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의 뜨거웠던 여름을 세 가지 이유로 기억하고 있다.
첫째는 전교조 해직교사들이 전원 복직을 한 해이므로 결코 잊을 수 없다.
- 5년에 걸친 해직생활을 끝내고 다시 돌아온 교단에서 아이들과 함께 매일매일 황홀해 하던 중이었다.
둘째는 역사적인 남북정상 회담을 앞두고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였다.
- 태어날 때부터 빨갱이로 귀 따갑게 들어오고, 결코 죽지 않을 인물, 영원할 줄 알았던 김일성의 죽음으로 정부와 시민단체
간에 북한에 조문을 '가야 한다, 안 된다, 가야겠다, 못 간다, 갈 거다, 가기만 해라..'하며 서로 으르릉거리다가 결국 못 갔기
때문에 기억한다. 그리고 북한 인민들의 엄청난 슬픔에 경악하였고, 온 나라는 전쟁 분위기로 난리법석이었다.
셋째는 엄마가 돌아가셨다.
- 돌아가시기 전에 '니가 다시 선생이 된 걸 보고 죽으니 내가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가 있다'고 하셨기에 확실하다. 그리고
엄마 말고도 그 여름이 끝나고는 유난히 노인들이 많이 돌아가셨다는 신문 기사를 또한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하여간 1994년 여름은 내 생애 최고로 더웠다. 대구의 기온이 최고 39.9도까지 올라갔다.
0.1도만 더 올라가면 40도가 되는데 ' 아, 아깝다!' 라고 탄식을 했기 때문에 39.9도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차에서 내리려고 문을 열자마자 뜨거운 열기에 깜짝 놀라 다시 차 안으로 기어들어갔지.
그런데 이후 2010년도 오늘까지 여름이 아무리 더워도 94년도 여름보다는 덜하다.
그 여름을 겪었기 때문에 매년 여름을 너끈하게 견디고 있다.
몇 년 전 발 수술을 하려고 전신 마취를 하는데, 척추에 커다란 주사 바늘이 들어와도 '아, 머리 아픈 것보다는 덜 아프네.'
했던 적이 있고, 씀바귀의 쓴 맛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라일락 잎보다는 훨씬 덜 쓰네.' 라고 느꼈던 적이 있고, 94년도 여름
을 겪었기에 올해 최고라 해 봐야 36도밖에 안 되는 이 여름을 잘 보내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나이를 먹으면 세상에 그다지 '대단할 게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상 끝!
첫댓글 1994년 여름은 정말로 뜨거웠군요, 해마다 다사다난했다지만 올해 더위를 잊을 수 없네요, 오늘 학교에서 전기 과다 사용으로 정전되어서 급식소에서 뜨거운 미역국을 먹는데 어찌나 뜨겁던지 화탕지옥이구나 생각했지요, 이 모든 것도 다 지나가고 기어이 서늘한 가을은 오겠지요?
94년 여름을 똑똑히 기억합니다...어제 딸과 대화를 나누다 그러잖아도 그해 여름 얘기를 했지요....작은 딸을 가져서 막 입덧을 하던 때니.....정말 그해 여름이 덥기도 했지만 근 두달 비한방울 내리지 않았다는 것도 아시지요..ㅎㅎㅎ
1994년, 마른장마가 영남지방에 있었죠. 중부지방엔 비가 많이 오는데 유독 영남지방엔 올듯하다가 그냥 지나가 버리고 강줄기 마다 바닥을 드러냈죠. 그땐 에어컨도 가정집에는 거의 없었고....39.9도.....대구에서 길가다가 죽겠다는 위기감을 처음 느낀 불통 더위였죠. ^^
그렇군요. 달희님이 확연히 기억하는 것을 저는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군요. 그럼요. 겸험은 가장 큰 스승이지요.
사람마다 기억하는 것이 다르지요. 전 우리 모두 가슴 아프게 복직했던 것 말고는 거의..... 몇 년 떠나 있던 학교에 돌아가니 OMR카드 사용하고 행정실 아저씨까지 차를 다 가지고 있는 것이 무지 생소했던 기억이.... 지구가 자꾸 뜨거워지고 뜨거워진 만큼 사람들은 에어컨을 더 돌리고 그 열기가 지구를 또 둘러싸고... 악순환이 계속되어 후손들은 어떻게 살까 걱정되지요.
그 때는 그렇게 더워도 젊어서 견딜 수 있었는데... ㅎㅎㅎ 지금은 에어컨이 있어도 힘드네요. 세월 탓이겟죠?
그 더위는 젊었기 때문에 이겨 냈지만 그 보다 덜 더워도 힘들어 사망 하겠습니다 나이 때문인가 봅니다 이제 추억이 그리운 나이입니다
정말로 힘들 때는 "나는 지금 자서전의 가장 힘든 부분을 쓰고 있는 중이야." 혹은 "나는 지금 갈등이 최고로 고조된 영화의 한 부분을 찍는 중이야."라고 생각하라던 어느 분의 말이 떠오릅니다. 어떤 드라마도 어떤 소설도 갈등이 없는 것은 없지요. 우리네 삶도 냉혹한 갈등으로 단련되지 않으면 진정한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 글이 주제에 어긋난 건 아닌가요? 만약 그렇다면 그건 더위 탓이지 제 탓은 아님!!
아! 저두 기억해요 그날 서울의기온이 36도였지요
그날에 모임이 저희집에있어서 부엌에서 고생했지요
그날 김일성이가 저나라로갔구요
정확한 연도를 기억하지는 못해도 그 즈음의 여름에 무지 더웠어요. 그 땐 에어컨도 없고 선풍기 뿐이었는데 낮동안에 데워진 아파트 옥상이 식지를 않아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자다가 온식구가 근처 모텔을 간적도 있었지요. ㅎㅎ 올 여름도 꽤 더워서 그때 일 떠올리곤 했었는데 달희님께는 사건이 있는 해였군요.
옛날엔 이리 더운 날이 없었어요. 왜냐면 추억은 아름답기 때문이죠.^^
그래요. 그해 여름 우리딸애를 낳았어요. 낳은 지 며칠 안 지나 김일성주석이 죽었고, 조문 가던 대학생도 잡히고, 특히 박용길 장로님(문익환 목사 부인)이 판문점에서 잡혀 수갑 찬 모습이 신문에 크게 났지요. 그뿐 아니라 그해 철도노동자들이 대대적으로 파업해서 남편이 아기를 보러 대구에 올 때 기차를 못타고(파티마 병원은 동대구역에서 가깝죠.) 버스 타고 오곤 했죠. 그런 걸 보며 딸아, 너는 통일 된 세상, 그래서 노동 운동을 해도 빨갱이라 몰리지 않는 세상에 살아라. 그 세상을 위해 엄마도 일하겠다는 내 바람을 담아 아이 이름을 새누리라고 지었어요.
그리고, 저 더위에 강해서 자취 생활 5년 동안 선풍기 없이 살았는데, 어찌나 더웠는지 온몸에 땀띠가 나서 어쩔 수 없이 선풍기 바람을 쐬었지요. 그러니까 담박에 손저림 현상이 오더군요. 그래, 그런지 딸애 또래들이 자라면서 무지 별나고 해서 그또래 애들 담임할 때 너무 힘들었어요. 생각해보면 그때 제가 몸이 많이 망가진 것 같아요.
ㅎ 보리누리님 저도 그해여름 아들을 낳았습니다. 오늘이 음력으로 그녀석 생일입니다. 어제 몇가지 음식만들면서 나중에 넌 생일에 엄마 맛있는거 사줘야한다고 햇더니 꼭 그리하겠다고합니다. 런닝 안입으면 안되는줄 알고 그때까지 살았는데 그여름 런닝을 벗었고 민소매 셔츠도 처음으로 입었고 양말도 벗어봤습니다. 보기만해도 더웠던지 어머님께서 민소매셔츠사다 억지로 입히셨는데 정말 시원하더군요. 8식구 먹을 보리물 끓여서 식혀 냉동실에 얼리는일도 제겐 큰 일이었고, 거기에 아이낳기 며칠전 좀도둑이 들어서 문도 못열고 아이때문에 선풍기도 못틀고, 아이낳고 나흘째되는날 어머님몰래 뜨거운물로 샤워하고 양치하고 머리감고.
..냄새때문에 제자신이 참을수가 없어서...그래서인지 저 요즘 팔이저려서 병원다녀요. 아들녀석오면 이 얘기도 꼭 해줘야겠습니다. 그래도 말없는 아빠나 형과 달리 엄마 맘을 잘 알아주고 달래주기도하는 아주 키특하고 예쁜 녀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