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쓸쓸함)에 대하여...
50대에 접어들면 각각의 영역에서 그 역할이 거의 끝나가는 시기다. 아니 어쩌면 끝난 시기다. 예전에 유행했던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직장 다니면 도둑놈)를 지나와 보니 허튼 말이 아니다. 50대에 접어드니 가끔씩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거대한 쓰나미처럼 고독이 덮쳐온다. 왜? 어디서? 이유도, 원인도 모르겠다. 속수무책이다. 아직까지 그럭저럭 살림을 꾸려오고 있지만 드문드문 느끼는 이 허한 느낌과 쓸쓸함은 로빈슨 크루소의 고독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우리는 왜 고독한가? 그리고 어떻게 치유해야 하나? 아니 치유가 가능하기나 한 걸까?
1 가정에서의 고독 : 밑빠진 존재감
50대로 접어들면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자식으로서, 친구로서의 존재감이 점점 떨어진다. 거의 바닥이다. 그 존재감을 지키기 위해 나름 안간힘을 써 보지만 역부족이다. 이미 저울의 추는 나를 떠나 쏜살같이 상대편으로 달려가고 있다.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커서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고 아빠도 찾지 않는다. 아내에게 더 이상 내 말이 먹히지 않을뿐더러 자주 아내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부모님도 세상을 등지셨거나 등 떠밀어 요양원에 보낸 것 같아 면목이 없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진다. 친구들끼리 연락을 끊거나 연락이 끊기거나 하고 아예 칩거에 들어가는 친구도 있다. 고립무원이다. 내 편이 하나 둘 그렇게 떨어지거나 멀어져 간다. 상당 기간 허탈감과 공허감, 그리고 공포감(?)에 휩싸여 망연자실이다. 그러다 서서히 내면을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동안 뭐 했니?" 독배를 삼키는 쓰디쓴 심정으로 반문해 보지만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다.
존재감 대신 자존감이라도 키운답시고 이것저것(취미, 여행, 독서, 사색?, 운동) 해 보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다. 오히려 주변의 원성만 늘어간다. 존재감이고 자존감이고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주변의 지지와 격려가 없는 혼자만의 정신 승리는 오래가지 못한다. 오히려 고독의 농도만 더 짙어질 뿐이다.
2 사회에서의 고독 : 소외감
직장에서 은퇴하고 현역 시절에 쌓은 네트워크를 써먹어 보려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보지만 상대방의 심드렁한 반응에 의기소침해진다. 축소지향의 시대를 살아야 함을 직감한다. 아직 아이들 대학 교육도 못 시켰는데, 아직 자식들 출가도 못 시켰는데, 아직 부모님 문상도 못 받았는데... 대학 등록금과 결혼 청첩장 그리고 부고장을 보낼 일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직장을 그만두면 모든 네트워크가 산산조각 난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다. 그동안 내가 이런 정도의 대접을 받고 산 것이 실력이 아닌 명함 한 장이란 사실을 실감한다. 명함은 군대에서의 계급장이다.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다시 이등병으로 입대해야 한다는 것과 같다. 이등병 시절을 생각하면 몸서리쳐지는 일이다.
직장 생활이 원만했다고 퇴직 후의 사회생활이 원만할 거라는 생각은 순진한 생각이다. 직장에서는 직급이 있고 명함이 있어 위계질서와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지만 퇴직 후의 사람 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직장 밖에 나와 보면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 나도 이상한 사람 중의 한 명일 것이다. ㅠㅠ 나만 잘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낮은 곳으로 임할 생각이 아니면 소위 말하는 적당히 쉬우면서 적당한 월급을 주는 일은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
3 육체적인 고독 : 몸의 쇠함
고독은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50대가 되면 몸도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아프고, 저리고, 시리고, 뻐근하고 안 아픈 곳이 없다. 족구 시합을 해보면 안다. 넘어지고 꼬꾸라지고 거기다 헛발질까지... 생각 속에서는 날아다니지만 코트에서는 기어 다닌다. 잇몸은 무너져 내리고, 소화 기능은 떨어지고, 근육은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책 읽을 땐 돋보기 안경을 써야 하고 겨울엔 찬바람에 눈이 시려 밖의 외출도 꺼린다. 뱃살이 두툼하게 잡히고 다리는 가늘어지기 시작한다. 밤에 한두 번은 꼭 깬다. 그래서 아침이면 비몽사몽이다. 수면의 질이 롤러코스터를 타듯 떨어진다. 기력은 쇠하고 기억력은 하루가 다르게 희미해진다. 좀 있으면 관 속에 들어갈 생각을 하면 소름이 돋는다. 가정에서 소외되고 사회에서 매장(?) 되고 거기에 몸까지 부실하면 갈 때까지 간 것 아닌가?
몸의 쇠함을 상쇄하려고 몸에 좋다는 것을 찾아다니거나 약을 달고 살거나 건성으로 헬스클럽을 찾는 것처럼 안쓰러운 것도 없다. 적당한 일을 적당한 월급을 받고 하면 될 걸 시간을 낭비하거나 돈을 들여서 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란 말은 새빨간 거짓말임을 나이 들면 안다. 육체가 쇠하면 정신도 쇠한다. 옛날로 되돌리려는 무리한 욕심 보다 육체가 쇠하는 속도를 줄여야 한다.
4 잉여 인간의 고독 : 역할 없음
고독은 단순히 밑빠진 존재감과 소외감 그리고 몸의 쇠함이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이 셋은 부차적인 문제다. 진짜 고독의 원인은 다른 데 있다. 바로 역할의 없음이다. 원시 공동 사회에서 역할 없음은 도태였고 도태는 곧 죽음이었다. 역할은 곧 소속감이고 소속감은 매슬로의 욕구 5단계에서 3번째로 중요한 욕구다. 그래서 다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자신이 초라해지기만 할 뿐 좀처럼 존재감이 회복되지 않는다. 존재감은 고사하고 자괴감만 쓸쓸히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몸부림보다는 다른 무엇으로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소속된 역할이 없는 잉여 인간들이 제일 많이 내뱉는 독백과 푸념이 "세상은 나 없이도 잘 돌아가는구나"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게 화내고 원망할 일인가?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 아닌가? 나 없이도 사랑하는 내 가족들은 잘 살아야 하고, 나 없이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잘 굴러가야 하지 않겠는가? 알고 보면 나 없이도 잘 돌아가야 좋은 것이다. 그러니까 잉여인간이 됐다는 사실은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어쩌면 홀가분함이고 해방감이다. 이를 발전적인 그 무엇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리어 왕처럼 과거의 영광과 역할을 다시 복원시키기 위해 안감힘을 쓰는 건 오히려 역효과만 난다. 50대 이후에는 과거의 역할에서 과감히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 손자병법에 들어가고 물러날 때와 시기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 둘을 혼동하면 백전 백패다.
넉넉함에 대하여...
고독의 원인을 잘 살펴보면, 당했다, 허송세월을 보냈다. 모든 게 부질없다, 속았다, 세상인심 야박하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 이 세계엔 의리가 없더라(?)와 같은 한탄과 원망과 후회뿐이다. 젠장, 구구절절 다 자기 연민에 절어 있다.
고독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뭐든 스스로 해야 한다. 회사도 스스로 나와야 한다. 갈 때까지 가서 막다른 골목에 몰릴 때까지 직장 생활을 고집하면 나올 때 험할 꼴을 당한다. 적당한 때 나와야 한다. 사실, 직장을 다녀본 사람은 대충 안다. 자신이 나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혹시나 해서 좀 더 다니는 사람도 있고, 본격적으로 개기기로(?) 마음먹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둘의 말로는 좋지 않다. 혹시나는 역시나로 끝나고 개기면서까지 다닐 정도면 볼 장 다 본 사람 아닌가?
1 마음을 고쳐먹자(?)
쓸쓸함의 빈자리를 넉넉함으로 채워야 한다. 어떻게? 잃은 것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얻은 것과 앞으로 할 것 그리고 해야 할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얻은 것이 없다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꽤 많고,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고민해 보면 해야 할 일이 적지 않다.
* 얻은 것부터 잘 챙기자
우선 얻은 것 중에 첫 번째가 많은 시간이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무료함이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배우는 시간이고 준비하는 시간이다. 시간도 있을 때 잘 활용해야한다. "닥쳐서 생각하지"처럼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도 없다. 넋 놓고 있다가 닥쳐서 잘 하는 사람 못 봤다.
단순한 인간관계 또한 얻은 것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자. 연락이 안 오는 사람에게 구걸하듯이 전화하지 말고 그런 사람은 과감하게 가지를 쳐내자. 사정사정해서(?) 열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자신에게 호의적인 한 사람에게 정성을 들이는 것이 더 낫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가족이다. 이렇듯 주변을 정리하고 단순화하면 소외감도 잠시 그보단 해방감이 찾아온다. 그때가 비로소 집착에서 벗어난 시점이다. 즉, 자유인이 되는 초입에 들어서는 것이다.
* 해야 할 일을 찾자
큰 역할은 끝났지만 잔잔한 역할은 남아 있다. 누군가의 보조자가 되는 것이다. 연극 무대의 주연 말고 조연 역할 말이다. 그동안 주연으로 살았으니 조연으로 살만하지 않은가? 박수받고 살았으니 박수를 쳐주면서 살 수 있지 않은가? 군림하고 살았으니 받들면서 살 수 있지 않은가?
고독함과 쓸쓸함은 과거를 보기 때문이다. 추억을 소환하는 것이야 뭐가 문제 일까마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과 어리석은 결정 때문에 비탄에 싸이거나 한탄을 하고 심지어 자학을 하는 경우가 있다. 또 과거 잠깐 동안의 영광과 업적을 가지고 훈장을 닦듯 자신의 위세를 반복적으로 과시하는 사람도 딱하고 추잡스럽다. 쓸쓸함을 위로받고자 하면 위로받을 일만 생긴다. 아니, 위로받고자 하면 위로받을 일을 만든다. 그러니까 모든 불행의 근원은 자신이 만드는 셈이다. 그러니 위로받을 일이 있어도 정중히 사양하자.
* (행복의) 파랑새는 없다고 생각하자
몇 주 전부터 팔이 저리기 시작했다. 예전에 일자목 진단을 받은 일이 있어 당연히 목 디스크를 의심했다. 병원에 가기가 꺼림칙했지만 병원은 빨리 가는 것이 좋다는 평소의 생각대로 갔다.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다행히 목 디스크는 아니었다. 목에 디스크 증상은 있지만 우려할 상황은 아니란다. 다행이다. 초음파로 어깨를 진찰해 보더니 심줄이 파열됐다는 진단이다. 양쪽 어깨에 주사를 맞고 간단히 할 수 있는 운동법을 알아왔다. 그리고 약을 받아왔다. 병원을 나서면서 잔잔한 행복이 밀려온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안도의 행복 말이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삭막하다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인생은 고통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잔잔한 고통이 오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고통이 한 단계씩 줄어들 때 우린 행복을 느낀다. 그러니까 고통을 줄이기 위한 노력들 하나하나가 행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틱낫한 스님은 '행복은 고통에서 피어나는 꽃'이라 하지 않던가?
2 일하는 인간이 되자
보람되고 또 넉넉함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일하는 인간이다. 배우는 지식인의 삶도, 유유자적 방랑하는 여행자의 삶도, 품위 있는 교양인을 삶도, 깨닫는 구도자의 삶도, 돈을 좇는 투자인의 삶도 있지만 하루하루 몸을 쓰는 일하는 인간을 추구하자. 일 한다고 그 외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일하는 틈틈이 배우고, 여행하고, 교양을 쌓고, 진리를 탐구하고, 재테크도 할 수 있지 않는가? 단순한 삶으로 접어든 50대에는 정신노동보다는 육체노동이 폼 나지는 않지만 더 적합하다. 물론 한량과 실업자 그리고 구경꾼 등과 같은 제3의 길이 있지만, 설마...
40대까지가 인생 1막이었다면 인생 2 막은 50대 이후부터라고 생각하자. 삶의 절정은 지났지만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기도 하다. 해가 지기 전의 저녁놀처럼 우리의 50대도 그런 아름다운 시기가 되어야 한다. 찬란했던 절정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모든 영광은 지나간 추억이 되었다고 언제까지 소처럼 되새김질만 하고 있을 것인가? 사람은 시기마다, 그리고 때에 따라, 나이에 따라 바뀌고 변해야 한다. 변하지 않겠다는 완고함이야말로 고생을 자처하는 것이다. 다들 미적거리고 있을 때, 다들 쪽팔려 주저하고 있을 때 먼저 치고 나아가야 한다. 이것저것 따지다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아무 일도 못 한다.
몸을 쓰는 천한 일을 한다고 혹시나 자신을 업신여기지 않을까, 혹시나 가족들에게 가장의 위상이 추락하지 않을까, 혹시나 지인들이 나를 우습게 보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라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바뀌지 않은 당신 모습을 우습게 볼 수는 있어도 바뀐 당신 모습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없다. 물론 친구들은 겉으론 당신을 폄하할 수도 있다. 궁상떤다고 할 수도 있고, 뭘 얼마나 번다고 그 난리냐고 할 수도 있고 또 먹고사는 데 지장 없는데 무슨 지랄(?)이냐고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친구들 말은 진심이 아니다. 진심을 확인하려면 당신 와이프 말을 들어봐야 하고 또 친구들 와이프 말을 들어봐야 한다. 정 반대의 얘기가 나올 것이다. 떠날 때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것처럼 바뀔 때 바뀌는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이다.
당신이 50대에 접어들었다면 인생 1 막은 거의 끝났다. 이제 2 막을 준비해야 한다. 인생 2막에서 주연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주연은 고사하고 조연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지나가는 행인 1, 행인 2에 만족해야 할 수도 있다. 행인 1, 2라도 중요한 건 연극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지 주인공처럼 멋지게 폼 잡으려고 하거나 관객의 박수를 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넉넉함 대신 쓸쓸함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넉넉함을 채우고 싶거든 무대에 서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인생 2 막을 2년째 사는 지금의 나를 평가해 보면 만족스럽고 넉넉하다. 생활은 궁핍하지 않고, 생각은 어지럽지 않고 마음은 심란하지 않다. 폼나는 명함을 갖고 싶다는 생각만 버리면 조금씩 넉넉함의 밀물이 들어온다. 넉넉해지려면 방관자의 삶에서 관찰자의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방관자의 삶은 무관심이지만 관찰자의 삶은 현실 참여이고 적극적인 관심이다. 방관자의 삶은 현상만 보지만 관찰자의 삶은 원리와 이치를 찾는다.
버들치
첫댓글 40대인데도 공감이 가는 글이네요
감사해요
너무 와닿아서 위로가 됩니다 ..
공감합니다~
힘과 용기를 주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구구절절이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많은도움이 되는글 감사합니다~
너무좋은글입니다.
3번이 와 닿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