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두려워 말자
성경 본문: 고후 1:3-11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
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중에 있
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인생에 있어서 고난을 당하는 자세는 첫번째로 [나는 고난을 견딜수
밖에 없다]고 하는 체념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하
고 있으나 삶에 있어서 필연적인 멍에로 간주하는 사람들입니다.두번
째는 고난을 인생이 더 성숙해지기 위한 수련이나 연단으로 받아들이
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체념을 하는 류의 사람들보다는 덜 불평하면서
도 자기의 능력의 한계를 모르고 가진 수단과 방법으로 고난을 극복하
려고 힘쓰는 자들입니다. 세번째로는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서의 고난을 받아 믿음과 기도로
감당하면서 그 결과로 주어질 축복을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서 고난받는 인생에게 주시는 세가지 약속을 기억합시다.
(1)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함게 하시고 위로우하시며 감당케 하실
뿐만 아니라 능히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고후 1:4).
(2) 고난의 당시에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기쁨의 결과를 주며
감사의 여건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고후 1:8).
(3)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이 소망의 보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에 참예(동참)된 자이기에 예수의 소망이 동일
하게 우리에게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고후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나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에도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예수님
은 말씀하셨습니다(요16:33).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자요 하나님의 보호를 받은 존재인 것을 아시고 도리어 환난에
대하여 감사하는 신앙인이 되자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할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
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
할 즈음에 또한 피할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전 10:13) 고 하심을 잊지 맙시다.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감사]의 자세입니다. 절망을 모
르고 모든 일에 감사와 소망으로 전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넘치
는 위로와 은혜와 축복을 부어주실줄 믿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눈을 드시고 귀를 기울
이소서]
연약한 우리 인생들이 고난을 극복하는 확실한 자원은 곧 기도입니
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도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
니라 하시니라](막 9:29)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없다면 하나
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아주 떠나버릴지도 모
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옴은 영적으로 잠들어 깨우시기 위하여
기도의 신호로 환난이나 고통이 온줄로 믿고 모든 문제를 무릎으로 해
결하고자 할 때 더욱 확실한 은혜와 축복이 나타나게 될줄 믿습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로서의 보시기에 아름답고 좋은 대상일 뿐인지
교제하며 영광을 취하시는 대상은 그의 형상으로 지은 사람이기에 그
의 자녀들이 대화의 문을 차단해 버릴때 강권적인 힘으로 기도의 자리
에 무릎을 꿇게 하여 기도를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1) 기도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주시는 시
간입니다(요1:47).
(2) 기도하는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이 오셔서 귀를 기울이
시고 들어 주시는 시간입니다(롬15:30-33).하나님께서 들으시려는 기
도는 세련된 문장이나 시적인 아름다운 문자가 아니라 솔직하고 진실
하고 모든 죄를 남김없이 고백하고 나의 필요를 진지하게 간구하는기
도입니다.
(3) 왜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라도 기도하도록 역사하십니까? 그
시간만은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의 이름만
을 기억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마6:5,6).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
나이다]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라서 징계의 채찍이 없으면 바르게 가는지 그릇
되게 가는지 알수도 없고 분별도 아니됩니다. 따라서 죄를 짓고 불순
종의 길을 가더라도 완고하여 되돌아올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고난
과 역경이 닥쳐왔을때 신속하게 자신의 위치나 역할을 확인하고 도리
어 깨우쳐주시는 하나님이 섭리를 감사하면서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요나]는 풍랑을 만나기 전에는 의도적으로 자기의 뜻대로 처신하고
불순종하면서 잠이 들었으나 풍랑을 만나게되고 제비를 뽑게 되자 곧
깨달아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에 대하여 더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안하
고 [내 죄 때문입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면 풍랑이 멈출 것입니
다]라고 말하고 자기의 죄를 붙들고 책임을 지는 자가 되었을때 더욱
크게 사역자로 쓰임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이 주는 곤나에 대한
해답으로서는
(1) 죄가 원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주께서 우
리 위에 세우신 이방 열왕이 이 땅의 많은 소산을 얻고 저희가 우리의
뭄과 육축을 임으로 관할하오니 우리의 고난이 심하오며](느9:37). 하
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도리어 자기의 고집대로 사는 죄 때문입니다.
(2) 죄를 짓고 아예 하나님 마저도 잊어버리는 일로 고난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잊은지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하솔군장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붙이셨더
니 그들이 치매 백성이 여호와께 부릊지어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기므로 범죄하였나이다. 그러하오나 이
제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를 섬기겠
나이다 하매](삼상 12:9,10).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
이 등지고 돌아서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3) 그러나 죄가 없어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
음에도 고난이 오는 것은 더 크게 베풀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
랑의 뜻이 있습니다(롬 8:17). 더욱 큰 소망을 가지고 감사로 고난의
때를 단축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사역 앞에서, 교회앞에서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반성하고 주
님 앞에 더 가까이 다가서서 의지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더욱 큰 위로
의 영으로 붙드시고 고난을 싸매어 주시면서 새롭게 역사하여 주시게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시고 지키시는 좋으신 하
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를 좇다는 모든 자들을 회개시켜서 더 가까이오
게 하십니다 (사 1:5,6).요셉의 큰 고난이 큰 성공을 가져왔음은 하나
님의 치밀한 계획과 섭리의 결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본문을 통하여 환난 중에 바울이 감사하면서 기뻐하는 것은 주와 함
께 고난을 받으면 영광도 함께 받으리라는 사실을 알고(롬 8:17)그 이
유 때문에 그의 육체의 그릇 속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고 있다고
하였습니다(골 1:24). 십자가의 고난을 채우는 분량이 많을수록 영의
사람이 굳건하고 크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의 사람은 무참하
게 깨지는 것입니다. 육체의 그릇속에 담겨있는 육정과 고집과 혈기와
교만의 찌꺼기들이 떨어져 나가기 위해서는 환난이란 드럼 속에 들어
가 사정없이 굴림받을 때 새로운 영성의 인격자로 피조되어 탄생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 없는 중생이 불가능하고 십자가 없는 구원은 불
가능하고 십자가 없는 구원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나는 생각하는고로 내가 있다] 하였으나 신학자
키에르코르는 [내가 고통하는 고로 내가 있다]는 새로운 명제를 내 걸
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새로운 은혜를 채움
받게 하고 새로운 능력을 힘있게 하기에 도리어 기쁨의 조건이 될지언
정 슬픔과 절망의 조건은 될 수 없습니다.
(1) 욥은 그의 교만이 깨어지기 전까지는 더 혹독한 고통과 환난이
가중적으로 덮쳤왔으나 겸손한 신앙을 회복하고 두손 들게 되며 기도
할 때 새로운 은혜를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욥 33:14-29).
(2) 고난이 없을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고 그릇 행하여
고집대로 살았으나 고난을 당하게 됨으로써 말씀을 지키고 바른 길 가
게 되었다고 시편 119:67절에서 말씀하고 있음은 고난의 유익을 나타
내고 있는 것입니다(시 119:68)
(3) 하나님께서는 강팍한 자의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서도 환난을 주
신다고 하였습니다 (느 9:32). 하나님께서는 높이 들어 쓰시기 전에
먼저 고난이란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 낮추시고 겸손하게 만드시는 것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의 40년동안 말로 할 수 없는 고생을 시
키면서 낮추신 것은 마침내 가나안이란 축복의 땅을 주시려는 뜻과 섭
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새롭게 하고 낮추게 하며 육정의 찌꺼기
를 다 제하여 버리고 순수하고 순종하여 주의 뜻을 받아 지키게 하시
는 것입니다. 환난을 감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그에게 참된 영광의
승리가 있을 것을 믿습니다. 아멘.
바울의 연약했던 것들을 통해 얻는 교훈
성경 본문: 고후 10:8-11
1. 바울의 연약했던 것들
1) 바울의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
고 말이 시원치 않았음 (고후 10:10) .
2) 바울은 말에 졸하였음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고후 11:6).
3) 바울의 육체에는 사단의 가시가 항상 박혀 있었음 (고후 12:7).
2. 바울에게 주신 육체의 가시는?
1) 하나님께서 바울로 교만치 못하도록 주신 은혜의 가시임 (고후
12:7).
2) 바울이 주를 더욱 의지하여 항상 큰 능력 가운데 거하게 하신것
임 (고후 12:9).
3) 바울의 달음질하는 방향이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신 것임 (고
후 9:26-27).
3. 연약한 자신을 바울이 변호한 모습
1) 나의 편지만 중하고 힘이 있을 뿐 아니라 내 육신과 말도 그러하
다 (고후 10:10-11).
2)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졸하지 않다 (고후 11:6).
3) 나는 너희를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하다 (고후
10:1).
4. 약점을 갖고 있던 바울이 자랑했던 것들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갈 6:14).
2) 자신의 여러 약한 것들 (고후 12:9).
3)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 (빌3:3).
<미련한 자를 통하여 나타난 주의 능력>
인도에 선교사로 갔던 윌리엄 캐리는 제화공이었다. 그가 그의 구두
방에서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외국어를 공부하며 쿡 선장의 여행기를
연구한다고 하여 그를 바보요 비현실적인 망상가라고 불렀다. 그가 목
사가 된 후에도 바보라고 했다. 그가 목사 회의에서 "오늘날 모든 백
성에게 가서 복음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 위대한 본부가 아니냐?" 고
제안하자, 연로한 목사는 그에게 "이 젊은이, 앉게, 하나님께서 이방
인을 회개시키는 것을 기뻐하실진대 자네나 나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
지 하실걸세"라고 나무랐다. 그러나 그는 신령한 진리를 가지고 먼 인
도로 가서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4대 주요 말로 성경 전체
를 번역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을 아시아 32개국 말
로 번역하도록 이끌었고 126개 기독교 학교와 한개의 기독교 대학을
설립하도록 도왔다. 그는 그의 임종의 병상에서 속삭이기를 "참으로
하나님은 엄청난 일을 하셨구나"라고 하고는 눈을 감았다. 한 사람의
제화공이 선교사의 꿈을 가지고 노력한다고 모두 그를 바로 취급하였
으나 인도에 가서 성경을 인도의 4대 언어로 번역하는 위대한 일을 하
였으니 그를 통하여 위대한 능력이 나타났던 것이다.
<황금예화설교>
< 겸손/은혜를 자랑치 말라 >
은혜를 자만함은 기묘한 일이다. 어떤 이는 "나는 깊은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는다. 약한 신앙자는 타락할지도 모르지만 나
에게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나는 타는
듯한 사랑을 갖고 있으므로 설 수가 있다. 곁길에 빠질 그런 위험은
없다"라고 한다. 은혜를 자랑하는 자는 실은 그 자랑하는 은혜를 거의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은혜가 자기를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
는 물줄기가 샘에서 끈임없이 솟아지 않으면 하류는 곧 고갈함을 비록
크게 비쳐도 후에는 연기가 나고 곧 악취를 발하게 된다.
자기의 은혜를 자랑치 않고 차라리 그리스도와 그 힘에 자랑과 신뢰
를 두라, 그리하면 말미암아서만 당신은 타락을 면할 수가 있다 (고전
10:12).
무엇이 나를 힘있게 하는가?
성경 본문: 고후 12:1-10
이땅에는 과연 평화가 올것인가? 수시로 변해가는 정세속에 설레임과 걱정
스러움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한때는 김일성을 죽지도 않는다고 야단을 했
는데 양국 정상회담을 앞두고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에 어찌된 영문인지 모
어리둥절 하게 합니다. 앞으로 김일성의 죽음이 한반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예측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바램은 한반도의 평화
에 중요한 시점이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북한의 생리에 따라 체제 강화
를 위한 대화중단이라는 극한적 상황으로 발전해 갈 공산이 크다고 믿지만
그러한 도발적 발상은 그들의 생명이 짧아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것입
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기도하는 백성이 있고 또 말세를
베풀어 주시리라 믿는 것입니다. 그러한 미래를 위해 힘이 있는 나라가 되
어야 합니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사건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큰 고기는 작
은 고기를 잡아 먹고 사는 것이 자연의 법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
다면 우리의 관심은 우리에게 필요한 힘은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 것인가의
문제일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18:1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고 했
습니다.사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상상할 수 없는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은 나의 힘이라는 믿음에
서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갈바를 잊지 못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힘이 되어 주심으로 그가 밟은 땅이 변하여 축복의 땅이 되게 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살인자요 도망자였던 모세에게 힘이 되어주신 하나님께
서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는 큰 일을 완수케 하셨습니다. 여호수아를 강
하고 담대하게 해 주심으로 지도자를 잃고 방황하던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주인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950:1의 절대적 불리한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을 믿고 기도했던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갈멜산에 내리신 불의 역사는 하나님을 거역하
고 불신했던 막강한 세력을 쳐 없애는 능력을 경험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
힘이 되어주신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
은 오늘 바울 사도의 신앙저 고백을 통해 보여주신 자신이 강하게 되는 길
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말씀은 실제 우리에게 주어질 힘있게 되는 길이 된
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경험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세째 하늘에 가 보았
습니다. 그때 자신은 몸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모르는 상태였다고
말합니다. 그가 본 낙원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
랑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부끄러운 것이 되지 않을 것이
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시는 참말이기 때문이라고 했
습니다. 다만 그 말을 듣고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렵다고 합니다. 자신은 약
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놀라운 능력의 사람이
였습니다. 병든자를 고치기도 했고 그가 지나가는 그림자에 위해 죽어야 할
사람이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자랑거리가 많습니까? 그런데 그에게
는 가시가 그 몸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안질이라고도 합니다만 하여튼
자기 몸에 병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일을 위해 세번이나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응답된 것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음성이
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바울은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
물러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된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
전하여 진다는 말씀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표현은 텔레이파이
라는 말인데 텔리오 끝낸다 완성하다의 현재 수동형으로 쓰여지는 말입니
다.
다시 말해서 내 능력 즉 해 듀나미스는 그리스도의 힘이야 말로 지금 완성
시키는 그리스도의 힘이야말로 지금 완성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
다. 인간은 약한 존재입니다.불완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은 아무
리 우리가 약하고 불완전하다해도 그의 능력에 의해 온전해 지는 축복을 받
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
니다.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는말은 바울의 삶속에 항상 떠나지 않고있
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서 그것만이 자신의 약함이 도리어 힘있는 자의 삶
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기뻐합니
다. 무엇을 기뻐했습니까? 약한 것을 기뻐했습니다. 능욕받은 것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궁핍한 것을 기뻐했습니다. 핍박받는 것도 기뻐했고 곤란한
것 까지 기뻐했다고 했스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신앙생활로
부터 온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주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나 궁핍하거나 곤란
한 일이 있다해도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주님의 능력이 내게 머물러 있
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능력은 곧 나를 그 어떤 현실 앞
에서도 힘있게 해주고 온전하게 해 주는 힘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
은 이 사실을 깨닫고 난 다음 그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주님의 능력이야말로
나이 힘이 되어 주신다는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힘이 없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
니다. 경제적인 힘,정치적인 힘,지식의 힘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빈
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보다 값진 힘은 주님의 능력이 내게 머물러 있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 주님의 능력이 머물러 힘
이 되어 주실까요?바울은 내가 가장 약할때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그리스
도를 위하여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받고 궁핍을 당할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난을 받는다해도 그리스도와 함께 사람이되
기를 원한다면 그의 능력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머물러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인생의 최고의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그를 위해 살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은 기꺼이 힘이 되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가치있
게 살고 또 주의 능력으로 온전케 살고자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그것 까지도
성경 본문: 고후 12:5-10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누구에게 묻든지 [그것은 사랑입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사랑이 될 수 있도록 승화시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과연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천차만별의 대답이 나오리라 생각
됩니다.
그렇다면 진정 사랑을 사랑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
은 다름이 아니라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입니다.
아무리 많은 자선과 긍휼을 베푼다 해도 그 자선과 긍휼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면 결단코 그것을 사랑의 발로라
고 말하지 못합니다. 오직 그것은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높이기 위한 자
신을 과시하기 위한 자기만족의 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자신을 있게해준 모든 이들에 대한 감사가 넘쳐 진정 주위의
자신보다 못된 형편에 있는 이들과 자신의 것을 함께 나누는 이것이 바로
참 사랑이 아닌가 합니다.
흔히 내리사랑이라는 말들을 합니다.
때문에 세상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이라
고들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부모님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일까요? 그것
은 다름아니라 무엇인가를 받기로 전제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
니, 한발 더 나아가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베푸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도사로서 시무하던 서울의 어떤교회에서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
을 던진적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하다고 생
각되는 순간을 한가지만 말해보자] 많은 대답중에 저는 이 대답이 아직까
지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주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학생이었는데
[예! 그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똑하고 떨어지는 순간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머니 뱃속에서 떨어지는
순간 부잣집으로 떨어졌으면 호강되게 잘 살 수 있었을 것을 가난한집으로
떨어져서 지금 이렇게 고생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자조섞인 대답이었습니
다.
만약 그 부모님이 그의 대답을 들었더라면 얼마나 가슴아팠겠습니까.
저는 그에게 참된 행복은 부잣집에서 태어났느냐, 가난한집에서 태어났느
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얼마나 만족하고, 감사
하며 살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어떤 환경을 가지고 있
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환경속에서 어떤 마음자세로 살아가고 있
는가가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여러종류의 사람을들 경험해가며 살아갑니다. 어떤이들
은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에 만족하거나 감사하지 못하고 사는가하면,
어떤이들은 아주 적은 것만을 누리면서도 그 속에서 감사하고, 오히려 베
푸는 사람들을 찾아보게 됩니다.
과연 어떤 삶이 진정 행복한 삶입니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잠언 17장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작은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큰 일에 감사 할 수 있는 것이
요,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
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우리는 어려움과 고통까지
도 하나님께 감사로 승화시키는 사도 바울의 믿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의 교우들에게 권면한대로 자신도 항상 감
사하는 삶을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감사는 자신의 처지를 뛰어넘
은 감사였습니다.
사실 알고보면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드리는 것은 매우 당
연 한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는 대단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때
문에 유대인들중 몇몇에게만 주어지는 로마제국의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이
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당대 최고의 랍비로 인정받던 랍비 가말리엘의 문
하에서 공부를한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바리새파에
속하여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신문화를 주도한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더우기 이러한 조건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다시한번 체험하고 지금까지의 잘못된 길을 벗어나서 참된 회개와 구원의
길오 접어들었으며, 많은 성도들에게 사도의 칭호를 받을 수 있었으며, 오
늘에 이르기까지도 기독교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인정받고 신약성경에도
전체 27권중 자그마치 열세권에 이르는 책을 남기는 모든이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그런 사람으로서 어찌보면 감사도 한없는 감사를 드려야만 한사람
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당연할것 같아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내면을 살펴보면 그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많은 어려
움을 가지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많은 성도들에게는 사도로서 추앙을 받고있었으나 당시
교계의 지도자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로 부터는 사도로 인정받지 못한 그
런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바울이 전도하러 가는 곳마다 항상 바울의 사도
권에관한 분쟁이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즉 바울을 따라다니며 바울은 사도가 아니며 스스로 사도라고 칭하는
것은 교만함에서 나온 잘못이라고 헐뜯고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더우
기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신들보다 사도바울의 명성이 더욱 올라감에 따라
바울이 사도라고 스스로 칭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도들이 점
점 많아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사도바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봅시다. 나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땅끝까지 전파하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죽을 고생을 하는데 가는곳마다 따라다니며, 그 일
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사람들중의 상당수가 바로 그
일을 도와야 할 한편이라고 한다면 과연 나의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고통을 사도 바울은 항상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땅끝까지 전파하기 위해 받는 고통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고백하는대로 예수의 이름을
전파하다가 그저 숨만 끊어지지 않을 많큼 때리는 사십에 한대 감한 매를
여러차례 맞아야 했으며, 수없는 재판과 투옥생활의 연속이었으며, 진정
예수를 전하다가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아까와 하지 않는 그런 각
오를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야만 하는 힘겨움이 항상 그의 어깨를 짓눌렀습
니다.
두번째로 바울에게는 자신을 위한 가장 간절한 기도제목이 하나있었습
니다. 바울은 그 기도제목을 위해 세번이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세번
의 기도라는 것은 우리가 새벽기도회 삼일간 나와서 매일처럼 동일한 기도
제목으로 기도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치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두고
겟세마네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
도의 간절한 간구와 같이 자신의 전생애를 거는 그러한 기도였습니다. 그
러나 하나님께서는 [네 은혜가 이미 네게 족하다]고 간단히 일축해 버리고
마셨습니다.
실로 이 문제는 바울에게있어서 전도자의 역할 수행을 가로막는 커다
란 걸림돌이었습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던 이 육체의 가시는 악성 간질이었던 것으로 대부분
의 학자들이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
하다가 단위에서도 발작을 일으키곤 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갈라디아
서 4장 13절로 14절의 말씀을 보면,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
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라
고 갈다디아교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있는 모습을 찾아보게 됩니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다가 단위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자신을
바라보며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마다 일언
지하에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자신을 따라다니며 일을 훼방하는 자들 까지도, 또한 자
신의 목숨을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드려야하는 온갖 고생도,또한 하나님을
위해 그 고생을 하는데도 자신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응답에
까지도 감사로 영광돌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바라봅시다.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하나님께 감사로
영광돌리고 있습니까?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지난 한해동안 우리의 삶을 돌아보건대
어느하나 하나님의 인도함이 없었던 일이 있었습니까? 평소 우리가 느끼
지 못했을 뿐이지 한 순간, 한 순간 하나님의 놀하운 은총과 보호하심이
우리를 떠난적이 없음을 깨닫고 깜짝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받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고 감사하는일에는 너무도 인색했음을
솔직히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그것이 감사해야 할 것인지 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실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주실 가장 큰 은혜와
사랑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죄악중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영혼을
위해 당신의 외 아들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새 생명과 새 삶
을 받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세상 어떤 것이 과연 이 새 생명과 비길
만한 가치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즐겨읽는 수정교회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
사님의 글중에 [더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죽을 수 밖에 멋는 아무 쓸모없는 나를 택하셔서 새
삶을 허락하시고 영원한 생명과 참사랑을 누리게 하여주신 그것보다 더 큰
은혜를 과연 어디서 찾겠습니까?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우
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일 수록 더욱 흔하게 만드셔서 우리가 쓰기에 모자
라지 않도록 풍족하게, 쓰고 넘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또 감사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
다.
물이 그렇습니다. 공기가 그렇 습니다.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땅이 또한 그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물을 주신 하나님께, 또 공
기를 주신 하나님께, 불을 주신 하나님께, 그리고 이 땅을 창조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왔음을 솔직히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
다.
우리의 주위를 돌아봅시다. 크고 작은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또한 몸을 상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이렇게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바로 이순간 우리가 숨을 쉬고, 하나님께
나아와 머리숙여 경배드리고 있다는 바로 이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우리의 감사제목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혹시 김귀동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분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이
름을 모른다면 충청북도 음성에 있는 꽃동네에 대해서는 많이 아실 것입니
다. 오늘의 꽃동네를 있게 만든 김귀동 노인은 얼마전 하나님 품에 안겼
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남기 유명한 말은 아직도 꽃동네를 들어가는 가장
앞쪽에 커다란 돌에 새겨져 그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습니
다. [구걸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총입니
다!] 자신이 구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 감
사하며 정신박약 노인으로서 자신보다도 더욱 어려운, 움직일 수 조차도
없는 노인들을 모아 구걸하여 모은 밥으로 먹여 살리던 그 분의 감사야 말
로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감사에 인색했는가를 돌아보게 합니다.
뇌성마비의 몸으로, 남이 알아보기도 힘들정도로 어지럽게 쓰는 한자
의 글씨를 위해 몇분을 허비해야 하는 그 몸으로 참 감사의 찬양시를 하나
님께드리는 송명희 시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
강있지 않으나,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남에게 없는 것을 주셨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받지 못한 사랑 받았
으니..... 참 병신이 누구입니까? 남에게 병신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저입
니까?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남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찾지못하고,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그들이 바로 참 병신입니다.]
맞습니다. 자신의 부족함 까지도 감사의 제목으로 삼는 그 믿음 속에
하나님의 참사랑이 살아 숨쉴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세어 봅시다. 아마도 하
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 삼는다 하여도 그 은혜와 사랑을 다 적
지 못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 그것 까지도 하나님께 감사로 영광돌
리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벼농사가 우리 농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11월 셋째주
가 추수감사주일이라는 것은 일견 잘못된 것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혹시
미국이 그렇게 하니까 무화 사대주의 혹은 종교사대주의적인 발상이 그렇
게 만들었나 생각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청교도들의 그 진실된 감사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영국 성공회로 부터 종교의 자유를 찾아 화란으로, 화란에서 포르투칼
로, 포르투칼에서 미지의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미지의 땅에 도착
하자 마자 교회부터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디언, 질병, 그리고 식
량난과 싸우는 삼중고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인디언의 습격이 있을 때 마
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그 어려운 와중에서 처음으로 얻은 옥수수열
매, 그것도 다음해 씨앗용으로 남겨 놓고나면 먹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그
첫소산을 하나님앞에 참 감사와 정성으로 바친 날이 바로 11월 셋째주일이
었습니다.
때문에 어려운 가운데 그 어려움까지도 감사했던 청교도들의 신앙을
계승하기 위해 지금까지도 우리의 실정과는 다소 다른 추수감사절을 지키
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추수감사절의 의미는 우리가 지금 이시간 처해 있는 상황
그 자체를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금 나의 모습 이대로 감사를 드립시다. 내게 있는 어렴움
그것 까지도, 내게임한 고통 그것까지도 모두 하나님앞에 감사드리는 믿음
의 성도들이 됩시다.
오늘 이시간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종을 이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나
약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연륜도 짧고 경험도 없는 목사입니다. 제주
노회 담임목사로서는 가장 늦게 안수받았고 또한 나이도 가장 적은 사람입
니다. 때문에 과연 제가 이 무거운 중책을 이끌어 나아갈 수 있을까? 하
는 두려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바로 그 부족함 까지도
이시간 감사를 드립니다.
그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더욱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을
것이요, 나이도 어리기에 더욱 열심으로 뛸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약한 자를 통하여 더욱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고 영광받으시기 때문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범사에 감사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 감
사하는 자를 통해,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그것 까지도 감사하는 자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려 지금도 모든 준비를 해 놓으시고 기다리고 계십니
다.
목회자의 어려움(II)
성경 본문: 고후 12:7-10
<서론>
우리의 삶에는 때로 고난이 닥친다. 그러나 오히려 고난을 이겼을 때 새
로운 삶의 활력소가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본론>
1. 고난은 누구에게 오는가?
(1)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누구에게나 온다.
악인과 마찬가지로 선인도 고통과 어려움과 패배를 맛볼 수 있다.
이 둘의 차이는 그들이 어떻게 고난을 받아들이는가이다. 고통의 태양은
때로 밀초를 녹일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점토를 딱딱하게 만들 수도
있다.
(2) 계시를 받은 것이 큰 사람에게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면 교만을 감추어 주시고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신다.
(3) 그리스도의 능력이 계속 머물게 하려는 사람에게 온다.
장막을 펴 확고히 머무는 상태로 마치 영광의 구름이 이스라엘 장막
위에 덮였듯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장막쳐럼 계속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2. 기독교인은 고난이 닥쳐올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1) 고난의 제거를 위
해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이 괴로운 가시의 제거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되풀이하여 간절히 기도했다. 응답을 받을 때까지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고난이 기도를 가르치기 위하여 주어진 것처럼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
기도하도록 가르친다.
(2) 고난이 지니고 있는 은혜를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약한 것들은" 그대로 놔두면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돕는 자
가 된다. 왜냐하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
리고 이 은혜는 고난 받는 자에게 계속적으로 함께 거한다.
(3) 고난을 오히려 위대하게 되는 징검다리로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권능은 오직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서만 그 완전한 힘을 발
휘한다.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약함을 시인하면 할수록 우리를 강건케 하시
는 그리스도의 능력(엡3:16, 빌4:13)은 더 명백해 진다.
3. 그러면 고난은 우리에게 어떠한 유익을 주는가?
(1) 겸손하게 해 준다.
(2) 기도하게 해 준다.
(3) 은총을 가져온다.
(4) 우리를 강함으로 축복해 주신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에게 넘치도록 주어지게하여 그의
영적 성품에 관한한 고통을 기쁨으로 변화시키게 하려 함이다.
몸은 계속 아픔을 느끼고 굴욕감이 나날이 증가 되어가나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짊어지신 그리스도로 충만 되어진다. 이리하
여 우리는 육체적 비참함을 이길 수 있을 뿐아니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
이 지극히 크므로" 솟아날수도 있었던 모든 교만과 허영을 이기게 되는 것
이다.
성령님과의 교통
성경 본문: 고후 13:13
지난 주간 동안 제가 성회를 인도한 노르웨이 교회는 깊은 영적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노르웨이의 국교는 루터란 교인데 그들의 교회는 아름답고 장
엄하며 종교의식은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출
석성도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신앙의 열정은 얼음장같이 차갑게 식어 있
었습니다.
노르웨이 목사님들은 이구동성으로 제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조 목사님
보시기에 노르웨이 교회의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어떻게 해야 노르웨이
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노르웨이 교회에
는 성령의 역사가 사라졌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니 기도가 없고,
기도가 없으니 회개와 변화가 없습니다. 노르웨이 교회가 살아나기 위해서
는 기도의 불이 붙어야 하고, 기도의 불이 붙자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만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동안 예수님의 12제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
아 넘쳐나오는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서 능력있게 기도할 수 있었고 또한 다
대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나가서 천국복음을 증거하고 귀
신을 쫓아내고,병든자를 고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갈보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 지내심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못하고, 성령의 감화를 받지 못한 제자들은 형편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전도도 하지 못하고 귀신도 쫓아내지 못했으며 한
사람의 병자도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모두 다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에 전전긍긍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후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전
혀 기도에 힘쓰던 중 열흘째 되는 오순절날에 이르자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날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
이 각 사람 머리에 임하였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
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히기 시작한 연후에 놀라운 권세와 능력
이 임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은 용감하고 담대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교
회를 세우며 천하에 복음을 증거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의 신앙이 살아날 수 없고 우리
교회가 불붙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우리 개인의 신앙이나
교회의 성장은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성
령이 임재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께서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오순절날 이 땅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보좌에 계시고 아들 에수님은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지
만 성령은 그때의 오순절 이후 지금까지 2천년동안 교회에 머물러 계시고
또한 이 세상에 임하셔서 하나님의 사역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도와 교회가 성령님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
는 것은 성령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내 백성이 지시깅 없어
망한다"고 한 구약의 옛 선지자의 말처럼 오늘날 사람들이 성령에 관한 지
식이 없기 때문에 성령과의 교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스칸디나비아 반도 교회들에게서 절감한 것은 그들이 성령신학은 갖
고 있으나 성령과의 교통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있음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러므로 개
인의 신앙도 잠들고 교회는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상태에 있는 것이었습
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사긴에 성령님에 관해 자세히 알아보고 성령과의
깊은 교통을 이루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 성령님의 인격성
바람같은 혹은 불같은 성령이라고 성령에 대해 상징적인 표현을 하니까 사
람들이 성령께서 우리와 같이 인격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
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분명한 인격체이십니다. 인격에는 지성과 감성,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인격의 요소인 지성을 갖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
보면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생각을 다 통달하시는 성령은 탁월하고도 무한
한 지성을 갖고 계십니다.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성을 가진 지적인 존
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성령은 희노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3장 7
절로 11절에"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말
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
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라고 기록되어있습
니다.
이러므로 성령은 감정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령께서는 분
명히 감정을 가지셨기 때문에 무시하면 진노하고 슬퍼하시며 소멸되는 것입
니다.
또한 성령은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 보면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당신의 뜻대로 은사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사도행전 13장 2절에도 보면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하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성령께서 당신의 뜻에 따라 일을
시키시는 결단의 의지를 가지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령이 인격자인 것을 알면 인격자로 대접해야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시
니 이 성령니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감사하고 모셔들이지 아니하고 무시하면
성령께서 슬퍼하시고 소멸당하시고 진노하시며 떠나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
니다.
오늘날 서구 교회의 결정적인 잘못은 성령을 인정도 환영도 아니하고 모셔
들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와계셔도 인격적인 대우를 하지 않
고 무시하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없고 인본주의적인 교회가 되어 제도와
조직만 살아 있는 냉랭한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오순절날에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 땅에 강림해서 우리
가운데 일하고 계신 성령님은 우리처럼 육신은 가지고 있지 않으나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임으로 늘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는
삶을 살아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2. 성령님과의 교통
성령님과의 교통은 여러 면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먼저는 지적인 교제가
이루어져 대화가 가능해야 합니다. 지적 수준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가
되어지지 않습니다. 성령과 우리와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감동으
로 쓰여진 성경을 통해야 가능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과의 지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다음에는 성령과의 정적인 교제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는 늘 성령께
감사하고 성령을 기뻐하고 사랑하며 하나님과 예수님을 끊임없이 찬미함으
로 이루어집니다.성령이 곁에 계셔도 기뻐하지도, 사랑하지도 찬미하지도
않으며 무시해 버리면 정적으로 성령과 교통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
리는 늘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며 감사하여 따뜻한 교통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의지적인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여야지
내 마음대로 행하고 난 다음,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는다고 원망해서는 안되
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우리 곁에 와 계심으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 뜻을 찾고 나를 이끌어 주시기를 간구할 때 성령
과의 의지적인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총체적으로 성령님을 항상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게
성령께 감사하며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말씀의 젖으로 먹이시고 장성케 하여 천당까지 데려가는 책임을지
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함 없이는 교회가, 성도가 살아남
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성령님과의 동업
성령은 공연히 이곳에 와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여러분과 함께 삶
을 살아가기 위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를 빌려서
말씀을 증거하시고 난다음에 베드로의 동업자가 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
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고 하시고는 친히 베드로와 함께
그물을 잡아 당기고 가득히 잡힌 고기를 온 손에서 비린내가 나도록 만지시
며 같이 일을 해주신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인 구주일 뿐 아니라 우리 삶의 동업자이기도 하십
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은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어갈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인생 동업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초대교회는 반드시 성령님과 동업을 했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
에서 이방인에게 율법을 지키게 해야 될 것이냐 아닐 것이라냐라는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을 통해서 우리가 새 언약에 들어왔음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옛 언약의 율법
이나 의식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그 결론을 편
지로 써서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이방인에게 보냈습니다.
그때 그 편지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행 15:28). 그들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그들만 의논한 것이 아니라 성령
이 그들 가운데 함께 계서서 이러한 진리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한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기도회에서도 보면 사도행전 13장1절로 2절에 "안디옥 교회
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
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모든 회의는 성령과 결정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의 교회는 성령께서 책임을 지고 이끌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가 텅텅 비고 많은 성직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실패하는 이유는
그들이 성령의 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회피하며 하는
사역은 육의 일에 불과하고 아무런 결과도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6절로 10절은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
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
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을 인정함이러라."고 말씀
합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함이 없이 인간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모든
일은 종국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아무 의무도 없고 인간으로서는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기다리고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지식과 총명을 주시고 깨달음을 주셔서 여러분의 갈길을
환하게 보이도록 인도해주십니다.
꿈을 환상을 보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성령을 기다리면 성령은 여러분에게
깨달음을 주셔서 여러분을 이끄시고 여러분의 마음 속에 소원을 일으켜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은 여러분을 이끌어가고
도와주기 위해서 와계시는 인생 동업자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시기를 주의이
름으로 축원합니다.
4. 성령님의 사역
성령이 이 지상에서 종국적으로 하시는 사역은 예수님을 구주로 나타내시
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성령의 역사가 그리스도 복음의 중심이 되지 아니하
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성령과 더불어
역사한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지 아니하고 인간이나 어떤 단체
를 자랑한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역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하시는 일은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임한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성령은 은사를 주셔서 교회를 세우려고 하
십니다. 성령은 지식의 말씀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혹은 방언, 방언 통역,예언의 은사,믿음,기적 병고치는 은사들을 주셔서 그
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려 하십니다.
성령은 또한 사역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십니다.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유하는 일,구제하는 일,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을 하게 하시고
그를 통해 교회를 세우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은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생활 속에 끊임없이 역사하사 우
리의 죄를 지적해서 회개시켜 주시고 우리 속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하여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일은 선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에서, 사마리아
에서,땅끝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떠나버리시면 선교 사역도 떠나버립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투어 가면서 온 세게에 선교사를
보내고 선교 사역에 힘을 쓰는 것은 한국 교회에 성령이 임하여 계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이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이끄시는대로 선교 사역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세계 선교 사역을 통하여 확실하게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아름다운 교회를 짓고 신학을 발전시키고 많은 사회 참여와
구제사업을 한다고 해도 성령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것들은 구제사업을 한다
고 해도 성령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것들은 모두 육의 일이요, 종국에는 예
수님 없는 하나의 인간 자랑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성령없는 사람은 비없는 구름이요, 물없는 우물이요, 불없는 화
로이며, 열매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형식은 있으나 내용은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령
은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서 오늘 이 자리에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이러므로
성령을 인격적으로 반갑게 모셔들이고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의지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성령의 손에 이끌리어서 인생을 살고 성령의 손에 이끌
이어 천국까지 올라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 생활의 채점
성경 본문: 고후 13:5-13
연말이 되면 한해를 돌이켜 보며 수지결산을 하기 마련입니다. 1993
년을 보내며 1년간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각자 채점을 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가?
5절 하반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안에 계신줄을 너희가 스
스로 알지 못하느냐?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 했습니
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과 그 분이 구주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계시
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아났고
지금도 성령으로 나와 함께 내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최
상의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내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
입니다. 부모와 함께 집안에 있는 아이는 겁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외출한 집에 혼자 남아 있을 때는 두렵습니다. 마찬가지입니
다. 주님은 온 우주 어느곳이나 안계신 곳이 없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안에 있을 때에만 두려움이 없
는 것입니다.
2. 내가 바로 살고 있는가?
7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
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
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7절은 바로 사는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를 밝
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산다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
다. 종이위에 붓으로 선을 그어 보십시오. 아무렇게나 선을 긋는 것은
쉽지만 그러나 바르게 곧게 선을 긋는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군사가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
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조건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구원받
은 사람에게는 거기에 합당한 생활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에 따르는 행함인 것입니다.
3. 진리를 위해 살았는가?
8절에 보면 "우리가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
를 위할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8절은 두가지를 교훈합니다. 하나는
진리를 거스리면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한다는 것은 진리를
위해 산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산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의 삶이야 말로 점수 높
은 생활인 것입니다.
4. 평안한가?
11절을 보면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으을
같이하며 평안할 찌어다. 또 사랑과 평안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
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결과를 설명하고 있는것입니다. 한마디로 믿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요 위로가 있고 평안한 것입니다. 믿지 못하면 불안
하고 안심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난후에 마음이 평안해 졌
다면 그것은 점수가 올라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믿기 전이나 믿고
난 지금이나 매 한가지라면 아직도 내 믿음이 합격점 이하에 맴돌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1년의 마지막에 와 있습
니다. 각자 스스로의 신앙생활을 채점해 보십시오. 몇점이나 될것 같
습니까? "너희가 믿음이 있는가 자신을 확증하라"
현세와 내세
성경 본문: 고후 4:16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육신은 보이는 것이요, 영혼은 보이지 않는 것이며
현재와 고난은 보이는 것이요, 미래의 영광은 보이지 않는 것이며 현세
는 보이는 것이나, 내세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에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은 가견의 육신과, 현재의 고난과, 현세의불
가견의 영혼과 미래의 영광과 내세와 대조하면서 오묘한 진리를 갈파하
였습니다.
1. 보이는 겉사람과 보이지 않는 속사람
보이는 겉사람 (육체)는 후패합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보이는
겉사람은 질병과 노쇠의 죽음으로 인한 후패에 이르게 됩니다.
해가 바뀌고 또 바뀌는 동안 인간의 연령이 증거하여 소년이 장부되고
백발되어 늙고 후패하여 감을 피치 못합니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하며 힘이 세다 할지라도 소용없습니다.
결국은 겉사람의 후패와 생명의 종점에로의 도달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인은 겉사람의 후패를 탄식하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외칩니다. 보이는 겉사람은 후패하지만 보이지 않는 속사람은 날로 새로
워집니다. 하나님께 접근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
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러한 영의 극치를 무엇으로 표현하겠습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받는 불완전한
인간의 보이는 육체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겉사람은 "무명한자, 죽은자, 징계를 받은자, 근심하는자, 가난한자 같
으나" 속사람은 "유명한 자,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고 항상 기뻐하고 부
요하고 모든 것을 가진자라" (고후 6:9-10) 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사람과 정반대의 법칙으로 역사하십니다.
2. 보이는 환난과 보이지 않는 영광
성도가 세상에서 보이는 환난을 받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바울이
말씀하시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것
이라"하셨고 또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받
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하셨습니다.
애굽왕 바로에게 야곱이 가로되 "내 나그네 길의 세상이 백삼십년이니
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이 미치니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 47:9) 하였습니다.
이는 야곱의 연령이 백삼십이나 증가하였을 뿐 아니라 그동안에 환난과
시험이 더욱 심하여 노쇠와 부패를 신속히 하였다는 탄식의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주 모세는 만년시에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건강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하거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90:10)
모세는 120년을 살면서 연령중가와 함게 환난 시험의 인간고를 샅샅이
겪어 신속히 노쇠 후패한 것을 탄식한 것입니다.
본문에 바울이 "겉사람은 후패하나"라고 말한것도 환난 시험의 인간고
때문에 자기의 육체적 생명이 신속히 노쇠후 패한 것을 탄식한 것입니
다. 바울이 비참한 고난의 기록은 고후 11:23-33절에 있습니다.
바울은 "현재에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
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 라고 하였습니다.
환난을 당할때에 괴롭고 슬프다 할지라도 베드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
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 (벧전4:12-13)
보이는 현재의 환난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영광을 더하는 것이니 모든
환난과 시험을 감수하여 영원한 영광에 참예합시다.
3. 보이는 현세와 보이지 않는 내세
보이는 현세는 시간적으로 잠깐이고, 공간적으로 유한하며 보이지
않는 내세는 시간적으로 영원하며 공간적으로 무한하며 보여지는 것입
니다. 우리는 보이는 현세에 애착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내세에 애착합
시다.
환난은 우리 눈에 보이는 곳에 해를 끼칠 수 있으나 보이지 않는 하늘
나라에는 해를 끼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믿을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히
브리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
거라"하였습니다. (히11:1)
모세는 120년을 살면서 연령증가와 함께 환난 시험의 인간고를 샅샅이
겪어 신속히 노쇠 후패한 것을 탄식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모습이니 (롬1:20) 그것이 얼마나
존괴하며 참되며 복된 것입니까?
인생은 보이는 이 세상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찾
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기자는 역대 성도들의 신앙을 예찬할 때에 "이 사람
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
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성을 예비하셨
나니라" (히11:13-16)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올
것을 찾나니" (히13:14) 라 하였고, 바울도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
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있
어 탄식하며 하늘로 부터 오는 울의 처소도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
니" (구호5:1-2) 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가로되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하
지 아니함이로다" (고후 5:7). 하셨습니다.
솔로몬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나니라"
(전도서 3:11)고 하였습니다.
부귀영화, 권세를 얻었다 하나 저주받은 이 세상에는 진정한 만족이없
는 것입니다. 이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세상에서 천만년 살것같이 대단
한 애착심을 가지고 덤빕니다. 인생아!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
는 안개니라" (약4:14).
보이지 않는 내세는 광명하고 즐겁습니다.
현세는 불의가 충만하지 내세는의가 충만합니다.
현세는 질병과 죽는 일이 많은 내세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과 곡하
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합니다. (계시록21:4).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 주님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셔
서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십니다.
할렐루야!
보이는 겉사람은 후패합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며 보이
는 현재의 잠시 받는 환난은 경한 것이요, 보이지 않는 장래의 영광은
지극히 크고, 중한 것이요, 보이는 현세는 잠깐이요, 유한하며 보이지
않는 내세는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성도는 보이지 않는 것을 사모하나니 "눈에는 아무 증거 안뵐지라도믿
음만 으지하고 걸어 갈지라.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굳게서" (합동 찬송가 298장)
보이는 것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희생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
혼을 위하여 보이는 육체를 쳐서 복종케 하며, 보이지 않는 미래의 영
광 위하여 보이는 현세의 잠시 받은 현세를 초월하여 우리 주님 재림하
실 그 아침까지 일로 매진하여 영원무궁토록 천국 영광을 누릴 것입니
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성경 본문: 고후 5:17-21
인생은 만남으로 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전체를
'만남의 연속'이라는 어휘로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 인생의 다섯 만남
처음 우리는 부모와의 만남을 통해서 인생을 출발합니다. 부모를 잘 만나
면 그 인생이 평탄하여 살아갈 수 있고, 부모를 잘못 만나면 인생을 험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풍요로움 속에서 태
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어날 때부터 컴컴한 지하실에서 태어나는 사
람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대해다 보면 어떠한 아이들은 참 교양이 있고,말할
때 착한 말을 하고 행동이 바릅니다. 이런 아이들의 부모는 교양있는 부모
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행동이 거칠고 야만적이며 말솜씨도 나쁘면 그 부모가 그러하다
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의 인격형성의 출발은 부
모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중요한 만남이 스승과의 만남입니다. 선생과의 만남으로 말미암
아 우리는 지식을 믿게 됩니다. 또한 인격적인 교양을 섭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세번째 만남은 부부의 만남인 것입니다. 부부의 만남을
통해서 참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가정이 무엇인지를 알게되며 부부의
갈등과 인내 그리고 화해와 사랑이 이 모든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사회에 나오면서 우리는 인생의 생존경쟁
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먹느냐 먹히느냐? 눈물과 피와 땀의 생존경쟁의
장, 이것이 우리의 사회현실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사회와의 만남을 통해서
인간생존 경쟁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
스도의 만남인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면서 아무리 좋은 부모를 만
나고, 좋은 스승을 만나고, 또한 사회에 나가서 생존경쟁 터에서 늘 승리하
고 수용하는 그런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갖지 못
하면 그 인생은 참 가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낙엽처럼 삶이 지고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오로지 한줌 흙으로 돌아가고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져가는 그 비극밖에 남
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있는 만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인 것입니다.
2000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서 갈보리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리셔서 죽으셨습니다. 로마정
부는 예수님을 극악한 죄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고 유대인의 제사장들
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이단으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일반 군중들은
궁중심리에 의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갈보리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고 힘없이 매달려 있는 위대한
변화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얻은 우리의 유익
첫째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죄인으로
마시고 삽니다. 사람들마다 그 양심의 죄악에서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그
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의 일생의 죄를 대신 십자가에서
담당하시고 피를 흘려서 칭찬해 주신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알아야 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만나면 내 죄가 다 씻음을 받고 그 대신 예수 그리스
도의 의로움을 옷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
받은 의인이었다는 이 놀라운 의식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
리는 더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의인입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가 절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입
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에덴에서 쫓겨나고 하
나님 앞에 쫓겨난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해로운 피를 통해서 하나님
과 화목하게 되고 이제는 하나님을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고 성령
께서 친히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기
도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하늘나라의 지식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처
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예수님
이 우리의 구주이신 것을 알게 되며 하늘나라와 여러가지 지식과 생각을 우
리 마음속에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임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셔서 죄와 사망에서 우
리를 해방시켜 주시고 거룩하게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고 우리를 지도하시고 깨닫게 하시
며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기억나게 해주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
리를 징계도 해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
령은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매순간 우리와 함께 계시
고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놓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항상 함께 거하시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남을 가진 사람은 인생이 외롭다
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손에는 잡을 수 없지만 공기가 눈에 안보이고
잡을 수 없지만 공기는 눈에 안보이고 잡을 수 없어도 우리가 숨쉬고 사는
것처럼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성령을 마시며 성령과 함께 호흡하고 살고 있
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치료를 깨닫게 되는 것입
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질병을 짊
어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뜰에서 로마의 군인들에게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얻어맞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었습니다. 성경은 말
씀하기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하고 계신 것
입니다. 우리의 몸이 병이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치료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환경적인 저주에서 해방되
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에덴에서 쫓
겨난 인간은 저주받은 땅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막고 사는 비극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저주받고 헐벗고 굶주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라 속량
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삶속에 모든 저주가 다 벗
어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요, 하나님
의 사랑을 받았으며, 은과 금이 풍부하였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큰 축복
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이렇게 시인해야 됩니다.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저주받은 사람 아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직장에 갈
때도 항상 긍정적인 고백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야웨의 말씀을 순종하는
복받은 사람이 가는곳마다 그곳에 축복이 임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
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
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명기 28:3-6).
우리의 의식이 확실히 변화를 받으면 그 변화받은 의식에 입각해서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이 변화디기 위해서는 그 이유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유없이 마음이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몸찢고 피를 흘려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
을 깨달을 때 우리들은 우리가 저주에서 해방을 얻었다는 의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사망과 음부에서 해방
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의 죽음을 묻어 버리고 영원한 고통의 장소 음부를 청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삶 속에 종말이나 죽으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한번 태어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지만 우리들은 죽음이
다가와도 죽음에서 해방된 사람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사망이 다가와서 육신의 장막집을 벗어버릴지라도 참으로 죽지 않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망을 보고 비웃을 수 있습니다. 사망을 보고 높이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망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제는 죽음이 우리를 떼어 갈 수 없고, 음부도 우리를 파멸시킬 수가 없
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갈보리 십자가 밑에 나와서 우리를 위
해서 십자가에서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만남
을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남녀 노소 빈부 너나 할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
가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 매달린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옛 사
람을 벗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얻은 우리의 변화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수양과 도덕
으로 교육을 통해서 형벌을 통해서 사람은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와 만남을 통해서만 완전히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옛 사람이 아닙니다.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청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
니다. 우리는 항상 새사람이 된 것을 힘차게 바라보고 이 사실을 입으로 강
하게 시인해야 합니다. "나는 용서받은 의인이다. 나는 성령이 같이 계시고
성결한 사람을 사는 사람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채찍에 맞으심으로 병
에서 놓여 남을 받은 사람이다.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병에서 해방을 얻
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라이다. 나는 사망과 음부에서 해방받은 사람이
다. 나는 사망과 음부에서 해방되고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는 그렇게 의식을 변화시킬 이유가 있으며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이유
가 있으며, 또한 우리는 입으로 그렇게 시인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 못박혀서 모든 인류를 위하여 몸찢고 피흘려
그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도 예수님의 피가
부르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깨어진 몸이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 피의 부르짖음이 우리를 듣고 우리의 의식이 새로워 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사는데는 세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 형태는 육신
의 노동력으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가장 고통을 많이 당
하고 생산성도 적습니다. 두번째 종류의 사람은 정신 노동을 하고 사는 사
람입니다. 교육을 받고 그리고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서 정신적인 노동을 가
하고 사는 사람은 육체적인 노동을 하고 사는 사람보다 더 월등한 대접을
받습니다. 세번째 유형의 사람은 영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예
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므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사는 사람인 것
입니다.
우리는 육체로 사는 사람도 아니요 정신적인 노동으로만 사는 사람도 아닙
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
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
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고 하셨습
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고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하셔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우리에게 복을 부어주시는 것입니
다.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육적 사람에서 정신적인 혼의 사람
에서,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 사람이 되어서 이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섬기며 성령님을 나의 보
혜사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일날은 교회 나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항상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회개하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들어가며
나가며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삽니다.
이와같이 영적인 삶을 살고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믿음을 더하여 육적으로 사는 사람이나 혼으로 사는 사람, 정신노동을 하고
사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삶을 살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사는 사람들을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으며,위
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게 하십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은 한때 예수님을 잘 믿는 나라였습니다. 온 천하에 복음
을 증거했습니다.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 목사는 우리나라에 셔만호를 타고
대동강에 왔다가 하나님 말씀 한마디 증거하지 못하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 흘린 피가 부르짖어서 우리 한국에 1200만명의 성도들이 탄생된 것입니
다. 이와같은 복음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영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이곳은 해적의
나라였습니다.영국이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은 요한
웨슬레의 거대한 부흥운동을 통해서 영국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되고 그리고
그들의 생활이 변화되어 사회와 국가가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
세계 일등국가로서 살아왔으며 지금도 일등국가로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
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수많은 만남을 가지고 삽니다. 인간의 삶은 만남
의 관계 속에서 인생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와의 만남, 선생님
과의 만남의 관계 속에서 인생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와의 만
남, 선생님과의 만남과 관계, 그리고 부부와의 만남과의 관계, 사회와의 만
남과의 관게, 이런 관계 속에서만 살아간다면 나중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관계가 모두 완전해지려면 하나님과의 만남의 관계가 있어
야 되는 것입니다.
또 선생과 만남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갈등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치료받을 수 있고 부부와의 만남에서 겪는 인격적인 갈등과 고통 그리고 문
제도 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한 은혜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만남을 통해서 패배하고 절망에 처하고 열등의식과 좌절감
에 짓밟혀 있을 지라도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넘치는 은
헤를 통해서 이모든 것이 치료받고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영
적으로 거듭나고 이제는 믿는 사람이 되고 신령한 삶을 사는 영으로서 사는
삶이 다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그렇게 될 때 여러분 우리가 어떠한 역경도
이겨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므로 우리는 이제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망과 기쁨으로 넘쳐나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이제는 부정적인 인생을 다 불살라 던져 버릴 수가 있는 것입
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담대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신앙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만났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무질서에서 질서를 이끌어 주
시는 것입니다. 죄에서 미래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가난에서 부요로 이
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변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와 삶
성경 본문: 고후 6:1-2
은혜와 은혜 아닌 것, 은혜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
이도 없다면 구태여 은혤르 논할 필요도 없고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은 하늘과 땅만큼 엄청난 차치
가 있기 때문에 성경은 은혜를 강조하고 있으며 은혜를 받으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바울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은혜 베풀 때 너를 도
왔다","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라고 말씀하면서 은혜의 중요성을 강조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도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은헤를 강조했습니다만 그 가운데 특히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강조했습니다. 이유는 바울 자신이 풍성한 은혜
의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깨달은 사람과 체험한 사람들이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몇 가지 교훈을 찾겠습니다.
1. 은혜는 올바로 받아야 합니다.
1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
의 은헤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에 대하여 권면
하는 자신의 위치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
는 것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까 이 권면은 바울의 개인적 충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설교듣는 사람들이 지녀야 될 태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
님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케 합
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고 순종
해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편식방법과 태도로는 은헤받기가 어렵습니다. 본문
1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 뜻은 은헤의 가치를 알고 소중하게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은혜 자체는 금은보석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헤를 잘못 받으면
그 삶에 아무런 변화도 갱신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동안 유교전통과 문화를 지켜 나왔기 때문에 유교적
윤리와 도덕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유교윤리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겠지만 [삼강오륜]이 그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부모와
자식, 윗사람과 아랫사람, 부부간의 윤리가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높이
고 순종하는 것이 성경의 명령이고 동양윤리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94년도에는 유학갔던 아들이 돌아와 돈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한 사
건으로 온 세상에 충격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학 강단에서 학생
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버지를 살해함으로 더 큰 사회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일부 언론은 그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더 큰 충격
입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정말 기독교인이었다면 은혜를 체험
하고 거듭난 신자였다면 그런 일은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1,200만-1,500만이라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은혜를 모르고
교회만 들락거리는 사람들 속에는 도둑놈, 소매치기, 살인자, 불한당, 이중
생활하는 자, 그리고 어쩌면 살의를 품고 있는 자들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
다. 그러나 그들도 은혜를 제대로 받기만 하면 거듭나고 새사람되고 회개하
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니라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소프라노 성악가 김영미씨의 얘기는 감동적인
것입니다.
미국 L.A 에 있는 나성한인교회 김의환 목사님이 김영미씨에게 주일 2시
예배에 와서 성가연주회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미국 대부분의 교회
는 저녁예배가 없거나 2시에 드리는 교회가 많습니다.
김영미씨의 대답은 주일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L.A에
있는 제퍼슨 감리교회 성가대원인데 성가대원이 많지 않기 때문에 빠질 수
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은혜받은 사람만 가능한 감동적 이야기입니다.
김영미씨의 성공은 그녀 자신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입니다만 그러나 주님
과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그의 신앙과 책임감 때문이었으며 그것을 보신 하
나님께서 그녀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서 저는 이 말 뜻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에게 자주 물었습니
다. "엄마 어떻게 엉덩이에 뿔이 나?"라고 그때마다 제 어머님은'크면 알게
된다"라고 하셨고 "까불지 말라는 뜻이란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 어머님의 대답은 명답이었습니다. 철들고 세상을 알면
서 그 뜻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뜻이 때론 떠오릅니다. 엉덩이에 뿔
나는 법은 없습니다. 뿔은 이마에 납니다.
만일 엉덩이에 뿔이 난다면 그것은 기형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는데 장애물
이 됩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거나 잘못 받으면 기형아가 됩니다. 그리고 자
신의 삶을 망가뜨립니다.
서울시내 모 큰 교회 정문입구에는 그 교회가 꼭 사서 넣어야 할 건물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교회 자체도 땅이 비좁거니와 그 땅을 사서 넣어야 교
회 전경도 드러나고 출입도 자유로워지는 건물입니다. 큰 교회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돈도 있습니다. 문제는 건물임자가 땅을 내놓지 않는 것입니
다. 그런데 어느 해 그 건물을 팔겠다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긴급히 당회
를 모였습니다.
그런데 당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 결사반대를 합니다. 말도 되지 않는 이유
를 들이대면서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그 교
회는 그 건물을 사지 못했습니다. 그후 그 장로님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
렸습니다. 들은 바대로는 그 분은 지금 미국에서 "내가 왜 그때 그렇게 반
대했는지 모르겠다"며 후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고집은 다릅니다. 내 고집을 강조하는 사람은 은혜받은 사람이 아
닙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주관과 고집과 죄악과 악습을 십자가에
못박고 꺽어 버립니다.
다른 얘기 하나를 더 하겠습니다.
서울에 있는 모 큰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교회 바로 뒷편에 붙어 잇는 500평 대지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성장이
나 미래를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매입해야 하는 땅입니다.
15년전 어느 날 평당 100만원에 팔겠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당회를 모였습
니다. 땅이 너무 비싸다며 한 사람이 한사코 반대를 하는 바람에 포기했습
니다. 7년이 지난후 5억에 팔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다시 모였습니다만
반대하던 그 사람 때문에 부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어느날 50억에 팔겠다는 연락을 받고 14년만에 50억에 샀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고 고집부렸던 그 사람은 교회에 세 가지 큰 손해를 주었
습니다.
첫째, 49억 5천만원의 손해를 주었습니다. 첫번 기회에 반대를 안했다면 5
천만원에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회성장을 14년 정지시켰습니다.
셋째, 긍정적으로 교회를 섬기고 일하려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신앙적 상
처를 주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바로 받으면 태도가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
고 신앙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헛되
이 받으면 다른 삼과 자신에게 엄청난 손해와 상처를 주게 됩니다.
사울왕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되
었습니다. 그는 은혜받고 예언을 하는가 하면 나라 정치를 잘했습니다. 그
러나 그 은혜를 제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헛되이 여기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외면하고 교만하기 시작하고 세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자 하나
님이 그를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뻔했습니다. 자신도 그의 왕가도
몰락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그리고 바로 받아야 합니다. 부천의 영생교, 일본의
오음진리교, 그들이 표방한 것은 영생이고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인
을 주저하지 않는 비영생, 비진리 집단이었습니다.
여러분, 부모도, 자식도,남편도, 아내도,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은혜를 받아 합니다.
2. 지금 받아야 합니다.
2절 끝을 보면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라고 했습니다.
"보라"는 것은 은혜의 공개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은혜 자체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란 숨쉬는 그 순간, 살아있는 이 찰라를 의미합니다. 이 순간. 이
찰라, 맥박이 뛰고 심장이 고동치고 손발이 움직이고 두 눈이 껌벅거리고
있는 이 순간이 지금입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에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다
분히 종말적 긴박성이 강조되는 시간인 것입니다.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다음으로 미루면 안됩니다. 은혜를 덱토스라고
합니다. 그 뜻은 "입증된"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입증된 사건입니다. 두 번다시 그 효과를 물
어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카이로라고 합니다. 그 뜻은 유쾌하다,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유쾌하고 행복합니다. 본문은 은혜와
구원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은혜의 결과를 구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은혜받아야 행복하고 유
쾌하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더 이상 은혜를 미루고 소홀히 취급할 생각입니까>
스코틀랜드에서 목회하던 어스킨(Erskine) 목사의 설교를 들은 스칼렛 부
인이 그 날 큰 은혜를 받고 깊은 감동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
일 그녀는 어스킨 목사의 설교를 들엇으나 은혜를 받지 못받았습니다. 스칼
렛은 목사님을 만나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어스킨의 댈바은 "지난 주에는
당신이 예수를 만나려고 왔기 때문에 신령한 은혜를 받았지만 오늘은 나를
보려고 왔기 때문에 은헤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은혜의 출처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은헤를 주는 것입니
다.
지금 은혜받아야 합니다.
다음 시간은 내 시간이 아닙니다.
내일도 내 시간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은혜를 받읍시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자
성경 본문: 고후 6:1
과거에는 한 사람이 일해서 온 가족을 먹여 살렸습니다. 남자는 일
을 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갈 책임이 있기 때문에 대부분 그 가정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특히 유교적 사고에 의해서 여자가 일하여 식구를
먹여 살리는 것은 체통없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굶는 한이 있
어도 절대로 여자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의식이 달라졌습니다. 맞벌이다 해서 함께 일을 합니다. 요즈음 젊은
이들 중에는 결혼해서도 맞벌이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도 합니다. 특
히 여성들 중에는 결혼을 해서도 자기 성취다 자기개발이다 해서자기
취미와 적성에 맞는 일을 하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한 학생들은 아
르바이트를 합니다.
이렇듯 함께 기쁘게 뛰다 보니까 피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일하면 피곤하지 않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어떤
일도 감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일하되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혼자 일하지 말자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더불어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독
처하는 것이 좋지 않게 보여 돕는 베필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
고 축복해 주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했습니다.
홍수시대에 의로운 노아의 가정을 구원하시고 축복하시기를 '생육하
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 .' 하나님은 인간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함께 보된 삶을 살기 원하셨던 것입니다.이렇듯 하나님이 창
조 섭리 속에 인간은 더불어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지 않
는 것을 이웃에 해주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 같
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입니다. 이
추운 겨울에 광부가 없으면 연탄없이 어떻게 따뜻하게 지낼 수 있습니
까?기름을 수입해 오지 않고도 돈만 있으면 기름을 얻을 수 있습니까?
원유를 팔고, 그 원유를 사다가 정유해서 공급하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농부가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먹을 수 있겠습니까?이렇듯
내가 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해줌으로 인해서 내가 살아가는 것
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이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나라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의 덕을 보면서 삽니다.
만약 유엔이 없었다면 우리 나라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렇게 볼때 모두가 귀합니다. 나만 귀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귀합니
다. 몸의 각부분이 그 나름대로 귀한 것처럼 이 사람 저사람, 이 나라
저 나라가 다 귀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 한 사람만 귀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귀합니다.서로가 도움을 주고 영향을 주고 받
으며 살아갑니다.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 혼자라고 생각하빈다. 설령
자기 혼자라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혼자
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각각 흩어질 것을 아셨습니다. 자기를 혼자 둘 때가
올 것인데 그러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는 것
을 믿었습니다 (요16:32-33). 인간이 혼자 있게 되면 두가지 문제에
빠지게 됩니다.
첫째는 교만입니다.
이런 때는 하나님의 도움도 필요없습니다. 무슨 일이든 자기 혼자서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또한 자
기가 빠지면 아무것도 아닌 줄 압니다. 자기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빈다. 이렇듯 교만 합니다.
둘째는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상황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자기능력, 자기지
혜 자기 힘의 한계상황에 부딪히면 절망하게 됩니다. 내게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절망합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할때 교만하고 할 수 없을 때는 하나님
께서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절망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우십니다(렘 1:5). 그는 자기는 아이이기 때문에
말할 줄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말슴이 '내
게 너와 함께 말할 줄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게 너와 함께 너를 구원하리라'는 것입니다 (8) .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모세는 감
당할 수 없다고 변명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정녕 내
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2).'는 것입니다 .도한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하십니다 (출4:12). 금년에는 혼
자 있지도 말고 혼자 일하지도 맙시다.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합시다.
항상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가 됩시다.
2. 믿음으로 일하자.
오늘 우리는 불신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서로믿을 수 없다고 불평입
니다. 시장에 가서 물건을 하나 사더라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주이는
싸게 판다고 하나 아무래도 속는 기분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믿지 못
하고 남편은 아내를 믿지 못합니다. 상사는 부하를 믿지 못하고 부하
는 상사를 믿지 못합니다. 사실 믿지 못하는 것이 불행입니다. 그러나
속으면서도 속지 않고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웃도 믿을
수 없고 친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입니
다.
어느 중풍병자를 침상채로 사람들이 메고 예수님 앞으로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께 가면 그 환
자가 고침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그리고는 환자를 메고 예수
께 나아갑니다. 환자로부터 고용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환자가 믿음이
있어서 예수께 가자고 부탁한 것도 아닙니다.예수께서는 저들의 믿음
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마 9:1-8). 곧 친구들의 믿
음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믿기만 하면
됩니다. 잘 믿는 것이 곧 주의 일입니다(요6:29). 믿는 자에게는 표적
이 따릅니다 (막 16:16-18).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막
9:23). 믿음이 문제입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믿
음을 구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막9:24).
열두 해를 혈루증이라고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
니다. 소문을 듣고 예수께 나아가 그의 옷에 손을 댑니다.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병이 나을 줄 믿은 것입니다. 놀라
운 것은 그의 믿음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막 5:25-34). 어떤 문체라
고 믿음을 가지면 그 믿음이 일할 줄 믿스빈다. 내가 못한다고 낙심하
지 맙시다. 불가능하다고 절망하지 맙시다.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하
나님께서 일하시되 믿음을 가진 자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믿
음의 사람이 됩시다. 믿음은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금년 한해는 우리
의 지식, 경험,능력보다는 믿음으로 일하는 해가 되도록 합시다.
3. 기도로 일하자.
나의 답답한 문제를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으면 축복입니다. 내 기
로운 문제를 누구에게 털어놓겠습니까? 사람에게 털어 놓으면 그 말이
돌고 돌아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믿고 말했다가 어려움을 당한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믿을 수 없지만 오직 한분 믿고 털어놓
을 수 있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다 들어주십니다. 기도는 비는
것입니다. 기도는 고백하는 것입니다.기도는 탄원하는 강청하는 것이
요 상담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교제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그 어떤 탄원과 원통함을 들으
십니다(시 142:1).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게서 응답하십니다 (렘 33:2-3). 그러므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일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시 대통령 당시 미국은 인공위성을 발사한 일이 있습니
다. 그런데 그 인공위성이 고장난 것입니다. 그안에 있는 사람이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미주 전 지역의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회들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인공위성은 기적적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는 놀라운 역사를 이룹니다.
기도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
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
하지 아니하는' 것은 기도의 힘입니다(고후 4:7-9). 여호와를 앙망하
는 자는 여호와의 새힘을 얻습니다(사40:31).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
은 곧 기도를 말합니다. 금년 한해는 기도로 일합시다. 무슨 일이든지
기도로 시작합시다.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깁시다. 과거에는 몸으로 일
했습니다. 몸으로 일했으니 육체가 피곤했습니다. 지금은 머리로 일합
니다. 그래서 지금은 머리로 일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머리가 복잡합
니다. 정신적으로 피곤합니다.
앞으로는 영으로 일해야 합니다. 곧 믿음으로 기도로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영적으로 건강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감당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한해, 하나님께서 일해 주시
는 한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성경 본문: 고후 6:11-13
(고후 6: 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고후 6: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
서 좁아진 것이니라
(고후 6: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
을 넓히라
마음은 의식.감정.생각따위의 정신 작용의 총체로 정의됩니다.좀 더 구
케적으로언급한다면 정신은 마음의 본질적인 실체로서 마음의 작용을 통제
합니다. 따라서 마음은 신체적 작용의 견제를 받으나 정신은 그 제약을 벗
어나 자주적 기능을 영위하는것으로 정의됩니다.심리학에서는 마음을 의식
과 정신기능으로 구분합니다.의식은 그 사람이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현상
이며 정신기능은 그 의식을낳은 작용입니다.
마음은 히브리어로 "레브"라 하는데 이 레브는 마음이란 의미외에 중심,
내부,핵 심이라는 의미의 더 근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적으
로는 생명의 중심인 가슴,심장을 의미하였고 정신적으로는 감정의 공간이
며 영적으로는 인식,기억,사고의 근거지라고 말합니다.
감정적인 부분에 대한 "레브"즉 마음은 기쁘고 즐거운 마음,사랑하는,근
심하는, 미워하는,분노의,두려운,사모하는,쏠리는,시기하는,인색한,담대한
마음등등이며인식적이고 의지적인 차원에서 "레브"의 사용은 다음과 같습
니다.
온전하고 의로운 마음,악한,순종하는,불순종하는,제어하는,정직한,깨닫
는,청결한생각과 계획의 출구,결단하는.선악을 분별하는 마음등입니다. 이
와같은 마음의 작용을 통하여서 우리가 알수 있는것은 마음의 작용이 우리
가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매주 중요한 영향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좁아 터졌다"라고 하는 사람을 가리켜 무엇이라 하는가요?모든
면에서 표옹하지 못하고 편협된 자기 편견에 빠져서 관용이 없다는 의미로
말을 하게 됩니다.여러분의 마음은 좁은 마음입니까? 아니면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입니까?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고린도인들에게 "우
리의 마음이 넓었으니"라고하였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을 수용할수 있는
너그럽고 애정이 있고 신뢰성이있는 마음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이 넓은
마음은 하나님의 은사로서 육체의 일을 버리고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가질수 있는 마음의 자세입니다이와같이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가 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끊임없는사랑과 깊은 관심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행위들을 말이나 편지로써 지적하며 훈계하였습니
다.
복음은 사도바울의 마음을 넓혀 주었기에 바울은 복음이 고린도인의 마
음도 넓혀주리라는 가정을 본문에서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한
때는 그의 견해와 감정이 자신과 개인적인 관심이 쏠리는 대상들에 게만
국한 되어 있었습니다.그러나 사도바울이 복음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후
부 터는 그의 마음이 넓어 졌으며 인간의 구원을 위한 위대하고 자비로운
계획이 포함되어 있는것이라면 모든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일것입니다.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은 마음이 좁아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 생각하며 남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게되며 사도바을처럼 복음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알게되면 그만큼
마음이 넓어져서 모든 사람들을 대하여도 모나지 않고 관대한 모습의 사람
으로 바뀔것입니다.
1.왜 사람의 마음이 좁을까요?
1)오래참지 못하는데 원인이 있습니다(눅8:15)
참고 견딤. (눅8:15). 오래 참음.길이 참음.
(눅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특별히 우리나라의 문화를 보게되면 참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습
니다. 그것은 결국은 마음이 넓지 못해 자기만을 생각하는 결과이기도 합
니다. 참지 못하는데서 모두가 손해를 보며 살아가고 있는것입니다.서로서
로 양보하며기다릴줄 아는 문화가 정착되면 마음들도 넓어질것입니다.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도 좋은땅에 떨어져 인내해야만 결실한다고 말씀
하고 있 습니다.그러므로 인내하는 생활이 우리 생활속에서 계속되어 질
때 좋은 열매를 맺을수 있습니다.인내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마
음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항상 참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그
리스도는 범사에 인내 하셨습니다죽기까지 인내하심으로 십자가의 죽음도
달게 받으셨습니다. 인내는 마음을 넓혀줄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히10:36)
(히 10: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또한 인내는 여러분의 소망도 이루어 줄것입니다 (롬15:4)
(롬 15: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가지게 함이니라
2)이기주의적인 사상때문입니다(창19:4-9); 욕망
(창 19: 4)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
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창 19: 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창 19: 6)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창 19: 7)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창 19: 8)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
들을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
무 짓도 하지 말라
(창 19: 9)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놈이 들어와서 우
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별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그
러니까 참지 못하는 성급함이 뒤따르고 남을 생각할지도 모르는 모습이 되
어 지는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차를 타고 가는데 한 사람이 주위에 옷자락을 넓게 펴놓
고 앉아있었습니다. 이것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적인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 장 점잖은 채 하지만 식탁을 같이하여보면 좋은 음식과
큰것을 모두 저 혼자만 먹으려고 합니다.오늘날 교회안에는 아전인수주의
와 같은 심사를 가진사람이 많 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맙시다.욕심을 가
지고는 마음을 넓힐수가 없습니다.
3) 사람이 흥분되면 마음이 좁아집니다(민20:10)
(민 20:10)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
게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반석에
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는 백성들의 불평으로 인하여 흥분하여 하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
는 죄를낳게 되었습니다.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였는데 모세는 반
석을 두번치는흥분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결국에는 모세는 약속된 가
나안땅을 들어가지 못 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많은 일들을 경험하셨고앞으로도 많은 일들이 눈앞에 펼쳐질것입니
다.자기의 뜻대로 생각대로 행동한다 면 좋지못한 결과가 있겠지만 모든
일에 있어서 흥분된 모습을 제거하고 하나님의뜻을 쫓아 살아간다면 아름
다운 삶으로 마치게 될것입니다.
2. 마음을 넓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성경말씀을 지속적으로 섭취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벧전2:2)
(벧전 2: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말씀은 우리의 즐거움의 원천이 되며 행위의 표준이고 영적양식입니다.
말씀을 계속적으로 읽으며 그 말씀을 따라 묵상하며 살아간다면 그 말씀이
우리를 진리 가 운데로 인도하여 마음이 넓은 인격자로 만들것입니다.하
나님의 말씀인 성경책 자체가 복음입니다.사도바울도 이 복음의 진리를 깨
달았을때 마음이 넓어졌다고 하였습니다.마음을 넓혀줄수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지식도 아니며 오로지 그 목적 이 위대하고 유익한 하나님의 말씀
인 성경뿐입니다.
2)복음의 능력에 복종하는 것입니다(롬1:16)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지식이란 대단히 유용한 것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마음을 넓히기 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교만하게 만들기 쉽습니다.우리의 마음을 교화시키는 것은
바로 복음입니다복음은 온 우주를 통하여 가장 선한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사람들은 이 계획을 신실하게 수긍하고 있습니다.그
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선한일을 사랑하며 그것이 복음에 제시된 방
법으로 증진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신실하게 연합하게 되면 그 즉시 위대한
선을 발 견함과 동시에 그들의 마음이 넓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
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인간의 마음을 넓혀 줍니다.복음은 그리스
도를 향하여인간의 마음을 넓혀 줍니다.복음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하여
인간의 마음을 넓혀 줍니다.복음은 모든 인류를 향하여 인간의 마음을 넓
혀줍니다.복음은 모든 피조물을 향하여 인간의 마음을 넓혀 줍니다.복음은
모든 사건에 관심을 갖도록 인간의 마음을 넓혀줍니다.우리 주위에서 일어
나는 모든 사건들은 복음의 광대하신계획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복음
은 모든 믿는자들에게 만물이 다 그들의 것 이며 과거,현재,미래가 결국
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것임을 확신시켜 줍니다
3)사회적인 교제를 통하여서 마음을 넓힐수가 있습니다(행2:42)
(행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기도
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우리가 사람과 사귀어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사회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 마음이 좁은것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도간의 교제를 통해서 마음을 넓힐수 있습니다.
4) 다음으로는 기도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을 넓힐 수 있습니다(요일5:14)
(요일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
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바른 기도를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원수를 용서할 수 있고 미운 대상 앞에 사랑을 베풀 줄 아는
너그러운 넓은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근심을 해결합시다
성경 본문: 고후 7:9-10
인생을 이야기 할 때에 희노애락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은 기쁨과 희락의 시간보다는 오히려 슬프고 근심스러운 시간이 훨씬 더 많
다고 생각됩니다. 이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우연이나 운명으
로 돌리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나약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근심없는 세상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근심은 신앙안에서 반드시 해결됩니다.
1. 먼저 사람이 근심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죄 때문에 근심이 왔습니다.
@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했습니다 (불순종). 창 3:6에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되었습니다 (영적죽음). 창 3:8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조).
엡 2:3 "우리도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더니.."
2) 그 근심을 불신앙이 붙들고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한 인간은 근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 마 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
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
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로 아시느니라."
( 혹 당신은 남 모르는 죄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많이 의지하며 살지 않습니까? 당신의 자녀들이 의식주 때문에 고민하는 것
을 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 당신은 하나님 곁에 가까이 있따고 생각 하십니
까? )
2.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근심할 수 있습니다.
1) 죄 문제입니다. (심령상 문제 = 비 윤리적이고 비 도덕적인 행위로 말
미암은 정신적인 근심)
2) 경제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있
어도 고민, 없어도 고민스러운 것이 돈과 재산입니다.)
@ 돈을 사랑한 결과?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 일만 악의 뿌리가 되
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 미혹을 받아 @ 믿음에서 떠나 @ 근심
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
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3) 불편한 인간관계입니다 (부모 형제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부부간의
갈등, 이웃과의 갈등, 직장에서의 상하직원간의 갈등, 교우간의 갈등, 교역
자와의 갈등 등...).
@ 고부간의 근심 (창 26:34-35). "그들이 (에서의 처들)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이 되었더라"
@ 부자간의 근심 (눅 15:12-13) "아버지여! 재산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
을 내게 주소서"
@ 형제간의 근심 ( 눅 12:13) "선생님 내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4) 건강 문제입니다 (요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3.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할 근심도 있습니다 (말슴으로 책망을 받을
때 오는 근심 )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고후 7:3 "하나님의 뜻대로 하
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
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
4. 어떻게 근심을 치료할 수 있습니까? 다윗의 경우 = 시 25:16-18 (기도
는 최상의 근심치료 방법).
@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 잠 10:22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
하여 주시지 아니하시느니라."
당신은 요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앴는 근심이 있습니까? 조용히 지금
우리 근심 보따리를 예수님 앞에 내려 놓습니다.근심한다고 되는 일이 있습
니까? 우리의 죄짐을 져주신 예수께서 우리 삶의 짐도 그가 져 주십니다.
겸손히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로 드리는 사람들
성경 본문: 고후 8:1-8
지방 중심도시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있는데 어느날 그 도시의 천주교 신
부가 찾아 왔답니다. 찾아온 목적은 신도드을 모아 놓을테니 몇시간 집회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천주교에서 개신교 목사를 청해다가 집회를 할
려고 하는가, 그리고 무슨 얘기를 해달라는 것인가라고 물언더니 이미 로마
바티칸의 허락까지 받았다며 개신교의 십일조하는 법을 얘기해 달라고 하더
라는 것입니다.
찾아온 신부의 얘기는 도대체 천주교 교인들이라는게 헌금할 줄도 모르고
바티칸에서 돈오기나 기다리고 있어서 답답하고 속상하다며 몇시간 개신교
인들 헌금하는 얘기를 해달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쾌히 승락하고 가서 몇 시간 십일조 얘기를 했더니 반응이 크
게 일더라고 했습니다. 천주교보다는 개신교가 훨씬 더 헌금생활에 익숙하
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세계교회 가운데 한국 교인들이 가장 올바른
헌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헌금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드린다면 받으시는 하나님
께는 더 큰 영광이 될 것이고 드리는 우리에게도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1-8과 고린도후서 8:1-8과 고린도후서 9:1-7은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 주신 헌금에 관한 교훈입니다.
몇가지 기본적인 원리를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6:3을 보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8:1을 보면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라고 했고, 8:4을 보면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8:6을 보면 "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이상에서 말하고 있는 "은혜"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행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그 행위자체를 은혜로 해석한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를 [은혜]로 해석한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며 감사행위이기 때문입니다.
1988년 10월 5일 아침 계약 회사원이었던 전용기 씨가 아침 조깅을 하러
나갔다가 차에 치어 두개골 골절 등 14가지 합병증세로 전주예수병원에 입
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쫓아간 부인 성정식 씨의 놀
라움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 당시 네살된 딸과 생후 45일밖에 안된 딸
을 대전의 친정집에 맡기고 월 5만원의 사글세 생후 45일밖에 안된 딸을 대
전의 친정집에 맡기고 월 5만원의 사글세 방을 병원 앞에 얻어 남편의 간병
을 시작했습니다.
남편 전용기씨는 식물인간이었습니다. 하루 수십 차례씩 가래를 빼내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을 시키는 등 남편 수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고통의 날들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5년 11개월이었습니다.
주위에선 포기하라고 했고 시댁식구들도 발길이 뜸해지는가 하면 의사들도
합병증세 때문에 얼마 살지 못할 거라며 살아난다고 해도 식물인간을 벗어
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까운 사람들은 새출발을 하라
고 권위하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급성폐렴 등 합병으로 수많은 고비를 넘겼는가 하면 성정식씨도 4
개월만에 쓰러져 입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씨는 평소 배워둔 미용기술로 환자들의 머리를 깍아주고 한달에 4-5만원
을 받아 남편의 기저귀를 사거나 약값에 보탰습니다.
본래 성정식씨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믿는 집으로 출가를
해왔지만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사고로 쓰러지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날마다 병원교회에 나가 남편 살려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식물인간이라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4년 11개월간의 길고 긴 식물인간의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
다.
저는 이 사연을 신문에서 읽었고, 예수병원 관계자의 입을 통해 직접 들었
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한편의 인간드라마입니다. 부부가 서로 얼굴을 마
주 바라보며 주고 받는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여보 고맙소","여보 깨어나줘서 고마워요"
"내 일생 당신 은혜 잊지 않을꼐"
"나 당신 사랑한다구"
"저두요"
부부의 대화를 엿들은 건 아니지만 대충 그런 대화가 오고 갈 것입니다.
은혜는 순수한 것입니다. 은혜는 조건도 없습니다. 다만 은혜는 감동과 감
격과 감사가 넘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감동하고 감격한다면
드린다는 행위가 너무나 감사하고, 기쁜 사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드릴 수 있고, 드릴 것이 있다는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억천만금을 가지고 있어도 죽어버리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드릴 수 있고 또 드릴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제아
무리 드리고 싶어도 가진 것이 없다면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
릴 것이 있다는 것은 은혜인 것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깨어나면 그대로 무릎꿇고 즉시 그 자리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오늘도 깨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으로 보게 해주셨군요. 귀로 듣게 해주셨군요 입으로
말하게 해주셨군요. 손발이 움직이게 해주셨군요 또 다시 오늘 하루를 주셨
군요 감사합니다."
이 기도를 드리고 일어서곤 합니다.
여러분, 억천만원을 벌지 못했더라도, 성공출세를 내 욕심대로 못했더라면
살아있다는 것과 내 것이라고 몫지은 것이 없다는 것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
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라야 은혜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장병을 치료하는 내과 전문의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평소 식도락을 즐기
던 두 남자환자를 치료하고 있습니다. 위장병 환자는 다른 환자들에 비해
음식을 조심해야하고 특히 의사의 지시를 따라야 하빈다. A라는 성을 가진
환자는 의사의 말에 순응하고 치료되면 마음놓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자기 절제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 결과 치료가 급속도로 빠릅니다.그런데 B라는 성을 가진 환자는 의사
말을 듣지 않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먹는 재미로 사는데 왜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느냐, 먹으면서 치료를 하는 법은 없느냐, 먹고 치료하면 되지 않
느냐며 항의하고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 환자는 A 환자에 비해
80% 치료가 지연되고 있다는것입니다.
먹게되면 먹게 되서 감사하고, 먹지 못하면 이 다음에 잘 먹게 될 줄로 믿
고 감사하는 사람이 은혜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그가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
니다.
건강한 것, 드릴 수 있게 된 것, 드릴 것이 있다는 것, 오늘 내가 여기 존
재한다는 것 그것을 은혜로 믿고 감사합시다.
2. 자신을 먼저 드려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8:5을 보면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물질로 헌금을 하기 전에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를 들어 설명해 보게습니다. 가령 남편이 딴집 살림을 차리고 딴
살림을 하면서 그것을 미봉하기 위해 자기 부인에게 좋은 차를 사주고 좋은
옷을 사주고 용돈을 분에 넘치도록 준다고 가정해 좁시다. 부인은 남편이야
어디를 싸돌든 돈주고, 차사주고,옷사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할 수 있겠습
니까?
돈이 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내게 달라"고 하
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10여년 전 저는 어느 사진전에 갔다가 별난 작품을 구경했습니다. 사진모
델은 주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작품은 거의가 얼굴이 없었습니다. 여자의
각선미, 히프 가슴, 팔목, 등 그런 부분만을 클로즈업시켜 찍은 사진들이었
습니다. 얼굴없는 지체들의 전시회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돈만 드린다면 그것은 얼굴없는 가슴처
럼 흉물스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수재민 구호금을 내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수재민 구호금을 내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나
를 먼저 드릴 때 하나님은 내가 드리는 물질과 시간과 재주를 받으시는 것
입니다.
3. 심는대로 거둡니다.
고린도후서 9:6을 보면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농사법칙이고 인생
법칙입니다. 바울은 그 법칙을 하나님께 드리는 법칙으로 도입한 것입니다.
쿠바의 산티아고 마을에 [마리아]라는 여선생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말을 타고 학교에 출퇴근을 했습니다. 어떤 날 남루한 옷차림에 맨발로 학
교를 향해 뛰어가는 소년을 보게 되었습니다. 차림새가 꽤재재한 거라든지
맨발로 뛰는 걸로 보아 가난한 집 아이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 소년이 누구인가를 알아 보았더니 자기학교 학생이었고, 검은 눈이 초
롱초롱 빛나고 공부를 잘 하는 아이였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마리아 선생
은 구두 한 켤레를 사서 그 학생에게 주었고, 정성껏 도와 주었습니다. 그
리고 그 다음해 그는 그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후 쿠바의 지도자로 카스트
로가 권좌에 오르게 되었고, 마리아 선생은 한 신문에 공산주의를 비방하는
글을 썼다는 죄목으로 경찰서에 연행되었습니다. 그 선생은 곧 바로 정보과
정에게 넘겨졌습니다.
마리아 선생을 본 정보과장이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당신은 마리아 선
생이 아니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옛날 구두 사준 학생이 바로 접니다."
라며 덥썩 손을 잡았습니다. 구두 한 켤레와 작은 정성이 훗날 위기를 모면
케 해주었던 것입니다.
덕이라는 씨앗을 뿌리면 덕이라는 열매를 거둡니다. 사랑이라는 종자를 뿌
리면 사랑이라는 열매를 거둡니다. 그럼으로 좋은 일은 많이 뿌리는 것이
좋습니다.
덕이라는 씨앗을 뿌리면 덕이라는 열매를 거둡니다. 사랑이라는 종자를 뿌
리면 사랑이라는 열매를 거둡니다. 그럼으로 좋은 일은 많이 뿌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을 뿌리고,부덕을 뿌리고,죄를 뿌리면 그것들을 많이 거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쁜 일은 많이 뿌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어떤 날 아브라함 집에 낯선 손님 셋이 찾아왔습니다.
너그럽고 후덕한 아브라함 부부는 정성을 다해 송아지를 잡고 요리를 만들
어 그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두 천사였습니다. 그날 아브라함
은 그들을 대접하고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리고 그날의 약속대로 일년 후에 이삭을 낳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은 공짜가 없습니다. 많이 드리면 많은 것으로 채워주십
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면서 늘 해야 할 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 더 많
이 못드려 죄송합니다","주님 정성껏 드리겠습니다","주님 더 많이 드리도
록 복 내려 주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알고 드립시다.
은혜를 감사하며 드립시다.
나 자신을 드립시다.
풍성하게, 넉넉하게, 많이 드십시다.
심는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바로 드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드리는 사람들의
헌신과 헌물과 감사를 받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드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거지
도 거지취급하면 화내고 덤빕니다.
하나님을 누구로 알고 믿고 드리고 있습니까?
바로 드리는 사람들에게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국제화 시대의 사명
성경 본문: 고후 9:1-15
오늘은 교회설립 33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지난날 동안 베푸신
은혜를 감사드리며, 국제화 시대에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마지막 말
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시대에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려면 구체적으로 빛을 발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빛을 내는데는 두가지가 구비되어야
합니다.
1.빛을 발하게할 기구가 필요합니다.
그 요소는 첫째가 예배입니다.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 모여 드리는 교
회의 공동예배입니다(요4:24, 예배의 내용). 그리고 우리의 삶의 현장
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롬 12:1,2).
두번째는 교육입니다(딤후 3:13,14,16). 성경은 인간이 날때부터 악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의인이 의인 구실하는데는 교육과 훈
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번째는 선교입니다 (벧후 2:5) 전파되는 곳에 악의 세력은 다 물러
갑니다. 이 일을 감당하는 사람은 다니엘은 별과같이 빛나리라고 했
습니다 (단 12:3).
네번째 요소는 기도입니다. 모세의 40주야 기도, 베드로의 옥중기도,
엘리야의 기도, 바울과 실라의 기도, 이것이 어둠을 물리쳤습니다 (행
3:1-10).
다섯째는 이웃을 돌보는 것입니다 ( 마 25:35-36).
2.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에너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성령"이십니다. 그 다음에 현
실적으로 물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세계 선두를 유지하기
위해 이익의 20%을 투자하는데 우리는 최고의 7%에 불과합니다.
영적인 면에도 투자가 필요합니다. 예배와 교육에 많은 에너지가 투
자되어야 합니다. 전도에 투자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번돈으로 안됩니다. 십일조를 드려
야 합니다(말 3:10). 헌금에 대하여 바로 드려야 합니다 (막
10:29-30). 우리의 전대를 풀어야 합니다 (눅 6:38). 헌금은 복이기
때문에 아무리 강조해도 무리가 아닙니다(히 7:1-6,7). 이를 위해 넘
치게, 넉넉하여(8), 풍성(10),부요(11),감사(12),영광(13) 돌린다고
하였습니다.
심은대로 거둔다
성경 본문: 고후 9:6-11
저 광대무변의 우주는 태양을 중심하여 못 위성들이 제자리를 지키며 돌고
있습니다. 놀라운 힘과 질서의 운행은 사람의 힘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입니다.
가을의 추수는 봄에 씨뿌리고 여름에 일한대로 거둡니다. 하나님은 세상끝
날까지 상선벌악하시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성경의 교훈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자기의 것으로 받아 믿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새로
운 면과 존귀와 영광을 누리게 합니다.
1) 지난날의 심은것들
농사하지 않는 사람이 무엇을 심는다고 할 것입니까? 사람의 삶의 과정은
심는것과 같습니다. 곡식알은 생명력이 있어야 합니다.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성실하게 심었는지요? 믿음의 생활에서 성경읽기,
기도,봉사, 전도에 생명의 씨앗들을 잘 심었는지요 하루하루의 삶을 무의미
하게 헛되게 산다면 이것은 잘심지 못한 결과입니다. "일일일선"이라는 바
날이 있습니다. 하루에 착한 일을 하나씩한다는 말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믿음직스럽게 사랑의 힘으로 돕는 생활로 개인적인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
다.
사람은 자기가 심은대로 그 열매를 거둡니다. " 세상의 지혜는 세상적이
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평화로우며, 관용, 양순,
긍휼,선한 열매가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지난날의 불신과 불의, 악행으로
심었다면 회개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선함과 진실과 봉사로 심으십시다.
2) 받은 은혜를 배은하지 맙시다.
사람이 사람된 가치는 은혜를 은혜로 알고 은혜 보답에 있습니다. 오늘의
사회는 도덕윤리가 무너졌습니다. 지난주간 신문에 23세난 아들이 자기 아
버지를 살해하면서 담배값도 벌어오지 못하는 애비는 죽어야 한다고 때려
죽였습니다. 동국대학 학생이 교수를 집단 폭행하였습니다. 교회까지도 기
독교의 윤리와 도덕이 타락되어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의 근원은 선,의,거
룩,진실인데 이러한 것들이 거이 무기력해지고 형식화된 상태에 빠졌스빈
다. 하나님, 부모, 스승, 목사 윗어른, 이웃에 대하여 받은 은혜를 얼마나
보답하고 살으십니까? 은혜보답은 믿음과 정비례합니다. 감사를 모르는 사
람은 인간성이 모두 버려진 자입니다. 감사는 비교하거나 어떤 분량을 논해
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지난주간에 어떤 교인이 자기 집을
사게되는데 돈이 부족해서 고민하며 기도하던중 하나님이 집을 살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하다고 먼저 헌금을 드렸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집값이
감해 지던지, 하는 사업이 잘되어 넉넉히 그 집 사는데 부족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시인 다윗은 "여호와께서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
할꼬"(시 116:12)그는 자기가 받은 은혜를 시 116:8-12절까지 표현하기를
사망,눈물,넘어짐에서, 건졌다고 하였습니다.
3) 감사표현
감사할 이유와 조건이 다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자기의 노력과 공으로 생
각할 때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
을 주시는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부요하며 너그럽게 연을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
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바울은 각각 믿음으로 마음에 정
한대로 하며 인색하게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
를 사랑하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인색한 자는 하나님도 그러한
사람에게 인색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자가 되기를 바랍니
다.
많이 거두는 농부
성경 본문: 고후 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농사를 지으려면 논이나 밭같은 땅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엔 심을
씨앗이 있어야 하고, 심을 사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 이 밖에 비료라든지 농약들도 필우라지만 그런 것은 다 조금 전
에 말한 땅, 씨앗, 농부 다음에 들여야지 하는 엉뚱한 욕심만 부리다
니 참 웃기는 일이지요. 이건 마치 서울은 동쪽인데 북쪽으로 가면서
서울 가야지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을 정도지요.
김화홍이란 농부와 강두식이란 농부가 나란히 지붕을 맞대고 살고 있
었습니다. 김화홍 농부네는 식구가 여덟인데 강두식 농부네는 아홉식
구였어요.
감자를 심게 되었습니다. 봄입니다. 밥도 다 먹히고 간식도 자꾸 먹
고 싶어지는 봄철이 된 것입니다. 해가 길어진 탓입니다.
김화홍 농부는 감자를 아끼지 않고 먹었습니다. 그러나 강두식 농부
는 밭에 심을 씨 감자를 아주 토실토실 여문 것으로 골라 넉넉히 덜어
놓고 규모있게 조금씩 필요한 때가 되면 그때만 먹었습니다.
밭에 씨 감자는 심는 날이 되었습니다.
김화홍 농부는 400평 밭에 다 심지 못하고 말았지만, 강두식 농부는
700평에 넉넉히 심을 수 있었습니다. 김화홍 농부는 심을 때 감자를
너무 잘게 쪼개고 쪼개어 마치 구슬만큼 작은 씨 감자를 심었고, 강두
식 농부는 크고 눈이 똑똑한 감자를 큼직큼직하게 잘라 아끼지 않고
넉넉히 크게 쪼개어 심었습니다.
7월 장마철이 되기 전에 두 집이 다 감자를 거두어 들였습니다. 수확
량은 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 많이 거두었을까요?
김화홍 농부는 아끼면서 깍쟁이같이 심었습니다. 강두식 농부는 그
반대였습니다.
이것은 헌금하는 태도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내는 것은 농부가 자기 밭에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
습니다.
이것은 남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는 태도에 대한 말씀도 됩니다. 우
리가 불쌍한 이웃을 돕는 것은 농부가 자기 밭에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노랭이짓, 깍쟁이짓하며 바들바들 떨면서 억지로
헌금을 반가와 하시지 않는다고 성경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보상을 받을 생각을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고 모른체하고 지나가는 사람
도 축복하기 싫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불쌍히 여기고 기쁜 마음으로 넉넉히 헌금
하는 사람에게 더욱 넉넉히 갚아주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농사짓는 농부입니다.
우리는 모두 많은 곡식, 많은 과일과 채소를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농사에 쓰일 씨앗을 아까와서 바들바들 떨며 적게 심으면 우리가 결코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게 바칠 때 기쁘고, 넉넉히 그리고 불쌍한 사람을 도울 때 노
랭이짓 하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하나님께선 충만히 갚아 주십니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
성경 본문: 고후 9:8-15, 마 5:43-48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말이나 글로 표현하려고 할 때에 과
연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무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성경
에서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너무 크고 넓으셔서 도저히 필설로 나
타낼 길이 없다는 감격적인 고백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들이
이렇쿵 저렇쿵 말한다면 표현력의 부족과 잘못으로 그 큰 사랑을 손상시킬
우려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은사'라고 한것이 가장 적
절한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세상에는 한 인간에게 대하여 지나친 찬사와 영광을 돌림으로써 나중에
어색하고 아주 부끄러운 결과가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태
양과 같다' 혹은 '바다와 같다'...... 고 했을 때 그 사람이 과연 거기에 미치지 못하게 되면 결국은 그것은 아부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름이나 아호를 너무 잘 지으려 해도 탈입니다. 사람은 자기 이름
만큼도 못할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믿고 나서 자기 자신을 '죄인중에 괴수'라고 하였습니
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요 어리석은 자요 옹졸한 자요 반역하는 존재들입니
다. 거기에 비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인간들에게 찬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일은 아무리 하여도 지
나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좋은 말을 다 동원하여도 부족할 것 뿐
입니다. 우리가 지금 부른 찬송가 404장은 복음성가를 찬송가에 편입한 것인
데 여기 3절의 가사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 할 수 없겠네.'
는 작사자가 어느 정신병원의 벽에 쓰여진 낙서를 보고 그것을 그대로 인
용한 귀절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똑똑하고 학식과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도 그들이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면 나중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지만 비록 정신병자가 한 말 일
찌라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은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은혜를 받는 귀중한
찬양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
님의 사랑을 과연 어떻게 감사해야 할찌 모르겠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아
는 사람은 과연 '말할 수 없는 은사'라고 밖에 달리 무엇을 더 말하겠습니
까? 이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감사하신 은혜를 세가지로 생각하고 깨달음을
갖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생각하여 봅시다. 과연 하나님
은 우리들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
니다. 하나님은 그를 진실히 믿는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평안과 안전을 보장하여 주시고 모든 좋은 은사와 선물을 풍성히 주
시고 언제나 우리를 잘 되게 하여주십니다. 성서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
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약 1:17)고 말씀하셨
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고 하였습니다.
옛날 요셉은 참으로 불행하고 억울한 처지에 놓였었습니다. 그는 공연히
형들에게 미움을 삿고 애급에 노예로 팔려 갔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
이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포자기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좋으신 하나님의 뜻을 믿었습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지만 옥중에서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의 범사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창 39:23) 그가 나중에 총리대신이 되고 형들이 그 앞
에서 떨며 불안해 할 때에 그는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음으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
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
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5-)
고 말하면서 그는 형들을 안심시키고 피차 좋은 마음을 갖도록 하였습니
다. 요셉은 참으로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좋으신 하나님
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분으로 믿으십니까?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을 '좋으신 분'으로 알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 주인을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
서 모으는 굳은 사람으로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주인에 대한 올바른
이해 올바른 신앙을 가지지 못한 이 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가 생각
하고 믿는 바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들이라면 나를 쓰시는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을 고아처럼
홀로 있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소원과 간구를 다 알고
계시며 어떻게 해서든지 그 소원을 이루어 주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를 반드시 성공하게 해주시지 실패하게 하지 아니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
리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지 추호라도 나쁜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성서는
보잘것 없는 새나 꽃도 먹이고 입혀 주시는데.....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 하시고 내어 주신이가 어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니 주시겠느냐고 성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
든 것을 선하게 하여 주셨을 뿐 나쁘게 해주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은 형언하기 어려운 은혜이요 말할 수 없는 은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본성이 좋으시기 때문에 그 좋으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잘되게 하셨고 또
잘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때마다 우리의
모든 일마다 형통하게 하시고 잘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일들을 생각하
시고 그 놀라우신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
니까? 좋으신 우리의 하나님 그 분이 가지고 계신 계획과 목표는 과연 무엇
입니까? 하나님이 세상나라 왕들처럼 자기의 세력을 넓히고 땅을 확장하려는
생각을 가지실까요? 하나님이 세상의 왕들처럼 적을 진멸하고 원수들을 심판
하며 자기의 권세와 위엄을 높이려고 하는데 뜻을 두고 계실까요? 하나님이
인간들처럼 원수들을 보복하고 악한 자들을 진멸하려는 데에 당신의 최종적
인 목표가 있을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원래의 목표는 그런 것
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과 그 최대의 목적은 무엇입니가?
그것은 구원입니다. 인간구원이 하나님이 세우신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하
나님은 사람을 죄악에서 구원하시려고 하는데 가장 열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그 숱한 사람들이 단 한사람이라도 멸망에 이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한마리 양을 찾는데 열심과 정
열을 쏟아 부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사람을 살려 내
시려고 그 외아들까지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
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
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고 하였으며,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
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
라.'(눅 15: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표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은 얼마나 배신과 반역
을되풀이 하였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인류를 그 죄악에서 구원하여 내시는 구원의 역사가 역력
히 기록되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잘못할 때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묵
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마다 인도자와 구원자들을 세워 구원하시고, 또한
말씀을 선포하는 자를 세워 깨닫게 하시고, 경고를 발하시고, 때로는 원수들
을 통하여 몽둥이로 때리시고 결국에는 구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된 것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그 섭리에 의하여 된 일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중에 구원받은 은혜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소유해도 구원을 잃었다면 아무 소
용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그가 회개하기 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노골
적으로 반항하고 나섰던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그는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것
을 복음의 사도로 세워 주신 은혜를 생각하고 그것을 '말할 수 없는 은사'였
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죽게 하면서까지 나같은 것을 구원하
여 주신 일.....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최대의
목표는 인간구원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나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인간에 대한 사랑때문입
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동기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니까...그러하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혹시 징계를 받아도 하나님이 왜 나를 징계하
시는지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만일 징계가 없다면 그것은 사생자요 하나님
의 참 아들이 아닌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의도와 그 동
기를 살펴 본다면 우리는 정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나
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들과 대적자들에게 까지도 미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 개인 개인을 사랑하시고 이땅의 온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처럼 옹졸하지 않습니
다. 적개심이나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당신의 의롭고 선한 것으로 모든 사람
에게 혜택을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십니다. 그래서 땅에 소출이 풍성하게 하시
고 모두 다 잘 먹고 잘 살게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고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며 저희에게 곡식을 주
시며 초장에는 양때가 번성하게 하셔서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감사의 노
래를 부르게 하여 주십니다.'(시 65)
하나님은 저 북한 땅에도 풍성한 소출이 있게 하십니다. 그들도 역시 하
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풍성한
소출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저 이슬람 교도들에게도, 힌두교도들과 불교도들
에게도 먹을 것과 쓸 것을 주셔서 풍성히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원수와
이방인들에게도 해와 비를 내려 주셔서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대한
민국을 특별한 은총으로 돌보아 주시고 우리의 모든 일에 '영광의 관'을 씌
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할 때에도 여전히 먹을것 입을것 쓸
것을 주십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는 민족과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산야에 모든 동식물에게도 먹을 것을 주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보잘 것없는 갈가마귀도 주리지 않고 먹고 살게 하십니다. 모든 은
총 그것을 생각할 때에 그 은혜는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또 그 내려 주
시는 축복은 무한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먹여 주시지 않
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모
든 생명에게 식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악인과 원수
에게까지도 그 은사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 만물과 만민을 먹여 살리시는 우
리 하나님! 우리는 그 은혜를 감사하고 그 사랑을 찬양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이 항상 선하시고, 특별히 우리들에게 좋으
신 분이라 것, 그것이 감사의 근거된다고 믿습니다. 나에게 언제나 좋으신 그
분, 내 인생길에 항상 좋으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죄악과 멸망에서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감
사의 이유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를 바랍니다.
영원을 위한 삶
본 문 : 고후 4:16-5:7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오래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백년을 넘기는 자들이
그렇게 많지 못하다. 월남 이상재 선생이 나이가 많았을 때 청년이 선생을 찾아가서 "선생님, 신문을 보니까 일본의 수상은 1백세를 능히 살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으며 영국의 어떤 사람은 1백20세를 살 수 있다고 말하는데 선생님은 몇 세까지 사실 수 있습니까?"라고물었다.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나를 그런 사람들과 비교하지 마시오. 나는 영원히 삽니다"라고 말했다.
"영원이요?"라고 묻자 "그렇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 땅에서 보람있게
일을 하다가 영원히 산 다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본문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아니 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하였다. 여기에 "낙심하지 아니하나니"라고 한 것은 성도의 삶이 바로 영원을 위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을 중심 하여 "영원을 위한 삶"이란 제목으로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의 삶을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영원을 위하여 사는 이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것으로 만족을 누리지 아니하고 영원을 위하여 산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 네 가지를 본문에서 말하고 있다.
첫째. 겉 사람은 후패하기 때문이다. 본문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하였다. 여기 보면 우리 사람에게는 겉사람과 속 사람이 있다. 여기 "겉 사람"은 우리의 영혼을 싸고 있는 "육신"을 의미하는 것이며 "속"은 바로 육신 속에 있는 영혼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겉 사람은 후패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의 육신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점점 허물어져 가는 것이다. 운동을 해도 허물어져가는 것이다. 음식을 조절해도 허물어지는 것이다. 얼마전 신한국당 최형우 고문은 건강에 무척 신경 쓰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뜻하지 아니하게 쓸어져 그의 육체가 허물어지는 것을 본다. 그래서 옛시에 "한 손에 막대 잡고 한 손에 가시 잡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하니 백발이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고 하였다. 우리의 육체는
질그릇과 같아서 금이 가고 깨져 쓸모 없이 버리게 된다.
둘째 환난은 잠시이기 때문이다. 본문17절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라고 하였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수많은 어려운 일을 많이 만난다. 특히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는 환난이 많고 핍박을 받아 고통을 받고 살았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무참히 죽어 가고 사도들이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히
11:36-38절에 보면 희롱을 당하기도 하고 채찍질을 당하기도 하고 결박을 당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과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기도 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아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 속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본문의 저자 사도바울은 고후11:23-27절에 보면 옥에 갇히기도 하고 강도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였고 수고하며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자기의 받은 환난과 고통을 말하고 있다.
이런 환난은 것은 정말. 간담을 서늘케 한다. 모두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애매히 고난을 당한 것이다. 얼른 생각하고 현실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환난과 고난은 잠시 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을 벗어버리면 고난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롬8:18절에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고 또 벧전5:10절에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잠간 고난을 준다"라고 하였다. 성도가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을 경하다고 했고, 장차 받을 영광은 중하다고(17) 했다.
다시 말하면 성도가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은 잠시 잠깐일 뿐 아니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때 아주 가벼운 것이다. 수치로 계산한다면 1kg의 환난을 당했다면 영광은 숫자로 계산할 수없을 정도이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자는 환난을 피해 배교하기도 하며, 환난 중에 낙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환난을 통하여 세상 줄을 끊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생활이 강화되고 하늘의 법칙과 성경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고 무슨 일을 당하든지 더욱 주님을 의뢰하게 만들고 환난을 통하여 육체는 고통을 당하나 영혼을 찾고 이생을 잃었으나 하나님 나라를 얻은 줄 알고 감사하며 찬송하게 된다.
셋째. 보이는 것은 잠간이기 때문이다. 본문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 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에 "보이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 있는 권세도 명에도 지위도 찬란한 문화도 생명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잠간일 뿐이다.
둘째 영원을 위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가 영원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 그
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영원을 위한 삶을 살수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본문5: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다.
첫째,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 본문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이라고 했는데,여기 "장막집"은 우리의 육신을 의미한다.
오늘날 성도들은 육신의 장막을 영원히 간직할 줄로만 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해도 너무나 보이는 것에 치중하는 것을 본다. 돈 문제,질병 문제, 직장 문제 등에 치우친다. 예수 믿으면 돈을 많이 모아야 하고 수지가 맞아야
하고 물질의 복을 받아야 하고 질병도 없이 건강하게 살아야 하고 직장에도 어려움 없이 형통하여야 한다. 이런 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포기해 버리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이런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은 잠간이지만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했다. 우리의 육안에 보이는 것은 멀지 않는 장래에 끝나 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의 숨이 끊어지는 날에 다 무덤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친척 중에 관리로 오래 있었던 분이 있었는데 그분의 장례식에 가보니 평생에 받은 패가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 죽고 나니 그것 다 불에 태우고 땅
에 묻어 버리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죽으면 이런 것들이 다 헛것이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둘째 영원한 집이 있는 줄알고 살아야 한다. 본문에 "영원한 집이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다. 이 영원한 집은 우리의 영혼이 가서 머물 수 있는 영원한 처소를 의미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영혼이 있는데 이 영혼은 집이 있는데, 하나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머물수 있는 육신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을 떠나가서 살 수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이 땅에 있는 장막은 사람이 지은 집이므로 무너지게 되지만 영원한 집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므로 무너지지 아니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집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지어 주신 영원한 집인 것이다. 이 집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이 집을 위하여 온전히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집은 예수님이 예비하신 집이다. 요14:3절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아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였다. 날 구원하신 부활의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내가 가서 머물
수 있는 영원한 집을 준비하시겠다고 하셨다. 이놀라운 사실을 알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셋째 이것을 사모하며 살아야 한다. 본문5:2절에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나니"라고 하였다. 온전한 성도의 삶은 바로 저 천국에 이르러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집으로 온전히 덧입기를 사모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길을 예수님께서 예비하셨으니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 영원한 집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헬렌켈러가 존경을 받는 것은 그가 눈먼 소경이요 말 못하는 벙어리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엿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을 다 고쳤기 때문이 아니요, 삼중고의 현실 속에서도 영원한 집을 발견하여 현실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의 삶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다.
넷째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본문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대로 살다가는 영원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정말 우리눈에 보이는 것 없어도 내 손에 잡히는 것 없어도 날 사랑하시는 주님의 권능 믿고 살아갈 때 환난도 이기고 곤고도 이기고 승리하게 되어 이 세상 마치는 그날에 영원한 나의 집 저 천국에 이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사는 동안에 영원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의 것은 잠깐이요 저 세상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영원을 위한 삶의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또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 영원한 집 손으로 짓지 않는 하나님이 지으신 집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집을 사모하며 그 집을 그리워하며 이 세상에 것보다 영원을 위하여 힘쓰고 애써서 살아가면 반드시 우리는 영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영원을 얻기 전에 이 땅에서부터 영원의 삶이시작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었다. 본문4절에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함이라"고한 것은 우리가 생명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땅에 살면서 두 가지의 삶을 살게 된다. 하나는 죽는 삶이다. 이는 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하여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생명을 향하여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어디에 속하느냐? 에 따라 그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삼킨바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나 나의 죄와 허물을 온몸에 걸머지고 십자가에 못밖혀 죽으신 예수그리스도를 인하여 내죄가 사함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바 되어 생명에 삼킨바 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삶은 죽는 삶이 아니라 사는 삶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재미있게 살아도 죽는 삶이요 예수믿고 사는 삶은
힘들고 어렵고 핍박과 환난을 만나 고생을 하여도 그 생은 생명의 삶인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요11:2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 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미 생명에 삼킨바가 되었으므로 이 땅에 살다가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되어있는 것이다.
둘째 성령의 보증으로 살아간다. 본문5절에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
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생명에 삼키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수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예수 믿는 자들에게 보내 주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증거를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 이시니라"고 하였다. 이제 우리는 생명에 삼킨바 되었으므로 죽음이 두렵지 않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에 속한 자들임으로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죽는 것이 하나도 두려울 것이 없다. 왜냐하면 죽어도 사는 자들이기때문이다.
죽음이란 단지 잠시 해어지는 이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멀지 않는 장래에 우리도 죽음의 관을 통과하면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보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이다. 오늘 우리 중심에 성령님께서 내재하시는가?를 확인하여야 한다. 즉 우리가 성령을 받았느냐? 는 것이다. 내 심령속에 주의 성령님이 계시기만 하면 우리는 영원을 얻은것이다.
셋째 주와 함께 거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본문8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로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우리가 주와 따로 거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주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이 땅에 것에만 관심을 가지지 말기를 원한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부요하게 되는 것만이 축복이 아니요, 가난하면서도 어떻게 감사하며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눈먼 사람이 반드시 눈을 떠야만 축복이 아니다. 예수님 앞에 군중이 제일 많이 모였을 때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후였다. 이유를 아시고 "너희가 떡을 먹은 연고로 나를 찾는도다 " 예수님이 육신의 떡을 주지않고 생명의 떡에 대한 말씀을 하시니, 다 가고 12제자만 남았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는 "주여 영
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그렇다. 육신의 떡이 아닌 영생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 멘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말 씀 : 고후 5: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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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것인가? 를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었다. 우리가 예수믿는 사람답게 사는것이란 먼저 내가 내자신을 깨뜨리고 죽이는 생활이어야 한다.그리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여야 하고 발견한 주의 뜻을 향하여 열심히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생활인 것이다.사실 내가 살아있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수 없는 것이다.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아무것도 슬모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우리가 가만히 생각하여 보자 여러분과 나는 쓸모없는 인간인것이다.그래서"아하나님의 은혜로 이쓸대없는
자"라고 찬송하는 찬송이 진정한 찬송인것이다.자아가 덜 깨어졌다는 것은
구원은 받았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삶하고 한참 먼거리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다고 말은 하지만 성숙하지 못할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우리들에게 사도바울은 본문17절에"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이는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생활을 나타내 주는 말씀인
것이다.오늘은 본문을 중심하여"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제목으로
잠시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구원의 의미를 올바로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려면 구원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첫째 구원은 방향의 전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본문14절에"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 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것이라"고하였다.여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했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방향을 전환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고 계신다는 말이다.
그러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방향이 어떻게 전환하여야 하는가?이제까지 죄를 향하여 살아오던 우리의 삶을 바꾸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꿀수있는가?그것은 본문에"한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사람이 죽은것이라"고하신 말씀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인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것
은 바로 죄인된 모든 사람이 죽은것이된다는 것이다.죄인된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여 살아나셨기 때문에 죄인된 우리도 주님이 사흘만에 부활하여 살아나신것 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하는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할것은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지 모든것을 버리거나 포기하라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모든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이있다. 즉 가정도 포기하고 직장도 포기하고 사업도 포기하고 돈도
포기하고 명예도 포기하고 그저 예수만 믿어야 되고 교회 생활만 전념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이있다.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빼앗기 위하여 우리를 불러서 구원시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러 구원시킨것은 풍성하고 넘치는 축복을 주시기 위함인것이다.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망하게 하시기 위하여 부르셨다면 예수믿는 모든사람이 다망하고 예수 믿을 사람 아무도 없을것
이다. 우리는 모든것을 가지고 삶의 방향만 바꾸면 하나님께서 풍성한 것으로 복을 부어 주실것이다. 둘째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는 삶이다. 구원이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므로 이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내가 대신 살아야 하는것이다.
본문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에"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라는 말은"자기 중심의 인생"을 의미한다. 예수믿고 구원얻는 성도들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업이나 돈이나 명예나 권세나 이런것을 포기하고 버릴것이 아니라 이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것임을 알아야 한다.이제
까지는 이모든것을 내중심으로 나만을 위하여 죄짓는 일에만 사용해 왔으나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모든것을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이런것을 빼앗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욱 풍성케 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이유를 알아야 하는것이다. 그이유는 다른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인것이다. 지금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것을 가지고 나의 인생을 사는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의 삶을 살아야 하는것이다. 예수님이 이세상에서 못다한 일들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가정을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전력을 다하여야 하는것이다.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여야 한다.
가정의 모든일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되도록 초점을 맞추어 나아가야
한다. 직장생활도 주님의 뜻을 이루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사업도 주님의 뜻을 이루는것에 초점이 맞추어저야 하는것이다. 돈도 명예도 권세도 모두가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초점을 모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시키신 목적인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안에서 있어야 한다.
우리 성숙한 성도들은 그의 삶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성숙한 그리
스도인의 생활을 할수있는것이다. 본문17절에"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여기에"그리스도안에 있으면"이라고 했다.이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의미하는것이다.사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밖에 살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하는것이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이라고 했는데 이는"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사람마다 삶의 구심점이 있다.어떤이는 삶의 구심점을 자녀교육에 두는 이도 있고 부부간의 사랑에 두는 자도 있고 자기가 하는 사업에 두는 이도 있고 물질에 두는 이도 있고 죄짓는데 두는 이도 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중심은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한다.
분명히 우리성도들의 삶의 중심이 그리스도를 향하여야 한다는것이다.우리는
무엇을 하던지 예수그리스도를 생각하여야 한다는것이다. 우리는 항상 예수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는 것을 말한다.내가 이생각을 하는것이 내가 이일을 하는것이 주님을 어떻게 하는것이 되는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고 주님께 유익이 되지 않으면 하지말아야한다.
그리고 주님께 유익이 된다면 내게 손해가 되어도 시행하여야 하는것이다. 어떤 때에는 내게 엄청난 손해가 있을수있다.그러나 주님께 조금이라도 유익이 된다면 그일을 행하여야 하는것이다.이것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삶인 것이다. 이런 삶을 살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있는 것이다.
둘째.그리스도안에 사는 삶은 어떤가?
본문에"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안에 사는자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것이다. 예수 믿기 전하고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고 있다. 예수 믿기전에 우리의 신분은 어떠했는가? 사단의 자녀요 죄악의 자녀였던 우리가 아닌가? 사도바울은 엡2:3
절에"전에는 우리도 다 그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라고 하였다. 여기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였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믿기 전에 우리는 다 사단의 역사하는 가운데서 살면서 죄만 범하였기 때문에 그죄로 인하여 죽을수밖에 없는 진노의 자녀였다는 것이다.그러나 예수안에 살면서 부터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라고 부르는하나님의 자녀가 된것이다.아버지가 바뀐것이고 가문이 바뀐것이요 신분이 바뀐것이다.
근본이 바뀐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인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
었으므로 사도바울은 본문에서"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라고 하였다. 여기에"
이전것"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피조물이된 우리에게 완전히 해결되고 문제되지 않은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세가지인데 엡2:1절에"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로 알수없는 죽었던 자들이였음을 말하고 있다.둘째 엡2:2절에"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라고 하였다. 이는 사단의 권세에 얽매여 그를 추종하고 지배를 받았던 자들이다.
셋째는 엡2:3절에"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이다.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이세가지 문제가 해결된것이다.우리는 성숙한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바로 예수안에서 사는 것에서 부터 시작이 됨을 알아야 한다.
셋째.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게된다.
우리가 이렇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게 되면 두가지의 놀라운 은
혜를 입게 되는데 우리는 이를 누리면서 사는 귀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본문18절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라고 하였다. 여기보면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라는 말 은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살면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게가 회복 되어진다는 것이다. 진노로 인하여 징계를 받을수 밖에 없던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징계 대신에 사랑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것이다.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을 떠나 있었으므로 바로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
께 가까이 나아갈수없는 자였다.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못밖혀 죽으
심을 인하여 우리가 부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부터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 할수있고 또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수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이모든 것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내려주시는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것이다
그리고 이제 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것이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것은 우리가 하늘나라 갈때까지는 사단이 가는 길목마다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앞에있는 사건들마다 사단이 개입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그래서 우리는 사건마다 예수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것이다.문제를 만날때마다 예수이름을 찾아야하는것이다.
롬10:13절에"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기
때문인것이다. 사실 자녀는 다 자라기 까지는 부모의 빽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기는 어리고 힘이없어도 아버지가 사장이면 사장의 권세를 가지고 살게되고 장관이면 아들도 장관권세를 가지고 사는것이다.그러므로 문제가 생기면 아버지 이름만 대면 해결이 되는것이아닌가?
둘째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지는것이다. 본문18절 하반절에"또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라고 했다. 그리스도안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이 되어짐을 알아야한다.내가 먼저 화해하고 내가먼저 화목하게 하여야 한다. 그럴때 상대방도 화해가 있고 화평이 이루어지게 되는것이다.
잠16:7절에 "사람의 행위가 여호를 기쁘시게 하면 그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하시느니라"고하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믿으면 사람과의 관계도 안좋아진다고 믿고있다. 물론 처음에는 조금 그럴수도 있다.그러나 그것을 그렇지를 않는것을 알아야 한다. 핍박받는 사람중에는 정말 예수때문에 핍박받는 사람보다도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 때문에 핍박 받는 이들이 많이 있음을 알수있다.자기의 나뿐 습관이나 성격이나 고집이나 이런 문제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때가 많이 있다는것이다.신앙생활 한다고 가정을 팽게 처 버리고 남편을 무시하거나 남편의 약을 올리거나 남편의 성격을 더럽힘으로 덤으로 예수를 욕먹일때가 없지않는가?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지금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내앞에 있는 그어떤 어려움이나 위기가 와도 문제없는것이다. 우리는 망해도 문제없다.그리스도께서 해결하여 주실것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사도바울은 빌4:13절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것을 할수 있느니라"고 하였다. 우리모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원한다.
아 멘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
말 씀 : 눅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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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실에서
지금은 거의 모든 집이 깨끗한 수세식 화장실을 쓰지만 농촌에 가면 아직도 많은 집이 재래식 화장실을 씁니다. 재래식 화장실은 화장실이라기 보다 변소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변소는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많이 있어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냄새 입니다. 코를 찌르는 냄새를 참을 수 가 없습니다. 변소에 갔다가 오면 그 냄새가 온 몸에 다 배어 버리고 맙니다. 변소 갔다가 방에 들어가면 옆에 있는 사람이 얼굴을 찡그립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변소에 들어가는 사람은 처음에 잠깐만 냄새를 맡을 수 있고 조금만 지나면 그 냄새를 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냄새를 느낄 수 가 없습니다. 냄새가 너무나 강해서 코의 신경이 무디어 졌기 때문입니다. 변소에 들어간 사람은 그 냄새를 못 맡고 오히려 방에 있던 가족이 변소 냄새로 얼굴을 찡그리게 되는 것입니다.
♠ 여러분의 몸에는....
이렇듯, 사람이 어떤 일을 했느냐에 따라서 .... 어디를 갔다 왔느냐에 따라서.... 냄새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술집에 다녀온 사람은 몸에서 술냄새와 함께 담배냄새가 납니다. 생선을 팔러 다니는 사람의 몸에는 생선 비린내가 납니다. 불고기 집에 갔다온 사람에게는 맛있는 불고기 냄새가 납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어떤 냄새가 나야 할 까요?
여러분은 길게는 아주 어려서부터 그리고 짧게는 한달 정도 교회에 다니는 어린이들입니다. 적어도 1년 이상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에 다닌 사람은 1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다니지 않는 친구와 무엇인가 다른 냄새가 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 전도사님과는 대학교 시절에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술도 잘 마시고, 입에서는 욕도 잘 나옵니다. 전도사님 눈에는 그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전도사님이 그 친구와 이야기 하다가 깜짝 놀랄 만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 친구에게 교회를 다녀 보라고 전도하는데, 그 친구는 아주 어릴 때 부터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일이 되면 성경책을 끼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 친구에게서 교회의 냄세를 맡을 수 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냄새를 맡을 수 없었습니다. 그 친구에게서 맡은 냄새라고는 술냄새와 담배 냄새, 그리고 입에서는 욕냄새..... 손에서도 발에서도 머리에서도 어디에서고 예수님의 냄새를 맡을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친구들도 가끔 그런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너도 교회 다니니? 너는 교회 다닐 것 같지 않은데?
우리는 가끔 이러한 말을 듣지 않습니까? 이런 말을 듣는다면 그 동안 우리의 몸에서 예수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진실하게 교회에 다녔다면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예수의 냄새가 났을 것입니다. 친구는 우리를 보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그럴 줄 알았어..... 너는 교회에 다니는 앤줄 알았어... 라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 예수 냄새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냄새를 내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교회 생활에 열심인 사람입니다. 주일에 교회를 빠지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친구가 일요일에 어디 놀러가자 말해도.... 안돼! 나는 주일에는 교회에 가야 해! 라고 말할 때 우리의 몸에서는 예수의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입에서 유행가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찬송과 복음송과 동요만 나오는 사람입니다. 유행가가 다 나쁘지는 않지만 우리 어린이들이 부르기에 적당한 노래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부를 노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길을 갈 때나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하나님을 찬양해 보세요. 우리의 몸에서 예수 냄세가 날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 냄새가 납니다. 학교 점심시간에 용기를 내어 기도하고 밥을 먹어 보세요. 그러면 친구들이 아~ 제는 교회에 다니는 애구나 라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우리의 손과 발에서 예수의 냄새가 나는 어린이 입니다. 정작 우리의 손과 발에서 예수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수의 냄새를 보이기 위해서 주일에 교회가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들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나쁜 냄새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아니? 저런 애도 교회다니니? 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우리의 손과 발이 친구에게 봉사할 때, 화해의 손을 내밀고, 전도의 발을 가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의 몸에서 예수의 냄새가 풍겨나는 것입니다.
예수의 냄새는 사실 겉모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겉모양은 나의 모습입니다. 예수의 냄새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옵니다. 겸손할 때, 자기를 낮추고 예수님을 높일 때... 예수님의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향가를 품은 향수병과 같습니다. 병 뚜껑이 닫혀 있으면 향기가 나지를 않습니다. 이 뚜껑을 연다면 냄새가 납니다. 하지만 이 뚜껑이 때때로 닫힐 때가 있습니다. 교만이, 욕심이, 분냄이, 그만 뚜껑이 됩니다. 혼자 잘난채 할 때마다 이 뚜껑은 닫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장위 교회 어린이들은 교회생활, 기도생활, 전도생활, 봉사의 생활, 겸손의 생활을 열심히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교만으로 뚜껑이 닫힐 때 마다 기도로 그 뚜껑을 여는 우리 어린이가 되시길 바랍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말 씀 : 고후 4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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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하므로 우리가 이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 낙심하는 성도들...
사람이 살다보면 잘 될때가 있는가 하면 안될 ㄸ도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역시 잘 될때가 있는가 하면 안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잘될 때 좋은 일만 있을 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정작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뭔가가 안될 때입니다. 바로 이때 가장 먼저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은 "낙심"이라는 불청객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교회안에서,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낙심"하여 교회를 떠나거나, 아니면 시험 가운데 빠져서 신앙을 떠난 행동 가운데 빠져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이러한 모습은 없습니까? 낙심을 글자 그대로 풀이해 본다면 "마음이 떨어지다"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런 말을 혼자 중얼거립니다. "내가 왜 이일을 시작했지?" 주의 일에 뭔가 해보려고 그 일에 뛰어 들었다가 차츰 시간이 지나 가면 그 일이 부담이 되기 시작합니다. 무언가 방향도 잃어 버리고, 지치기 시작하면 우리는 다시 이 말을 혼자 중얼 거립니다.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던고!"
이러한 말을 우리 마음 속에 해 보신일이 있으십니까? 이러한 절망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는데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며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공작입니다.
♠ 사도 바울의 낙심.
오늘 읽은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직분 맡은 자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의 편지입니다. 고린도 후서 3장에서 직분 맡은 자들을 바울은 "새언약의 일군"이라고 부르며 주의 일군된 자의 영광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느 직분보다 새 언약의 일군된 것이 더 큰 영광의 직분이라고 말합니다. 영혼을 살리는 직분이기 ㄸ문입니다. 영혼을 돌보는 직분이기 ㄸ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임을 받아 그 분의 뜻대로 사랑을 나누고 섬기기 위한 직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참으로 영광된 직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한 직분이기에 바울은 이 직분 맡은 자들이 낙심하지 말고 충성되이 일할 것을 당부합니다.
다 읽지는 않았지만 고린도 후서 4장 전체를 통해서 바울은 낙심하지 말것을 세번 권고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4장 1절에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8절에는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16절에도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말이 참으로 고린도 교회와 또한 지금 우리 믿는 성도님들께 위로와 기쁨이 될 줄을 확신합니다.
바울처럼 낙심할만 한 상황이 많았던 사람이 있었을까요? 그는 인간의 눈으로 볼때 참으로 많은 위험과 고난과 절망속에 낙심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먼저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합니다. 낙심합니다. 자기가 무엇인가 할수 있노라고 자신했던 그의 마음이 번번히 실패로 돌아갈 때마다 그는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고 낙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이게 웬일입니까? 나는 참 곤고한 사람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나 자꾸만 육신의 명령을 따라 삽니다."
그는 또한 자기 민족으로 부터 받는 고난과 박해에 대해 절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자기가 지옥에가고 자기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사랑하는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고 옥에 갇히고, 고소 당하는 일들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낙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부터 배신감을 당한 느낌이없을 것입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온 몸을 바쳐 일하는데, 그들은 바울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으며 바울을 돌로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 나라가 더디 오는 것에 대하여 낙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지연과 하나님 나라의 지연은 바울 뿐만 아니라 모든 초대교회가 겪은 절망이었습니다. "주님 어서 오십시요."라고 기도하며, 자신이 가진 것 다 버리고 주님이 다시 오시기만을 기다리던 1세대 기독교인들은 낙심하여 교회를 떠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을 낙심 시키고 절망시키려 하였던 원인들을 바울은 참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힘으로 극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생길 때마다 바울은 "왜 내가 이 일을 시작했던고!"라고 한탄하고 있지는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매번 다시 일어나 주님의 사역을 시작했건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낙심하지 마시오"라는 권면은 고린도 교회에 큰 위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지금 낙심하고 실의에 빠진 우리에게도 큰 위로와 회복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린도 교회는 지금 낙심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1-6절 까지의 말씀을 본다면, 고린도 교회가 열심히 전도함에도 열매가 보이지 않음에 낙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큰 열심을 가지고 전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결과만을 바랄 때 우리는 낙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현대는 모든 것을 결과를 가지고 평가합니다. 얼마나 나왔느냐? 얼마나 걷혔느냐? 어떤 업적을 남겼느냐? 하는 것을 따집니다. 현대의 경쟁 사회속에서 동기는 별로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결과만을 가지고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고 교회를 판단하고 우리의 사역을 판단하기에 우리는 지치고, 쉽게 낙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낙심하지 말것을 말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남겼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그일에 임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해 줍니다. 동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이라면 너무 결과에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은 세상의 악신이 그들의 마음을 가리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은 이미 멸망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전도하다가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낙심할 필요가 없음을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동기라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느냐? 성령을 위해 심느냐?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왜 결과에 그렇게 연연하느냐?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보다 네 자신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냐? 너희가 전할 것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아니냐? 너희는 그의 종이 된것이 아니냐? 너희가 진리를 나타내고자 했으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한다.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낙담하는 것은 내 자신을 드러내고 자 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동부를 전담하다가 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많이 나오게 할 수 있을 까? 라는 고민입니다. 아이들이 많이 나오게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연연하여 비 복음적인 프로그램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단지 재미를 위해서 아이들이 그 재미를 맛보게 함으로 많이 나올 것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 효과는 단기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재미 없어 지면 아이들은 떠나는 것입니다. 그 때 다시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적이면서도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든지 재미는 없지만 아이들을 꾸준히 신앙으로 지도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7절 부터 15절 가운데서는 고린도 교회가 받는 핍박과 고난에 대해서 낙심하지 말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말하는 것만으로도 고난과 핍박을 받기에 충분한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상황을 사도 바울은 여섯가지의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첫째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둘째가 답답한 일을 당하는 것입니다.
셋째가 핍박을 받고
넷째가 거꾸러 뜨림을 당하며
다섯째가 예수의 죽음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과
마지막으로 항상 죽음의 위협에 처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난이 얼마나 심하였는지 그들은 모일 때마다 교인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일부터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이 믿는바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13절 하반절에 "믿는 고로 또한 말하느니라."라는 말은 핍박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말고 자신의 믿음을,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에 주저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면 우리에게는 늘 고난이 따라 다닐 것입니다.
불의한 상황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이 증거할 그리스도는 어떤 그리스도 이십니까? 그 분은 바로 정의의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불의한 일에 "예"할 때 이 사람은 "아니요"라고 말하므로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서 그리스도는 사랑의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입니다. 이 일 때문에 오해와 박해를 받게 되더라도 말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희망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 분을 증거하므로 절망하고 낙담한 영혼들에게 새 희망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 가운데 우리가 고난을 당할지라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가 연약한 육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본문이 지적한대로 질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질그릇은 깨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볼품없는 거친 그릇입니다. 보잘 것 없음의 표상인 것입니다. 그 질그릇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그 질그릇이 답답한 일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면 당연히 깨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낙심하지 아니하는 것은 우리안에 있는 보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러한 일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 답답한 일을 당한다라는 의미는 더 이상의 방법이, 더 나아갈 길이 없음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리 사방으로 우겨싸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악심치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아무리 우리에게 길이 없어도 한가지의 길이 우리에게 항상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길인 것입니다. 사방이 다 막혀도 하늘의 길은 열려 있는 것입니다.
제가 신대원 시험을 준비할 때 겪었던 일입니다.
91년 12월에 첫번 시험에서 떨어지고 나서 저는 심한 낙심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적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발표가 났습니다. 합격자 명단에 제 이름이 없다는 안내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심한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하나님, 주님께서 허락하신 길이 아닙니까?"
설상가상으로 생활비도 떨어지고 집에다 생활비를 부쳐 달라고 할 면목도 없었습니다. 하루 하루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요. 그래서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왕 굶는 것 기도하면서 굶어 보자..
기도원에 가서 금식을 하니 얼마나 마음이 편해 지는지... 굶어도 다 함께 굶기 때문에 기뻤고, 또한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며 나의 잘못들을 하나 하나 지적해 주시는데 감격할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기도원에 갔다온 저녁,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와 있는데 제가 아는 전도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주신 일이었습니다. 만나자고 합니다. 만나서 다시금 저에게 확신을 주시고 위로도 주시며 헤어질 때 제 손에 봉투 하나를 쥐어 주셨습니다.
그 봉투 속에 만원 짜리 두장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며 저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먹이시는구나, 낙심할 필요가 없구나..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구나. 다시 세워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손길이 다시 공부하는 1년을 지탱하게 도와 주신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요. 우리가 받는 고난이 아무리 크다고 한들 예수 그리스도가 당한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고난과 핍박으로 질그릇이 깨어짐을 기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육신은 보잘 것없다는 것을 확인 시켜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안에 이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안에 있는 보배가 드러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광의 광채가 그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죽을 때 내 자신의 능력을 떠나 예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할 때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핍박을 받을 때 낙심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질그릇을 의지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16절부터 18절까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빨리 변화 하지 않음에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낙심케하는 상황일지라도 우리가 낙심치 않는 이유는 우리가 영원한 것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을 사모한다면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사모한다면, 지금 우리에게 처한 상황이 빨리 바뀌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은 바로 보이는 것과 잠간 있을 현세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나오는 돌아보다라는 말의 뜻은 헬라어로 `스코푸톤'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목표로 삼다. 주목하다 라는 뜻이라 합니다.
여러분이 돌아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목하고 목표로 삼는 것은 무엇입니까? 잠시 우리가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가 무엇을 목표로 달려 가고 있는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만 돌아 본다면 결국 우리는 낙심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 직분 맡은 자의 자세
낙심한다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엑카쿠멘'이라는 말입니다. 이말의 뜻은 "마음을 잃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낙심하지 말라는 말은 마음 하나 잃지 말자는 뜻입니다.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 다 잃어도 마음을 잃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쓰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그가 주를 의지하기 때문이라고 이사야서 26장 3절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가을의 문턱에 들어 서있습니다.
신년 초에 우리가 새로운 마음으로 직분을 기쁘게 받았을 줄 압니다. 설레임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올해는 잘해 보리라 결심도 하였을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남긴자와 같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칭찬도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직분을 감당키 위해 많은 시간 눈물로 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어떤 마음이 되었습니까? 어떠한 자세가 되어 주님앞에 서 있습니까?
"내가 왜 이일을 시작했던고!"라는 마음이 있지는 않습니까? 낙심되어 차라리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았더면 하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감당은 하고 있지만 억지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가대 봉사에 교사의 일에 구역의 일에 즐거운 마음으로 달려 가는 것이 아니라 마지 못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마음이 되어 있다면 우리는 낙심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낙심하지 말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처음에 가졌던 주님을 향한 마음을 잃어 버리지 말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교회일을 하다가 낙심하였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자세로 교회일을 감당하였는지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결과에 너무 연연하지 않았느냐? 나를 나타내기 보다 너 자신을 나타내려 하지 않았느냐?
내 자신 보잘 것 없는 질그릇을 의지하지 않았느냐? 왜 능력의 근원인 나를 의지하지 않았느냐?
왜 보이는 것만을 바라 보느냐? 왜 잠간 있다가 없어질 것을 추구하느냐? 인내를 가지고 영원한 것을 바라 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이 더 중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다시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을 때이기에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갈 때이기에 그렇습니다.
지금 다시 시작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 저는 보잘것 없는 질그릇입니다. 나를 나타내지 않고, 주님의 주시는 능력으로 인내를 갖고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저를 사용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라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기를 주님은 우리에게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님께 드리는 것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이 가을에 맺을 열매가 아닐까요?
`예'와 `아멘'의 신앙생활
본 문 : 고후 1: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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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긍정적인 신앙인데, 이런 신앙은 자기의 믿음대로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생활을 가져오게 합니다. 이에 비해서, 부정적인 신앙은 파괴적이고 지극히 소극적인 생활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긍정적인 신앙을 가지고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바울사도는 이런 긍정적인 신앙을 본문에서 잘 교훈하셨습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이 세운 고린도 교회에 많은 애착과 관심을 가졌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헬라지역 최대의 항구도시였고,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고, 헬라 지역을 통치하는 로마의 총독부가 있던 곳입니다. 이렇게 큰 도시에 개척한 이 교회는 짧은 기간에 헬라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교회를 떠나 에베소에서 목회할 때에, 고린도 교회에 여러 문제들이 생기고 그들의 신앙이 어린 연고로 바울의 마음을 근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먼저 써 보냈습니다. 그후 바울이 이번에는 빌립보에 있을 때 고린도 교회가 많이 뉘우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그 교회를 권면하기 위해 고린도후서를 써 보냈습니다. 오늘 복음을 요약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예와 아멘의 신앙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20절 말씀을 다시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나니 그런즉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이 말씀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예'는 긍정적 자세를 표현한 것이고 `아멘'은 진실된 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예와 아멘의 신앙이란 어떤 것입니까?
첫째,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자
꾸 없애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이 있고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문
필가이며, 대중 연설가인 지글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벼룩이 방바닥에
놓여 있으면 천장까지 뛸 수 있는 놀라운 점프력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러나 이 벼룩을 병에 담아놓고 뚜껑을 덮어 놓으면 벼룩은 병 안에서 한참 점프를 하지만 병뚜껑에 막혀 떨어집니다. 이렇게 반복한 뒤에 "아, 내 능력은 이 정도밖에 안되는구나"하고 체념한답니다. 그때 병뚜껑을 열어놓아도 천장 까지 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체념하고 뛸 생각을 안합니다. 많은 사람도 이 벼룩과 같은 사고방식을 합니다. 나는 돈이 없으니까, 나는 배운게 없으니까, 나는 몸이 약하니까, 나는 늙었으니까, 무엇을 시도하기 전에 "나는 못한다"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가능성을 파묻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기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어주신 무한한 가능성을 결코 사장시키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귀한 은사를 잘 개발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
기 때문에 무엇인가 할 수 있다. 그러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나는 못한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나는 할 수 있다. 남들이 성공한 이상으로 나도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1950년 8월 23일 동경의 밤은 깊었습니다. 한밤중에 맥아더 사령부에서
작전 참모회의를 했습니다. 해군 참모가 못한다고 반대의견을 냈습니다.
인천항은 좁고 얕기 때문이다. 간만의 차가 심하다. 시간의 여유가 없다.
이런 이유로 못한다고 했습니다. 육군의 콜린스 장군도 부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인천은 낙동강 전선과 멀다. 차라리 군산 상륙이 좋겠다. 미국
국방성과 백악관도 염려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맥아더는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기도하는 중에 인천 상륙을 명령했습니다. 대승을 올렸습니다. 세계 전사에 빛날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했습니다. 이것은 맥아더 장군의 적극적 이고 긍정적인 사고가 이뤄낸 유명한 전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 무슨 일이든지 형통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긍정적인 자화상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둘째, 매일 긍정적인 말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남에게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축복의 말씀을 전해주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던지는 말 한마디가 사람의 일생을 좌절하게 만들수도 있고, 심지어는 생명을 끊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되고 기쁜 소식의 말씀을 전해서 우리 이웃이 창조적인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말이란 자동차의 기어와 같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사용하면 분위기가 부정적으로 가고, 긍정적인 말을 하면 긍정적이 되서 아주 화목하고 즐겁습니다. 자동차의 기어를 앞으로 전진하도록 하고 동력을 넣으면 그 차는 앞으로 나갑니다. 단수를 높이면 더 빨리 달립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말은 후진기어와 같아서 자꾸 뒤로 물러나게 합니다. 이런 부정적 언어를 쓰면 먼저는 자신이 손해고 특히, 신앙적으로 많은 손해를 봅니다. 또한 그 말을 듣는 이들의 마음이 상처를 입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잠 14:3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을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는 입술로
자신을 보전한다"
이해인의 <말의 위한 기도>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좀더 겸허하고, 좀더 인내롭고
좀더 분별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우리가 일상에서 유머를 사용해도 건설적인 유머를 사용해야 합니다. 지
나가는 말 한마디라도 남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말, 복된 말을 사용해서 상
대방의 인격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예와 아멘의 신앙은 어떤 형편에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믿음입니
다.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로마서 8:28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불행한 환경과 불리한 조건도 모두 합동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신앙의 사람은 역경을 최상의 축복으로 변화시키는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생활을 극복하고 이기는 자는 축복하시고 원망과 불평하는 자에게 진노하셨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12명의 정탐꾼이 똑같이 가나안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열명은 환경을 보고 겁을 냈습니다. 우리는 못한다 가년 죽을 것이다고 부정적인 견해를 말했습니다. 그 결과 심판을 받았습니다. 가보지도 않고 앞에 도전하는 상황에 겁을 냈습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마음에 낙심이 오면 모든 길이 막힙니다. 사업을 하시든지 학업을 하시든지 어려움이 닥치고 마음이 무거울 때마다 부정적인 생각과 안된다는 생각을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자꾸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아멘이라고 말하세요. 상황을 바라보지 마세요. 사람을 바라보지 마세요. 사업을 바라보지 마세요. 우리가 세상 어디에 가면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나라에 가도,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도 이 세상에는 만족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직장에 가든, 어떤 남자를 만나든, 세상에 없는 어떤 여인을 만나도 만족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세상을 향하면 늘 괴롭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고 기도하고 찬송하세요. 아멘을 외쳐보세요. 며
칠전 제 마음 속에 어두운 그들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왠지 마음이 무겁고 즐겁질 않았습니다. 제 마음을 제 집사람에게 이야기 했더니 찬송을 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한 시간 동안 찬송을 했더니 완전히 회복 되었습니다. 다시 힘과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상황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우리를 선히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리빙스턴은 특별한 용기가 있었고 겁
을 모르는 배짱이 두둑한 사람입니다. 어느날 친구가 "아프리카에서 일하는게 두렵지 않나"라고 물었습니다. "왜, 나도 인간인데. 연약한 인생이 두려움이 없겠는가. 그러나 나에게 어려움이 온다면 그건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내게는 유익이 된다네. 또한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네. 내가 복음을 위해 일하다 죽으면 그때가 곧 본향가는 때이니, 내가 하나님 품에 안길때까지 하나님이 지켜주실 줄 믿는다네"라고 했답니다.
믿는 이는 어떤 환난도 이깁니다. 이기고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을 믿으시
기 바랍니다.
넷째, 아멘의 신앙생활은 기도의 생활입니다. 기도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입고 살 수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과 아이를 앞에 두고 제자들이 어쩔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주시고 낫게 하
셨습니다. 제자들이 신기해서 우리는 애 못하냐고 물으니 "기도외에는 다른 것으로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함으로 우리는 어려운 시험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나이많은 뱃사공이 젊은이와 함께 배를 탔습니다. 젊은이에게 노를 맡겼습니다. 젊은이가 양손에 잡은 노를 보니, 한쪽 노에는 `기도하라', 다른쪽 노에는 `일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노인에게 `일을 한다면 기도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그러면 기도라고 쓴 오른쪽 노를 멈추고 일하라고 쓴 왼
쪽노만 저어보라고 했습니다. 젊은이는 왼쪽 노만 저었습니다. 배는 앞으로 가지 못하고 그 자리만 맴돌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그걸 가리키면서 `일을 하지 않고 기도만 하거나 기도없이 일만 하게 되면 한쪽 노를 젓는 것과 같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일할 때 형통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아무
리 바빠도 기도는 줄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을 줄여도 기도만은 제대로
지켜야 합니다. 어느 아이가 배가 고파서 기도하는 것을 생각하고 식사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왜 기도 안하고 먹느냐 물으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기도를 그렇게 빨리햐냐 물으니, 너무 배가 고파서 "하나님, 어제와
같습니다" 그랬답니다. 아무리 급해서 기도해도 삶을 통해 하나님은 승리를 허락하십니다. 바쁠수록 실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마이크로 말씀을 전합니다만 지금 만약 전기가 끊어지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넓은 곳에서 육성을 전해야 하지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아무리 마이크가 좋아도 전기가 연결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값비싼 전기제품도 전기가 끊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기도의 선이 끊어지면 그 성도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줄이 하나니의 가슴에 연결이 되었나 살펴보시기 바랍니 다. 마가 11:24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했습니다.
다섯째, 이 예와 아멘의 긍정적인 삶을 바로 오늘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선한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다. 기도할 맘이 있습니까? 오늘 하시기
바랍니다. 전도할 맘이 생겼습니까? 목표가 정해지면, 오늘, 지금부터 즉시 시작하십시오. "내일부터 하겠다. 새달부터 하겠다. 새해 첫날부터 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출발부터 실패입니다. 지옥에 있는 마귀들이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려고 회의를 열었습니다.
첫 번째 마귀가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죽이자" 제안했습니다. 그러니까 늙
은 마귀가 말하기를 "순교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영광스러워 하니까 죽이는 것은 효과가 없다" 둘째마귀는 "그리스도인들을 감옥에 가두자" 고 했습니다. 힘센 마귀는 "가두면 더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이 더 충만해지더라"
이것도 채택이 안되었습니다. 세 번째 마귀는 지혜로운 마귀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사랑하
자. 단 내일부터 하자"는 마음을 갖고록 하는 전략을 쓰자고 했습니다. 결국, 이 전략이 채택되고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선한 삶을, 아름다운 목표를 정했으면 지금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오늘 이 세상은 우리에게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심어주는 세상입니다. 마
귀는 우리 맘속에 "아니요"라고 대답하라고 속삭입니다. 안된다고, 못한다고 말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바울의 말씀대로 예와 아멘의 생활입니다. 예라고 말합시다. 아멘이라고 말하십시다. 항상 건강하고 밝은 긍정적 사고로 모든 일에 승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본 문 : 고후 7: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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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덱거라는 근세 독일 실존 철학자는 "사람은 돌멩이나 나무나 소나 말
처럼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반성하고 자각할 줄 아는
실존이다"라고 했습니다. 나무나 돌멩이는 아무런 느낌이나 생각이 없습니다. 말이나 소는 느낌이나 생각은 있어도 사람처럼 예민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참으로 예민하고 복잡한 존재입니다. 죄를 지으면 마음이 아프고 가책이 됩니다. 좀더 소유하고 싶은데 그게 안이뤄지면 괴로움이 옵니다. 죽음이 가까이오면 허무를 느끼게 되고 사고를 당하거나 가족이 죽으면 슬퍼할 줄 아는게 인간입니다. 차라리 동물처럼 자기를 모르면 편한데 자기를 잘 알기 때문에 더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덱거는 "사람이 산다는 것은 염려와 근심의 연속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은 염려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근심없는 사람도 없고 근심없는 사회도 없습니다.
근심없는 곳이 딱 한 군데 있긴 있는데 그건 바로 공동묘지입니다. 죽은
자는 말도 없고 근심도 없는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먹고 배부르면 그저 아무 생각없이 누워 잠만 자는 동물 보다는
근심이나 고민과 번뇌가 있는 인간이 더 아름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건 인간의 근심과 염려를 미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갖고 있
는 많은 근심은 아무 쓸모없고 비생산적인 근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근심하는게 대개 이런 것들입니다. 여러분의 염려는 어디에 속한
지 냉정하게 판단해 보세요
첫째로 이미 지난 일을 걱정합니다.
하나님이 과거의 삶을 다 결재해 주셨습니다. 그게 잘된 과거든지 죄로
얼룩진 과거든지 결재서류 페이지에다 도장을 꽝 찍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과거를 자꾸 끄집어내서 한숨 쉬며 걱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10년이나
20년전의 과거의 실패와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근심합니다. 아무 소용 없습니다. 울어도 힘써도 못합니다. 끝난지 오래입니다.
둘째는 앞으로 올 일을 생각하고 근심합니다.
더구나 심각한 것은 생기지도 않은 일을 자꾸 부풀려서 공상하면서 걱정합
니다. 이런 근심을 집중적으로 하면 현실적인 느낌이 와서 사람을 괴롭힙니다.
예를 들면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이 비행기가 행여 떨어지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하면서 불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APT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이 APT가 15년 됐는데 무너질지 모른다' 그런 생각입니다.
옛말에 기우라는 말이 있지요. 옛 중국의 기나라에 항상 침식을 잊고 근심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세상 모든 일을 근심합니다. 하늘이 무너질까, 땅이
꺼질까 여기까지 근심합니다. 그래서 `기나라 사람의 근심'이 기우라는 겁니다.
괜히 근심하고 오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고 우리들 태
반이 기우속에 산다는 겁니다.
세 번째는 내 뜻대로 안된다고 걱정입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고 불신앙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뜻에 산다고 해놓고 내뜻이 부정되고 하나님의 뜻이 긍정되니까 못마땅 합니다. 자식도 내 뜻대로 못합니다. 어떤 부모님들은 자식이 당신들 맘에 드는대로 결혼하지 않는다고 근심하고 아파서 그러눕습니다. 이런 착각이 어디 있어요? 자식의 결혼이지 부모의 결혼입니까? 특별한 흠이 없다면 자식들이 좋은대로 결혼하는게 좋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맡기지 못하니까 근심 속에 삽니다.
우리가 모든 걸 다 맡긴다면 아무 근심 없습니다. 총알이 빗발치고 포화가
무성한 전쟁터에서도 엄마등에 업힌 애기는 새근새근 잠듭니다. 모든 걸
엄마에게 맡기니까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잠자는 겁니다.
예수님도 갈릴리 풍랑이 대작할 때에도 배밑에서 깊이 잠드셨습니다. 제자
들은 죽겠다고 근심했습니다. 맡기는 자와 못맡기는 자의 차이입니다. 예
수님은 하나님에게 맡겨서 근심이 없겠지만 제자들은 믿는다 하면서도 못
맡기니까 근심했습니다.
제가 운전 배운지가 한 10년되는데 그전에는 운전하는 사람 옆에 타고 갈
때 편안했습니다. 그리고 어떨 때는 잠도 잤습니다. 운전도 모르고 뭐 잘
모르니까 그냥 맡기고 갔습니다. 그런 운전을 배우기 시작하고 뭐좀 쬐끔
아니까 그때부터는 괜히 걱정되고 불안합니다. 운전석 옆에 앉아 걱정하는 사람 참 바보입니다. 탔으면 그 사람에게 맡겨야겠죠.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인도자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뭘 염려하세요?
예수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배짱이 있어야
해요.
가끔 병원에 가보면 4층인 줄 알았는데 5층이 되어 버립니다. 4층이 없습
니다. 왜냐하면 4층은 `죽을 사'자 생각해서 환자들이 꺼린답니다. 믿는
성도들은 이런데서도 해방되어야 합니다. 근심하지 맙시다.
저는 결혼식을 4월 4일에 했습니다. 그때 농담으로 어떤 친구가 "야 죽을
사자 두 개든 날에 왜하냐?" 합니다. 원래는 4월 5일에 하려고 했는데 그날
이 주일이니까 안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근심이 없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결혼 날짜 잡아놓고부터 근심을 시작하는데 무슨 근심이냐면 날
씨 걱정입니다. `비가 올까 안올까?'. 어떤 분은 남의 집 혼사까지 가져다가 근심합니다. `이번 토요일 어떤 집사님네 결혼인데 비가 안와야 하는데'
비가 오면 오는거지 내가 어떻게 합니까? 비오면 우산 갖고 가면 되는 거고
그 비가 결혼을 축복하는 비라 생각하는 그만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찬송가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이 세상에 죄악된 일이 많고 참 죽을일 쌓였구나" 가는 곳마다 근심이고, 시간마다 한숨과 고뇌로 가득찬 세상입니다. 정치에는 나라 근심, 학교가면 진학근학 근심, 시장에는 물가근심, 병원에는 질병근심, 농촌에는 쌀개방 근심, 도시에는 공해근심, 근심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렇게 많고 많은 근심 가운데 사도바울은 근심을 두가지로 나누고 있습니
다. 첫째는 세상 근심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합니다. 먼저, 세상 근심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세상 근심은 근심의 내용이 자기 중심적입니다. 즉, 내가 지금 소유한 것이 없어질까 걱정합니다. 내가 사놓은 증권의 주식값이 떨어지면 어쩌나, 내 땅값이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근심입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한분은 아주 재물에 집착이 강한 분이었습니다. 부모에
게 물려 받은 재산의 분배 때무에 형제의 의가 나빠졌습니다. 너무 소유에 집착한 나머지 아주 심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많은 주식을 사놓고 주가가 뚝 떨어지면 앓아 누워, 교회에 못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가정적인 큰 시련을 당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양쪽눈을 완전히 실명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재물의 욕심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주님은 마가복음 4장에서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 말씀의 성장을 방해
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근심과 걱정이 있을 때 우리 믿음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근심이 있을 때 잠도 못잡니다. 잠잘려고 숫자를 세어도 안 옵니다. 째깍거리는 작은 시계의 초침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같이 크게 들립니다. 세상 근심으로 가득한 사람은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도 병이 듭니다. 또 하나 인간을 억누르는 세상적 근심이 있는데 그건 죄책에 대한 근심입니다. 이건 물질적인 근심보다 더 심각합니다. 내가 잘못한 건 시인하는데 회개하고 돌아서는 결단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근심이 사라집니다.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회개의 체험과 거듭남의 감격이 없이 계속 절망하고 깊은 고민에 빠져서 자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건 죄의 문제 앞에 근심하는게 아니고 그 죄의 대가나 그 죄가 폭로될까봐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런 근심은 우리를 더 곤고하게 만듭니다. 우스개 소리가 있는데, 십계영은 10개인데 한가지 더 있답니다. 11번째 계명은 "들키지 말라"란 겁니다. 죄를 짓더라도 들키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다 드러납니다. 설영 드러나지 않아도 적어도 하나님은 아시고 내 양심은 나를 향해 고발하고 있습니다.
근심의 초점이 어디 있습니까?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가슴 아파
서 근심입니까? 그 죄가 발각되고 남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근심입니까?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근심을 다 떨쳐야 합니다. 계속 이 근심에 쌓이다가는 본문 말씀대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근심은 다 주께 맡기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의 근심이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라고 합니다. 세상근심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한 근심은 할수록 복을 받습니다. 오늘날 소위 "신세대"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신세대의 특징은 고뇌가 없다는 것입니다. 절제도니 삶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고 싶은 것은 다하고 살자는 겁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하고 먹고 싶은 것 다먹고 보고 싶은 것 다 보고, 그렇게 거의 본능에 의해 삽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고뇌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기 내면을 바라보고, 창조적인 고민을 하는 사람이 그리운 때입니다.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해야 한다"고 하니까 맘 속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평안이나 누리고 받받기 위해서 나왔지 근심하러 나왔나"고 거부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평안도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섰을대 평안이 오는 것이고, 축복도 복 받을만한 삶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오는 것입니다. 물론 근심 중에도 내가 천당에 갈까? 지옥에 갈까? 하는 근심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천국에 감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근심을 주님앞에 설때에 내놓을게 없어서 근심이면 부끄러움입니다.
내 일생 돌아보니,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리저리 미루
고 핑계한 것, 육신을 위해서만 살았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는 별로 산게 없어서 그게 근심입니다.
올 한해도 다 기우는데 다시 돌아보면 하나님 앞에 충성못한게 걱정이 됩
니다.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붙들고 있는 초라한 나의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이런 근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근심하는 성숙한
백성들이 되십시다. 육체의 질병으로 근심하십니까? 인간적인 근심은 마시기 바랍니다 . 오히려 "하나님! 이 병으로 당신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주님, 이 육체의 가시로 인해 더욱 당신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소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사업으로 염려하십니까? 욕심부리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내게 물질의 축복을 주신다면 이제는 육체의 삶을 위해 투자하지 아니하고 당신의 복음 사업을 위해 투자하겠나이다." "나의 실패는 주님의 실패요, 나의 성공은 주님의 성공이니, 주여 나를 붙드셔서 영광을 거두시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그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교회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간곡히 기도하는 성도들로 인해 교회가 세워집니다. 몸된 교회의 교육관이 필요하다면 그걸 위해 기도하고, 계획하며, 기쁘게 동참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근심을 하고 계십니까? 이제는 세상 근심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근심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럴때에 거기 참된 회개와 구원과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은총의 새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성숙함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본 문 : 고후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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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보는 것을 좋아한다. 白聞而不如一見
귀보다 눈보다 귀하다. 라디오 보다 TV 낫다. TV보다는 입체영화나 컴퓨터 가상 현실이 더 나을 것이다.
"맛을 본다" "맡아본다" "들어본다" - 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보기를 잘해야 인생을 바로 살고 성공적으로 살수가 있다. 눈이 인생의 운명을 좌우한다.
그런데 흔히 눈은 육신의 눈만 있는 줄 아는데 눈에는 육신의 눈이 있고 영의 눈이 있다. 이 세상에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많이 있다.-원자, 전자, 핵, 전기등-
육신의 눈은 가까운데, 멀리 있는 것은, 곁에 있는 것, 속에 있는 것. 물질적인 것은 볼 수 있어도 영적인 실제는 볼 수 없다.
사람들은 보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아는데 육신의 눈은 부정확하다.
보이지 않는 면을 볼 줄 알아야 참으로 지혜 있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수가 있는 것이다.
멀리 보아야 한다.
대원군-쇄국 정치
일본-미국 바로 보았다면, 2차 대전
속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빛 좋은 개살구- *독사의 알-
긍정적인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부정적인 눈으로 안될 것만 보고 불가능한 것만 보는 사람은 성공적인 사람이 못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 할 때- 여호수아, 갈렙---
영적인 실제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육신의 눈이나 지식의 눈을 가지고는 사람의 영혼도 영적인 세계도 볼 수가 없다.
보통 사람들은 성령도 악령도 사람의 영혼도 믿지를 않는다. 그래서 이 세상만 볼 줄 알았지 내세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못 본다.
믿음으로 중생한 사람 믿음의 눈, 영의 눈이 뜨여진 사람만이 영적인 실제를 믿을 수가 있고 알 수가 있고 볼 수가 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고 천국 백성이 되느냐 하면 죄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다.
영의 세계는 믿음으로 인식이 가능하므로 믿음을 가져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구원도 받을 수가 잇다. 육신은 5관을 통해서(보고, 듣고, 만져 보고, 냄새맡고, 맛을 보는)인식이 가능하지만 영의 세게는 믿어야 된다.
가령 냄새는 코로만 알 수 있지 귀로나 눈으로는 알지 못한다. 맛은 입으로 분별하지 손으로 만져 봐서는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영의 세계는 믿어 봐야지 눈으로 봐서는 모른다.
하나님은 믿음의 채널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고 우리의 영혼은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고 죄사함 받을 수 있다.
죄도 우리의 눈에 안보이지만 대단히 중요하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고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고통의 장소 지옥으로 들어가게 된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하시고 부활하시므로 에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게 하셨다.
자동차에 스위치만 틀면 라디오가 나온다. 이같이 믿음의 스위치만 올리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과 연결되고 구언 받을 수가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아들(예수)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우리 인간이 멸망에서 구원받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만이 참된 구원의 길이 되시고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
여러분! 오늘 간곡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운명이 바뀐다. 그러나 우유부단하고 미루고 안 믿으면 영원히 후회할 날이 이른다.
이제 예수를 구주로 믿기로 결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고 구원받아 더 중요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준비하시고 누리시길 바랍니다.
영원을 위하여 삽시다
본 문 : 고후 4: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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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사는 신자들은 속사람보다는 겉사람,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에, 환난보다는 안일에, 영원한것 보다는 현세상에 치우쳐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성도의 생활은 영원을 바라보며 영원을 위하여 살아야 할 것이다. 왜인가?
1. 겉사람은 후패하기 때문이다.(16)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지만 겉사람은 점점 후패해 간다.
겉사람이란 육체, 거듭나기 못한 영혼을 말한다.
사람마다 겉사람은 다듬고 가꾸고 아름답게 장식하지만 필경은 후패하고 낙후되며 썩어버린다.
질그릇과 같은 몸은 금이가고 깨져 쓸모없이 버리게된다. 후패하고 깨져버릴 육체를 위하여 살지 말고 영원한 영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 환난은 잠시이기 때문이다.(17)
창세 이후로 성도들이기에 당하는 여러가지 환난과 고통이 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무참히 죽어가고 사도들이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히11:36-38. 고후11:23-27. 등에 기록된 환난은 간담을 서늘케한다.
모두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애매히 고난을 당한 것이다. 얼른 생각하고 현실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성경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잠간 고난을 준다"(벧전5:10)
성도가 세상에서 당하는 한난을 경하다고 했고, 장차 받을 영광은 중하다고(17) 했다. 다시말하면 성도가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은 잠시 잠깐일 뿐 아니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때 아주 가벼운 것이다.
수치로 계산한다면 1kg의 환난을 당했다면 영광은 숫자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자는 환난을 피해 배교하기도 하며, 환난중에 낙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환난을 통하여
1. 세상줄을 끊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생활이 강화되고
2. 하늘의 법칙과 성경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고
3. 무슨일을 당하든지 더욱 주님을 의뢰하게 만들고
4. 환난을 통하여 육체는 고통을 당하나 영혼을 찾고
이생을 잃었으나 하나님 나라를 얻은 줄 알고 감사하며 찬송하게 된다.
3. 보이는 것은 잠간이기 때문이다.(18)
보이는 것은 잠간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했다. 우리의 육안에 보이는 것은 불원간에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권세도 명에도 지위도 찬란한 문화도 생명도 잠간일 뿐이다. 오늘날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너무나 보이는 것에 치중하는 것을 본다. 돈문제, 질병문제, 직장문제 등이 기도의 중심이요 설교의 중심이 되는 것을 본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부요하게 되는 것만이 축복이 아니요, 가난하면서도 어떻게 감사하며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눈먼 사람이 반드시 눈을 떠야만 축복이 아니다.
헬렌켈러가 존경을 받는 것은 그가 눈먼 소경이요 말못하는 벙어리요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엿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것을 다 고쳤기 때문이 아니요, 삼중고의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의 삶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다.
예수님 앞에 군중이 제일 많이 모였을 때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후였다. 이유를 아시고 "너희가 떡을 먹은 연고로 나를 찾는도다"
예수님이 육신의 떡을 주지 않고 생명의 떡에 대한 말씀을 하시니, 다 가고 12제자만 남았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그렇다. 육신의 떡이 아닌 영생의 마씀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4. 장막집은 무너지기 때문이다.(5:1)
이 지구는 장막집이요, 내 자신도 장막집이다.
언젠가는 무너질 집이다. 여기에 아무리 견고하게 다진다 할지라도 영원한 처소가 결코 될 수 없다.
성경은
인생을 "나그네"라고 한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느니라("빌3:20)
향기를 발하는 교회
본 문 : 고후 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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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시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사모하여 그를 방문하였다.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하여 꽃을 심은 화분 두개를 가져왔다. 같은 꽃인데도 하나는 진짜 꽃이었고 하나는 조화였다. 시바 여왕이 화분들을 멀리 갖다놓고 솔로몬에게 어느 화분이 진짜 꽃이냐고 물었다. 솔로몬은 "동산에 나가 벌과 나비를 몇마리 잡아오라"고 했다. 그 벌과 나비를 놓아주니 벌과 나비들이 그 방안에서 날더니 금방 화분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두개의 화분중 한쪽 화분에 가서 앉았다. 솔로몬은 "저 벌과 나비가 앉은 화분이 진짜 꽃이다"라고 한다.
식당에는 음식냄새가 나고, 병원에는 소독약 냄새가 나고, 생선가게에는 비린내가 난다. 무엇이 모여있는가에 따라 냄새가 달라진다. 쓰레기가 썩을 때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난다. 그러나 채소와 생선과 과일에서 처음부터 악취가 났던 것이 아니다. 처음 출하될때의 과일은 그윽한 향기를 발달한다. 채소도 상큼한 냄새가 난다. 그러나 그것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방치해 두면 썩어 부패한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때는 감격과 기쁨으로 살았고, 구원 소식이 그저 좋아서 기뻐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의 마음을 관리하지 못해서 잡초가 우거진 것은 아닐까? 썩어져 냄새나는 모습은 아닐까?
시중에 파는 향수의 종류는 아주 많다. 싸구려 향수는 처음에 향기가 진하게 난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는 없어져버린다. 그러나 향수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프랑스 제품의 고급 향수는 뿌릴 때는 별로 냄새가 나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은은한 향기가 지속되기에 좋다고 말한다.
향수도 싼것이 있고 비싼것이 있듯, 성도중에도 싸구려 신자와 고급인자가 있다. 싸구려 신자란? 처음에는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새벽기도도 나온다. 성경도 열심히 읽고 말씀안에서 순종하려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모든 열심을 상실해버리고 순종하는 자세가 없다. 신앙 연륜이 길어지면 더 은은한 예수님의 향기를 발해야 하는데 오히려 인간적인 냄새와 세상냄새가 더 발하는 싸구려 신자가 있다. 반면에 첫사랑을 버리지 않고 언제까지나 변함 없는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순종하며 봉사하는 신도도 있다. 자기가 있는 그 위치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그리스도의 삶은 자기 몸으로 채워진다. 진정한 예수님의 향기로 사는 성도가 고급 성도이다.
어느 향수 광고는 향수를 묻친 종이를 여성 잡지 사이에 넣기도 한다. 아주 소량이지만 그 냄새가 오래 가기 때문에 소비자의 손에 들어갈때 향기가 남아있다. 작은 향기지만 오래간다. 교회의 큰 일을 한꺼번에 하는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작은일들이 모이면 큰 역사를 이루게 되므로 더 고마운 일이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보잘것 없는 사람도 예수님이 사용하시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모시는 내적 능력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성도의 향수는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의 마음은 상하고 부패해서 썩은 냄새가 난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내 마음을 채우시면 예수님의 향기를 내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
한 나그네가 한 덩이의 진흙을 얻었다. 그 진흙에서 굉장한 향기가 발하기에 나그네가 물었다. "너는 바제드의 진주냐?" "아니요" "그럼 너는 인도의 사향이냐?" "아니요" "그럼 너는 무엇이냐?" "나는 한 덩이의 진흙일 뿐이다." "그러면 어디서 그런 향기가 나오느냐?" "그 비결을 말해 드릴까요? 나는 백합화와 오래 함께 살았습니다." 하찮은 진흙 한덩어리도 백합화와 함께 살았을때 사람의 이목을 끄는 물질이 된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한 세월이 얼마나 길까? 그런데도 예수님의 향기가 안나고 성령의 냄새가 나지 않음은 입으로는 늘 예수와 사는것 같지만 실제는 육신적, 물질적 세상적으로 살기에 악취를 발한다. 우리는 예수의 향기를 지녀야 하다. 예수의 향기는 생명의 향기다. 생명은 향기를 토한다. 죽음은 악취를 낸다.
여러분! 우리는 죽음의 악취를 풍기는 자녀가 되니말고 생명의 향기를 발하는 백성이 되어야겠다. 샤멜 넘버5는 온세계 여성들이 사랑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향수다. 이 향수는 장미꽃잎 45kg을 가지고 향수액 28g을 만든다. 이는 1600배 농축하므로 만들어진다. 장미꽃 45kg은 대단한 양이다. 트럭으로 몇대는 된다. 그것을 여러 과정을 거쳐 향수로 만든다. 향기가 그저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과정과 연단을 거쳐서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향수를 내몸에 한방울만 바르고 다녀도 하루종일 향기로운 것이다.
사람이 좋아하는 향기는 하나만이 아니라 다양하다. 인삼향, 국화향, 모과향, 오랜지향, 허벌향, 나드향등 나름대로 각자의 향기가 있다. 이 독특한 양기를 잘 개발해서 발산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맞은 달란트와 능력을 주셨다. 이제 이 향기들이 모여 하나님 앞에 바쳐진다. 이웃에게 향기를 전한다. 교회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있는데 아름다운 향기를 내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이 한번도 들어가고 싶지 않는다면 우리 책임이다.
교회 주변 사람들이 5년-10년을 살았어도 한번도 교회에 나오지 않음은 우리가 지금 향기를 발하지 않고 악취를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군자중 하나인 `蘭'이 하나 있을 때는 향기를 잘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난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개가 모여있다면 그 향기는 말할 수 없이 그윽하다. 우리 모두가 향기들이 된다면 우리 교회는 정말 아름다운 교회가 되고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안식을 얻고 쉴것이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공원에 가서 운동도 하고 꽃도 보면 얼마나 마음이 기쁜지 모른다.
과연 그리스도의 향기란 무엇일까?
첫째, 기도의 향기다.
계 5:8 "금대접에 향기가 가득 담겨있는데 이 향은 성도의 기도다."
계 8:3 "하나님보다 앞에 있는 제단이건 그 처소에 천사가 금향로를 갖고 있는데 거기에 많은 향이 담겨 있는데 이것이 곧 성도들의 기도다." 우리가 기도하기만 하면 천사가 기도를 손에 받아가서 하나님 앞제단 금향로에 갖다바친다. 우리의 순수하고 깨끗한 기도와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신다. 우리 경신교회는 기도의 향기가 가득한 교회가 될수 있기를 소망한다.
둘째, 믿음의 향기다.
야곱은 간사하고 사기성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나 아버지 이삭이 아들 야곱을 축복할때 `내 아들의 향취'라고 했다. 그가 얄밉고 간사했지만 믿음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의 믿음을 보고 "내 아들의 향취는 믿음이더라"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했다. 우리는 믿음의 향기를 소유한다. 신앙의 꽃이 피고 향기를 내면 보든 불신과 원망이 묻어난다.
셋째, 순종의 향기다.
삼상15:23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여기서 제사란 말은 향기와 연관이 있다. 영어에서 향수를 퍼퓸(perfume)이라 하는데 이 말은
per + fume 의 합성어로 연기를 통한다는 뜻이다. 즉, 구약에서는 제사드릴때 동물을 잡아서 드렸다. 이때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실 때 "흠향하셨다"
똥물을 불에 태울때 연기가 난다. 그러니까 태울때 역한 냄새를 제거하는 방취제를 쓴다. 하나님에게 악취를 드릴수는 없다. 그래서 향기로운 제물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제사때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보다 순종의 향기를 더 기뻐 흠향하시는 것이다.
시 81:15 "순종하는체 할지라도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고 했다. 다른것은 "하는체"하면 안되지만 순종만은 "순종하는체"해도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했다. 억지로라도 순종하면 복주신다. 베드로도 때로는 예수님 말씀이 찜찜해도 순종했는데, 기뻐서만 순종한 것이 아니다. 그래도 그것이 큰 복이 된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끌려서 십자가를 지고있다. 모든 일을 억지로하면 불행하다. 그러나 순종만은 하기 싫어도 억지로 할때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고 복을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네째, 감사의 향기다.
감사의 향기를 드리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하루는 영국의 스펄전 목사와 카일러 박사가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웃으며 길을 갔다. 스펄전 목사가 "여보게 우리에게 웃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세." 하니 "좋은 생각일세"라고 카일러 박사가 대답한다. 길을 가다가 나무 아래 잔디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하나님! 우리에게 웃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드린다.
우리는 감사드릴 일이 너무나 많다. 건강을 주셔서 감사하고 직장을 주셔서 감사하고 자녀를 주셔서 감사하고 믿음을 주셔서 감사하다.
바울은 옥중에 있어도 감사를 잊지 않았다. 죽음의 생활에서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감사했다. 욥도 자기의 재산과 자식을 다 잃고 건강을 다 잃었어도 감사했다.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이다. 감사의 향기를 드리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다섯째, 사랑의 향기다.
서로 사랑할때 향기가 나고, 서로 미워하여도 죽음의 악취가 난다.
엡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심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향기로운 제물이 되셨다. 사랑이 깃든 마음이 향기로운 마음이다. 사랑이 깃든 헌금이 향기로운 제물이다.
빌 4:18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다." 사랑이란 희생이다. 사랑으로 인해 찢기고 상하는 아픔이 있다해도 그것으로 향기가 진동하게 된다. 아가 2:2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사랑의 향기는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다. 온실속에 있는 꽃이 아니다. 백합화가 바람에 날리면 가시나무에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긴다. 동풍이 불면 서쪽 가시에 찢기고 북풍이 불면 남쪽 가시에 찢긴다. 그때마다 그 독특한 향기가 온 골짜기를 메운다. 우리가 때때로 찢기고 상하여 눈물을 흘리지만 이때 우리 성품이 다듬어지고 주님의 향기가 나는 사람으로 변화된다.
여러분에게는 무슨 냄새가 나는가? 본문은 말씀하기를 `생명의 향기'가 있고 또한 `죽음의 향기'가 있다고 했다. 바울이 말한 죽음의 향기를 이해하려면 고대 로마의 풍속을 알아야한다. 옛날 로마 제국에서는 전쟁에 승리한 개선 장군이 돌아올때는 제사장들이 향불을 피우면서 개선 행진을 했다. 그 향기는 개선 장군에게는 승리의 향기지만 포로로 끌려오는 적국에게는 죽음의 향기가 되는 것이다.
생명과 승리의 그리스도! 부활의 주님 안에 있는 자는 생명의 향기를 내지만 그리스도를 떠날때는 죽음의 향기를 낸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부활하고 승리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었다. 향기는 악취를 제거하는 힘이 있다. 모든 악은 승리의 향기속에 소멸된다. 불화가 있는 곳에서 화해의 향기를 발하시고,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의 향기를 발하시기 바란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본 문 : 고후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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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받는 것을 군대에 입대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비유하면 적절한 비유가 될 것 같습니다. 군에 입대하면 세상과, 일상생활에서의 삶을 일단 청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에서 입던 옷을 벗어버리고, 군복으로 갈아입습니다. 요즈음은 어떠한지 모르나 제가 입대할 때는 삭발을 했다. 기상 시간, 취침 시간이 일정하고,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순종해야 했습니다. 자기 멋대로, 개인 행동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활이 전면적으로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군대에 입대하여 군대 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세례식]은 바로 [입영식]과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비유한다) [입영식]
은 "이제 군인으로서 상관에 명령에 순종하며, 군대 생활을 성실하게 하겠습니다."라는 선서를 하고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세례를 베푸는 세례식에 참여하는 자는,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겠습니다"라는 결단하고 다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식]은 바로 군대에 입대하여 거행하는 [입영식]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딤후 2장 1-4)에 보면, 바울선생께서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를 보고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어떤 군사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일 것입니다.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든지 고난이 없이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고난을 통과하면 영광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군대에서의 군인 생활은 고난 중에서도 격심한 고난을 겪습니다. 즉 고된 훈련, 엄격한 규율, 부자유함, 군과의 싸움에서의 위험,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군사가 된다는 것은, 군인이 되기 위해서 고된 훈련을 받아야 하고, 때로는 핍박도 있고, 시련도 있다. 세상의 악과 더불어 싸워야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겪어야 하는 시련은, 금보다 귀한 믿음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고난을 기쁨으로 받고, 그 고난을 잘 이기고 극복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군인 생활은 자기 개인 생활이나 가정 생활에 얽매이지 못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개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서, 복종하는 생활이 있어야 합니다. 지휘관 되시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자신의 뜻에 연연할 수가 없습니다.
세례 받으시는 분은, 바로 이같은 다짐을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단하는 좋은 군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군인은 나라와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라를 위해 충성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임금이나 장군을 위해 목숨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
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나라의 부름을 받아 군에 입대한 참으로 좋은 군인입니다. 여러분은 나라에 충성을 해야합니다. 이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군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더욱 귀한 것은, 여러분들이 예수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군대 생활은 기한
이 있습니다. 3년 정도로 군복무를 끝내면 제대를 하여 군인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는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평생토록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제대가 없습니다. 참으로 바라기는, 오늘 세례 받으시는 여러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군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합니다. 복음을 위해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아야 합니다. 좋은 군사는 자기 생활에 메이지 않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자입니다. 또한 좋은 군사는 불러 주신 자, 즉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같은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피조물
본 문: 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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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은총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성도들과 가정위에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해가 되면 무엇인가 모르게 우리의 가슴을 부풀게 하며 새로운 결심과 각오를다짐하게 됩니다. 특히 신앙 생활을 하는 우리들로서는 "금년이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아야지" "올해야말로 진실하고 보람있는 삶을 살아야지"하고 새롭고 알찬 다짐을 합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려 깊운 사람이라면 어떤 자기 분석없이 신년을 맞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월의 짧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역시 우리들의 실패와 과오와 좋은 기회들을 상실한 것을 회고하고 난 후, 오는 새해에는 우리의 시간을 선용하여 보겠다고 서약합니다. 즉, 모든 것을 새롭게 각오하게 됩니다.
그러나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비결은 자신의 결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첫째, 새로운 피조물의 조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 말씀은 마치 구약시대에 실수로 살인한 자가 도피성으로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려는 것처럼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에서 은신처를 취함으로써 구원과 피난처로 하여 그리스도께 피한 것을 의미합니다. 나뭇가지가 힘과 양분을 얻기 위해 줄기에 붙어있는 것처럼, 우리 육체의 각 지체가 위안과 도움을 얻기 위하여 몸에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물고기는 물 속에서만 자유롭습니다.
새들은 공중에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새들은 오직 공중에서만 자유롭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를 의존할 때만 자유롭습니다.
둘째, 새로운 피조물의 특성
"새로운 피조물"이란 근본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의 개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2:10).바로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피와 살의 의지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입니 다. 오직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엡4:23).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의 위대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새로와 졌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던 마음에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신 것입니다. 봉사와 말씀 증거로 목적이 하난가 되었음을 보여 주시며, 우리들의 심령이 새로워진 것을 성령님께서 우리들의 심령에 증거하십니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시40:3). 우리의 입술로 찬양 하는 찬송 또한 새로와 졌습니다.
세째, 새로운 피조물의 결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은 죄에 대하여 새로운 견해를 갖게 됩니다. 죄를 죄악의 저주로, 갚아야 할 부채로, 닥쳐올 불행으로 보던 옛 견해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가치하고 부정하며, 버려야 될, 옛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구세주가 아니십니다. 매일 매일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와 함께 현존하는 분이 십니다. 세상에서 흥미있던 옛 것들은 사라져 버렸고,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관심이 일깨워 졌습니다. 옛 생활에서는 세상의 향락과 이익이 우리의 원하는 바 목적이었으나 지금 우리의 원하는 바는 세상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과거에 세상은 내 자신을 위한 쾌락의 장소였으나 지금은 그리스도를 위한 일터인 것입니다.
네째, 새로운 피조물의 특권
어느 "누구든지"간에 이 새롭고 복된 생활에 들어가는 문은 우리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지"란 저가 몸이 약하고, 무력하든지, 또는 슬프고 죄를 많이 지었든지, 상관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죄악의 파멸로부터 자신의 발걸음을 그리스도께로 돌린다면 그 사람이 비록 늙어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즉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자신과 화목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 권면에 말씀
1.새해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출발합시다.
사랑은 위대한 힘입니다. 사랑은 원자폭탄보다도 더 무서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은 실패를 성공으로, 가난을 풍요로, 질병을 건강으로, 전쟁을 평화로, 바꾸어 놓는 기적의 힘이 있습니다. 실패의 원인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 권면에 말씀
1.새해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출발합시다.
사랑은 위대한 일입니다. 사랑은 원자폭탄보다도 더 무서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은 실패를 성공으로, 가난을 풍요로, 질병을 건강으로, 전쟁을 평화로, 바꾸어 넣는 기적의 힘이 있습니다. 실패의 원인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공의 비결은 무엇인가? 끈기입니다. 승리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도 끈기입니다. 끈기란 무엇인가? 오래 참고 견디는 힘입니다. 지구력이요. 인내력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인내요, 성공은 사랑의 산물입니다. 매사에 사랑이 흐르는 인생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건강합니다.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생명력이 강한 사람은 장수합니다. 마치 봄이되면 새싹이 굳은 땅을 뚫고 올라오는 것같이 생명력이 강한 사람은 장수합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도 역시 장수합니다(엡6:1-2).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도 장수합니다(장3:1-2).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순진하여 악에서 떠난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습니다(잠3:7-8, 욥1:1).선한 일에 부요하고(딤전6:17-19). 구제하며, 선한 열매를 맺어가는 사람은(딤전6:22-12),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7-31).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생명력을 넘치게 주셔서 장수합니다(요10:10).
사랑은 평화를 가져옵니다.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 나라의 평화를 가져옵니다. 사랑을 따라 모든 거슬 구하여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지만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입니다.
3. 가장 중요한 사랑은 인생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도 사랑하고, 남의 인생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이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치도 않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구치도(추구하지도)않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현하는 선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 참 행복이 있고, 풍요가 있으며, 평화가 있습니다. 금년 한 해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가정에 행복이 있고, 풍요가 있고, 평화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의 반성
본 문: 고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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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불안과 공포의 시대입니다. 생의 질서와 방향을 상실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혼돈은 결코 정치적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요 정신적 신앙적인 문제가 이 속에 더욱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자의 몸이 쇠약할수록 건강이 더욱 아쉽고 그리움과 같이 하나님을 상실한 병든 오늘이기에 건전한 신앙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계는 내외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으면서 새로운 생명력의 탄생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밖으로는 교직자의 권위 상실과 안으로는 일반 신자들의 열매 없는 생활 그리고 그릇된 신앙 노선에서 복음의 참된 진리와 본질을 왜곡한 탈선 행동이 오늘의 기독교로 하여금 이중 삼중의 고통을 당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혼미해진 사회와 신앙의 세계에서 자신의 신앙을 반성하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신앙 내용을 검토하여 신앙의 재 정비를 강화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 처하여 있는 신앙인의 당연한 태도가 아닌가 생각되는 것입니다.
1. 피상적 신앙은 아닌가?
이것은 형식적이요 외식적인 신앙입니다. 물론 바리새인적인 신앙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하겠으나 한 마디로 말해서 영적 체험이 없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수박이나 사과 등 그 과실의 외피만 핥아 보았지만 그 과실에 있는 진미에 대해서는 전혀 알길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사과 맛은 실거야...' `달고 시원할거야...' 어디까지나 추측과 이론으로써 그 맛을 상상해 보는 것과 같이 신앙의 영적 체험이 없으면 `과연 성신을 받으면 그럴 수가 있을까?' 또는 `믿음은 어려운 시련을 당할 때에 방패가 된다더라.' 자기 자신의 것이 못되고 어디까지나 제삼자를 소개하는데 불과한 것입니다.
오늘 교회문을 출입하는 신자라고 하는 사람 가운데에 이런 내적 체험이 없는 피상적인 신앙인이 많습니다. 철저한 내적 체험 없이 목사가 되고 전도사가 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죄를 한 번도 회개 못해본 사람이 장로도 되고 집사도 될 수 있습니다. 세례 교인도 될 수 있습니다. 입술로 몇마디 중얼거리고 배우 모양 눈물 몇 방울 흘리고 회개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마음을 찢고 송곳으로 찌르듯 새로 태어나는 아픔과 격동이 있어야 합니다. 물리적이 아닌 영적 갱신입니다. 내부의 일대 혁신입니다. 이는 인격 수양으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신비적인 역사입니다. 신기하고도 놀라운 역사요 이적입니다. 이것이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곱추가 일어나는 일 보다 더 위대한 이적입니다. 화산을 파헤치는 폭발력 보다도 더 강력한 힘입니다. 이러한 내적 경험이 없는 피상적 신앙의 사람은 데마와 같이 세상으로 다시 나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롯의 처의 신앙이 그러한 신앙이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신앙이 그러했습니다. 성령 받기 전 열 한 제자의 신앙이 그러했습니다.
피상적인 사람으로서도 설교를 잘 할 수 있습니다. 기도도 곧잘 할 수 있습니다. 또 주일학교도 곧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이 아니요 기계적으로 행하는 일봉의 의식입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능이 없습니다. 움직이는 열이 없습니다.
신앙은 반드시 내부로부터의 체험을 철두철미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몇달 몇년 다녔지만 아직도 회개의 경험이 없는 분은 없으십니까? 죄의 껍질을 깨칩시다. 피상적인 신앙에서 탈피하여 신앙의 깊은 경지에 이르러 봅시다.
2. 미신적 신앙은 아닌가?
"유대인은 이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1:22-23)라고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신앙 특색은 이적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좋아하기는 하였지만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표준을 모두 이적에 두었습니다. 따라서 눈 앞에 나타나는 이적이 없으면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이적이 있고 없는것을 보아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를 구별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그대가 하나님께로 왔다면 우리 앞에 무슨 표적을 보여라"(마16;1-4)고 욱박지를 때 예수님께서는 "이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마16:4)고 하셥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 할 때에도 이적을 행하라고 하였습니다.(마 4:1-11)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에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서 네 자신을 구하고 우리도 구하라. 그러면 내가 하나님 아들됨을 믿겠노라.(마27:38-44) 하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그리고 심지어는 강도까지도 하나님의 아들된 이적을 향해 보이라고 희롱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그 같은 사상이 얼마나 예수님을 괴롭혔던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전도하여 세운 고린도 교회의 유대인들도 이같은 이적 사상에 사로 잡혀서 이적의 배후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깨닫지 못하고 현실에 나타난 사물만을 가지고 판단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는 도마와 같은 실증주의적 믿음입니다. 오늘날 이같은 타입의 신자들이 도처에서 교계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들은 눈 앞에 보이는 것만으로 사물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기도해서 병이 나았으니 하나님이 들으신 것이요, 낫지 않았으니, 하나님이 듣지 않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적이 없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재수가 좋지 못하여 사업이 잘 되지 않으니 하나님이 돌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믿음이 타락되고 하나님의 사랑에 배반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이란 히브리 기자가 정의해 말한 바와 같이 아직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소망이요 미래로 연결되는 역설인 까닭에(히11:1-) 건전한 지식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미신으로 화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가견적인 현상이 결코 그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는 보이고 안보이는 것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무슨 이상을 자꾸 보려고 하고 들으려고 하며 또 그래야 은혜 받은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아직도 그 신앙 수준이 어리고 얕은 자리에 있는 까닭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누구나 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그 때 그 절박한 환경 속에서 역사의 위기 속에서 임시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인 비상수단인 것입니다. 이런 것이 기독교 복음의 근본 진수는 아닙니다. 복음의 근본 목적은 죽은 심령을 다시 소생시켜 새 권능를 주어 그의 인격과 생활에 새 출발을 기약해 주는데 있는 것입니다. 요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 받아 영생의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 제일가는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전도해서는 안됩니다.
여러가지 이상한 말에 미혹받거나 현혹당하지 마세요.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건전한 성경 지식을 토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무식한 사람이 더욱이 신앙의 주체성도 없는 사람이 기도한다고 하여 밤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고 며칠씩 뛰고 소리쳐 보세요. 그 무슨 소리 좀 들리면 하나님 음성 들었다는 등 계시를 받고 환상을 보았다는 등 엉뚱한 소리하고 맙니다. 마치지 맙시다.
신앙은 지.정.의의 요소를 내용으로 하지 않으면 건전한 신앙이 될 수 없고 또 탈선되기 쉽습니다. 건전한 성경 지식이 우리 심령에 부닥칠 때에 큰 격동을 받아 그 힘이 우리 생활에 옮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열매 맺는 과정입니다. 지식 없는 열심과 믿음은 광신이요 맹신입니다. 길지 않아 과열된 흥분과 감정이 식고 보면 아무 속알맹이 없는 빈 고무 풍선 같이 되고 맙니다.
그 사람의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참으로 경계하고 조심하여야 합니다. 건전한 성경 지식 위에 건전한 인격과 윤리로 이루어진 신앙이야 말로 이 세대를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3. 세속적 신앙은 아닌가?
이는 신앙 절반 세상 절반이라고 하는 소위 세상과 타협하고 현실주의에 영합할려고 하는 신앙 태도입니다. 신앙은 이같은 미온적이며 중도적 입장을 결코 허용하지 않습니다. 신앙을 하나의 사치품이나 악세사리로 생각하고 또한 신앙을 자기 생활의 수단으로 삼아 자기 이익의 만족을 채우려는 것은 유물적이요, 향락주의요, 현실주의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마6;24)" 고 하셨고 야고보 장로는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약4:4)고 신앙과 세속의 분계선을 명백히 그어 말했습니다.
아직까지도 세상 허영이나 영광에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 풍조와 세속적인 생활 방법에서 떠나지 못하였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이렇게 세속에서 떠난 자기 신앙을 간증해 말했습니다.
내가 세상을 향해 죽었으니 타협할 대상이 없습니다. 내가 세상을 향해 죽었으니 세상이 나로 더불어 협상 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세상과 나는 서로 죽었습니다. 오직 남은 것은 십자가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새로 지음 받은 영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세상이 타협할 조건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신앙과 세속의 경계선을 분명히 합시다. 오늘날 이 경계선이 모호해 졌습니다. 이 경계선이 흔들리고 무너지고 퇴락해 가고 있습니다. 신앙인 같기도 하고 이방인 같기도 합니다. 흰 것과 검은 것의 구별이 혼돈되고 있습니다.
성도로서는 풀무 불 속에 들어 갈지라도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명예와 지위와 자기 유익을 위하여 이 두가지 성격의 일을 합쳐 버리고 세상의 눈치를 보면서 세속과 타협한 때는 없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야 말로 모호해진 신앙과 세속의 경계선을 다시 분명히 하고 내 속에 거하는 온갖 독소를 제거한 후 이 경계선을 수축하고 신앙의 재 정비를 강화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육신의 나, 현실의 나는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구속하신 주님의 형상만을 모십시다. (갈2:20)
우리 주님께서는 말세에 어찌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비관적인 탄식을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 끝날에 참으로 수정보다더 더 맑고 순결한 믿음을 찾아 보기 힘들겠다는 예고의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정금보다도 더 귀한 티도 흠도 인간의 인위적인 그 무엇도 섞이지 않은 정결한 신앙이 아쉬운 시대입니다.
백두산 천지에 흐르는 물은 깨끗하고 정결하며 마시기에 능히 족하지만 압록강의 긴 강줄기를 따라 흘러 내리고 보면 나중에는 여러가지 불결한 오물이 섞여 탁류가 되어 버리는 것과 같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백 이십 문도가 받았던 최초의 그 은혜, 그 심령도 19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기독교 신앙에도 온갖 시대 사상이나 사회 풍조 등에 휩쓸려 온갖 이질적인 요소가 혼합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더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음으로 시간을 유예할만큼의 여유가 없습니다. 이 때야 말로 각자의 신앙을 돌아다 보고 반성할 때입니다.
역사의 밤은 길었습니다. 암흑의 시대를 뚫고 전진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오직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산 믿음 뿐입니다(요한일서5:5).
죽은 신앙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 갈 수 없습니다. 큰 뗏목은 흘러가는 물을 거슬러 올라 갈 수 없으되 조그마한 송사리는 억센 폭포수라도 능히 역수해 올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그대로 가감없이 믿는 그 신앙이야 말로 이 병들고 패역한 세대를 이길 수 있는 산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각자 우리는 어떠한 신앙의 자리에 있는지 살펴봅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
진실한 소원을 두고 행합시다
본 문: 빌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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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송구영신 예배에 온 교회 성도들이 새해에 바라는 소원과 함께 감사 예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어떤 분은 소원을 기록한 봉투에 헌금을 담아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돈으로 사는 것 같은 잘못된 신앙이 될까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혹은 새해의 소원들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교역자들이 이를 위해 특별 기도를 산상에서 드린다 하면 마치 무속 종교의 기복 사상을 조장할 우려가 있지 않은가 하는 염려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여태껏 없던 목회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이런저런 생각을 낳게 하는 것일까요?
그 첫째 이유는 새해를 맞으면서 1년간 기도드릴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확실하게 세우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각자의 소원을 정리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데 꼭 적어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게 될 것입니다. 솔직히 적어내려면 소원을 집약하게 됩니다. 또 적어내고 나면 계속해서 기도하게 하고 1년 동안 소원들이 많이 생기겠지만 대표적인 몇 가지는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목회자와 영적인 만남의 장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성도들과 얼굴을 익히며 사무적이고 친교적인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인 요구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절박한 사정들은 저절로 알게 되지 않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교역자들은 노트에 옮겨 적어 놓은 것을 가지고 수시로 기도중이나 심방중에도 성도들과 영적인 만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셋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소원들이 믿음과 함께 점차 성숙해가는 훈련이 성도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말 주일 설교중에 우리의 소원을 솔직하게 적어내야 할 것을 부탁 드렸습니다. 간혹 의례적인 한마디를 적은 성도도 있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이 솔직한 소원들을 적었습니다. 가족의 건강, 사업의 확장, 자녀의 진학, 결혼 상대자 잘 만나기, 주택문제 해결 등 실제적인 소원으로부터 나아가서는 가족의 전도, 구역의 부흥, 민족의 통일 같은 소원도 있었습니다.
어느 집사님은 성경 신구약의 성구를 적어놓고 그 말씀이 성취되길 소원 하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부르며 그 소원을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느 한 분의 소원도 하나님께서 괄시하시지 않고 기뻐 받아주실 내요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성도들은 적어냈든지 마음에 간직했든지 간에 금년의 소원을 막연히 기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보다 절실하게 품고 마음으로 행하시길 바랍니다.
1.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며 또 그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본문 13절에도 "하나님은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씀 합니다. 시편 107편 30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 소원도 없이 산다면 절망 상태에 이른 것이요,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대로 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원이 없는 사람은 믿음도 없게 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37편 4절에는 "하나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소원을 주신 하나님은 이루어주기도 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소원을 주시고 또 이루어주심은 우리의 개인적인 욕심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품었던 소원이 믿고난 후에 반대로 돌변해버리는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소원들이 예수를 알고난 후 변하여 하나님 영광에 속한 소원, 이웃을 위한 소원들로 바뀌는 실례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성숙한 기독교인은 자기 소원이 하나님이 주신 소원인지 자기가 만들어낸 소원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기도하고 말씀도 상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예수께서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오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다"고 말씀합니다. 겟세마네에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회피하려는 육의 소원과 순종하려는 영의 소원이 갈등했던 예수님의 처절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극한 마음이 영의 소원으로 결정짓게 되었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언약을 보며 의아해할 때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슨 기도를 드리든지 그 소원을 응답하신다는 뜻일가요?
요한복음 15장 16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하사 과실을 맺게 하며 그 과실이 항상 있어서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다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슨 소원이든지 이루게 하신다 하셨지만 우리는 그 소원이 바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영적인 소원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무슨 소원이 되었던지 시편 38편 9절 말씀대로 "내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소원입니다.
13-14절에 "저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우리안에 두시는 소원은 어떤 것일가요?
첫째, 12절 끝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합니다. 그 복종의 본보기는 5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어 겸손히 낮아지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하신 사실로 나타납니다. "너희 안에 이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으라"고 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길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원을 이루는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에 복종하며 생활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공평과 정직을 기뻐하셔서 그런 소원을 갖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잠언 11장 20절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공평한 저울추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입법부나 사법부 등 법을 다루는 기관에는 공평을 상징한 저울 조작들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공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공평과 진실을 소원으로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쓰레기 종량제가 실시되기 전 며칠 동안 우리들 시민의 양심이 얼마나 무디어 있는지를 잘 나타냈습니다. 수거료 몇 푼 아끼려고 낡은 냉장고나 텔레비전을 남의 집 앞에다 버린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아직도 일부에서는 쓰레기 봉투값을 아끼려고 쓰레기를 아무 봉지에나 넣어서 남의 집 앞에 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비록 가난하게 살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정한 생활을 소원 삼아야 합니다.
셋째, 죄인이 회개하여 구원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전도하기 원하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의인 아흔아홉 사람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말씀한 대로 하나님은 사람들이 미련하게 여기는 전도로 믿는 자를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우리안에 있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적어낸 올해 소원을 보면 단 몇 사람만이 이 소원을 가졌습니다. 한 해 내내 이 소원을 품고 이 소원을 따라 살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이 기뻐하신 소원을 우리에게 두시고 이것을 좇아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어떻게 하면 자기 소원을 성취할 수 있을까 연구하고 또 노력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소원한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 각자 나름대로 자기 건강 관리를 힘쓰고 있습니다. 진학 소원은 불철주야 학업연마를 하게 되고 사업확장 역시 성실히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소원을 좇아 행하는 길은 무엇이 있을까요?
먼저, 그 소원을 주신 하나님께 기도로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첫번째 길입니다.
내 스스로 만들어낸 소원도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은 기도없이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내 소원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원을 포기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명을 받아 헌신한 사람들은 예외없이 기도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여 살기 위해 그 소원을 붙잡고 부단히 노력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공평과 정의로운 삶을 소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올바른 판단력을 늘 구해야 합니다. 전도의 소원을 품고 살기에 성령의 능력과 지혜의 말씀을 주시기를 늘 기도해야 합니다. 새해의 소원을 적어내신 성도들 모두는 주의 종들과 합심하여 기도로 행하시길 바랍니다.
다음으로, 소원을 좇아 살아나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피땀 흘리는 기도를 드리실때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세 제자는 시험에 들지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졸음으로 인해 그 말씀을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세 제자를 보시고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하고 동정을 하셨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를 3번이나 부인하고 약해지는 시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필칭 "마음에는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여" 못합니다. 안됩니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육적인 소원을 이루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왜 영적인 소원에는 육신이 약해지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구원을 이루려는 소원을 갖고 살때에 그 소원이 성취되는 모습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이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이 없는 자녀로 또 빛으로 나타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소원을 좇아 이렇게 나타나는 생활을 원하십니다.
금년 새해 우리 모두의 소원들이 궁극적으로는 우리 구원의 성취요 하나님의 자녀된 빛된 생활을 나타내는 절실한 소원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실패같은 성공
본 문: 고후 6: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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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의 삶을 원한다. 벤자민 플랭크린은 말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성공이 하나의 병과 같이 되어 자나깨나 그것이 염두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지나치면 "성공병 환자가 되어 대개 남의 성공을 시기하는 마음이 강하여 결국은 욕하고 중상모략하며 단숨에 2단 3 단을 뛰어 오르려는 욕심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오늘 우리 사회 안에,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성공주의는 팽배하여 있다. 심하게 표현하면 모두들 성공병에 걸린 환자들 같다.
실패란 무엇이며 또 과연 무엇이 성공인가?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어떤 개인이 추구하던 목표가 이뤄지면 성공하였다고 말한다. 우리가 말하는 성공이란 과연 무엇인가?
1) 경제적인 면에서 사람들은 사업이 잘되고 물질적으로 부를 누릴 수 있을 때 성공하였다고 말한다.
2) 정치적으로 남을 다스리는 입장에 이르게 되면 성공하였다고 말한다.
3) 그 사람의 이름이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 질 때 성공하였다고 말한다.
이 세가지 중에 어떤 경우든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그러한 경지에 이르게 될 때 사람들은 말한다. "그 사람 성공했지! ......."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 사람의 외면적인 요소들에 불과하다. 요즘 북한 주석 김 일성이 죽은 후에 그를 향한 호칭과 더불어 조문여부 때문에 논란이 많은 줄 아는데 이렇게 보면 김 일성은 성공한 사람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를 향하여 누가 과연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사도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헬라 철학에 능통한 사람이고 유대종교에서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다. 이러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자기의 자랑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살던지 죽던지 오직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여김 받는 것을 크게 원하였다. 바울선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만을 자랑하다가 일생을 마친 사람이다.
바울의 생애를 통하여 볼 때 과연 그에게 성공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번째 편지 속에서 자기를 가리켜 '무명한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승리와 성공은 역설적인데가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그의 성공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바울의 고백에서 성공이란 무엇인가?
바울이 지녔던 성공적인 사고를 우리가 이해한다고 하면 우리들도 성공적인 삶의 주인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바울 사도의 이와같은 고백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결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은 먼저 "가난한 자 같으나 사실은 모든 것을 가졌다."고 말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든지간에 많은 돈을 가지고 좋은 저택을 가지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 그를 가리켜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물질적인 풍요를 가지고 생의 만족을 말하지 않았다.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바울은 천막을 만들어 팔면서 복음전도를 한 사람이다. 간단한 순례자의 모습으로 소아시아를 누비고 다녔던 사도 바울의 전도여정은 가난함과 외로움을 온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비록 가진 것이 없었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바울은 그의 심중에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풍부와 만족을 체험하면서 일생을 살아 온 사람이다. 사실 물질적으로 보면 그는 성공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참된 부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사로 잡힌 까닭이었다.
바울의 이러한 삶의 방법은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하게 자라나신 예수님에게 일단의 무리들이 찾아와 예수를 따르겠다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둘 곳도 없다.'(마 8:20)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누가 예수님을 가리켜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분은 태어나실 때부터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 부모가 집을 떠나 여행 중이었다. 그렇다고 따스한 여관 방에 누운 것도 아니었다. 겨우 바람이나 피한다고 들어 간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 그 분은 본래 부요하신 분이셨다. 그러나 가난한 자의 모습을 가지고 태어나신 분이셨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예수의 삶 속에서 새로운 발견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고난의 길이요 가난한 자의 길이요 고통 받는 자의 길이다. 그 분을 따르는 우리들은 그 분과 함께 고난 받겠다고 말하면서도 고난과 그의 아픔에 동참하는 일을 주저하고 있다. 우리 중에 누군가 그러한 일을 당하면 하나님에게 복을 받지 못한 일로 판단하고 만다. 인격적인 평가의 기준도 거의 모두 그가 가지고 있는 물량적인 것에 두고 있다.
미국에서 많은 부를 모은 노 부부가 말년에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개발에 헌납할 생각을 가지고 하버드 대학을 방문하였다. 정문을 막 들어서려는데 수위가 이들 부부를 멈춰 세웠다. 총장을 만나러 왔다고 말 하였지만 수위는 아주 경멸하는 태도로 괄세를 하는 것이었다. 노 부부는 수위에게 조용하게 물었다. '이런 대학 하나를 세우는데 돈이 얼마나 듭니까 ?' 수위는 들은 척도 아니하고 노 부부를 밖으로 좇아내버렸다. 수위에게 상처를 받은 노 부부는 집으로 돌아왔다. 자기의 전 재산을 정리하여 새로운 대학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스탠포드 대학이었다. 나중에 이 사실이 하버드 당국자에게 알려져서 매우 아쉬움을 남게 만들었다. 그 뒤로부터 하버드 대학 정문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문구가 붙어 있게 되었다고 한다.
만일 이 노 부부가 좋은 차를 타고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대학에 들어갔다면 수위가 그를 멸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겉보기에 늙었고, 가난해 보이고 무식해 보이고 실패자처럼 보였어도 그는 재벌이었다. 그들은 자기 모든 재산을 교육에 투자할 줄 알고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을 가진 자였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입었고 또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 인생들에게 부요와 함께 넉넉한 승리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바울선생은 본문에서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라고 기록하였다.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징계를 받는다는 것은 벌을 받는다는 뜻이다. 남들이 생각할 때 바울이 징계를 받은 것처럼 생각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벌을 받아야 할 뚜렸한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핍박을 여러번 당하였다. 하루는 가이사랴 빌립보지방을 지나는데 귀신에 붙잡혀 점을 치는 여인을 만나 그를 고쳐 주었다. 그런데 주인은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여 옥에 가두었다. 비 정상적인 사람을 정상적으로 고쳐 주었는데 치료비는 고사하고 그들을 옥에 가둔 것이다. 얼마나 억울하고 분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실라와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였다.
바울은 로마에서도 옥에 갇힌 일이 있었다. 그 당시 기록한 편지에서 바울은 기록하기를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하였다. 그의 권면은 눌림을 받은 자가 누린 승리가 어떤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바울은 옥에 갇히고 채찍에 맞으며 온갖 수모와 핍박을 받은 자였다. 이 세상이 보기에 그는 실패자였다. 그러나 그는 승리자였고 성공을 소유한 자였다.
로마서 8 장에 나타난 바울의 승리의 찬가를 읽어 보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부활의 예수를 만난 후에 그의 삶이 완전히 뒤 바뀐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받아 들인 사람 만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부활에 동참한다는 이 사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성공의 모습이다.
사도 바울은 얼마든지 세상적인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성공에 대한 개념을 달리한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의 판단보다는 보다 더 깊고 넓고 높은 차원으로 자리를 달리 한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귀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겼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생각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는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화가 임하리라 생각하였다.
1940년 여름, 일본 경찰에 잡혀간 주 기철 목사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죄수의 몸으로 폐와 심장이 약하여져서 모진 고문에 몸은 약해 질 대로 약해진 몸이었다. 그런데도 기도하며 성경암송을 힘 쓰고 또 갇힌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에 힘을 다하였다. 주 목사님은 옥중에서 7 년 세월을 보냈으나 그의 신앙은 더 더욱 깊어만 갔다.
1944년 4월 스무날 그의 부인이 면회를 갔다. 주 목사는 그의 부인에게 '내 대신 어머님을 잘 모셔주시오. 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 조선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겠소. 교회 앞에 이 말을 전하여 주십시요.'라고 말하고는 그 다음 날인 4월 21일 오후 9 시에 ' 내 영혼의 하나님이여! 나를 붙드소서.' 하고 최후의 기도를 마친 후 49세를 일기로 인생을 마쳤다.
주 기철 목사의 삶을 대변한 설교는 너무나 유명한 '일사각오'였다. 한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분이 평양신학교 부흥회를 인도하는 첫날 밤 설교 제목이었다. 그 설교 내용인즉 첫째 예수를 따라가는 일에 일사각오요, 둘째는 남을 위하여 일사각오요, 셋째는 부활의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였다. 주 기철 목사의 생애는 성공인가 실패인가? 총총히 박힌 못 위를 걸어가며 발바닥에서 흘려 버린 그의 피가 오늘 우리 한국교회 성장의 밑거름인 것을!
두 아들의 생명을 앗아 간 원수들을 양 아들로 입적하신 손 양원 목사님과 같은 순교자의 사랑의 터 위에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기둥이 높이 솟아 오른 것을! 손 양원 목사의 삶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세상 사람들의 판단에서 볼 때 이들은 완전한 실패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들이다.
33 세를 일기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삶도 실패자의 삶처럼 보였다. 제사장들도 환호하고 서기관들도 기뻐하고 로마의 집정자들도 환호하였다. 하늘조차 검게 물들은 그날은 인간 예수의 완전한 실패처럼 여겨진 날이었다. 사단조차 박수를 치며 승리의 개가를 불렀음즉한 날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무덤에서 다시 살아 나셨다.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이기신 것이다.
세상이 판단할 때 바보스럽고 뭔가 모자라고 우습게 여겨져도, 역사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가치와 생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성공의 열쇠를 거머 쥔 사람이다.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약한 것들에 대한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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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고후 12:6-10
페트로니우스는 "사람은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할수만 있으면 그 결점을 감추고 살려 합니다. 그러므로 막트윈은 "모든 사람은 하늘의 달과 같아서 남에게 결코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라 했습니다.
과연 사도바울이 자신의 약한 것들을 자랑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1. 그 약한 것들이 고차원적인 은혜의 방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 본문 7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라 햇습니다. 과연 사도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가장 큰 은사와 은혜를 받은 사도였습니다. 그는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의 부르심으로 받았으며, 3년동안 아라비아에서 훈련을 받았고, 3청천에 올랐으며, 성경의 반 이상을 기록했습니다.
(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까지 주셨던 것입니다. 이는 시로 사도바울의 약점들이었습니다. 물론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혹자는 그의 볼품없는 풍체(고후10:10)라 했고, 어떤이는 질병 즉 간질이나 안질이나 만성 두통 및 열병이라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3번씩이나 생명을 내어건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응답은 거절이었습니다. 즉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3) 결국 사도바울에게 주어진 연약함 즉 육체적인 질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고차원적인 은혜의 방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높은 영적 체험과 함께 육적 가시를 주셔서 균형을 유지케 하시고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모든 교만과 유혹과 실패를 미연에 방지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도바울은 그 질고를 안고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한 것들을 자랑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육체의 가시를 통해 더욱 더 겸손과 성결과 하나님의 의를 이뤄나가야 할 것입니다.
2. 그 약한 것들이 하나님의 온전한 능력에 이르는 통로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 본문 9절에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했습니다. 여기 내 능력이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의 능력이요, 그 만물을 보존하시고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능력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거룩하신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사랑의 능력이요, 그 아들을 죽음 가운데서 부활시킨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의 그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 것들을 자랑하는 생활을 통해 우리의 삶속에 머물게 됨을 또한 발견했습니다. 여기 머문다는 말은 헬라어 "에피스케노세"로서 "장막을 펴고 머무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어던 상황속에서라도 결코 떠나지 않는 확실한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가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자녀가 병들때 어머니는 더욱 강해집니다. 가정에 어려움이 닥칠대 가장은 더욱 생명바칠 각오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그의 자녀들의 연약한 것들을 통해 온전히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3) 사도바울은 한평생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를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더 강하게 힘입고 모든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피곤을 이겼습니다. 고통도 이겨냈습니다.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도 이겼습니다. 마침내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가지고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이는 그의 약함을 통해 더욱 온전히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3. 그 약한 것들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 사도바울이 기록한 로마서 8:29은 그리스도인으 삶에 찾아오는 모든 종류의 고난과 슬픔과 연약에 대한 명쾌한 대답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는 사도바울의 일생을 재탱해 준 주옥같은 말씀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음을 확신한 사도 바울에게는 그의 모든 약함들 조차도 그를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고차원적인 은혜요, 은사요, 축복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2) 저는 지난 5월 미국여행중 뉴욕에서 그만 안경을 깨트리는 불상사를 당했습니다. 임태승 장로님댁에서 하루밤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날씨는 몹시 더워 한 밤을 어렵게 보냈습니다. 아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열기 위해 창가로 가던 중 벗어놓은 안경을 무심코 밟아 버린것 입니다. 할 수 없이 300달러짜리 안경을 주문해 쓰게 되었습니다. 당시 돈도 다 떨어져가는 터이라 사실 속이 몹시 상했지만 내색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경은 유리가 특수 유리여서 겨로 깨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8월23일 새벽 교통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콩코드 2.0이 대파되어 수리비 견적이 800여만원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을 안경에는 흠 한군데 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 안경알이 깨어졌다면... 그제서야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감사했습니다.
(3)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약점없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 모든 약함도 합력해 선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작품이요, 선물이요, 은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약점을 부끄러워하며 절망만 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더욱 더 온전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려야 할 것입니다.
화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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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고후5:13-21
오늘은 성례주일 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이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받아 마시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세운 새 언약이다 이것을 횅하여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 니다. 그런 다음에 주님은 그 밤에 잡히시고 부끄러움을 당하신 뒤 날이 밝자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찬을 통해서 주님의 고난 당하심과 죽으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때문에 주님께서 붙잡히셔서 고난 당하시고 물과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까?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대항하고 거역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되어 하나님께 멀어지자 이 멀어져 간 인간을 구원하고 화목게 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화목'은 영어로는 `다시 더불어 함께 붙들어 매는 것'의 뜻이 있고, 헬라어로는 `다시 회복하여 붙들어 매는 것'으로서 깨어진 관계를 조정해서 회복하게 하는 것, 본래로 되돌려 정상화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다시 화목케 하시려고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살을 찢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화목하려면 불화하게 되는 원인, 장애물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사람들과 화목을 깨고 장애를 주는 인간들의 죄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렁에 빠진자가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며, 썩는 수박이 스스로 회복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은 무능해서 그 죄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멸망받는 죄인이, 불순종하고 거역했던 죄인이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려면 죄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그 화목제물로 보내셨으며 이 화목은 방법으로 주님이 우리의 죄값으로 죽으셨 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죽으심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원수되었던 인생들이 정상적 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인생들이 죄를 지였으면 당연히 멸망받아야 되지만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않으셨습니다(19절). 한 분 주님이 죽으셨지만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14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또 한 직분을 주셨는데 그것은 "화목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18절) 이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 들에게 다른 사람을 화목하게 하고, 사람끼리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19절) 즉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화목케 하는 자로, 화해 자로, 삼으셨다는 것이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부모와 자식사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 부부 사이에 화목하십니까? 하나님과 화목했으면 사람과도 화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생들과 화목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시면서 너희들도 `화목케 하라'고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가리켜 `그리스도를 대신 한 사신'이라고 하셨습니다.(20절) 따라서 우리들은 화목을 만들어야 하며 이 성찬을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로 화목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화목을 만드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첫째,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자입니다.(15절)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위해, 죽은 영혼을 위해 사는 자 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위해서 미친 사람입니다. 화목하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미친 자라고 했습니다.(13절) 이 말은 헬라어로 `황홀한 상태'란 뜻입니다. 즉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황홀한 상태, 기분 좋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상태는 하나님 앞에 찬송을 드려도 좋고 예배드려도 기분이 좋고, 전도하는 일이 기쁘고, 하나님만 생각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없어질 세상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미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을 강권하시도다"(14절)라는 말씀처럼 주님의 강한 사랑을 받은 우리이기에 하나님과 주님을 위해 미치고 사람과 화목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하나님과 막힌 담이 없어야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도 담이 벗어야 합니다. 만약 담이 있다면 반드시 허물어야 합니다. 미운 감정들이 있으면 화목할 수 없으며, 불화만을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는 정상입니까? 정말 새로운 사람입니까?(17절) 개혁된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화목케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화목의 제물되신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 `화목의 제물'이 되어야 하고 `화목의 사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화목의 말씀을 전하고 `너희는 하나님과 이웃과 화목하라'고 외치는 사람이 되어서 화목의 삶을 살아 드리며 주님의 은혜에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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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