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포크계의 대모(大母) 양희은
양희은은 1952년 8월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태어났고 군 장교였던 부친과 서울예대 성악과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게 된다,
아무래도 그녀의 탁 트인 목청은 군인정신과 엄마의 재능을 물려받은 산물인 것 같다.
그리고 유아기에 소아마비를 앓아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입이 약간 불편해 보이는 것이다,
70년대 우리네 동네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림이다. 아귀가 맞지않고 색깔은 벗겨진
오래된 저런 철대문이 집집마다 있었고, 그 앞으론 촌스런(^^)옷을 입은 꼬마 아이들이
떼지어 몰려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노래'라는 옷을 입고 태어난듯 재능을 보였으며, 초등학교에서 경기여고에
이르기까지 교내에서 노래하면 그녀로 통했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을 가회동에서 보냈는데. 동생인 양희경과 함께 '양대령네 딸들'로 불리었다고 한다.
참... 아주 오래 전 이야기지만 TV에서 동생 양희경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때 언니인 양희은의
목소리와 너무 비슷해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는데 그녀는 성우 출신이었다.
그녀의 노래 인생은 대학입시에서 낙방한 후 재수를 하던 19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구들과 함께 구경간 명동의 '청개구리'공연에서 우연히 무대에 서게 되었는데 이자리에서
서유석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노래를 불러 반향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이자리가 70년대 대한민국 포크계의 대부(大父)와 대모(大母)가 조우한 첫 만남인 셈이다.
이렇게 국내 포크의 산실인 '청개구리'와 안면을 튼 후 김민기와 친분을 쌓게 되었고, 재수 끝에
서강대학교 사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면서 계속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리고 신입생 시절을
보내던 1971년 9월, 드디어 데뷔 LP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한다.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아침이슬 (1971. 9 유니버어살)
70년대 청년문화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앨범재킷이 멋진 데뷔 앨범이다. 긴 생머리
청바지, 통기타... 김민기의 대표곡격인 "아침이슬".함축적인 가사가 압권인 "그날"
역시 김민기와 같은 서울대생이었던 김광희의 "세노야"등의 창작곡과 언제 들어도
참 좋은 "Puff","Seven Deffodis"."Try to Remember"등의 번안곡이 실려있다.
"아침이슬"이 언제부터인가 데모가(운동권노래라고도~)의 최고의 주가를 올렸던 시절
이 있었다, 그런데 이 곡이 1973년엔 건전가요 리스트에 올랐다가, 다음해엔 금지곡이
되었으니 우리네 세상사 모든일은 각자의 시각에 따라 해석에 따라 그 본질이 다른 이치이리라,,
71폭송 힛트모음 제1집 (1971,9 유니버살)
양희은의 솔로 데뷔 음반을 발표하면서 거의 동시에 포크송 옴니버스 앨범인 본작에
"나뭇잎이 떨어져서 "와 불멸의 애창곡인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 그리고 번안곡인
"일곱송이의 수선화" 등 세 곡을 올리고 있는데. 대중적으로 폭넓은 사랑을 받으면서
지명도를 확보한 데는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 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양희은은 앨범 발표로 대중들에 대한 인지도를 높였고, 명동의 오비스 캐빈이나 코스모스
그룹 2층 파라다이스 룸 등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1970대 초 대한민국의 포크열풍을
선두에 서서 이끄는 개척자 그룹에서 활약을 펼친다.
그리고, 그녀는 순수한 포크족들의 모임인 '청개구리 ' 활동을 하면서도 상업적인
활동, 즉 명동 오비스 캐빈이나 코스모스 등의 쌀롱가와 방송에 출연했던 것에 대해
졸지에 가장이 되어버린 집안 형편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그것은 당시 순수한 노래 모임인 '청개구리'에서도 경희대의 김윤태. 서강대의 임문일.
그리고 김민기와 양희은 자신을 '사총사'라고 부르며 일체의 상업적인 활동을 하지 말자고
약속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을 술회한 부분인 것 같다, 부모의 이혼 및 어머니의 빚보증
으로 가게사 기울어 그녀가 살림을 떠맡게 되었다고 한다,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제 2집 (1972.7 유니버어살)
아쉽게도 음반은 초반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가 앨범 커버가 증발해 버린 레코드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주는 양희은의 음반인데, 김민기가 양희은 이고
양희은이 김민기인듯 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아름다운 것들","그사이 ","서울로 가는길","새벽길","작은 연못" 등도 좋지만,
난 "백구"를 제일로 좋아한다. 내 초등학교 시절 마당에 살던 개를 백구라 지었다,
불나무 (1972.9 성음)
방의경의 "불나무"를 타이틀 곡으로 한,일명 '봉투앨범' 이다. 음반에 있는 다른
수록곡들은 이미 양희은이 발표한 곡들을 모아 놓았다.
"맷돌 밝은 노래 모음" (1972. 재발매CD)
양희은은 본 음반에서 "서울로 가는 길",김광희 작곡의 "빈자리 ",그리고 공연에 참여한
다른 포크 싱어들과 다함께 부른 "아침이슬" 이렇게 세곡을 부르고 있다.
맷돌은 1972년 6월 14일 명동 코리아나 백화점 3층 문화 살롱에서 열린 첫 번째 공연을
시작으로 계속 가졌던 공연의 이름이며, 이 음반은 같은 해 9월26일 명동 국립극장에서
실황을 담은 것이다.
맷돌공연에서 노래하는 양희은 1972
양희은 고운 노래 모음 제3집 (1973.10 유니버어살)
정규 3집 앨범으로 볼 수있는 음반으로 1,2집이 김민기 냄새가 강하게 났던 반면
본 작에서는 다향한 스펙트럼을 느낄 수있다. 조동진, 방의경,한대수,서유석,
김광희. 그리고 신중현에 이르기까지 실로 당대 최고수들의 작품을 양희은이
맛나게 요리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대학생 가수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녀서 1972년 가을엔 라디오에서 방송 DJ를 맡는 등
그야말로 눈코 뜰새 없는 생활을 하던 그녀에게도 대부분의 스타가 겪게 되는 시련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1973년초엔 서유석과의 결혼설, 74년엔 금지가요 파동등,,,,
서유석과 양희은 사이에 터져나온 열애설은 지금의 그 어떤 연예계 커플이 던져주는
폭탄 못지 않은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대사건(?) 이었다.
같은 씬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최고의 남녀 가수들이었고, 당시 젊은이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TBC-TV의 '오라 오라 오라 '에서 두 사람은 공동 MC를 맡았었다.
하지만, 진실이 무엇이었든지 70년대 초중반 두사람이 남긴 주옥같은 포크송들은
별들의 향연 이었다.
내님의 사랑은 / 오너라 비야 (1974.5 유니버어살)
또 다른 장르로 록 소울의 포크 "내님의 사랑은"이 수록되어 있는 앨범이다, 故이주원의
주옥같은 작품들과 김정호와 김민기의 곡들로 이루어진 음반이다.
"내님의 사랑은 ","오너라 비야 "," 그리움 "등 세곡이 이주원의 작품들이다.
이주원 (1976)
(註: 이주원은 70년대 후반 "따로 똑같이"의 멤버였으며 국내 포크史에서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2009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별세)
- Greateast Hits (1974.6 카피음반)
서유석,임창제,양희은,이수영, 그리고 뒷편에 송창식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포크
싱어들이다 임창제 앞의 스탠딩 마이크에 TBC 라고 하는 추억의 방송국 마크가 보이는데,
원래 삼성소유였던 방송국이었지만 서슬 시프런 5공 군사정권 시절에 강제로 통폐합 되었다.
아마 후라이 보이 곽규석의 '쇼쇼쇼' 하면 생각나는 분들 많으실테고 70년대말 캠퍼스
그룹 사운드의 황금기를 열었던 '해변가요제 '와 ' 젊은이의 가요제'를 주최했던 방송국이다.
71년 데뷔 이후 73년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그녀에게도 피할 수 없는 군사정권의 칼날이
날아들어 수많은 그녀의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묶여버려 실질적으로 활동 중지에 들어간다.
그녀의 노래중"아침 이슬","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등 30 여곡 이상이 금지곡이 되었으니까,
군사 독재 시절에 족쇄를 채우면 채울수록 오히려 가멸찬 반항 운동이 일어나곤 했는데.
그 시점의 '양희은'이란 포크 싱어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동권 가수로 만든 면도 있다.
보고싶은 마음/밤은 가고./빗속을 둘이서 (1975.6 유니버어살)
故김정호의 "보고싶은 마음","빗속을 둘이서 ","밤은 가고" 등이 슬픔을 안겨주기도 하고
이수만 작곡의 "누가 알게 될까"같은 곡에서는 제법 락킹한 맛을 풍기며
김광희가 만든 "나의 친구"에선 다시 순수한 포크 싱어로 돌아간다 "나의 친구"는 1974년 11월
공개된 '현경과 영애'의 유일작에서 "내친구"로 발표되었던 곡이다,
네 꿈을 펼쳐라/내곁에 와요 (1976.2 서라벌)
이주원이 만든 "네꿈을 펼쳐라 ","내곁에 와요" 등이 많이 들려진 넘버들이고 "하늘"."노래"등
네곡의 이정선 작품들을 양희은이 불러주고 있다
한사람 / 세월이 가면 (1976.4 서라벌)
양희은의 초기는 김민기와 중기는 이주원이란 인물과 같이 했다고 볼 수 있는데 본 음반에서도
이주원이 만든 곡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모두 모여 노래를 ", "그리운 그님네는",
"나홀로 ","내사랑 그대곁에" 이렇게 다섯 곡이 이주원의 작품들이다,
내님의 사랑은 (1976.8 서라벌)
이주원의"내님의 사랑은 "외엔 이전의 힛트곡들을 수록한 베스트 음반성격이다.
여고동창생(1976.11 서라벌)
대단히 만족스러운 당대의 포크 컴필레이션 음반으로서 양희은은"여고동창생" 과 "그리움"
두곡을 부르고 있으며 이주원의 "나홀로"를 포함하여 바블껌, 허림, 박인희, 쉐그린등의
노래가 실려 알찬 앨범으로 기록되고 있다.
양희은 Best (1977.5 서라벌)
"들길 따라서 "를 필두로 양희은,이주원 콤비의 넘버들과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재미있는건
이 음반을 들을 때면 남궁옥분과 양희은의 음색이 꽤 헷갈린다는 것이다.
거치른 들판에 푸루른 솔잎처럼/천릿길 (초반) (1979.1 서라벌)
3년만에 발표한 양희은의 독집앨범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음반이다. 군에서 제대한
김민기가 다시 양희은과 손을 잡고 발표한 본작에서 정작 김민기의 이름은 찾을 수가 없는데
김아영이란 이름이 그가 사용한 대명(代名)이었기 때문이다,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은 "아침 이슬"과 더불어 양(兩大)데모가가 아니었을까?
국악을 도입한 "밤뱃놀이" 눈에 보이는 가삿말과 천연덕한 양희은의 목소리가 일품인"고무줄 놀이",
군복을 입어본 청춘들이면 누구나 공감할 "늙은 군인의 노래",마치 진군가 같은 리듬에 역시
가삿말이 압권이 "천릿길",가족들 생각이 절로 나게 만드는 "식구생각"등이 압권이다,
초반은 앞면 네번째 트랙에 "늙은 군인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고 재반은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수록곡이 바뀌어져 있다. 70년대 말고 80년대 초에 대학시절을 보낸 청춘들이라면 이 "늙은 군인의 노래"를
캠퍼스에서 안 불러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새우깡이나 병맥수나 소주를 사들고 캠퍼스 잔디밭에서
부르던 노래들 중 단골이었으며 "영자야, 내 딸년아 몸 성히 잘 있느냐?,,, "와 함께 셋트로
불러대던 곡이기도 했다.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천릿길(1979.1 서라벌) 재반
초반과 재반은 재킷 뒷면도 이렇게 다른데 , 초반이 우울한 시대상을 차분하게 읊조리는 듯한
사진이라면 재반은 너무나 밝게 웃는 양희은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70년대 중반부터 수많은 그녀의 노래들이 금지곡에 묶여 실질적인 가수 활동을 할 수없던차에
1977년엔 라디오 방송에서 권유하차하고, 1978년 TV쇼 프로그램에서 마지막으로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양희은, 당연히 정권의 압력에 의해 일체의 방송 출연등이 불가했던
시대적 상황이었다. 운동권의 가수(?)가 대중을 상대로 한 방송 출연을 그대로 두었을리는 만무하다.
아뭏튼 이후로 5년 동안 그녀를 방송에서 볼 수가 없었다. 8년만의 늦깍이 대학 졸업과
봉제 없체에서의 직장생활, 그리고 암 수술과 투병생활 등의 이유이었다.
하지만 80년대초의 해빙 무드와 그녀의 노래에 대한 강한 열망은 다시 그녀를 노래판으로
불러 들였다, 1983년, 자신이 가사를 쓴 "하얀목련"으로 오랜 공백을 깨고 다시 대중들 앞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기서 잠시 1973년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
신중현과 양희은 1973
어딘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신중현과 양희은이 만나 1973년 앨범을 발표한다,
신중현은 같은 해에 서유석과도 같이 작업을 하여 "선녀/나는 너를" 앨범을 공개 하였는데
락을 추구하였던 신중현이 포크에도 유달리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아래의 음반은 1973년에 발표한 초반을 1980년에 편집을 하여 재 발매한 레코드이다,
이름모를 소녀/ 길 (1980.3 서라벌)
A면은 김정호의 곡들을 , B면은 신중현의 곡들을 수록한 음반이다 1973년에 발표된
초반의 경우 본작의 B면이 A면에 그대로 들어가 있고 B면엔 조동진. 한대수,서유석,김광희가
만든 곡들을 양희은이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이 음반은 재반이라고 보기도 좀 그렇고
편집 재반 정도로 볼수 있겠다,
신중현과 함께 작업한 싸이키 포크 "길","당신의 꿈"등이 앨범의 백미라고 볼수 있는데
특히,"길"이나 "고운 마음"등에서ㅡ 바람처럼 흐르며 들리는 하프의 싸이키한 맛이 일품이다.
그리고 같은해인 1973년에 공개된 한국 싸이키델릭의 여제(女帝) 김정미의 앨범 "바람"에도
"나도 몰래 "와 "당신의 꿈"이 수록되어 있으니 비교 감상해 보는 것도 좋은 음악여행이 될 법하다.
어디만큼 왔니/누구나 다있지 (1981.5 서라벌)
송창식의 곡인 "어디만큼 왔니"가 가장 귀에 익은 음반이다.
30대 중반으로 접어든 그녀에게선 보통의 30대 여성들에게서 느껴지는 것보다 훨씬
깊이가 있다. 20대에 이미 최고의 자리와 수난을 경험했기에.,,,
그래서 우린 그녀가 30대에 발표한 "하얀 목련"과 "찔레꽃 피면"같은 곡을 더 좋아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1985.1 서라벌)
데뷔시절부터 "하얀 목련"에 이르기 까지 힛트곡들을 모은 베스트 음반이다,
찔레꽃 피면 (1985. 9 서라벌)
라이너 노트를 읽어보면 이 음반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 지를 알수가 있고,
특히, 조동진 선배에 대한 고마움을 양희은은 표하고 있다.
하덕규의 "찔레꽃 피면"과 "한계령"은 말 그대로 가슴을 울리는 깊은 감동이 있고
장제훈이 가사를 쓰고 조동진이 곡을 부친 "옛날에 옛날에"는 찡한 울림이 있다.
양희은이 처음 부른 노래들 2LP (1987. 10 서라벌)
두장짜리 베스트 음반으로 , 라이너 노트에 보면 양희은이 다시 부르면 더욱 잘해
낼수 있을 것 같지만, 스무살의 희은이를 가슴에 담아둔 사람들을 위해
옛것 그대로를 들려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오리지널을 그대로 올렸다고 한다.
1987년 양희은은 재미교포와 결혼 하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1994년에 다시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오지만, 그 사이 사이에도 좋은 음반을 발표했는데,. 아래의"1991"은
이병우와 작업을 한 음반으로 후기작임에도 불구하고 명반의 반열에 올릴 수 있다.
1991(19991 킹 레코드)
데뷔음반을 발표한 지 20년 이제 그녀의 나이도 마흔이 되었다. 그래서 삶을 관조하면서
노래를 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병우의 바램대로 이 음반을 들으면
마음에 편안함이 밀려 온다,"그해 겨울","그리운 친구에게 ","가을 아침","저 바람은 어디서?",
"11月그저녁에","나무와 아이","사랑 - 그 쓸쓸함에 대하여","잠들기 바로전",모든곡이
만점짜리 이다, 그리고 김의철이 시도했던 클래식 포크와 그 선이 닿아있는 듯한 느낌이다.
나의 지난 세월은 자랑이 아니라
세월만큼 퇴직된 창피함이다
이제야 진전 좋은 가수가 되고 싶은 마음이
너무 늦은 것이 아니 길 바란다.
-일천구백팔십오년 덛달 스무날 양희은-
데뷔 LP를 발표한 지 14년 뒤, 그리고 지금으로 24년전에 그녀가 한 말이다,
양희은은 그 이전에도 최고의 가수이었으며 , 그 이후에도 국내 최고의 가수이었다고 생각한다.
거의 40년 전의 이 모습과 지금 '세바퀴'등의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맹활약중인 양희은을
매칭 시킨다는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동네에서 그녀가 강아지를 끌고 산책을 하면 워낙 목소리가 크고 특이하여 모두가
양희은이란 걸 알아재칠 정도로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그런 대한민국의 보통 아주머니가
되어 살아가고 있단 이야기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으로 노래를 시작했던 70년대 초에서
전성기를 훨씬 지난 90년대까지도 우린 그녀의 음악을 사랑했었다. 물론 지금도,,
그리고 , 그녀의 음악史에서 김민기란 인물을 빼놓을 수는 없다. 김민기란 절륜의 크리에이터가
있었고, 양희은이란 희대의 메신저가 양립함으로써, 70년대에 그들이 내 놓은 수많은
불후의 명곡들이 빛을 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녀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떼를 쓰다 시피 송창식에게 노래를 시켜달라고 했던 양희은이 벌써 쉰 여덟이 되었다.
그녀에게 그런 가난의 역사가 없어서 , 아니면 우리들에게 운(運)이 없어서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면,,,, 명성황후가 당당하게 "나는 조선(朝鮮)의 국모(國母)다" 라고 했듯이
양희은은 "내가 대한민국 포크계의 대모(大母)다"라고 말해도 부정할 이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첫댓글 10여년 전에 인터넷자료 블로그에서 수집한 것인데 본문 블로그가 아직 있습니다, 대단한 양희은 팬이신거 같고
존경을 경하드리며 글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너무도 소중합니다
감사합니다
외국 팝이라든가 음악역사에서는 기록이 잘 보존 되어 거의 볼 수 있지만 우리네 가요 역사는 많이
빈약하기에 기록의 중요성을 많이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양희은에 대한 자료가 아주 정리가 잘 되어 있네요. 양희은님의 대단한 팬이신 주재근님이 좋아하실거 같습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책에도 도움이 많이 될거 같습니다. 물론 저는 음악 자체에 대한 평이 아니고 제가 처음 들었넌 노래들에 대한 느낌을 쓰는 것입니다만...
원래 이 글을 쓴 양희은 광팬님의 블로그가 다행히 아직도 건재하더군요(십여년 전에 김정호 웹시디 만든것
새로 정리하다 챙겨본 겁니다,)요즘 하도 딴지단속(이미지 내용 퍼 가는것)이 심한지라 양희은님 이미지라도
챙겨볼 욕심에 ㅎㅎㅎㅎ 비밀로 해 주세요,,,,, 그리고 영어팝 해석 사이트(역시 십여년 전에) 웹문서를 몽땅
컴으로 다운 받는 프로그램 시대가 있어서 해 둔건데 요즘 다시금 정리(사진 구하고, 팝가수 역사 챙기는 등...)
중입니다 거의 700여곡 되는데,,,감상부분은 유트브가 살려 주네요 굳이 엠피 없이,,, 그런데 부끄러운 것은
듣는 곡 마다 전부 처음 듣는 올드팝인데 넘 좋은 거 있죠 ,,,,횡재중입니다, ㅎㅎ
포크락님께서 준비중인 프로젝트에 많은 기대와 응원을 드립니다, 이판 사판은 아니지만 닿이는 대로
도와드리고 싶지만,,, 사실 이거 숙제도 아닌 숙제에 장난 아니게 중노동 그 자체라는거 충분히 느껴본
당사자 이기에 더욱 포크락님의 대장정에 마음만 앓고 있는 한 사람의 응원군으로 여겨 주시면,,,,
어쨌던 쉬엄 쉬엄 천천히 하세요 저도 시작 할 적엔 와락 하고 싶었지만 꾸준히 기간을 필요로 하더군요
김정호 웹 시디도 거의 일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항상 건강 하시길^^
양희은 님 광팬의 블로그 게시물답게 지금까지 접한 대한 자료 중에 가장 상세하게 설명되어있네요.
정말 가치있는 자료라 생각되고 오래전 양희은 님의 30주년 데뷔 콘서트에 1집 음반을 가져가 사인을 요청했더니
'아휴~ 내가 이렇게 고울 때가 있었구나..'라던 말이 떠오릅니다.^^
역시 므쨉니다, 부럽고,,,, 저는 유명인 앞에 서지도 못하는 오덜덜 이라고 ㅎㅎ
특히나 방송을 타는 분들에게는 우러러 보이는 예절을 엄청 지니고 있기에 더욱 나서지도 못합니다,
예전에 정호님카페 송년회때에 하남석님 보고도 제대로 말도 못붙여 볼 정도입니다,ㅎㅎㅎ
실로 엄청난 자료들
중에서도
09년 이주원선생 부고소식듣고
부산에서는
선아누나캉
칭구 지상캉
사하구 오드메 소주집에서
추모하는 자리도 가졌씁쬬
건강하옵시고 코노라 조심하셔요!~ 요즘 대세인사이니 참 헐,,,,
잘 지내시는지요.,^^ 왕 반갑습니다,
제작년 눈수술로 현재 시력이 반으로 떨어져
환자로 집에서 조리중입니다,
모쪼록 건강히 지내셔요~~ 기타사랑 노래사랑 행복한 날들 이루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