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님의 마지막 유언
사람의 마지막 유언은, 비록 이미 육신이 쇠잔하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말한 것이라 해도
누구나 엄숙히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내리신
마지막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옳은가?
주님은 유언이자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이 내려질 때보다도 더 엄숙한 순간에 선언하셨다.
하늘에 오르시기 직전, 주님께서는 당신이 행하신 지상에서의 모든 가르침을 완성시키시려는 듯,
성삼위의 위엄을 갖추시고 마지막 분부의 말씀을 남기신 것이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 15)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 신자 생활의 기본 방향이 어떤 것인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
주님을 믿는 신자라면 꺼지지 않는 열의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런데 이 본질적인 신앙의 요건이 때때로 저버림을 받고 있다.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나 밖에서 사람들을 찾아 나서지 않고 그대로 버려두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내리신
이 마지막 명령을 저버린다면 결국은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은총의 흐름이 막히어 믿음은 식어지고 급기야는 그 열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곳에서 이미 이런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라고 말씀하신 것은
진실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을 눈앞에 그리시면서
그들 하나하나를 위해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찔리시고 온갖 수모와 설움을 당하시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여러 번 기절하시고
마침내 갈바리아 언덕 위에서 목숨까지 바치셨다.
이처럼 위대한 주님의 수난을 헛되게 해서는결코 안 된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구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고귀한 성혈을 아낌없이 흘리셨으므로
우리는 이를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찾아 나서는 일이 그리도교 신자로서 우리가 받은 사명이다.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 훌륭한 사람들, 가까이 또는 먼 곳에 사는 사람들,
보통 사람들, 극히 사악한 사람들, 먼 곳에 외따로 있는 판잣집에 사는 사람들,
고통받는 이들, 악마 같은 자들, 외로운 등대지기, 나병 환자들,
잊힌 사람들, 술과 악습에 젖은 사람들, 위험한 부류의 사람들,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나 떠돌이들, 전쟁터의 군인들, 찾아가기 꺼려지는 곳,
달동네, 얼어붙은 황무지, 불볕 같은 사막, 울창한 밀림, 음침한 늪지대,
지도에도 없는 작은 섬, 미개한 부족 마을, 사람이 살고 있는지 조차도 알수 없는 미지의 땅,
그리고 무지개가 걸린 땅 끝까지라도 찾아 나서야 한다!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시도록
한 사람도 빼놓이 않고 찾아가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레지오는 주님이 주신 이 마지막 명령에 온통 사로잡혀 있어야 한다.
레지오는 어디에서나 어떠한 형태로든 영혼들과 접촉한 일을 제일의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이 일은 일단 착수하기만 하면 이루어지므로 시작만으로도 주님의 명령은
이미 완성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실 때 모든 사람을 변화시켜 놓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접촉하기를 요구하셨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을 변화하게 만드는 것은 안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일이겠지만
접촉하는 일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그런데 만일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차별 없이 접촉하는 일이
이루어졌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가?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님께서 아무런 가치 없고 불필요한 일을 하라고 명령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접촉하는 일은 적어도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바로 이 상태까지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은 아마도 성령께서 오시어 우리를 새롭게 타오르게 만드시는 일일 것이다.
많은 열심인 신자들은 자신의 힘닿는 데까지 수고하고 나면
그것으로써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만큼 다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혼자서 쏟는 노력은 안타깝게도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더구나 주님께서도 그런 외로운 노력을 기쁘게 여기지 않으실 뿐더러
미처 끝맺지 못한채 넘겨진 이를 기꺼이 돌보다 주지도 않으신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하는 사업을 착수할 때에는
혼자서 하기 힘든 다른 일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함께 일할
일꾼들이 넉넉히 확보될 때까지 신자들을 동원하고 조직하여
충분한 힘을 갖춘 후에 시작하도록 해야 한다
이 공동 사업의 원리, 즉 개인의 노력을 공동체의 노력에 연결시키는 행위는
모든 이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매우 중요한 의무이다.
이 의무는 고위 성직자나 본당 사제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레지오 단원들과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이를 통하여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제각기 한줄기의 사도직 물결을 이루며
이 물결들이 합쳐져서 마침내 온 누리에 넘쳐흐르는 대홍수를 이루게 될 것이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열망과 믿음이 크면 클수록 믿음을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의 행동의 힘도 함께 커진다.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은총은 지상의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에 무슨 조건이나 헌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은총의 샘은 항상 넘쳐흐르고 있으며 아무런 제한도 없고 그 물줄기를 통제하는 일정한 수로도 없다.
우리는 단지 이 생명의 물을 목말라 하며 마음을 활짝 열고 이 물을 받아 마시자,
우리의 믿음을 키워서 이 생명의 물이 우리 안에 가득히 넘치도록 힘쓰자."
(카르타고의 성 치프리아노 / St. Cyprian of Carthage)
2.레지오는 영혼 하나하나를 겨냥해야 한다.
"이른 아침 평일 미사의 제대 앞에 많은 신자들이 모여 든다 하여
그와는 정반대되는 무서운 세속 현실이 있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온통 잘못된 가정과 그 가족들, 주민 전체가 타락하여 미움이 대상이 된 동네,
악의 세력과 그 패거리들이 군림하는 곳들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한 곳에 밀집되어 있는 죄악 못지 않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죄들도 세상을 타락시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셋째, 우리는 그런 곳에서 잘 익은 - 사해(死海)와도 같은 - 죄악의 열매를 보지만
사실상 그러한 죄악은 온 세상 구석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영혼을 돌보지 않는 나태와 일상의 죄악들이 고개를 든 곳에는
어디에서나 더럽고 추악한 큰 죄들이 그 싹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므로 일꾼이 있는 곳에는 언제라도 해야 할 일이 있게 마련이다.
가령 할 일이 정말 마땅치 않다면 병원을 찾아가 불쌍한 노인들을 위로해 주거나
어린아이들에게 성호 긋는 법을 가르쳐 주면서 '누가 세상을 만들었지?' 하고 묻고
그 아이들이 혀 짧은 소리로 대답하게 만들어 보라.
여러분은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이런 단순한 행동만으로도 죄악의 전체 조직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넷째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무서운 죄악과 무질서도
치유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죄악이 판치는모습을 보며 좌절하는 사도직 일꾼들에게는 희망의 복음이다.
이런 경우에 그 치료법은 단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바로 교회의 신심 조직을 강력하고도 꾸준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얼핏 듣기만 해도 몸서리 칠 만큼 타락한 생활 속에서도
때때로 선(善)을 갈망하는 마음이 찾아 들 때가 있다.
이럴 때 누군가가 옆에서 달래고 격려하고 착한 생활에 대해 이야기해 주며,
옛날의 평범한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주면
가장 불행한 죄악의 희생자들도 사제에게 인도하여 성사를 받게 할 수 있다.
일단 성사를 받게 되면 변화를 가져오므로 전과 같은
완전한 죄악의 싱태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세우신 이 성사를 통해
그들의 삶을 바꾸어 놓으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때때로 '현재의 작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나
막달라 마리아 성녀가 새로이 태오나는 기적'을 바라보면서
그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치유가 그다지 뚜렷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오랫동안 젖어 있던 악습이나 과거의 인연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힘에 겨워 넘어지고 일어서는 일을 되풀이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을 이른바 모범적인 시민 되게 만들 수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게 내린 초자연적인 은총은
그들로 하여금 마침내 새로운 삶 안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이로써 위대한 목표는 달성되기에 이른다.
사실상 용감하고 순수한 레지오 단원은
아무리 암담하고 사악한 곳에 활동을 한다 해도 실패한 일이 거의 없다.
그 원리를 단순한데 단원들은 '개인 접촉'을 통해서 성사를 받는 사람의 수를 늘리고
그들이 꼭 지켜야 할 신심을 널리 전파하는 활동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죄악이 당신 눈앞에서 사라지게 된다.
어디에서나 선행을 행하여라. 그대의 선행은 모든 이를 향상시키며
사람들이 영신적으로 향상 될 때 죄악의 전투 대열은 무너지고 만다.
다만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무기를 필요에 따라 적절히 사용해야 한다.
가령 어떤 가정에 여섯 식구가 사는데 미사와 성사를 멀리하고
아무리 타일러도 받아들이지 않는 냉담상태에 있다고 하자
이럴 때에는 우선 식구 중 한 사람을 설득한다면
그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가정을 예수 성심께 봉헌하도록 만든다면
이미 승리의 날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 사람은 스스로 점차 나아지게 되고 다른 가족들도 그를 따라 향상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지금가지 나쁜 행동으로 서로를 타락의 길로 이끌던 사람들이
드디어 좋은 방향으로 나가려고 서로를 격려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미카엘 크리든 신부 /Fr. Michael CReedon)
"이 도둑이 드디어 낙원을 훔쳤구나! 이 사람보다 앞선 사람들도
일찍이 아무도 그런 약속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야곱도, 모세를 비롯하여
많은 예언자들과 사도들 가운데에서도 그러한 약속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 도둑은 그들을 모두 제치고 앞서고 말았구나!
이 사람의 믿음이 예언자나 사도들보다 더 뛰어난 것이었구나!
이 도둑은 고통을 겪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도 영광 중에 계시는 것처럼 흠숭을 드렸다.
이 도둑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 모습을 보고도 예수님께서
마치 왕좌에 앉아 계시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소원을 말씀드렸다
이 도둑은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모습을 보고도 임금님께 애원하듯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청했다. 오 찬탄해 마지않을 도둑이여!
그대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보고서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선포하였구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 St. John Chrysostom)
3.정교(동방 교회) 전통을 지닌 자매 교회들과의 특별한 유대 관계
교황 바오로 6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은
"교회가 반드시 해야 할 역활 (현대의 복음 선교14)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이 서로 화해하고 일치하도록 힘써야 할 교회의
또 다른 중요한 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될 것입니다"(요한 17,21)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는
오늘 날 가톨리 교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에 따라 이 공의회는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은 명백히 그리스도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며
세상에 추문을 남기고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 가장 신성한 목적을 손상한다"(일치 운도에관한 교령 1)고 지적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다음에 인용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서한 '동방의 빛 (Orientale Lumen)'은 동방의 모든 그리스도인과의 일치를 회복하려는
가톨릭 교회의 노력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방 교회 안에 이어서 내려온 존귀한 전통은
사실상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의 필수적인 유산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은
먼저 동방 교회의 전통에 친밀감을 가지고 접근하여
그들의 전통으부터 자양분을 얻고 일치를 이루려는 교회의 노력을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지원한 것입니다.
동방 가톨릭의 형제자매들은 그리스 정교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이러한 전통의 계승자들임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라틴 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로마 가톨릭의 신자들 역시
이 소중한 교회의 유산을 인정하여 자신의 전통만을 고집하거나
다른 공동체를 거스르는 행위를 억제함으로써 교회의 보편성을 회복하고
이를 교회와 세상에 명백히 드러내고자하는 교황의 강렬한 열망에 부응해 주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서방 교회뿐만 아니라 동방 교회의 생명 안에서 보존되고 성장해 온
이 유산이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것임을 이해하고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받아들이며,
온전히 맛들여야 할 것입니다."(동방이 빛 1)
이어서 교황은 정교회(正敎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계속 하신다.
"우리는 그들과 특별히 가깝게 결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면에서 서로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일치를 진정으로 열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같습니다."(동방의 빛 3)
정교회는 이와 같이 진정한 우리의 자매 교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치를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을 지침으로 삼아,
화해와 일치을 위한 온갖 가능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 장(章)에는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개종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교회에 속해 있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4. 입교자를 찾아 나서자
"교회가 존재하는 오직 하나의 이유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온 세상에 확장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나누어 주려는 것이다" 하고 교황 비오 11세가 엄숙하게 선언한 바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에 속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살면서
그들을 교회에 이끌어 들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때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만을 돌보는 문제에 너무 치중하다 보니,
막상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 조차 없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결국 교회 안의 신자들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교회 밖의 사람들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결과가 빚어진다 해서 놀랄일이 아니지 않은가?
여기에 잘못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에 관심을 갖도록 우리가 나서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신앙이라는 선물을 전하는 가장 훌륭한 의지를 실천에 옮기려면
소심하고 수줍은 마음이나 체면 또는 그밖의 이런 저런 어려움들을 모두 이겨내야 할 것이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전파되어야만 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열성을 바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St. Francis Xavier)은 말한다.
그러나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해야 할 행동을 못하게 막거나 그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면 신중해야 한다.
하나의 조직체 안에서 신중함이 담당하는 올바른 기능은 '브레이크',곧 제동 장치의 역활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중함이 '엔진' 곧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잘못이 빛어 지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의 결과는 활동이 멈추게 되는 것인데 그제서야 사람들은 놀란다.
과연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필요한 세상이다.
이기적인 생각으로 몸을 사리거나 쓸데없는 두려움을 초월하여 사는 사람,
교황 레오 13세가 잘못된 양극단이 라고 낙인 찍은 바 있는 '분별없는 행동'이나
소위 '지나친 신중'이라는 두 가지 오류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많은 영혼이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이라는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떠내려 가버린 영혼들을 구할 수는 없다
영원한 깊은 심연이 그 영혼들을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노력을 기울여 다른 영혼들을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면
결국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북음을 전할 준비를 갖추지 못하게 되고만다"(쉬네스 추기경/ Cardinal L. J. Suenens)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의혹의 바다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며 그곳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서 참다운 믿음과 평화가 교회안에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야 한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어떻게 그 진리를 알수 있겠는가? (사도 8,30-31 참조)
만일 가톨릭 신자들인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꼼짝 않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그들의 엄청난 오해를 어떻게 풀 수 있겠는가?
교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톨릭신자들의 냉정한 겉모습을 보고
그 마음속에 들어있는 믿음의 따스함을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열성을 보인 일이 거의 없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믿음을 보며
믿지 않는 자신들과 별로 또는 전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해서 그들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가톨릭의 교리나 주장을 대중 홍보 매체나 공공 집회를 통하여 알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 방법도 개인 접촉으로 뒷빋침되지 않으면 효과가 없어질 수밖에 없다.
만일 홍보 매체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접촉한 선교방식이 효과가 있다면
홍보가 과학적으로 이루어 지는 현대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교회로 쏟아져 들어오는 시대라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조차 그대로 유지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참으로 효과적인 선교 방법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친밀하게 접촉하는 것뿐이다.
방송이나 출판 매체는'믿지 않는 양들'을 '착한 목자'에게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일깨워 주거나 도와주는 역활을 할 수 는 있다.
그러나 그 일의 중심이 되는 활동은 개인적인 접촉과 호소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프레데릭 오자남(Frederich Ozanam)은 " 한 영혼을 끌어 올리려면 다른 또 하나의 아름다운 영혼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영신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을 구하는 일에는 반드시 사랑의 법칙이 작용해야 하므로 주는 사람이 없으면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그래도 나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편견과 무지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움직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편견이 사실상 널리 퍼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거의 선천적이고 더욱이 교육을 통해서 굳어져 있다는 사실이 인정된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일반 가톨릭 평신도가 앞에 나서서 싸울 수 있는 수단이 있겠는가?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 교회의 교리 속에는 훌륭하고 빛나는 값진 보검이 있다.
이 보검의 성능에 관해서 뉴만 추기경(Cardinal Newman)은
"나는 진리의 힘과 승리에 대해서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진리에는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사탄이 설사 이 진리의 힘과 승리를 줄이거나 더디게 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결코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고 말하고 있다.
그 외에도 우리 가톨릭 신자들이 늘 명심해야 할 또 하나의 원리가 있는데
이 원리를 우리 신자들의 생활 속에서 바르게 증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진리는 오류와 싸울 때 결코 화를 내지 않으나
오류는 진리와 싸울 때 절대로 조용한 법이 없다."(드 메스트로 / De Maister)는 가르침이다.
앞서 되풀이해서 강조된 바와 같이 입교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접촉할 때에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실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논쟁을 벌이는 태도나 고압적인 자세를 보여서는 안 된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겸손과 사랑, 그리고 성실함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말 뿐만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도 하나의 본질적인 요소가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언행이 순수한 믿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상대방이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심한 반발이 나올리가 없고 틀림없이 깊은 인상을 심어 주게 되므로
마침내 우리의 선교 대상자가 입교할 가능성이 한결 높아지게 된다.
버밍검의 대주교였던 윌리암스 박사(Er. William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스스로 붙드는 것이다.
믿음은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가는 불길이다.
믿음은 오직 사랑으로만 전파되며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는 믿음을 전파할 수 없다.
믿음은 오로지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으로부터만 전해 받는다.
자신에게 무관심하거나 적대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으로부터는 믿음을 전해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 접촉 활동이 꼭 필요하다고 볼 때 한 사람의 일꾼이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제대로 돌보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결국 입교자를 많이 얻으려면 많은 일꾼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레지오 단원은 더욱 더 많아져야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