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타의 가르침은,
인간을, 인생의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게 하는 방법을 설명한 것으로서.
이것을 붓다 스트라라고 말합니다.
“깨달음에의 길,” “깨달음에의 가르침”입니다
말하자면, 일상생활의 한 순간 한 순간 속에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과, 바른 행위를 실천한다.
그때에, 우리들의 마음의 창은 열리고,
과거세를 생각해 내어,
현재의 매일의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한,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타력 신앙인 대승불교에 의해서 깨달을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주; 부처님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이러이러하니 스스로 어떻게 하라는 식 이며,
내가 어떻게 해주겠다는 말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올바른 기준에 의해서) 매일의 실천 활동을 거듭하여 감에 따라,
고통에서 벗어나, 집착을 끊고,
마음이 부조화한 자신이 만들어 낸 흐림을 맑게 했을 때,
위대한 신의 자애(慈愛)의 빛이 가득차서,
마음이 평온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중국으로 건너가서, 학문 불교로 바뀌어 버렸고,
'지(智)'와 '의(意)'로 왜곡되어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情),
즉 마음은, 학문 불교의 철학화된 내부에, 매몰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그 신리(神理;신의 이치)를 찾아내기 위하여, 고생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불교는 일상생활 속에 살아 있지 않는 것입니다.
경을 올리거나, 불각에 참배하거나.
조상을 모시는 형태만이 지금의 신앙으로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불교라는 가르침에 따라서,
바른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과 행위를 실천하지 않고,
어떻게 불교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어려운 불교철학을 초심자가 알 리가 없다'고 조소하는,
프로 종교가가 만약 있다면, 나는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 인도의 고타마 붓타는 종교가였는가.
이스라엘의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가였는가..”라고,
고타마 붓타도 출가하였을 당시는,
바라몬의 사마나나, 사로몬들로부터,,
“초보자가 심원한 신(神)의 길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마하 바라몬의 ‘바바리’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 ‘빈가’를 위시하여,
마이토레야(미륵보살)등 17 명을 붓타의 슬하로.
‘마음’을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바라나시의 카파리라는 곳에서부터,
멀고 먼 구리도락쿠타의 땅으로 보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예수도 유대교도나 다른 교도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프로의 종교가중에도,
미온적인 종교에 어딘지 불만스러워,
스스로 길을 찾아 실천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프로의 종교가도 프로의식을 버리고,
초보자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캉가의 흐름이 지금도 변함없이. 벵갈만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신리(神理= 신의 이치)의 『법(法)』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전란의 시대에는 그 환경의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생명의 불변함을 가르치고, 마음의 평화를 주기 위하여,
타력본원이라는 방편을 써서, 사람들을 인도한 적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법”은 인간의 지혜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살아가는 수단으로 하여,
베일을 씌워서, 타력 신앙을 가르쳐서,
신자를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던 사람들도,
참된 “법”을 알았더라면, 그 죄는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도리어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 진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나는 “ 반야심경”을 현대의 자연법칙에 비추어,
그것이 얼마나 올바른 인생의 도표인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현장법사는 장안의 도시로부터, 멀리 남인도를 방문, 불교를 찾아,
악전고투 끝에, 드디어 불법의 진수를 알게 되고,
마음과 행위의 대 조화에 도달하고,
그 대반야경(大般若經)속으로부터 반야심경을 집약했던 것입니다.
본문 266자. 제목 10문자. 그것이 정수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더라면, 완성되지 않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식과 지혜는 다른 것입니다.
생활과 마음의 조화가 없었다면,
얻을 수 없는 불지(佛智)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세의 사람들은, 쉬운 타력본원의 길을 구했을 때부터,
생활체험을 통하여, 이해하는 것을 소홀히 하여,
자기를 잃고 말았습니다.
예를 들면, 현재,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공해도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문명이라고 하는 인간의 생활의 지혜에, 인간 자신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수정하는 것은, 역시 자력(自力)에 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속에 만들어진 스모그 현상도 같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자력에 의해서만, 타력이 얻어진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주; 내가 열심히 수행생활을 하여, 마음에 낀 구름(자기의 결점)을 맑게
제거해서, 수호령의 마음과 같은 깨끗함을 얻었을 때,
수호령의 수호를 받고, 지도령의 지도를 받는다는 말씀)
반야심경도,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독송이고,
이해하기 위한 사경이라면 좋습니다.
그러나 비는 것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본 뜻으로부터 멀리 떠난 것입니다.
내용과 의미를 안 마음과 생활,
그것 이외에 본질에 도달하는 길은 없습니다.
반야심경으로 이익을 얻으려고,
독송하는 것은 발성 연습과
자기 도피,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대한 반야심경 속에 있는 올바른 가르침을
진흙 속에 넣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다이아몬드를 도랑에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닙니까.
고타마 붓타의 가르침은,
위대한 마음과 행동의 가르침인데,
그것이 경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하나. 말의 해설에 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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