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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 묻혀 저 같던 제주 4.3 사건 슬픈 우리 역사의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동학 농민봉기 사건, 제주 4.3 사건. 광주 5.18 사건 모두가 같은 성격으로 동기가 비슷한 사건으로 봅니다.
광주 5.18 사건을 북한군 개입으로 좌파 (빨갱이)로 몰고 가듯이 두 사건 모두가 과잉진압에서 불씨가 커지는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5.18 사건에 북한군 개입이라고 하는데 북한군이 삼팔선을 넘어 광주에 오기까지 대한민국 정부군은 무엇을 했단말인가 그 책임은 누구인가? 새 대가리 당 국회의원들 입에서 빨갱이란 말을 하는데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 앞으로 대한민국이 선진국 대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역감정 좌파 우파로 나누어서는 절대 아니 된다.
지역감정 좌파 우파는 누가 왜 만들어놓았는가?
모두가 정치 선거판에서 만들어놓고 국민을 우롱하는 노론 소론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고자 하는 것인가
대한민국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물 안에 개구리가 되어서는 아니 되며 지역감정 좌. 우 파를 초월한 전국 정당으로 그런 정치판을 만들어 미래 지향적인 대한민국 국회가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국회의원들 중 위 사항에 위반되는 사이코 패스 같은 국회의원들은 국민 모두가 단호히 처단해야 할 것이다.
4.3 사건의 역사적인 배경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국권이 상실된 대한민국은 일본의 식민지에서 온갖 만행으로 수모를 겪으면서 37년 동안이나 죽지 못해 살아왔다. 일본이 대동아 전쟁에서 연합군에게 패하게 되어 우리나라는 1945년 8.15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우리나라는 무정부 상태에서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미국과 소련 두 도적놈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대한민국을 두 쪽으로 나누어 먹기로 1945년 12월 21일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통해서 한반도를 운운하면서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사상으로 단독정부를 수립시켜 신탁통치를 하기로 3.8선을 만들어 놓았다.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정이 우리는 그런 속셈도 모르고 남북한 총선을 운운하며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니 두 놈들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진즉 상황은 끝났는데 아무리 발버둥 처 보아도 이미 남과북 두 나라가 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남북 총선을 실시하여 독립정부를 수립하자고 국회의원수를 남북 인원수에 비례하여 남 200명 북 100명으로 하자고 제의 그런데 북측에서 웬 말이냐 북측은 사회주의 남측에는 자유 민주주의 이념으로 2 ; 1 이면 자유주의가 우세하니 아니 된다고 소련이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미국이 유엔에게 물었다. 어찌하면 돼겠냐고? 유엔에서 답변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라 당시 전북 정읍에서 이승만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남한만이라도 단독 임시정부 수립을 해야 한다고 했다. 깜짝 놀란 김구 선생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이 평양에 가서 사회주의 김두봉 김일성이를 만나 이념을 초월한 우리 민족은 하나이니 절대 두 정부를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고 협의하였다.
그러던 중 미군정과 친미 이승만은 남한만 단독 임시 정부 수립을 각본에 의해 계획적으로 준비하여 추진 1948년 5월 10일 200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하게 된다.
그러나 단독정부 수립 반대로 김구 선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5/10 선거 불참 운동을 강조하였으나 선관위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진행한다.
한편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도민들이 극단적으로 제주도에서 두 군데 선거구가 불타버린 사건으로 1948년 5월 10일 선거로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어 남한만 정부 수립을 하여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 공포한다. 그날이 제헌절이다.
그 후 제주도는 빨갱이 빨간 섬으로 낙인을 찍 이게 된다. 북측에서는 동 9월 9일 조선 인민 공화국이 함께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두 나라가 만들어졌다.
제주도의 역사적 지리적 특징 몽골 지배. 유배지 ( 광해군 추사 김정희 ) 일본과 가까워 일제 강점기 동안 가장 큰 피해가 제주도 이였다.
어린 학생들까지 징용과 징병으로 끌러가게 되었고 패망 직전까지도 제주도를 전쟁 요새화로 도민들은 부역으로 인해 제주도를 떠난 사람이 6만 명이나 된다. 1945년 우리나라는 8.15 해방을 맞이하였는데도 제주도에서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지 못했다. 미군정이 들어와 일본 놈들의 만행을 저지하고 친일파 세력들을 처단해야 되는데 하루가 일 년 같이 느껴졌다. 한 달이 넘어서야 미군정이 제주도에 들어와 일본 놈들은 물어갔으나 제주에는 혼돈 속에 역사는 흘러간다. 친일파를 처단하지 않고 미군정이 그대로 치안을 담당하도록 하여 제주도민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전국 경찰 중 80%가 친일파로 등용되었고 또한 미군정이 제주島를 제주道로 승격시켜 과다한 세금 부과 현재보다 道로 승격되었으니 경찰을 100명 증원시켜 과다한 세금으로 도민들의 살림살이가 팍팍하게 되어 살기가 어려졌다.
春來不似春이란 성어가 생각난다. 봄은 왔건 만은 날씨는 더 춥다 는 말
4.3 사건의 발달 1947년 삼일절 행사로 많은 시민들이 모여 삼일절 28주년 기념행사를 마치고 기마 경찰관들이 말을 타고 시가행진을 하던 중 관덕정 앞을 지날 때 여섯 살 되는 여자 아이가 기마병의 말발굽에 다처 넘어져 상처를 입었는데도 그냥 지나처 버린 그 현장을 보고 있는 많은 도민들이 저놈 잡아라 외치며 돌을 던지며 경찰서까지 따라가다가 폭동으로 오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6명의 제주도민 젖을 먹이는 부인과 어린아이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도민들은 경찰서에 가서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사과를 요구하였으나 경찰서에는 더욱 강경 진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려고 하여 당시 기자들이 이러다간 큰 일 나겠습니다. 모두들 그만두십시오 중제 역할로 마무리되었으나 1947년 3월 11일 제주도민 95% 똘똘 뭉쳐 총파업으로 맞선다 그중 경찰 교사 금융 공무원 개인사업장 등등 당시 중문 지서 경찰들도 파업에 동참 안하무인격인 정부에서는 민중의 지팡이가 될 수 없으니 사표를 낸다 중문 지서 경찰 일동 파업 후에도 사과는커녕 오히려 강경대책으로 사건을 수습하려고 하여 도민들의 속은 고춧가루 먹는 속으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런 세월 속에 1년이 지난 뒤
1948년 4월 3일 사건이 발생한다. 새벽 2시를 전후하여 350명의 무장대가 미군정 치하의 도내 24개 경찰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고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및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경찰 4명과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 사망하였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조국통일 반미 구국투쟁으로 무장봉기기의 기치로 내세웠다.
그러자 조병옥 경무관이 제주도에 내려와 상황을 파악한 후 사상이 불온한 좌익세력들을 싹 쓸어 버리겠다는 말과 응원경찰을 대폭 증원하겠다. 정부에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당시 제주도 9 연대장 김익열 대령에게 진압을 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어찌 군이 민간인에게 총을 쏘겠습니까? 무장대 대장과 만나 평화적 해결을 해보겠습니다. 당시 무장대 대장 김달삼 (당시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 )과 김익열이 만나 평화적 해결할 수 있도록 협의한다. 그러나 우익 서북 청단 단체에서 방화로 인하여 합의가 무산된다.
그리고 김익열 연대장을 해임되고 그 자리에 박진경이란 연대장이 부임하여 군경 합동작전으로 무차별 학살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 후 10월 17일 제주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폭도로 인정하여 무조건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한다. ( 육군 소령 송요찬 ) 헌법에도 없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니 제주도는 단절된 섬의 학살지였다. 1949년 1.17일 토벌대에 의해 북촌 사건이 발생하여 주민 약 400명이 학살되었으며 10.2일 군법회의 결과 사형 249명 학살 제주 비행장 인근에 암매장되었고 정방 폭포에 수장되었다. 이후 1950년 6.25 전쟁 반발 제주도만은 북한군에 점령되지 않았으니 희생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착각이 있었다. 그러나 1953년 7.27까지 동족상잔의 6.25 전쟁 중에도 제주 학살은 계속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1954년 9월 21일 4.3 사건이 7년 7개월 만에 대 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총 사망자 3만 명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금기의 역사로 이들의 죽음에 대하여 알려고도 하지 말고 입밖에 내지도 못하게 하였으며 살아남은 자 대부분은 연좌제에 묶여 출세는커녕 여권발급도 쉽지 않은 긴 세월의 아픔과 고통을 감내하여야만 하였다. 2000년에 4.3 특별법 공포 이후( 김대중 대통령) 4.3 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게기가 마련되었고
2003년에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2003년에 4월 노무현 대통령이 정부 수립 후 첫 공식사과를 하였으며 2014년에서야 4.3 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고 2019년 국방부에서 군의 유감으로 공식사과를 한다 하니 격세지감을 느낄 뿐이다. 가해자는 누구인가? 군정을 이끌었던 미국 놈들과 무능한 이승만 정부가 모든 사건을 명령 지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승만을 등에 업은 극악무도한 서북청년단 박진경 ( 1948.5.16.~6.18까지 33일간 토벌 연대장 ) 부임하자마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제주 땅이다. 30만 주민을 희생시키더라고 무방하다는 취임사를 하고 무자비하게 토벌을 감행하였다. 그 후 한 달도 안돼 대령으로 진급하자마자 6월18일 축하연을 하는 도중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에 의해 피살 당 하였다. 경남 남해에 박진경 동상이 아직도 굳건히 버티고 있으니 4.3사건이 풀릴 수 없었다. 최경록 ( 48년 6월 ~ 10월까지 토벌 연대장 ) 박진경이 죽자 후임으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학살을 감행 이를 바탕으로 승승장구 육군 참모총장까지 올라 중장으로 예편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당시 교통부 장관에서 경질된 이력이 있다. 송요찬 ( 48년 6월부터 9개월간 토벌 연대장 ) 최경록이 부임할 때 부 연대장(소령)으로 같이 부임하여 제주 해안선 5km 외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위반 시 무조건 사살한 주역이며 49년 2월까지 가장 많은 도민을 죽였다 3만 명 중 전체 76% 사살하였다. 박진경은 피살되어 그의 죗값을 받았으나 송요찬은 이제껏 아무 조치가 없었다고 한다.
푸른 하늘 이 글을 쓰면서 슬픈 과거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무고한 시민들이 왜 죽어야만 했는가?
이 글은 본질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접어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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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슴 아픈 역사들입니다
지금이라도 적폐청산???
잘 보고 읽고 갑니다
슬픈역사 .......현제도 이어져 진실을 외곡하고
좌파.우파 무고한 국민들만이.....
목숨을 받쳐나라를 구하느라 위대한분들 .....계시기에 이땅에 있도다.......
지금의정치는 서로 헐띁고 흔들고 분열이되면 무엇이 ........
주저리 해봅니다...~~~
지난역사의 흔적 상기시켜주신 글 감사 합니다.
감사히 머믈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