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서울의 봄
최원돈
대설이 지나서인지 하늘은 잔뜩 찌푸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하다. 겨울답지 않은 봄날이다. 오랜만에 아내와 영화관엘 갔다. 화제의 영화 <서울의 봄>이 내 마음을 이끈다.
1979년 12월 12일은 우리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날이다. 그 해 10 ‧ 26사태로 국가원수가 서거하고 나라의 존속이 위태롭던 시국이었다. 신군부가 혁명을 꾀한 날이기도 하고 반란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날이기도 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수많은 인간 군상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끝까지 변하지 않은 두 사람에게 주목하였다. 혁명 세력에 맞섰던 수도경비 사령관 이태신과 헌병감 김준엽의 모습이다. 그들은 혁명 세력들을 반란군이라 규정하며 끝까지 조국을 지키고자 했던 참 군인이었다.
수경사령관 이태신은 계엄사령관이 불법적으로 체포된 것을 알고는 고군분투하다 마침내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만류하는 부하인 작전 참모에게 절규하며 남긴 말이 귓전을 때린다.
“내 조국이 지금 반란군한테 무너지고 있는데, 끝까지 항전하는 군인 하나 없다는 게 그게 군대냐!”
이 얼마나 결기에 찬 참 군인의 모습인가.
반란군에 의해 곧 함락될 육군본부를 떠나는 군 수뇌부의 모습을 보며, 중과부적이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떠나는 사람들을 가로막고 울부짖는 또 한 사람의 참 군인 김준엽 헌병감.
“이곳은 제가 끝까지 지킵니다.”라며 곧 들이닥칠 공수부대와 맞선다.
육군본부의 헌병 병력은 경계 병력으로 초병에 불과했지만, 그는 조국을 지키겠다는 불타는 투혼을 보여주었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50년 전 나의 군대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971년 12월에 50사단 훈련소에 입대했다.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속에 훈련 과정을 모두 마치고 연병장에 모여 자대 배치를 수도경비사령부로 받았다. 모두 열 명의 장병이 배속되었다. 우리는 더블 백을 메고 두려움에 야간 군용열차를 타고 용산역 TMO*에 도착했다. 처음 본 서울 하늘 사이로 서울타워만 새벽 불빛에 어슴푸레 깜박이고 있었다.
잠시 후 ‘스리쿼터’에 실려 수도경비사령부로 들어섰다. 위병소에는 철모에 M16 최신식 소총을 든 초병이 근무하고 있었다. 연병장에는 하얀 도복을 입고 맨발로 훈련 중인 병사들의 함성이 귓전을 때렸다. “이제 우리는 죽었구나.”하고 누군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하지만 사령부에서 대기하는 동안 우리는 훈련소에서의 배고픔을 한껏 채울 수 있었다.
수경사는 지금의 남산 한옥 마을 자리에 있었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직할 부대로 수도 서울 방어를 주 임무로 엄격한 군기와 훈련으로 단련된 대한민국 최정예 부대였다. 당시 월남에서 용맹을 떨친 윤필용 장군이 사령관으로 국군의 어느 부대보다 강한 프라이드를 가지고 복무했다. 장교는 물론 부사관과 사병들도 최우수 병력으로 최신식 장비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장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충천했다,
나는 헌병대로 배치되어 3개월간 교육을 받고 20중대에 소속되었다. 외모 때문인지 부대 앞 필동 사거리에서 TCP* 헌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우리의 임무는 수도경비사령부의 병력과 장비가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교통신호를 수신호로 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수신호로 교통정리를 하는 헌병은 장안의 명물이었다. 헌병 화이버를 쓰고 권총과 곤봉을 매단 혁대를 차고 근무복은 매일 매일 세탁소에서 다려입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초병이었다.
해가 지나 전방에서 장군 지프 한 대가 나타났다. 까만 선글라스를 낀 장군은 시골티가 물씬 풍겼다. 수경사 참모장으로 부임한 장태완 준장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령부 참모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조장 올라오라고 했다. 나는 병장으로 조장이었는데 조원 3명 중 누군가 근무하며 참모장 차를 놓쳐 그냥 통과한 것이다. 참모장은 다짜고짜 걷어차며 똑바로 근무하라며 초병이 멍청하게 뒷짐 지고 근무하면 되겠느냐고 조원들 교육 잘하라고 했다. 작은 체구였지만 다부지고 눈에서는 불빛이 뿜어져 나왔다. 영락없는 호랑이 모습이었다.
장군으로부터 심한 질타는 받았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나태하게 근무해서 생긴 일이라 오히려 창피스러웠다. 그 후로 우리는 더욱 정신을 차려 근무하게 되었다. 멀리서 참모장 차가 나타나면 운전병도 라이터를 깜박여 주었다. 근무자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충성~”하고 경례를 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면 참모장도 만족한 듯 손을 올려 경례를 받아 주었다.
나는 5 헌병단 20중대 소속이었다. 우리 부대는 서울의 위수지역 담당으로 지역 중대와 검문소 중대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TCP로 배치되어 교통 헌병으로 근무했다. 이곳은 수도경비사령부의 얼굴이며 최일선 접점으로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매일 꼭두새벽 초소에 나가 밤늦게 부대로 돌아왔다. 어지간한 훈련이나 교육은 열외였다. 최정예 부대의 초병이라는 자긍심으로 복무했다.
대대장이 바뀌었다. 호남(好男)형 김진기 대령이 단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육군에서도 소문난 청렴한 군인이라 했다. 새로 부임한 단장은 점심 식사를 반드시 장병 식당에서 병사들과 함께했다. 취사반에서는 점심때마다 비상이 걸렸다. 그동안 군대 짬밥이라 보통의 식사였지만 단장과 함께 식사하다 보니 취사반에서는 맛을 내기 위해 갖은 양념과 부식으로 질을 높였다. 장병들은 음식을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웠다. 그때 지휘봉을 들고 혼자서 의젓하게 사병 식당 맨 앞자리에 앉아 식사하던 모습은 잊을 수가 없었다. ‘지도자는 저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해’하고 나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서울의 봄’에 나오는 이태신 수경사령관이 장태완 장군이고 김준엽 헌병감이 김진기 장군이다. 그들은 어떤 회유나 협박에도 흔들림 없는 참 군인이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며 누구도 나서지 않아, 자신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전혀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참 군인으로 남았다. 그 후 신군부가 정권을 잡으며 강제로 퇴역당하고 숱한 박해로 가족들 역시 불우한 삶을 살게 되었다.
당시 전역한 지 5년이 지나 직장에서 이 사태를 지켜만 보았다. 신군부가 혁명으로 성공하고 끝까지 장태완 수도경비 사령관이 맞서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마음을 졸이며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김진기 헌병감도 직위 해제되어 고초를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애를 태우며 가슴 아팠다. 특히 그들의 가족들이 알 수 없는 일로 유명을 달리했을 때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기도 하였다. 그런데 오늘, 이 영화를 보니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김진기 헌병감의 끝까지 항거했다는 사실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그들은 그 후 어떤 회유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사사로운 행동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럽다.
지금 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호시탐탐 대한민국의 전복을 노리는 세력들이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우리 스스로가 준비하고 대처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만약 우리에게 국가의 위기가 닥쳤을 때 이들처럼 분연히 일어나 자기 소임을 다 할 수 있는 참 군인이 몇 명이나 될까. 우리가 역사를 중시하고 교훈 삼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시절 전역하고 직장 생활을 한 지 몇 해가 지났지만, 수도경비사령부에서 몸에 밴 군인 정신과 프라이드를 잃지 않고 내 삶의 지표로 삼았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모든 일에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두 장군의 참 군인 모습은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나도 지도적 위치에 올라서는 두 분이 보여준 참 군인의 정신을 살려 모든 일에 솔선수범했다.
"진정한 무사는 얼어 죽을지언정 곁불을 쬐지 않는다." 는 말이 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무사였으며 참 군인이었다.
나는 ‘서울의 봄’을 보면서 그 시절 상황에 대해 다시 한번 떠 올려본다. 이제 그들은 모두 이 세상을 떠나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보는 시각에 따라 모두가 나라를 위해 나셨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한 군인 정신을 높이 사고 싶은 것이다.
지금 북한의 김정은은 대한민국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헌법까지 바꾸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언제던 남한을 불바다로 초토화해 인민공화국에 편입시키겠다고 한다. 우리가 ‘서울의 봄’을 보면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은 유사시에 조국의 안위에 문제가 생겼을 때 분연히 일어나야 할 참군인의 모습일 것이다. 과거에 얽매여 시시비비를 따져 정파에 도움을 바라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끝까지 조국을 지킬 수 있는 참 군인의 정신을 배우고 다져야 할 일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통해 또 ‘다른 서울의 봄’을 맞아야 할 사명이 아니겠는가.
영화의 자막이 올라가고 한참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는 구성지게 겨울비만 내리고 있다. 아내도 이 영화를 보고 그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그 시절 아내는 나의 ‘온리 유’였다. (2023.12.12)
*TMO : Transportation Movement Office 군 장병들의 수송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운 영하는 사무실
*TCP : Traffic Control Post 군사 교통 통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