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3일 사순 제3주일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루가 13,1~9)
‘Sir, leave it for this year also, and I shall cultivate the ground around it and fertilize it; it may bear fruit in the future. If not you can cut it down.’”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을 통해 모세를 부르신다. 당신 백성이 이집트에서 겪게 된 억압과 울부짖는 소리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해방시키시고자 모세를 쓰시는 것이다(제1독서).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 아래에서 홍해를 건너 파라오의 손에서 벗어났으나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광야에서 불평을 터뜨렸다. 그리스도인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악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이스라엘 백성처럼 악을 탐내며 불평불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제2독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주인의 손에 잘려 버려진다. 이처럼 회개하지 않는 이들 또한 하느님의 손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심판을 서두르지 않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끝까지 참고 기다리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도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자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로 이때 포도 재배인이 주인에게 한 해 더 기회를 주자고 합니다.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자기가 ‘나무의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음의 두 가지 일을 하실 것입니다. 첫 번째로 삶의 둘레를 파실 것입니다. 우리 삶의 주변으로 홈을 파시어 경계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곧 세상의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 고독한 자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세상의 삶과 늘 어울리다 보면 하느님을 만날 시간이 없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직접 영양분을 얻으려면 규칙적으로 그리고 꾸준히 삶의 둘레를 만들어 세상과 구분을 짓는 시간과 공간을 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거름을 주실 것입니다. 거름은 냄새나고 다가가기 싫은 것이지만, 나무를 키워 주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우리 삶에 어려움과 고통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거름입니다.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입니다. 이 사순 시기에 신앙의 열매를 잘 맺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둘레를 파시고 거름을 주시는 주님의 손길에 여러분 자신을 맡기십시오. 맺지 못했던 삶의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
회개는 새 출발의 다짐입니다. 삶의 무거움을 벗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진정 은혜로운 일입니다. 이를 공적으로 ‘함께 시도하자’는 것이 사순 시기의 정신입니다. 인간은 변덕이 심합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일을 금방 시들해하고, 그토록 ‘좋아하던 사람’도 어느 날은 사정없이 까발려 버립니다. 변덕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는 ‘슬픈 본능’입니다. 끊임없이 ‘새 출발’을 다짐하지 않으면 회개 역시 변덕스러운 마음의 표현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회개하면’ 뉘우치는 모습을 먼저 연상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답도 아닙니다. 회개는 뉘우침을 넘어 ‘새 출발’이 이루어져야 온전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큰 회개는 작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큰 회개가 요구되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작지만’ 잘못된 습관에서 돌아설 때 우리의 운명은 달라집니다. 나쁜 습관은 좋은 습관을 몸에 익히면 ‘자연스레’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에 대하여 칭찬보다 비난이 많다면 고쳐야 합니다. 물질을 대하는 자세에 욕심이 넘친다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본능을 조절하는 길은 ‘극기’밖에 없습니다. 남은 사순 시기 동안 ‘희생’과 ‘절제’를 연습한다면 우리 역시 ‘부활하는 부활절’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
우리 조상들은 엄청난 자연재해를 겪을 때마다 분명 그 안에 하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동안 하늘의 노여움을 사도록 행동한 것은 없는지 반성하는 계기로 삼았다고 합니다. 고려 말 공민왕 때 신흥 명나라를 치자는 주장이 유학자들 사이에 대두되었을 때, 이는 무모하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들이 명나라와 내통했다 하여 이들을 포함한 수십 명을 청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심문하는 중에 갑자기 큰비가 쏟아져 청주성 안에 큰물이 들이치기 시작하여 백성들이 큰 곤경에 빠졌습니다. 공민왕은 많은 이들이 무고하게 벌을 받고 있음을 하늘이 알고 홍수로 응징한 것으로 여기고 이들을 방면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제물을 바치고 있을 때 빌라도의 군사들이 그들을 학살한 사실과 그 옛날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명이나 깔려 죽은 일을 예로 드시면서, 이 모든 참변들은 단순히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조상들이 자연재해를 하늘의 뜻으로 여기며 반성하는 기회로 삼았듯이, 예수님께서도 비극적인 사건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회개를 요청하는 하늘의 표징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시대의 징표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어떠한 열매를 맺기를 바라시는지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청해 봅시다.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신대원신부-
사순 제3주일이다. 주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하고 말씀하시며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들려주신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잘라 버리겠다는 것이 포도원 주인 뜻이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아까운 땅만 차지하고, 그러면 땅만 버리고 못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지기가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하고 청한 탄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땅은 하느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맨 처음으로 하늘과 더불어 창조하신 것이다(창세 1,1). 만물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창조됐으며, 하늘은 만물을 덮고 땅은 만물을 실어 나고 자라고 열매 맺도록 하셨다. 땅은 곧 천지 만물이 생장(生長)하는 토대요 발판이다. 또 하느님께서는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며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하고 명령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죄를 지은 인류를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 많은 인류를 위해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하시면서 땅을 인간 생명의 터전으로 넘겨주신다.
땅은 하느님께서 죄 많은 인류에게 베푸신 자비와 축복의 선물이다.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얻어먹을 수 있었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오히려 인류에게 일하게 하심으로써 그 대가로 기꺼이 풍부하게 누리도록 마련해 주셨다. 이 때문에 바오로 사도도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0-12)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사실 빌라도에게 살해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이나 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사람들도 모두 억울한 이들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다른 이들보다 죄를 많이 지어 그렇게 됐을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니다'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하신다.
그들은 일상에서 고단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어찌하여 회개하지 않았을까? 무엇을 회개하지 않았을까? 놀랍게도 우리는 그것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에서 찾을 수 있다. 무화과나무는 나름대로 열심히 자라고 잎을 무성하게 싹 틔웠지만 결국 포도원 주인 뜻에는 부합하지 못한 채 아까운 땅만 차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무화과나무의 다름 아닐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진실하게 일해 일용할 양식으로 살아가지 않고, 남에게 참견만 하면서 마치 자신이 땀 흘려 맺힌 열매인 것처럼 살아간다면, 결국 가로챈 열매는 자신이 땀 흘리지 않고 남에게서 빼앗은 것이 아니겠는가?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향해 머리를 두고(회두), 마음을 하느님께 돌리며(회심), 사언행위를 뉘우쳐 마음을 고쳐먹는(회개) 행위다. 모든 인간적 탐욕을 경계하고(루카 12,15) 하느님 안에서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루카 4,4)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간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부와 학벌과 명예와 권력을 섬긴다. 이것들은 생명이 다하는 날 결국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것들이다. 예수께서도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사순시기인 지금 우리는 어떤 삶을 사는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쓸데없이 땅만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 뜻을 거역하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주님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 땅을 무시하고, 땀 흘리며 땅을 일구는 일꾼을 무시하며, 가난한 이들을 모른 채 하고, 가진 자들과 착취하는 자들을 애써 두둔하지는 않는가. 또 주님께서 용서하고 자비롭게 돌봐주고 계시는지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탐욕만을 채우려 드는 것은 아닌지.
하늘과 땅과 만물과 이웃이 모두 나를 위해 보내주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의 선물임을 알지 못하고, 한낱 자신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이용하려는 것은 아닌가. 또 공동선(1코르 12,7)을 지향하고 세상 정의와 불의, 평화와 불목 사이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지 깊이 따져보지 않고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진실로 주님께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 판가름할 수 있는 것은 곧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느냐의 여부에 달려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땅만 차지하게 돼 무화과나무처럼 잘려나가 멸망할 수도 있다.
‘성령의 힘’을 한껏 사용합시다
-장재봉 신부-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 사람들을 향한 루카 사도의 남다른 애정을 느끼게 합니다. 아울러 독서 말씀에서 건지는 느헤미야의 동족 사랑과 코린토 교우들을 향한 바오로 사도의 애타는 호소에 감전되어, 마음이 찌릿해집니다.
당시 예루살렘과 갈릴래아는 시쳇말로 양극화 현상이 뚜렷했던 곳입니다. 특권층의 고장 예루살렘과 소외당한 사람들이 척박한 삶을 이어가던 갈릴래아….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낙후된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루카 사도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가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날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기록을 읽으신 것이 성령께서 골라주신 것임을 넌지시 일러줍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그리도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어떠한 난관과 역경도 이겨내리라 속 깊이 다짐했으리라 싶습니다. 두루마리를 펴시던 예수님의 손끝이 떨렸을 것만 같습니다.
사실 다 가졌다고 여기는 기득권층들에게 예수님의 존재 가치는 절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은 자기네 삶의 기반을 흔들어버리는 불편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야말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제거하는’ 일에 거침이 없었던 이유일 터입니다. 때문일까요? 복음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과 낮고 어둡고 소외된 곳에서 외로이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빛이며 희망이며 기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1독서말씀이 “그 무렵”이라고 줄여놓은 부분이 아쉽습니다. 그 안에는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겼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당시 수사 궁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의 ‘술 시중을 담당’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왕에게 얼마나 큰 신임을 얻고 있었는지는 예루살렘 도성을 다시 세우겠다는 계획을 흔쾌히 수락하고 필요한 재원까지 후히 제공할 것을 윤허한 임금의 처사에서 감지하게 됩니다(느헤 2장 참조). 한마디로 그는 기득권이고 특권층이며 세상 영화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동족들이 ‘큰 불행과 수치’를 당한다는 소식에 ‘주저앉아 울며 여러 날을 슬퍼’하며 하느님께 기도하고 간청하였다니 그는 결코 자신의 안락에 안주하지 않았던 참 신앙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함께 묵상하고 싶은 구절은 “그때에 온 백성이 일제히 ‘물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서를 가져오도록 청하였다”(8,1)라는 부분입니다.
그날 백성들이 먼저, 주님의 말씀을 읽어 줄 것을 청했다는 사실,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다는 사실이 감동적인 까닭입니다. 그들의 삶은 열악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밭도 포도원도 집도 저당’ 잡혀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아들딸들을 종으로 짓밟히게’ 내어주어야 했던 엄청난 비극을 겪었습니다. 겨우 타국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돌아온 그들에게는 도무지 ‘손쓸 힘’조차 없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한탄하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빈민이었습니다. 그 처지에서 누구의 명령이나 권유에 의한 것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그들의 원의가 너무 곱다는 얘깁니다.
주님을 직접 뵙지 못했지만 주님 사랑을 온 삶으로 이해했던 루카 사도,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1코린 9,23)라며 끝까지 당당했던 바오로 사도, 주님의 계명에 담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놓치지 않고 실천했던 느헤미야의 삶이 한데 뭉쳐 선포되는 오늘이기에 울림이 큽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그날 그분처럼 ‘성령의 힘을 지니고’ 살아가는 빛의 존재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읽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기도를 ‘내 뜻’으로 도배하고 있습니다. 그분께 세상의 복만 구걸하고 기적의 순간을 낚아채게 해달라고 조릅니다. 주님을 크고 멋진 도성, 높고 화려하고 웅장한 곳에서 만나기만을 고대합니다. 이 때문에 세상 가장 낮은 곳, 갈릴래아에 계신 예수님과 뚝 떨어져 지냅니다. 도무지 만나지를 못합니다.
죽음의 문화가 판치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부디 느헤미야처럼 기도하고 사랑하기 원합니다. 바오로와 루카 사도처럼 철저하게 복음을 살기 바랍니다. ‘성령의 힘’을 지니고 “하느님의 집과 그분을 섬기는 일을 위한 덕행”(13,14)을 온전히 살아내기를 소원합니다.
돌아오라, 집으로!
-손희송신부-
사순 시기가 되면 ‘회개’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구약의 예언자들도 한목소리로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회개란 ‘악에서 돌아서서 하느님께로 향해가는 것’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처럼 집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정신 차리고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루카 15,11-32 참조)
하느님 아버지의 품은 우리 모두의 영적 고향입니다. 명절 때면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교통 체증을 감수하면서도 고향을 찾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향은 부모님이 계신 곳이고, 부모님의 품은 푸근하고 따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적 고향인 하느님의 품은 상상을 넘어설 만큼 따뜻하고 푸근합니다.
제1독서가 말해주듯이 하느님은 당신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시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분, 그들이 겪는 고통을 아시고 그들을 구하러 내려오시는 분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은 우리의 아픔을 속속들이 잘 아시고 감싸 안아주시는 분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품 안에서는 참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집 나가면 고생이란 말이 있듯이 하느님의 품을 벗어나 마음 내키는 대로 살다 보면 결국 고생길로 접어듭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곳에 가서 제멋대로 살았지만, 그 끝은 지독한고생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런 잘못된 길로 빠져들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하느님의 품 안에 머물면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좁은 생각부터 바꿔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신 분’(1요한 3,20)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주 한정된 생각의 틀에 하느님을 고정시켜 놓고 이런저런 기대를 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투덜거립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제2독서)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주려고 사과를 깎는 데, 아이는 사과보다는 사과를 깎는 칼이 신기해서 그것을 달라고 떼를 쓰기도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도 잘못된 생각에서 하느님께 그릇된 기대를 하면서 떼를 쓰기 일쑤입니다.
좁은 생각의 틀을 넘어서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마태 7,11 참조)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길에 험한 산을 치워주시지는 않지만 그 산을 넘어갈 힘을 주시는 분, 내 앞에 걸림돌을 제거해주시지는 않지만 그것을 내 성장의 발판으로 삼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진정 든든한 아버지이시고, 그분의 품은 참된 고향입니다.
1990년대 후반, 최고의 아이돌 그룹의 노래 ‘Come Back Home(돌아오라, 집으로)가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 노래를 듣고 집으로 돌아온 가출 청소년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영적으로 가출 청소년과 같은 우리를 애타게 부르십니다. “내 아들 딸들아, 돌아오너라, 집으로!”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박병규 신부-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가 완고한 마음을 거두고 회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복음은 두 가지 비극적인 사건을 소개하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한다.(13,1-5) 첫 번째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죽어간 사건이고, 두 번째는 실로암 연못에서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은 사건이다. 이 두 사건에 대해 역사적으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추측건대 예수님 당시 갈릴래아 지역은 백성들의 독립운동과 폭동이 빈번한 곳이었고, 이를 다스리기 위한 통치자들의 잔혹한 진압으로 갈릴래아 사람들의 죽음은 흔한 일이었다. 실로암에서 벌어진 사건도 마찬가지다. 예기치 못한 일로 아까운 생명들이 사라져 갔지만, 이러한 사건은 우리네 인생 역사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비극적인 일들의 원인을 자신들의 잘못이나 죄로 이해하고 있었다. 조상의 죄든, 자신의 죄든 죄로 인한 하느님의 징벌이 비극적인 일들로 나타난다고 믿은 시절이었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해석’의 문제다. 어떤 상황을 보고 그 상황이 무엇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 생겨났는지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호기심이 비극적 참사를 인간 죄의 결과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조금 다르게 해석하신다. 예수님은 소개된 두 사건보다 더 비극적인 사건은 회개하지 않는 마음의 완고함이라 여기신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5절)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참사는 ‘국한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게 멸망은 ‘모두’의 것이 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만큼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죄가 더 크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이러한 회개에 대해 더욱 강조하신다. 다른 공관복음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지만(마태 21,18-22; 마르 11,12-14), 루카복음에서는 조금 더 기다려 달라는 포도 재배인의 모습이 등장한다.(루카 13,8) 조금 더 회개의 시간을 달라는 간청의 모습이 보이는 대목이다. 사실 회개의 시간은 충분히 주어졌었다. 포도밭의 주인이 삼 년째 기다렸던 터였다.(7절) 그런데도 조금 더 시간을 달라는 포도 재배인의 간청은 무화과나무가 잘려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의 호소인 것이다. 멸망이 아니라 회개의 길을 걷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과도 맞닿아 있다. 복음의 시작 부분에 나타난 비극적 사건은 멸망과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 참사를 죄의 결과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논리에 따르자면, 죄의 끝은 멸망과 죽음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다르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죄의 끝은 회개에 있다는 것이다. 죄를 지었으니 너는 죽어라가 아니라, 죄를 지었으니 너는 기필코 회개의 길을 걸으라는 강한 부탁이 오늘 복음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
묵상(Meditatio) 얼마 전 한 신자를 만났다. 그분과 사형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당황스럽고 힘든 대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신자분의 말씀이 이러했기 때문이다. “나쁜 짓을 저질렀으면 죽어야 해요.” 할 말이 없었다. 너무나 단호한 그분의 말씀에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보태어 본들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했다. 죄를 지었으면 죽어야 한다는 논리는 참으로 그럴듯하다. 죄에 대한 대가를 분명히 치러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가를 치러야 할 그 죄인을 완전히 없애버린다면 누가 대가를 받아 안아야 하겠는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이고, 그만큼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하느님께 달려 있을진대, 마치 내가 하느님인 것처럼 죽여라, 살려라 하는 식의 태도는 참으로 완고한 마음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죄에 대한 판단은 하느님께 두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죄를 지은 이가 하루빨리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 안에 되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도 그 또한 하느님의 작품이지 않은가. 우리가 죽음을 쉽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죽음의 문화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않나 되돌아보게 된다. 강도, 산도, 바다도, 나아가 인간의 생명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우리의 이기심이 죽음의 문화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반성해 볼 일이다. 분명한 것은 복음은 죽음이 아닌 생명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명을 다시 살리는 길이 교회의 길, 우리 신앙인의 길임을 꼭 기억하자.
기도(Oratio) 하늘의 하느님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시편 136,26)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진정한 의미의 회개란?>
한 노부부가 반세기 가까이 결혼생활을 해왔지만 서로의 삶은 늘 고달팠습니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건만 두 분의 삶은 ‘화기애애’, ‘알콩달콩’이 아니라 언제나 ‘티격태격’, ‘용호상박’이었습니다.
원인을 분석해본 결과 코드 차이, 사고방식의 차이였습니다. 결국 살아온 배경, 가정환경의 차이였습니다.
아침식사 때 마다 남편은 아내의 한 가지 행동 때문에 늘 툴툴거렸습니다. 식탁에 앉자마자 부인은 갓 배달되어온 우유를 남편에게 따라주었습니다.
남편 입장에서는 옛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컵의 80% 정도만 따라주면 마시기도 좋고 쏟을 염려도 없을 텐데, 부인은 매일 같이 큰 머그컵에 넘치기 일보 직전까지 찰랑찰랑 따라주는데, 요즘 같아서는 손 떨림 증세도 있고, 그걸 쏟지 않고 마시기 위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그러려니 했었지만, 결혼생활 40년이 지난 어느 날 도저히 참지 못한 남편은 한 바탕 퍼부었습니다.
“왜, 아무 것도 아닌 걸로 평생 동안 날 괴롭히냐구! 우유 따라줄 때 먹기 좋게 80% 정도만 따라주지 왜 넘치기 일보 직전까지 따라줘서 날 힘들게 하냐구?”
남편의 말에 부인은 큰 충격을 받고 앓아누우셨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았던 어린 시절, 부인의 가족들은 뭐든 아끼고 아꼈다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신선한 우유 가득 부어 원없이 한번 마셔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향한 사랑의 표현으로 큰 머그컵에 가득 가득 우유를 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40년 동안 아침마다 사랑을 따라준 결과가 “왜 평생 날 괴롭히냐?”였으니 할머니가 앓아 누을 수 밖에요.
또 다른 노부부는 성격차이로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어 이혼하기로 하였답니다. 두 분을 담당한 변호사가 안타까운 나머지 사연이라도 들어보려고 노부부를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그날 식사의 주 메뉴는 통닭이었습니다.
매너가 온 몸에 잘 배어있는 할아버지는 그날도 습관처럼 통닭을 쭉 찢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앞가슴 살을 할머니에게 권했습니다. 그 순간 할머니는 앞가슴 살을 손으로 확 뿌리쳤답니다. 그리고 불같이 화를 내면서 40년 동안 한 번도 내뱉지 않았던 마음 속 이야기를 꺼내셨답니다.
“40년 결혼생활 동안 당신은 늘 이렇게 자기중심적이었어. 난 통닭 앞 가슴살 팍팍해서 정말 싫단 말야. 난 뒷다리가 제일 좋단 말야. 당신은 같이 살아오면서 내가 어느 부위를 좋아하는지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
그 순간 할아버지는 충격에 빠지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앞가슴 살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위야. 내가 먹고 싶은 부위를 꾹 참고 40년 동안 당신에게 준 건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사순 제3주일인 오늘 복음은 우리를 회개의 삶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삶을 산다는 것, 과연 어떤 삶을 사는 것일까요?
제가 생각할 때, 회개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서 나와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점검해보는 일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나의 영적 성장을 위해, 보다 충만한 인생 여정을 위해 선물로 보내주신 사랑하는 사람들을 좀 더 알아가는 것, 그것이 회개가 아닐까요?
멀리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 가족, 내 직장동료, 이웃들이 지니고 있는 남모르는 고통과 상처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작으나마 위로의 손길을 펼치는 것이 회개가 아닐까요?
서로 잘 안다고 해도, 정말 모르는 게 인간입니다. 서로를 알기 위해 계속 대화하면서 꼬이고 꼬인 관계의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아닐까요?
하느님 나라의 누룩이 돼야"
-홍승모 신부-
오늘 복음은 빌라도의 박해로 살해당한 사람들 이야기와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들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악의로 인해 발생한 살해 사건이지만, 다른 하나는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우연한 사고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야기의 공통 주제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죄인이건 아니건 모든 이들에게 갑자기 들이닥친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 두 사건이 신앙인들의 믿음을 동요시킨다는 사실입니다. 곧 신앙인들은 이런 일들을 주님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서, 과연 주님이 이런 일이 일어나게 허락하신 것인가 아니면 방관하시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역사 속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의인들 죽음과 무죄한 이들 고통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주님이 허락하신 것인지, 또는 악의 뿌리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명확하게 논리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은 일시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곁에서 계속 되는 문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 신앙에 의혹과 시련을 가져오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유혹과 시련이 교차하는 세상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깥에서만 구경하듯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 얽혀 깊숙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탈출 3,7-8).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진정한 이유는 이런 사건들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꿔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악은 우리에게 죄를 인식시켜 우리를 의혹과 저항과 시련 속에서 지배합니다. 그래서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주눅 들어 하는 종으로 만들어 버리지만, 주님은 우리를 희망과 자유의 종으로 변화시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어 우리를 심판하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당신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로마 5,20).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는 말(루카 13,6)은 바로 주님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신 것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자유를 향해 새로운 출애굽의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곧 주님의 백성은 이제 새로운 열매를 맺는 회개의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회개의 삶은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삶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회개는 의무가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삶과 함께 얽혀계신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리사이와 같은 위선의 누룩(루카 12,1)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누룩(루카 13,21)이 되도록 변화돼야 합니다. 위선의 누룩은 교만과 탐욕의 힘으로 삶을 지배하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누룩은 겸손과 빈 마음으로 오히려 남을 섬기게 합니다. 위선의 누룩은 인간을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 마음 속에 가둬 결국 죽음으로 밀어 떨어뜨리지만, 하느님 나라의 누룩은 인간 마음을 사랑으로 열게 하여 생명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의 누룩을 이렇게 비유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자만은 좋지 않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1코린 5,6-8). 하느님 나라의 누룩과 같은 삶은 모든 이에게는 생명의 빵이 되지만, 자신은 잃고 사라지는 음식의 소금 같은 삶일 것입니다. 이것이 축제를 기다리며 보내는 사순시기의 영적 양식과 영적 음료가 되도록 묵상해 봅니다.
회개의 증표를 열매로 보이십시오
-손용환신부
열매 맺지 못한 자의 최후
인간은 울면서 태어납니다. 이 세상은 모태와는 달리 고통과 번민으로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을 평생 살아야 하니 얼마나 서글프겠습니까? 만일 우리의 눈물을 한곳에 모을 수 있다면 그 눈물이 바다를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7-10)
그러자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탈출 3,13) 그러자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탈출 3,14)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어 이스라엘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인들의 종살이에서 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을 믿는 이들이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왜, 올바르게 사는 이들이 아파야 합니까? 왜,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야 합니까? 왜,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악인들을 남겨두고 착한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합니까?
이스라엘 사람들도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재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2-5)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이 진하게 가슴에 남습니다. 그러기에 죄 없는 이들이 당하는 고통과 죽음은 개인적 책벌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죄에 대한 경고입니다. 소유만을 위해 바쁘게 사는 우리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우리는 낙태와 피임과 환경오염 때문에 장애인들이 많이 태어남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못 뽑은 정치인들 때문에 국민 모두가 고통 받고 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돈 때문에 하느님과 사람들을 외면하고, 자연을 파괴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만의 이익 때문에 싸움과 분쟁과 전쟁을 하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점점 죽어가고 있고, 세상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경고하십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루카 13,7) 예수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잘라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우리는 포도 재배인처럼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8-9)
그러니 멸망은 사라진 게 아니라 뒤로 미루어진 것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두 번은 봐 주시겠지만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잘라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회개해야 합니다. 내일로 미루고, 다음으로 미룬다면 우리도 어떤 참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회개하지 않고 고통을 당한 후에 왜냐고 묻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당장 회개할 것을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바로 회개의 때이며, 은총의 시기입니다. 회개의 증표를 열매로 보이십시오. 우리는 과연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열매 맺지 못하면 큰일 납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첫” 만남
-최승정신부-
사순 3주일을 맞아 교회공동체는 매우 특별한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의 첫째 독서인 탈출기 3장은 모세가 최초로 야훼 하느님과 만나는 장면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우리들 인생의 이야기에서도 “첫”으로 시작하는 모든 낱말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듯이 하느님과 모세, 곧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이야기에서도 그 “첫”만남은 매우 중대한 함의를 지니게 됩니다.
먼저 모세라는 인물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이끄는 민족적 지도자로 구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 언급되는 예수의 성변화 사건에서도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 것은 예수시대에 모세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로 여겨졌는지를 반영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유다교 전통을 따르는 이들은 모세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모세가 야훼 하느님과 만나는 것은 단지 모세와 하느님의 만남이 아니라, 야훼와 이스라엘의 만남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탈출기 3장은 우선 모세가 야훼 하느님과 어디에서 만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곳은 “하느님의 산 호렙”이라고 설명되는데, 호렙은 시나이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따라서 훗날 계약이 맺어질 그 장소에서 모세는 야훼 하느님과 미리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떨기 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을 보고 야훼(또는 야훼의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모세는 자신이 하느님을 만난 것을 알지 못한 채 궁금하게 생각하며 그것을 자세히 보러 가는데, 그때 야훼께서 그에게 명령합니다. 야훼의 명령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가까이 오지 말라”는 명령과 “신을 벗으라”는 두 명령은 고대종교의 틀 위에서 이해될 수있습니다. 지상에 속한 인간이 신적 세계와 접촉하게 되면그는 죽거나 벌을 받게 된다는 믿음으로부터 우리는 첫째 명령을, 그리고 인간의 몸에 걸친 것은 인간의 권위를 상징하므로 신 앞에서는 그와 같은 권위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종교적 이해로부터 둘째 명령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모세에게 그가 파라오와 백성에게 가서 전할 말을 일러주십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아마도 모세의 질문은 다신적 세계관 안에서 모세가 알고 있던 숱한 신들의 이름 중 자신에게 나타난 신의 이름은 무엇이냐는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질문에 하느님은 (오늘날의 신학자들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으로 대답하십니다: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 여기서 “에흐예”란 “하야(있다)” 동사의 미완료형, 즉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이고 “아셰르”는 관계대명사입니다. 이 어려운 문장에 대해 수많은 학자들이 여러 가지 이론을 세워보았지만, 그 누구도 아직까지 확실하게 대답하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일반적인 라틴말 번역인 “ego sum quisum”에 따라 “나는 있는 나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과연 탈출기 3장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 문장에서 사용된 동사인 “하야”라는 동사는 “있다/존재하다”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스스로 “있는” 분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있게”하는 분으로 자신을 소개한다는 것을, 즉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 하느님은 존재와 생명(!)의 하느님임을 그 “첫” 만남에서부터 어렴풋이 암시하고 있음을 그 행간에서 읽게 됩니다.__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임숙희-
시작 기도 하느님, ‘아빠, 아버지’, 우리 안에 머무시는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통해 죄와 심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로잡도록 마음을 이끌어 주십시오.
독서 오늘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당시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을 회개와 연결해 새롭게 해석하시고?(1???5절), 이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원의 무화과 비유를 전달합니다?(6???9절). 오늘 본문은 12,?58???59의 말씀, 곧 하느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기에 우리는 서둘러 화해해야 한다는 주제와 직접 연결되면서 인간 사이의 화해의 뿌리인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화해로 넘어갑니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한 것은?(1절) 아마도 그들의 민족적 야망을 말살하려는 정치적 전략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 벌은 그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당대의 일반적 생각(요한 9,?2???3)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비판하거나 교정하는 대신, 그들의 판단이 정말 옳은 것인지 돌아보게 하시려고 두 차례나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생각하느냐??”?(2절, 4절) 예수님은 이어 당신의 새로운 해석을 덧붙입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3절, 5절) 이 말씀은 죄와 심판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생각 없이 그대로 따라가지 말고, 예수님이 활동하는 메시아 시대가 왔으니 시대의 표징을 정확히 파악하라는 말씀입니다. ‘회개하다’?라는 그리스어 원어?(μετανοω)?는 신약성경에서 죄와 의로움에 대한 사고와 태도가 완전히 바뀐 후에 그 결과로 삶의 방식이 변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하신 말씀은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피상적인 판단 대신 인간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진 태도,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인간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죄와 심판에 대한 잘못된 사고를 완전히 바꾼 다음에 새로운 삶을 살라는 초대입니다. 루카복음에서 ‘회개하다’?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된 대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에 죽기 위해 가는 ‘예루살렘 여정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 여정이, 죄와 심판에 대한 그릇된 판단과 선입견으로 ‘아빠, 아버지’?인 하느님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분한테서 멀어져간 사람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키는 여정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에서 다시 심화됩니다.(6???9절) 하느님을 상징하는 포도밭 주인은 삼 년째(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잘라버리’?라고 포도 재배인에게 말하지만(7절), 예수님을 상징하는 포도 재배인은 한 해만 더 여유를 주고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면’ 열매를 맺지 않겠느냐고 간청합니다. 그러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잘라버리십시오.”?(9절) 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잘라버리십시오.” 라는 마지막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5절) 오늘 복음의 주제를 요약합니다. 이 비유를 루카복음 문맥에서 보면, 예수님의 설교에 응답하지 않는 유다 백성에 대한 심판과 연결됩니다. 곧 분노한 하느님과 응답하지 않는 유다 백성 사이에서 중재하는 포도 재배인인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는 예수님의 사명이 다시 드러납니다. 하느님 뜻에 따르지 않고 온 마음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위협은 오늘의 복음 외에 다른 공관복음과 사도행전에도 자주 나타납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죄를 다양한 색깔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죄’?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니라 입과 의식으로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믿지 않고 이기적 욕망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지적합니다. 이 마음의 죄들은 하느님 대신 다른 것을 섬긴다는 점에서 우상숭배와 마찬가지입니다.
성찰 사막은 인간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진 죄와 하느님의 심판?·?자비가 적나라하게 체험되는 인간의 삶을 상징입니다(탈출 3,?1???8ㄱ.?13???15: 1코린 10,?1???6.?10???12). ‘하느님 자비의 복음사가’?인 루카가 전하는 오늘 복음은 삶에서 체험하는 하느님 자비는 그분의 정의로운 분노와 다가올 심판을 염두에 둘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기도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 103,?2)
극약처방
-김찬선신부-
오늘 코린토서의 말씀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평을 하다가 벌을 받아 불뱀에 물려죽은 이스라엘 백성의 얘기가 배경입니다.
오늘 코린토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 아래 있었으며, 모두 바다를 건넜습니다.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고,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 널브러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는 길을 알려 주시고 손수 인도자가 되시었으며, 손수 양식과 음료를 주셨음에도 백성들은 불평불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잘 해줘도 불만인 것이지요. 사실 많은 경우 잘 해주면 오히려 불만이 늘어납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그것은 잘 해 주면 그것으로 만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잘 해 주면 잘 해 줄수록 만족의 파이가 커지기 때문입니다. 만족이란 무엇입니까? 그릇으로 치자면 그릇이 가득 차는 것이고 욕망으로 치자면 욕망이라는 그릇이 가득 차는 것이지요. 그런데 욕망이라는 그릇이 더 커지면 지금까지의 만족이 불만으로 바뀌겠지요. 그러므로 만족의 비결은 만족의 파이를 줄이는 것이요, 욕망의 그릇을 최대한 작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성적으로 말하면 가난입니다. 아예 허접스런 욕구들은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군대에 가서 배운 것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사람들의 불만을 다스리는 법입니다. 군대에 가니까 첫날부터 사람을 개돼지취급을 하며 정말로 죽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두들겨 패는 것은 기본이고 갖가지 야만적인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이런 것을 통하여 인간적인 대우는 아예 받을 생각은 아예 거두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밥 한 숟가락만 더 먹어도 그리 기분이 좋고 오늘 하루 맞지 않고 잠드는 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도원 청원자들을 양성할 때도 같은 방식을 썼습니다. 수도원 들어오기 전에 다들 편하게 살다가 들어오는데 각오는 하고 들어오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살던 대로 살려는 관성이 남아 있지요. 그래서 제가 쓰는 방법 중의 하나가 2월 달 입회인데 그 한 겨울 추위에 거의 보일러를 때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불교에서 혹독한 행자시절을 보내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뱀으로 벌을 내리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점점 늘어나는 요구와 그에 따른 불만이 극에 달하자 하느님께서는 극약 처방으로 죽음을 내리신 것입니다. 죽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얘기합니까? 살려만 주면 무엇이든지 다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하지요. 해 달라고만 하던 것에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다는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요구는 줄어들고 경청과 원의는 늘어나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하심은 지금 이렇게 공을 들이고 잘 해 주지만 그래도 바뀌지 않고 계속 잘못 살면 죽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고, 그러니 하느님께서 극약처방을 쓰시기 전에 자기 좋을 대로 살던 망나니 삶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라고 하심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을 위한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의로우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불쌍한 우리로 하여금 실천케 하시고, 당신이 좋아하시는 것을 항상 원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하소서.”
모든 것엔 다 정해진 때가 있다
-전삼용신부-
제가 사제품을 준비할 때였습니다. 8일정도 대침묵 피정을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저는 그 기간에 어떤 특별한 것을 깨닫고 싶었습니다. 나를 불러주셨다는 확실한 증표나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이나, 뭐 아무것이라도 좀 깨닫고 싶었습니다.
전에 서품 받고 첫 미사 하시는 신부님들이 서품피정 때 깨달은 것들을 멋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나도 뭐 하나 특별한 것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7일이 지나도 아무것도 특별한 것을 깨닫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산에 올라가 하늘만 바라보며 깨달음을 달라고 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날 저녁 서품을 하루 앞두고 멍하니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어떤 죽어가는 한 나무를 바라보며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가지엔 나뭇잎이 하나밖에 달려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며 ‘왜 하나만 남아있을까? 저것도 언젠가는 떨어지겠지.’ 생각하고 있는 차에 그것이 갑자기 내 앞에서 마지막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 떨어지는 동안에 저는 소름이 돋는 것 같았습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이 이 순간으로 모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무언가 특별한 것을 찾고 있었지만 아주 짧고 특별할 것 없는 그 순간에 정말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첫 번째 생각이 든 것은 주님께서 태초부터 이 순간에 낙엽이 떨어지도록 준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태초부터 준비해 온 바로 그 시간에 내가 바로 그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생각은 하느님께서 저를 영원으로부터 이곳으로 지나갈 것을 알고 계시고 저를 사랑하고 계심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시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시고 그래서 제가 그 순간에 주님의 섭리를 깨닫기를 갈구하며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오셨던 것입니다. 사실 세상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아주 작은 것들이라도 세상 창조 이전부터 계획된 주님의 섭리 안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 든 생각은 그 낙엽 하나를 통해서 내가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을 찬성하고 계심을 깨닫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서품 받기 하루 전날에 다리가 삐끗한다든지 뱀에게 물리든지 하면 ‘하느님께서 이 길을 원치 않으시는가?’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이 단순하고도 큰 사건은 부정적인 느낌보다는 영원으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섭리와 관심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더 확신을 지니고 서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든 생각은 그런 하느님의 개입이 수 없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들이 하느님의 섭리에 집중하며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너무 쉽게 지나쳐버리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앞에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일주일동안의 고요함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에 매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단순한 사건 안에서 주님의 큰 섭리를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낙엽보다도 훨씬 큰 표징들과 이벤트를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고 기다리시지만 우리가 관심가지며 사는 것들이 다른 것들에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벤트는 수없이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든 생각은 하느님은 낙엽을 떨어뜨리는 일 밖에는 하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오신 이벤트는 낙엽 하나를 떨어뜨리는 일이었습니다. 마음을 뜨겁게 하여 황홀경에 빠뜨리든가 몸을 뜨게 한다든가 하는 신비한 것들이 아닌 어찌 보면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자연을 통하여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이래라 저래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주위 것들을 통해서 좋은 방향을 알려주실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건들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이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도 내가 싫으면 그만입니다. 마치 가리옷 유다에게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셔서 삼년 동안이나 이끌도록 했으나 본인이 선택한 인생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터치도 하실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인간의 자유 앞에서는 무능하시게 되고 다만 주위 상황을 통해서 우리에게 섭리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빌라도가 갑자기 제물을 바치고 있는 갈릴레아 사람들을 죽인 것을 듣고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갈릴레아 사람이기 때문에 동향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죽은 것을 듣고 함께 분노해주기를 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유다인들의 사고방식으로 현세에서 당하는 고통이나 죽음은 죄가 많아서 그런 것이기에 죽은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그렇게 죽은 것이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같은 고향 사람들의 죽음에 분노하였다면 빌라도에게 저항하는 것이 되어 반란 주동자로 몰릴 수도 있고 만약 유다인의 생각대로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같은 동향사람들인 갈릴레아 사람들에게는 큰 미움을 사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십니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실로암 탑이 갑자기 무너져 열여덟 명이 한꺼번에 죽은 일이 있었는데 그들이 죽은 이유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죄가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설명해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습니다. 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지는 모르지만 과실수를 심었다면 당연히 열매를 기대하고 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맺어야 할 열매를 맺지 못하자 하인보고 포도나무들이 먹어야 할 양분만 뺏어먹으면서 열매도 맺지 못하는 그 무화과나무를 당장 잘라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하인은, 당연히 예수님이시겠지요, 일 년만 더 지켜보자고 하면서 자신이 거름도 주고 잘 가꾸겠다고 하며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때 잘라버리자고 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어떤 열매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는 우리에게 죽음이 닥쳐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살아갈 시간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회개하여 “변화”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님의 뜻이 실제 삶에서는 전혀 안 먹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앞으로 미래가 창창하고 더 신앙생활도 열심히 할 젊은 사람들이 갑자기 죽어가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됩니다. 그러면 신앙인들은 이런 딜레마에 빠집니다.
“왜 하느님은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을 데려가실까? 악한 사람들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는데.”
예수님의 대답대로라면 회개하지 않아서 그렇게 망한 것이 되는데 그렇게 그 가족들에게 이야기해 준다면 몰매 맞을 것입니다. 과연 자연 재해나 전쟁으로 죽는 수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다 회개하지 않아서 그렇게 망한 것일까요? 포도나무에게 가야하는 양분을 빼앗아 먹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살려놔 봐야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재해를 통해서 몽땅 쓸어버리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대답은 어느 정도는 옳을 수 있지만 갑자기 죽는 모든 사람들의 이유로는 합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낙엽 하나도 떨어질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인간의 죽음이란 당연히 주님께서 정하시어 데려가신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걸어가는 내 앞에서 낙엽이 떨어지도록 그 한 순간을 위해서도 태초부터의 준비가 있으셨다면 한 사람의 죽음의 순간을 결정하는 것에서야 얼마나 심사숙고를 하셨겠습니까? 가장 적당한 시간,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명은 재천(人命在天)이라고 하듯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적당한 죽음의 순간을 정해놓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듯이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나무에게 달려있지만 나무를 베고 안 베고는 주인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리 죽을까봐 걱정하며 살 필요도 없고 내일도 살아있을 수 있다고 안심해서도 안 됩니다. 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각자는 언젠가 다 그 순간에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돌아가실 시간이 있었고 성모님도 베드로도 가리옷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이 가장 적당한 때이고 성모님께서 돌아가신 시간도, 베드로, 유다가 죽은 때도 가장 적당한 때입니다. 그것이 적당했는지 안 했는지 우리가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 가치는 하느님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정도면 가장 적당하다.’라고 생각하시는 시간에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결혼도 못해보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예수님의 죽음이 어리석게 보이겠지만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는 가장 완전하고 은총 가득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나쁜 것을 주려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당장은 그렇게 보이지 않을 지라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은 은총”입니다. 그러면 항상 감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가 항상 감사하라고 하는 뜻은 나에게 닥치는 모든 것들이 고통스런 것이라도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주님께서 준비하신 은총임을 깨닫게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늘도 내 영혼의 상태를 더 변화시킬 것을 결심합시다. 내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나를 살게 하시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나만 아니면 돼?
-김효준신부-
요즘 TV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복불복福不福 게임이라는 게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실내에서 편히 잘 수도 있고, 맛있는 식사를 배불리 먹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운이 나쁘면 한겨울에 야외에서 취침을 해야 하고, 까나리 액젓을 마시기도 합니다. “나만 아니면 돼!”가 이 게임의 기본 모토(?)입니다. 까나리 액젓을 마시고, 고추냉이 가득한 만두를 먹고, 한겨울에 강물로 뛰어들어야 하는 그런 무모하고도 어이없는 게임이지만, 나만 걸리지 않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논리입니다. 타인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 된다는 단순한 명제를 던져주는 게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명제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계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내 이웃, 내 동료가 지금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이 나에게 오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드십니까? 그들이 불행하니 나에겐 행복이 찾아올 거란 생각이 드십니까? 아닙니다. 그 고통은 이제 곧 나에게도 찾아와 내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해야 하고 또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양승국신부-
<어떠한 시련을 주시든>
나이는 어렸지만 상습가출에다 도벽, "과감하고도 다양한 수법" 등으로 제 머리 꼭대기 위에 있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봤지만 속수무책이었지요.
마침내 마지막 수단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고마우신 동네 파출소 경사님과 미리 각본을 짰습니다. 오랜 휴가(?)를 마음껏 만끽하면서 사고란 사고는 다 저지르고 귀가한 아이를 앞에 앉혀두고 저는 파출소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즉시 경사님이 도착했습니다.
각본은 이랬습니다. 저부터 먼저 혼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를 잘 돌보지 않고 왜 밖으로 돌게 하느냐?" 백배사죄했습니다. "송합니다. 모두가 제 불찰입니다. 저 아이는 뭐가 뭔지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아이는 죄가 없습니다. 아이를 잘못 교육시킨 저를 유치장에 넣어주십시오."
그 순간, 워낙 강심장이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던 아이 심경에 뭔가 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경사님은 냉정한 얼굴로 "이번만큼은 워낙 건수도 많고 피해자들도 더 이상 못 봐준다니 나도 어쩔 수 없다"며 아이를 연행해가려 합니다. 그 순간 제가 경사님을 붙들고 사정사정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 한번만 봐주는 식으로 각본이 짜여져 있었습니다.
충격요법은 다행히 잘 먹혀들어 갔습니다. 우선 아이는 그 일로 인해 잔뜩 겁을 먹었고 기가 완전히 꺾이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런 잘못도 없이 혼나는 제 모습, 자기를 구하기 위해 사정사정하는 제 모습에 아이는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충격요법"에 힘입어 아이의 가출이나 비행은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습니다.
오늘 사순 제3주일을 맞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듣기에 참으로 섬뜩한 말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강한 경고성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고 계십니다.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죽은 사람들이 기억나느냐?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다."
이어서 더 강경한 어조로 우리에게 신속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 볼까 하고 벌써 삼년째나 여기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 쓸데없이 땅만 썩힐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아예 잘라 버려라."
예수님 경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도대체 왜 자비 충만한 예수님께서 이토록 무서운 경고 말씀을 건네시는가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묵상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강한 경고성 발언조차도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경고 이면에는 우리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어떤 부모가 자기 자녀의 타락과 방황을 보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타이르기도 하고, 사정도 해보고, 때로 파격적으로 감싸 안아 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모든 노력이 먹혀들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합니까?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마음에 없는 말도 하게 됩니다. "너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면 자식 하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겠다. 호적에서 빼겠다" 등등.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고층 아파트 베란다 근처에 어른거리지 못하도록 혼을 낼 것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국 냄비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회초리도 들 것입니다. 아이가 빨간 신호등인데도 길을 건너간다면 호되게 야단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한 경고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마음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느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에게 발걸음을 되돌리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께서 오늘 다시 한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이 어떠한 시련을 주시든, 어떠한 고통과 십자가를 주시든 그 모든 행위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 강력한 구원의지가 자리잡고 있음을 기억하는 사순 제3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사랑은 1000개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갖게 되는 증오도 집착도 미움도 결국 사랑의 한 모습입니다. 사랑하기에 미워도 하고 질책도 하고 상처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의 탈선이나 그릇된 삶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안고 있는 부족함이나 취약점들을 용기 있게 지적해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사랑이고 이웃을 성장시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서로 남남이라면 상처나 고통을 주고받을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기에 상처도 고통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나눔
-허찬란 신부-
자신이 미인이 되고 싶으면 지금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있는 것을 굶주린 이와 나누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은 나누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나눌 수 있습니까? 영국의 탐험가 로렌스 오츠는 남극을 원정하다 동상에 걸린 자신이 대원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고 원정대장에게 “잠시 밖으로 나갔다 오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의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생명은 누구나에게 소중한 것인데도 그는 자신보다 대원들을 살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수없이 생각하고 생각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결단을 내림으로써 대원들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만든 대장의 이야기는 위대하기까지 합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나누려는 결의를 한다면 사랑의 결실은 반드시 맺기 마련입니다. 남을 살리는 것부터 지금 굶주린 이에게 작은 관심을 보이는 데까지 무한대의 사랑을 펼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인간이 삶의 이유와 목적을 잃으면 그것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비유가 바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이야기입니다.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것은 나누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라고 우리를 부르시지 않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은 가능성에 기대를 하고 계십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양승국신부-
나이는 어렸지만 상습가출에다 도벽, "과감하고도 다양한 수법" 등으로 제 머리 꼭대기 위에 있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봤지만 속수무책이었지요.
마침내 마지막 수단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고마우신 동네 파출소 경사님과 미리 각본을 짰습니다. 오랜 휴가(?)를 마음껏 만끽하면서 사고란 사고는 다 저지르고 귀가한 아이를 앞에 앉혀두고 저는 파출소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즉시 경사님이 도착했습니다.
각본은 이랬습니다. 저부터 먼저 혼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를 잘 돌보지 않고 왜 밖으로 돌게 하느냐?" 백배사죄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두가 제 불찰입니다. 저 아이는 뭐가 뭔지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아이는 죄가 없습니다. 아이를 잘못 교육시킨 저를 유치장에 넣어주십시오."
그 순간, 워낙 강심장이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던 아이 심경에 뭔가 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경사님은 냉정한 얼굴로 "이번만큼은 워낙 건수도 많고 피해자들도 더 이상 못 봐준다니 나도 어쩔 수 없다"며 아이를 연행해가려 합니다. 그 순간 제가 경사님을 붙들고 사정사정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 한번만 봐주는 식으로 각본이 짜여 져 있었습니다.
충격요법은 다행히 잘 먹혀들어 갔습니다. 우선 아이는 그 일로 인해 잔뜩 겁을 먹었고 기가 완전히 꺾이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런 잘못도 없이 혼나는 제 모습, 자기를 구하기 위해 사정사정하는 제 모습에 아이는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충격요법"에 힘입어 아이의 가출이나 비행은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습니다.
오늘 사순 제3주일을 맞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듣기에 참으로 섬뜩한 말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강한 경고성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고 계십니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이어서 더 강경한 어조로 우리에게 신속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 볼까 하고 벌써 삼 년째나 여기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쓸데없이 땅만 썩힐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아예 잘라 버려라."
예수님 경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도대체 왜 자비 충만한 예수님께서 이토록 무서운 경고 말씀을 건네시는가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묵상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강한 경고성 발언조차도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경고 이면에는 우리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어떤 부모가 자기 자녀의 타락과 방황을 보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타이르기도 하고, 사정도 해보고, 때로 파격적으로 감싸 안아 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모든 노력이 먹혀들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합니까?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마음에 없는 말도 하게 됩니다. "너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면 자식 하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겠다. 호적에서 빼겠다" 등등.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고층 아파트 베란다 근처에 어른거리지 못하도록 혼을 낼 것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국 냄비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회초리도 들 것입니다. 아이가 빨간 신호등인데도 길을 건너간다면 호되게 야단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한 경고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마음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느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에게 발걸음을 되돌리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께서 오늘 다시 한 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이 어떠한 시련을 주시든, 어떠한 고통과 십자가를 주시든 그 모든 행위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 강력한 구원의지가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하는 사순 제3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사랑은 1000개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갖게 되는 증오도 집착도 미움도 결국 사랑의 한 모습입니다. 사랑하기에 미워도 하고 질책도 하고 상처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의 탈선이나 그릇된 삶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안고 있는 부족함이나 취약점들을 용기 있게 지적해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사랑이고 이웃을 성장시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서로 남남이라면 상처나 고통을 주고받을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기에 상처도 고통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
살면서 예기치 않은 참사들을 겪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불의의 사고로 희생된 많은 사람들의 처지를 함께 아파하고, 참사가 빚어진 것에 대해 경악합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가 되어버린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미국의 9·11테러 등이 그렇습니다. 그때마다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바로 오늘의 복음입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13,2) 예기치 않은 참사를 당한 사람들이 남아 있는 우리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고하게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원인을 바로 알고 시정하지 않으면 비극은 계속됩니다. 사람의 생명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인식하며 책임있게 공사를 하는 것, 삶을 비관하지 않도록 서로 보살펴 주는 사회를 만드는 것, 국가간에도 약육강식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통치 질서를 마련하는 것이 비극의 원인을 없애는 것입니다. 이는 이상적 사회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각자가 이런 삶의 비전을 가지지 않는다면 미래는 참담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종류의 참사가 악순환되고, 그 피해자는 점점 더 가까운 내 이웃으로, 그리고 내게도 닥칠 것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13,5). 그래서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의 봉변 보고를 듣고서 먼저 “자,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하지 않으시고 아직 살아 있는 우리가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3-44ㄱ). 그런데 오늘 복음의 무화과나무는 아예 열매를 맺지도 못합니다. 주인은 드디어 결단을 내립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13,7) 단호하십니다. 세례자 요한도 회개를 위한 세례운동을 하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루카 3,9)라며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일 것을 촉구합니다. “나는 포도나무다”(요한 15,5)라고 하신 예수께서도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고 열매를 내지 못하는 가지는 잘려 불속에 던져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급하고 단호한 요구에 대해 예수께서는 한 해만 더 여유를 주도록 포도원 주인에게 간청하십니다. 그동안 둘레를 파고 거름을 줘서 가꾸어 보겠다고,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른다고. 끝까지 가능성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으시는 의지를 봅니다. 그분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이사 42,3) 분입니다.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추수 때까지 그냥 두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고 햇빛을 비추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유예의 시간을 주는 이유를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 3,15). 시편은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신다”(103,8)고 고백합니다. 사실 그분이 너그러우신 것은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끝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버리십시오”(13,9). 잘라버리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지만 그 유예 기간이 무한정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 ‘그 갈릴래아 사람’이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자비의 하느님이심을 믿지만 동시에 정의의 하느님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의가 없는 자비는 무례하게 만들고, 자비가 없는 정의는 폭력적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공정으로 드높으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정의로 거룩하심을 드러내리라”(이사 5,16).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온갖 복을 다 누린 부자는 대문 앞의 거지 라자로에게 무관심했습니다. 그가 죽어 불속에서 극심한 고통에 울부짖으며 라자로의 도움을 청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회개의 시간은 이미 끝이 났습니다. 유예기간은 살아 있을 동안입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자기 형제의 집으로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자기와 같은 처지가 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거절당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율법과 예언서가 있고, 게다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의 말씀도 있으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서 못한다는 변명은 소용없습니다.
법률 용어에서 집행유예란 유죄 판결을 내리고서 일정 기간 동안 형의 집행을 보류하며, 그 기간을 무사히 넘기면 선고의 효력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당장 잘라버리라고 판결이 났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지기 예수님은 한 해의 유예기간을 청했습니다. 그동안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어 다시 돌볼 작정으로. 아니 당신 몸소 죽음으로 거름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집행유예 기간이 지나기 전에 그 거름을 먹고 사랑의 열매를 맺어 선고의 효력이 없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이사 5,4ㄱ)라고 탄식하게 해드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회개’ - 생명으로 가는 지름길
-노성호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인 루카 13장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제목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신앙인들이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 같은 아주 절박하고 긴박한 순간에 놓였을 때 어떤 절대적이고 유일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 모두에게 “멸망하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한다.”는 참된 진리를 가르쳐주면서, 바로 그 하나를 잡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생명과 죽음의 희비(喜悲)가 엇갈리게 되고,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주님의 축복으로부터 멀어지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禍)를 자초하고 죄의 사슬에 묶여 멸망에 이른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고도 회개하지 않아 낙원에서 추방당했고(창세 3장), 노아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은 홍수가 일어나는 순간에도 먹고 마시며 폭력을 일삼다가 물귀신이 되었으며(창세 6,9-7,24 참조), 모세를 통한 하느님의 징벌에도 눈 깜짝하지 않고 고집을 피우던 파라오는 결국 자신의 맏아들을 잃고 한밤중에 자다 말고 일어나 곡을 해야 했습니다(탈출 12,29-30). 반면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말씀 속에 등장하는 작은 아들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면서 ‘회개’했기 때문에 잃었던 하느님의 축복을 다시 얻어 누릴 수 있게 되었고, 그때마다 새로운 삶의 희망과 기회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보면 문제는 ‘죄’의 다소(多少)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유무(有無)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기 마련이고 완벽한 인간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재의 수요일 미사 때 머리에 재를 바르면서 들었듯이 ‘우리 인간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갈 나약하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유혹에 빠지고 죄를 짓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담과 하와처럼 선악과를 따먹고,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홍수의 순간까지도 먹고 마시며 폭력을 일삼으며, 파라오처럼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친 후에 올바른 마음으로 하느님께 돌아가 그분의 자비하심에 의탁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를 뉘우치고 당신의 품속으로 찾아드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끊임없는 용서와 새로운 기회를 선사해 주시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번 사순 시기를 통해 또다시 우리 모두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당장 잘라버리실 수도 있었지만 우리들이 변화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임을 믿고 그때를 또 다시 미뤄주신 것입니다. 이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바로 회개하심이 어떨지요. 그리고 정말 잘려지기 전에 열매를 맺는 것이 어떨지요.
하느님 안에 자유로운 신앙인
-조욱현 신부-
오늘의 전례는 우리 생활의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의 표징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고 있다. 하느님 현존의 표징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냥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어 나갈 때, 즉 회개할 때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순절의 특별한 메시지며 오늘 복음의 주제이다.
복음: 루카 13,1-9: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다
오늘 복음은 두 대목으로 되어있는데 모두 다 ‘회개’와 연결되어 있다. 첫째 대목은(1-5절) 갈릴래아 사람들이 빠스카 축제 때에 희생제물을 봉헌하고 있었을 때에 빌라도가 그들 중 일부를 학살한 사실과, 실로암 탑이 갑자기 무너졌을 때 그들 가운데 열 여덟 명이 희생당한 사실이다. 이 사실에 대해 예수께서 어떠한 반응을 보이시는가를 보고 있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2-3절).
그들은 모든 불행을 다 정해진 죄에 대한 형벌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현실을 보다 깊이 깨닫기를 회피함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평온히 유지하는 편리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거절하신다1). 이러한 생각과 똑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현실을 오로지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거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자연적 수단이나, 정해진 사회의 구조에 의해서만 설명할 때에는 그와 비슷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중적 신앙을 두 번씩이나 거절하시면서 말씀하신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이 ‘망한다’는 말은 육체적인 죽음보다도 영적인 ‘파멸’, 즉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고자 하는 원의를 갖지 않는다면 인간 그 자체로서 이르게 되는 본질적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 회개는 생명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즉 회개는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면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생명과 성장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회개란 우리 자신의 피상적인 신앙을 버리고, 또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라는 초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른 사람들은 덮치면서 나를 스쳐 가는 이유가 특별히 있기 때문인가? 만일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택하시고 나를 택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분께서 내게 아직 결정적으로 마음을 결정할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 아닌가? 그리고 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볼 때에 나 자신이 더 열심히 투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는가? 이러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을 통하여서든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메시지를 깨달으려는 노력을 통해 끊임없이 나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회개는 바로 매일의 현실에 근거하기 때문에 항상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그리고 두 번째 가르침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비유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마태오(21,18-19)와 마르코(10,12-14)는 예수께서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무화과나무를 말라죽게 하셨다. 이것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운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지만, 루가는 심판과 처벌의 의미보다는 자비와 기다림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주인은 ‘삼 년’을 기다리면서 열매를 기다렸지만 열매를 얻지 못했을 때에도, 포도원지기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주인의 모습이다. 주인은 이런 아량을 통해 자신의 크나큰 자비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인내로이 기다려주신다. 그것은 우리가 적절한 시기에 결실을 맺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기다려주신다는 것은 그분의 자비의 표징이면서 또한 심판의 표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분의 인내로운 기다림을 저버리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더 무서운 ‘심판’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처럼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매순간순간은 항상 마지막 순간이 될 수 있고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책임을 지는 순간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회개하고 그에 맞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함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제2독서: 1고린 10,1-6.10-12: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의 교훈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출애굽의 어떤 사건들을 미리 일어난 사건으로 해석하여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그들이 이런 일들을 당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고가 되었으며 그것이 기록에 남아서 이제 세상의 종말을 눈앞에 둔 우리에게는 교훈이 되었습니다”(11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수한 하느님의 개입을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약속의 땅을 보장받았다는 착각을 하고 우상에 빠지고 음행을 일삼았다(7-8절). 그래서 그에 대한 벌을 받았다고 했다. 바오로 사도는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12절).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총이 크면 큰 만큼 책임과 위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자신이 변화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거나 게을리 한다면 우리에게도 같은 불행이 덮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맞은 위험에 놀라서 이집트 노예생활에 대해 향수를 갖고 끊임없이 불평을 한다. “이집트에는 묻힐 데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로 끌어내어 여기에서 죽이려는 것이냐?...우리가 이럴 줄 알고 이집트에서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두라고 하지 않더냐?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편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느냐?”(출애 14,11-12).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쉬운 일도 안이한 일도 아니다. 사순절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매일매일의 사건들과 현실들을 통해 입증되는 마음의 회개로써 ‘자유’를 성취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되돌아감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1) 참조: 요한 9,3: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회개와 은총 - 백남용 신부-
잡초란 무엇일까요? 어렸을 적에는 쓸모 없는 나쁜 풀을 잡초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차차 배움을 더하면서는 경작 목적에 반대되는 모든 풀들을 잡초라고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오이밭에 어쩌다 돋아난 참외덩굴은 잡초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이의 수확을 방해하니 뽑아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이런 전제 하에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들이 흡수할 양분들을 빨아들이며 자랐습니다. 아마도 포도나무의 결실이 그만큼 줄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의도적인 잡초입니다. 이 나무가 3년이 지나도록 무화과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포도 재배인을 불러 그 나무를 베어 버리라 합니다. 너무도 당연한 지시입니다. 그 재배인은 무화과나무를 감싸고 주인에게 한 해만 더 말미를 주십사고 청합니다. 거름을 주고 보살펴서 과일을 맺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포도 재배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 나무에 이미 어느 정도 공을 들였기에 아까운 마음도 있어서 더 정성을 들여 그 나무를 구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제 무화과나무의 몫이 남았습니다. 살아남으려면 제 모습을 멋지게 하기 위해 가지와 잎을 무성하게 하는 것보다는 우선 열매를 맺으려 해야 합니다. 이런 변화를 오늘 복음에서는 회개라는 주제 아래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 앞에서 예수님께서 두 번씩이나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도 재배인의 말에서 나타나듯이 우리의 회개는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루는 고독한 노력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포도밭에서 재배인 역할을 하시는 예수님의 은총이라는 거름이 우리를 돕습니다. 이 사순절이 회개의 시기라면 그 회개를 돕는 예수님의 은총이 있어서 또한 은총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 전반에서 회개란 말은 별 가치가 없는 듯합니다. 비리폭로가 자주 생기고 그 때마다 진실게임이 벌어집니다. 엉터리 비리폭로도 있고, 실제로 자행한 비리도 명확한 증거가 제시되기 전에는 모함이니 마녀사냥이니 하며 부정합니다. 양쪽 모두 끝까지 거짓말 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사실이 밝혀져도 아니라고 끝까지 우깁니다. 지도층의 이런 태도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누가 만일 비리를 뉘우치고 회개하면 모두가 둘러서서 “그래, 너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니 이제 물러나라” 하고 손가락질하려고 합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은총)을 베푼다면 훨씬 쉽게 회개할 용기를 가질 텐데요. 주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위하여 은총을 주시듯이 우리들 스스로도 회개를 위하여 서로서로 사랑을 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회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항복이다.
-유영봉 신부-
묵상 길잡이 : 은총과 회개의 시기인 사순절이 깊어가고 있다. 오늘도 교회는 우리를 회개에로 초대하고 있다. 인간은 죄를 벗어날 수 없고, 죄는 하느님과 하나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끊임없이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깨달을 때에만 가능하다.
1. 모든 불행한 사고는 다 죄(罪)의 벌(罰)인가?
우리는 항상 불의의 사고 소식을 접하면 마치 죄를 많이 지어 그런 변을 당하게 된 양 생각하기가 쉽다. 물론 무책임과 경거망동(輕擧妄動), 무사안일(無事安逸)이 부르는 사고가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사고로 희생되는 모든 사람이 죄가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의 기억에도 생생한 매미 태풍의 피해나, 쓰나미 피해, 성수대교 사고, 대구의 가스폭발사고 등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사고 때마다, 뒷 이야기를 듣다보면 항상 너무나 착하고 아름다운 삶을 가꾸어 온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두 가지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너희도 회개(悔改)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고 하신다. 그러나 이 말씀은 회개의 긴박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마냥 시간에 떠내려가듯이 사는 사람들에게 누구나 그런 일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하시며, 깨어 있을 것을 촉구하시는 말씀이다.
2. 회개 없이 구원 없다.
일찍이 사도 바오로는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5,12)고 하셨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요구 앞에 우리는 누구나 '사랑의 무능'을 절감한다. 하느님 앞에 진솔하게 우리를 비추어 보면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과의 만남, 그분과 일치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기름 병에 물을 붓고 아무리 잘 흔들어 놔도 물과 기름은 잘 섞이지 않는다. 물과 기름이 하나될 수 없듯이 죄(罪)중에 있으면서 하느님과 일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죄는 인간의 조건이다."는 말처럼, 인간은 죄를 떠날 수 없고, 죄와 하느님이 화합할 수 없다면, 죄인인 우리가 구원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고 하겠다. 그래서 "회개 없이 구원 없다."는 말은 우리가 한시도 잊을 수 없는 말씀이다.
회개(回改: conversio)란 무엇인가?
본래의 뜻은, 어떤 길을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섰음을 알고 돌아서듯이, 잘못을 깨닫고 삶의 자세를 전환하는 것이다. 삶의 자세에 대한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3년 동안이나 기다렸지만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야기이다. 포도원지기는 다시금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하며 애원한다. 우리는 때로 너무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하느님께서 왜 저런 놈들에게 천벌을 내리시지 않는가?"하며 원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인간이 죄를 지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벌(罰)을 내리신다면, 누가 살아남겠는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결심을 하고서도 연방 똑 같은 잘못에 빠지는가? 때로는 자신의 허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참으로 지겹고 싫어질 때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시며 뉘우치기만 하면 우리를 항상 받아주신다. 우리의 무수한 허물을 보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그 사랑과 인내 앞에 "주님, 당신의 무한한 사랑에, 그 인내에 손들었습니다."하며 항복할 때 참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진정한 회개의 길이 있다.
단순히 하느님의 벌(罰)이 무서워서 "주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하는 회개는 참 회개라 할 수 없다. 이것은 장사꾼처럼 유산을 받으려고 임종을 앞둔 부모 앞에 무릎꿇고 있는 자녀와 같은 모습이다.
3. 회개는 은총이다.
현대를 일컬어 '죄는 범람하는데도 죄의식(罪意識)은 없는 시대' 라고 한다. 여기에 우리 시대의 문제가 있다. 많은 공무원들이 부정을 저지르고도 법망에 걸려들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기보다는 '재수가 없어서 ....' 라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본다. 우리도 살면서 머리로는 "내가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에는 조금도 죄스러움이 없는 때가 더러 있다. 그래서 성사를 보려고 해도, 통회 없이 어찌 죄 사함의 성사가 되겠는가? 참으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죄를 지어 하느님의 맘을 상해드렸으면 회개를 해야 용서와 구원을 얻을 수 있는데, 그 회개마저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죄를 짓고도 마음에 죄스러움이 없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하느님 앞에 뻔뻔스럽다는 증거가 아닌가? 이 때는 깊은 침묵 중에 "주님, 저에게 참된 뉘우침을 주소서."하고 회개할 수 있는 은총을 겸손되이, 간절히 청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이 부서지고 낮추어져야 한다. 사순절은 회개의 시기이다.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51, 19)
'나만이라도' 회개를
-이기양 신부-
오늘 저는 욕을 좀 해야 하겠습니다.
"에라, 천벌을 받아 죽을 놈아!"
"벼락 맞아 죽을 놈 같으니라고!"
죄를 지었으니 하늘에서 벌을 내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다인들 역시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은 것과 제사를 드리던 유다인들을 빌라도가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을 두고 천벌을 받아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루카 13,2)하시며 그들이 결코 다른 사람보다 죄가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여 년 전 서울 한복판에서는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붕괴돼 수백 명이 죽고 다치는 놀라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대형 사고가 발생해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이 되었습니까? 인간적 욕심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이 자행되고 검은 거래로 덮으려했기에 수백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불의의 죽음을 맞고 가정이 파괴되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느 한두 사람의 파렴치한 부도덕성이 발단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구조적 불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명백히 보았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사람이 원인을 제공하면 그 일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에게로 일파만파로 흘러갑니다. 이것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사회 구조입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창설한 요셉 까르딘 추기경은 "더러운 물에 사는 물고기를 건져다가 깨끗한 물에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물 자체를 정화하는 것이 JOC 운동이다"고 사회 전체를 정화시키고 복음화해야 하는 이유를 역설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
지구 곳곳이 환경오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대기가 오염되고, 수질이 악화되며 이상 기후 현상이 나타나 막대한 피해를 보기도 합니다. 이 또한 우리의 지나친 이기심으로 일어난 인재입니다. 지나치게 냉ㆍ난방을 사용하고 음식물을 낭비하며, 편리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교통 시설을 시도 때도 없이 애용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지나친 냉ㆍ난방을 자제해야 합니다. 자동차 이용을 자제하고 음식물과 물을 아껴 써야 합니다.
지금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정치계로 쏠려 있음을 봅니다. 모두가 정치인들을 욕하고 울분을 토로합니다. "더는 못 보겠다" "갈아보자" 이렇게 흥분하고 있지만 이런 일들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정치계의 그릇된 풍토는 왜 개선되지 않고 거듭 반복되는 것일까요? 역시 이유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내 고향 사람이라고 찍어주고, 내가 아는 사람, 내 편의를 봐주는 사람이라고 뽑으면 이런 일이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또 우리의 교육이 희망이 없다는 말을 자주합니다. 그래서 내 자식만은 해외로 보내 공부시키고 싶고, 고액의 과외 공부를 시켜서라도 성공의 대열에 서게 하려고 부모들의 허리가 휠대로 휘어가고 있지요. 왜 이렇게 우리의 교육 풍토가 망가져가고 있습니까?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내 자식만 우선으로 잘 봐달라는 부정한 촌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만이라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한편 교통사고가 빈번히 일어나 개인이 죽기도 하고 한 가족이 모조리 참사를 당하기도 합니다. 음주 운전이나 과속, 교통 법규 위반 등이 이런 끔찍한 사건을 불러온 것이지요. 어떤 일이 있어도 음주 운전을 하지 않으며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법규를 철저히 잘 지키는 회개를 통해서 우리는 이런 일들을 개선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리가 무너지고, 폭탄 테러가 발생하고, 참혹한 교통사고가 일어나 희생된 그 수많은 사람들은 천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죄의 결과로 죽어간 것입니다. 우리 죄의 연대성이 빚어낸 참혹한 결과인 것이지요.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오늘 거듭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
예외는 없습니다. 나의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죄의 덩어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개개인에게 서둘러 생활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너희도 모두 그렇게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잘라 버리시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 회개의 삶을 사는 사순시기 되시기 바랍니다.
구원과 멸망
-함세웅 신부-
사순절의 전례적 의미는 회개에 있다고 했습니다. 아니, 회개는 늘 반복해야 할 그리스도교 신자의 본질과도 같은 것입니다. “겉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라는 구약의 외침이나 “뉘우치고 복음을 믿어라" “나를 따르라"는 신약의 외침은 신앙인에게 규범이 되는 말씀들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틀림없는 하나의 초청입니다. 그러나 이 초청은 응해도 상관없고 불응해도 무관한 그러한 초청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확실한 결과가 따라나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초청에 응했을 경우에는 구원이 있고, 불응했을 경우에는 멸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구원이냐 멸망이냐! 라는 필연적인 결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의 복음(루가 13,1-9)은이 후자의 것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만일 회개하지 않는다면 모두 망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문에는 꼭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망한다"라는 말씀은 종말론적인 경고임에 틀림없습니다. “회개하면 구원된다"란 말씀이 훨씬 부드럽지만 이러한 부드러움도 한계가 있다는 것, 참는 것도 분수가 있다는 것,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슨 약장수의 떠들어대는 소리가 아니라, ‘하느냐, 안하느냐' 중의 결정과 선택을 요구하는 기한부적인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수류탄의 안전핀을 잡고 있는 상태와 비슷한 것입니다. 터지느냐 안 터지느냐의 시간 차이는 불과 1~2분 차이입니다. 설마 저 사람이 그것을 빼겠는가? 하고 의심하고 있던 중에 그 수류탄은 뺑! 하고 터질 수도 있습니다.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서 기도하라"는 말씀 등의 뜻은, 모두 이 세상의 삶이 불과 1~2분 차이라는 것, 자신만만하던 중 불시의 습격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불시의 당함을 늘 생각하고, 그래서 ‘회개'하는 생활과 ‘깨어 있는' 생활을 해야 하는 신앙인을 바로 종말론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종말이 10년 후다, 15년 후다 하는 그런 식이 아니고, 내가 비록 이 세상에 살지만 하느님의 말씀에 확신을 가지면서 미래를 향하여, 영원을 향하여 현세에 집착된 마음가짐이나 생활을 초월하는 자세를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꼭 가야 할 목적지는 구원의 길을 거친 하느님의 품속입니다. 이렇게 꼭 걸어야 할 길에 누가 만일 길을 바꾼다면, 그것은 위험할 뿐 아니라 틀림없는 멸망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길로 오너라!"라는 부드러운 초청에 불응이 있기에, “좋아, 이 길로 오지 않고 다른 길로 접어들면 너는 결국 죽음의 길을 갈 뿐이야!"하는 경고와 함께, 선택할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사순절, 회개해야겠다는 마음 속의 강한 명령이 있지만, 실천이 안되는 맹숭맹숭한 신앙심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맹숭맹숭한 신앙인들에게 내리시는 예수님의 엄하신 말씀, 이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 제일 잘 알 것입니다. 자신, 가정, 직장, 사회, 임무 등을 생각하면서 ‘신앙인인 나'는 과연 신앙인답게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편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베어서 없애리라"는 비유 말씀입니다. 아무리 가꾸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 그것은 가꿀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비유가 있기 전에 우리는 모두는 이러한 식으로 농사를, 과수 재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가꾸어도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 그것은 아무리 불러도, 아무리 초청해도, 아무리 아끼고 사랑해도 돌아오지 않는, 자아 집착에 빠진 비신앙 내지 불신앙, 반신앙인의 옹고집, 회개하지 않는 마음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1년을 더 두기로 하였습니다. 혹시? 하는 희망과 함께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1년의 시간을 더 주십니다. 그 1년이 누구에게는 10년 일 수도 있고 다른 이에게는 하루일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 이것은 틀림없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이 주어진 시간에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은 열매를 맺도록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로 되돌아오는 일입니다. 뉘우치는 일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심하며 외워 봅니. “주님, 회개해서 열매를 맺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이수철신부-
우리는 미사 때마다 영성체 예식이 시작되면서,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라는 사제의 말에 이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로 시작하여 주의 기도를 바칩니다.
평범한 말마디 같으나 엄청난 은혜와 축복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고귀한 품위의 부잣집 자녀들인 우리들인지요.
이어 생각나는 루카복음 6장 36절 말씀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사람들,
아버지처럼 자비롭게 삽니다.
사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뭔가 애매하고,
“하느님 자녀답게”산다 할 때 분명해집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이들,
자비하신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무자비하게 막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과연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느님의 부잣집 자녀로
품위 있고 아름답게 살고 있는지요?
바로 오늘 복음의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환히 계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두 아들,
아버지의 자녀답지 못했습니다.
큰 아들은
평생을 자비하신 아버지 곁에 살았지만 자비롭지 못했고,
작은 아들은
제 멋대로 아버지께 상처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아버지의 마음 참 외롭고 쓸쓸했을 것입니다.
오늘 날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자들,
큰 아들처럼 또는 작은 아들처럼 살고 있는지요!
이래서 회개가 절실합니다.
아버지를 떠난 냉담자들은
작은 아들처럼 자비하신 아버지께 돌아오는 것이고,
늘 아버지의 집에서 살고 있는 큰 아들 같은
사제나 수도자들은
자비하신 아버지를 깨달아 아는 회개가 절실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진정 회개하여
자비하신 아버지의 품 안으로 돌아 온 작은 아들은
그 누구보다 아버지의 자비를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자비의 품 안에서
더욱 철저한 회개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회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스스로 의롭다 확신하는 완벽주의자
큰 아들로 상징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오늘 날의 종교인들인 사제나 수도자들입니다.
참으로 힘든 게 이들의 회개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 군요.”
아버지의 자유로운 자녀가 아니라
종처럼 살았다는 게 문제입니다.
외견 상 나무랄 데 없는 삶 같으나,
내심은 전혀 자비롭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방금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다.’라고
화답송을 노래했습니다.
오늘도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이 미사 은총으로
미카 예언자의 말씀대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버리십니다.
아멘.
- 서 공석 신부-
사람들은 재난을 당하거나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이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신앙인이면, 하느님이 그 불행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재난과 불행을 하느님이 인간 죄에 대해 내리시는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벌이니 벌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잘 참아 받아야 합니다. 의인은 벌 받은 죄인을 버리고 외면함으로써 의로우신 하느님 편에 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달리 생각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선하고 자비로우십니다. 따라서 그분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재난과 불행을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느님 편에 서는 것은 하느님의 일, 곧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이웃이 당하는 불행을 퇴치하는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불행을 보는 예수님의 시선이 이렇게 다르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읽어야 합니다. 복음은 갈릴래아 사람들을 빌라도가 학살하였다고 말합니다. 식민지의 총독인 빌라도는 백성의 소요를 항상 우려합니다.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갈릴래아 사람들을 보고 그들을 학살하는 과잉반응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입니다. 식민지 갈릴래아에서 있을 법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이 언급하는 실로암탑은 예루살렘의 급수(給水) 시설에 있던 구조물입니다. 그것이 붕괴하였다는 사실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입니다. 오늘의 첨단 과학 기술로 건립한 대교와 대형 건물도 무너지고 내려앉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두 가지 재해는 모두 있을 법한 것들입니다. 여니 재해와 마찬가지로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한 사건들입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런 불행을 하느님이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 희생자들은 그들이 범한 죄에 대해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회개하지 않으면, 벌 받을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논리이지 예수님의 논리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행실에 따라 하느님이 현세에서 상이나 벌을 주신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재난의 책임을 하느님에게 전가하지 말고, 선하신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이웃이 재난이나 불행을 당하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이웃이 그 불행에서 벗어나도록 돌보아줍니다.
모든 불행의 책임이 하느님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그 불행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그 불행을 당한 사람이 나 자신이라면, 나는 하느님이 나를 버렸다고 믿어 절망 가운데 죽어 갈 것입니다. 만일 그 불행을 당한 사람이 내 이웃이라면, 나는 그와 같은 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자만자족할 것입니다. 이런 자세들은 모두 예수님의 눈에는 인간으로서 망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벌하고 괴롭히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의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짓밟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불행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자비하시기에 그 자녀인 신앙인도 그 자비를 실천하여 이웃의 불행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하느님이 악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을 심고 기다리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서들(호세아, 미가, 예레미아) 안에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열매 맺도록 가꾸겠다는 포도원지기의 말을 받아들이는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기대하고 기다리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안에 나타나는 부정적 표현들, ‘잘라 버리라.’ 혹은 ‘그러지 않으면 잘라버리십시오.’등의 말을 오늘 복음의 핵심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협박하기 위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부정적 표현들은 기원 후 66년에 시작한 유대아의 전쟁이 70년에 이스라엘의 패전으로 끝나고,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키는 것을 본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인내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무화과나무는 드디어 하느님이 잘라버리셨다고 신앙인들이 믿으면서 발생한 말입니다.
하느님은 참고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삼년이나 기다렸다’, 혹은 ‘올해만 그냥 두시지오’라는 오늘 복음의 표현들은 심고 기다리는 하느님은 우리의 응답을 기대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자녀에 대해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심고 기다리십니다. 그분의 자녀인 우리는 열매 맺는 노력을 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재난과 불행을 퇴치하는 자비로운 실천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생명을 다양하게 심으셨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의미도 없고, 보람도 없는 생명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생명을 심으셨고, 그것이 자라고 열매 맺도록 기다리십니다. 그 열매는 하느님만이 보십니다. 우리의 좁고 짧은 시야에는 보이지 않는 것도 많습니다. 잘라버릴 판단을 하실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늘 복음의 포도원 지기의 역할입니다.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어서’ 열매를 맺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게 돕는 일입니다. 그것이 함께 심어진 동료 인간이 이웃을 위해 할 일입니다. 이런 노력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의 역할입니다.
자기의 뜻을 완강하게 관철하는 것은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못난 구석과 약점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자기의 뜻을 강요하고 사람을 복종시키려는 사람은 자기의 못난 구석과 약점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이웃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대화하고 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며 그를 돕습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하느님은 특정의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지배하라고 특권을 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웃의 뜻을 꺾고 그를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회개하며 하느님을 배워야 하는 자녀들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심어놓고 기다리십니다. 당신의 생명, 자비로우신 당신의 생명이 우리의 삶 안에 열매 맺기를 기다리십니다.
무화과나무를 통한 교훈
-박상대신부-
93년경에 완성된 플라비우스(37?-100)의 ≪유대고대사≫는 유대역사를 창조 이후부터 반란(66-70년) 전까지의 사건들을 기술한 책으로 성서의 이야기들을 각색하여 실었고, 유대교의 율법과 제도의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유대고대사 총20권 중 제18권에는 이스라엘의 5대 총독(26-36)으로 재임했던 빌라도가 두 번이나 유대인들을 크게 학살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는 예수님 당대에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이다. 두 번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35년경 가리짐산(고대 북왕조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남쪽 13Km 지점에 위치)으로 제사를 지내러 올라가던 사마리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빌라도 총독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추궁으로 소환되었고 그후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오늘 복음이 소개하는 빌라도 총독에 의한 갈릴래아 사람들의 학살사건이 실제적인 사건인지는 의문스럽다. 실제로 있었다면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간 갈릴래아 사람들이 성전 뜰에서 희생물로 짐승을 바치다가 참변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위에서 언급한 빌라도의 두 가지 대량학살 사건을 하나로 뭉친 듯한 느낌을 강하게 준다. 예수께서 달리 언급하시는 실로암 탑의 붕괴로 18명이 죽었던 사건은 실제일 가능성이 높다. 실로암은 예루살렘 동쪽 성밖 키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이라는 샘물을 유다왕국의 히즈키야(기원전 716-687) 왕이 터널(히즈키야 터널)로 연결하여 성안으로 끌어들여 만든 저수장(貯水場)이다. 따라서 실로암 탑의 붕괴는 성벽의 붕괴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은 뜻하지 않게 당하는 참사는 모두 당사자가 지은 죄 때문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학살과 실로암 탑의 붕괴로 말미암은 희생자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죄가 당시 그곳에 살면서 죽음을 면한 사람들의 죄보다 크지 않았다고 강조하신다.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사건의 잘잘못이나 죄의 대소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있는 사람들을 염려하여 당장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5절) 회개의 촉구는 다음에 이어지는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의 비유’(6-9절)에 잘 나타난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그들과 같은 죽음을 불사(不辭)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유 속에는 세 가지 주체가 등장한다. 이는 포도원에 심겨진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와 포도원지기와 포도원주인이다. 비유를 풀이하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을, 주인은 하느님을 뜻한다. 3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리려는 주인에게 포도원지기가 말미(末尾)를 청한다. 말미는 1년이라는 시간적 여유와 포도원 지기의 정성과 거름이다. 포도원지기가 무화과나무와 연대(連帶)하여 주인에게 말미를 청하는 모습은 아브라함이 소돔의 구원을 위하여 애쓰는 장면을 연상시킨다.(창세 18,23-33) 야훼께서는 아브라함의 청을 들어주셨다. 그러나 소돔은 단 10명의 의인(義人)이 없어 결국 멸망하고 만다.(창세 19,24-25) 이와 같이 오늘의 무화과나무도 포도원지기의 도움을 받아 다음 철까지 열매를 맺을 기회를 가진다. 만약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소돔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오늘 비유말씀에는 여지없이 당장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님의 바램이 담겨있다. 아울러 회개의 과정에 예수께서 포도원지기처럼 끝까지 도와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단지 여기서 ’끝까지’라는 시간은 회개를 필요로 하는 자가 살아 있는 동안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다.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당장 회개하고 화해의 삶을 살도록 해야한다. 동시에 아무 죄 없이도 십자가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시는 주님께 눈물과 기도로 회개의 도움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
첫댓글 회개하고 다시 새출발하는 마음으로 사순절을 보냅니다.
모두가 동참하기를 기대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