던져 독창적인 양식을 이룩할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 노년은 인류에게만 주어진 삶의 드문 양식이다. 다른 생명체들은 나이 들어 병약해지면 무리에서 버려져 다른 포식자에게
잡혀 먹히기 때문이다. 무리를 이루어 고도의 사회체계를 이룩한
인간만이 나이든 개체도 적절한 역할을 찾아 마지막까지 생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노인의 존재는 진화의 산물이요, 문명의 축복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노인이 무조건 존중 받아야 할 까닭은 없다. 주어진
여건에 맞추어 어떤 삶을 살것인가 를 고민할 때, 다시 말해 자기 생을 돌이켜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나이 듦에 적합한 삶의 양식을 갖출 때, 간신히 늙은이가 아니라 어른으로서 사회적 존경을 받을 수 있다.
노인의 인생 스타일 문제를 깊이 탐구한 철학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예술의 역사에서 말년의 작품은 파국이다." 좋은 예술가일수록 기존 사회질서에 적당히 조응하기를 거부하고, 거리두기, 내적 망명, 반 시대적 감각을 고집하면서 당대의 주류와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노인성이 신체의 노쇠와 악화를 연상시킨다면,
만년성은 저무는 노을의 무르익은 아름다움을 연상시키고,
말년성은 생애 마지막 자락에 이를 때까지 끝끝내 새순을 내미는 생성력을 연상시킨다.
낡은 전통에 대한 저항, 관습으로부터의 망명, 젊은 자신으로부터의 탈출이 우리안에서 말년성의 꽃을 피우게 한다.
나이가 드는 건 피할 수 없지만, 어떤 노인이 될 것인가는 각자 자신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