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식 불문율/원옥진-
외대 1학년을 다니다 중퇴했다고 했어요
분홍 커튼이 칸막이로 쳐진 카페 첫인상에서죠
왜, 냐고 묻지 않았어요
대답할 수 없는 것은 묻지 않는 것이 우리의 불문율
그녀는 시폰 원피스를 팔락이며 옆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웠어요, 새끼손가락보다 가는 국산 담배
나는 그저 맥주를 마셨어요
손님이 더 많은 가게로 옮긴다고 했어요
같은 건물 위층 술집이었죠
왜, 냐고 묻지 않았어요
내가 맥주를 마실 때면 짬을 내어 와 주곤 했는데
가슴이 작아지고 팔이 길어진다고 웃었어요
그녀의 짧은 시폰 원피스는 더욱 투명해졌죠
혼자 마시는 맥주는 이제 싱거워요
빗줄기에 알코올을 풀어야겠어요
내일 미국으로 떠난다고 했어요
어둡고 작은 나의 자취방에서죠
왜, 냐고 묻지 않았는데
돈을 많이 벌어서 대학을 졸업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녀가 왜, 를 말했기 때문에
잘할 수 있을 거라고 격려를 했어요
그녀는 저녁으로 차려준 밥상을 바라보며
소주를 글라스에 담아 마셨어요
자꾸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지만
먼저 잠이 들었어요
그녀가 벗어놓은 핑크색 시폰 드레스는
이제 떨어져 굳어버린 검은 배꼽 같았어요
그녀가 하얀 바탕에 검은 점이 듬성듬성한
아이를 안고 돌아온대도
왜, 라고 묻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