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평강의 하나님 》
살전 5:23~24
<故鄕 예루살렘에 대하여>
추석 잘 쇠셨지요?
명절 보내고 이렇게 예배할 수 있으니 기쁨이요, 행복이요, 은혜입니다!
추석날 고향에 잘 다녀오셨습니까?
한국인의 고향, 향수는 참 대단합니다. 고향으로, 고향으로 달려갑니다.
마침 지난 수요예배에서 제가 스가랴 14장을 본문으로 “고향 예루살렘”을 설교했습니다.
오늘 예배에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 고향은, 우리가 ‘어버이의 사랑으로,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고향을 주제로 사람들은 수많은 시를 짓고, 노래로 만들어 불렀습니다.
고향은 시와 노래가 되었습니다. 정작 고향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얼른 대답이 안 나와요!
고향이 무엇이냐? 정리를 하고 갑니다.
고향은 “어버이의 사랑으로, 태어나, 자란 곳”이라 했습니다.
이 말 속에 고향의 3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어버이의 사랑’ 둘째, ‘태어났다’ 셋째, ‘자랐다’ 고향의 3요소입니다.
고향이 그리워서, 고향 생각이 나서,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그리워서 달려갔습니다.
갔더니 고향이 그대로 있던가요? 아닙니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요즘 고향에 가 보면, 산도 옛 산이 아닙니다. ‘난개발’로 고향산천도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저희 고향은 용담댐으로 수몰되었습니다. 고향이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이제는, 고향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 기억으로만 남았습니다. 가슴 깊이 새겨진 ‘고향’
그래서 고향은 진주입니다. 고향의 ‘네 번째 요소’가 추가됩니다. “고향은 진주다!”
고향이 왜 진주입니까? 고향이 우리 가슴에 “팍” 박혀서 빠지지 않습니다.
마치 진주조개 속살에 박힌 모래알갱이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진주조개처럼 가슴에 박힌 고향이라는 모래알갱이를 평생 가꾸고 다듬습니다.
아, 내 고향, 내 사랑, 내 꿈, 시가 되고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은 진주입니다.
이제 고향을 찾아가려면, 자기 가슴 속에 진주가 되어버린 고향을 봐야 합니다.
고향의 네 가지 요소를 말씀드렸습니다. “① 어버이 사랑 ② 태어남 ③ 자람 ④ 진주”
☞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또 하나의 고향이 있습니다. ‘신앙의 고향’입니다.
신앙의 고향에도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① 하나님 사랑 ② 거듭남 ③ 자람 ④ 진주”
첫 번째, 두 번 째만 바뀌었습니다.
육신의 고향 첫 번째 요소는 “어버이의 사랑”인데, 신앙의 고향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육신의 고향 두 번째 요소는 ‘태어남’이고, 신앙의 고향 두 번째 요소는 ‘거듭남’입니다.
고향이 생성되는 방식과 고향이 진주가 되는 것도 똑같습니다.
육신의 고향은 어버이의 사랑으로 태어나 자란 곳 신앙의 고향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나 자란 곳 |
성도에게 신앙의 고향은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신앙이 자란 땅, 거기가 ‘예루살렘’입니다.
신앙의 고향이 그리워서 성지순례에 나섭니다.
가서 보니, 거기도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육신의 고향이나, 신앙의 고향이나 어쩜 그리 똑같습니까?
신앙의 고향 예루살렘도 우리 가슴 속에서 진주가 되었습니다.
☞ 고향이라는 진주가 두 개가 되었습니다. 육신의 고향, 신앙의 고향!!
☞ 추석을 쇠고 예배하는 주일이어서 마침 수요 설교를 리바이벌 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
오늘 설교 제목이 <평강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분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 참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십니다.
<고향>에 대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향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저마다 고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육신의 고향 하나로는 완전한 평강을 누릴 수 없다!”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또 하나의 고향, 신앙의 고향, 믿음의 고향을 주십니다.
우리가 가진 두 번째 고향은 예루살렘이라고 지난 수요일에 설교했습니다.
육신의 고향, 하나만으로는 우리가 진정한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육신의 고향에다가 신앙의 고향 예루살렘이 추가될 때 우리에게 진정한 평강이 있습니다.
이번 추석을 보내면서 우리가 묵상하고, 확인하고, 은혜받아야 할 주제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성도님은 엊그제 추석, 이어지는 추석 연휴, 이렇게 보내고 계시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추석을 주시고, 고향을 주시고, 믿음의 고향 예루살렘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추석이 훨씬 기쁘고, 반갑고, 행복하고, 은혜가 넘쳤습니다. 할렐루야~
반가움, 기쁨, 즐거움, 행복 그리고 은혜!!
지금 우리가 누려야 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설교 제목 <평강의 하나님> 오늘은 평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날입니다.
평강은 무엇인가요? 평강을 어떻게 설교해야 할까요?
추석을 지내면서도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평강’중에도 머리에 쥐가 났습니다.☻
☞ 평강이 무엇이냐?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지만, 때린 놈은 웅크리고 잔다!” 우리 속담입니다.
남에게 얻어터진 사람은 편하게 발 뻗고 잡니다. 그러나 때린 사람은 불안합니다.
맞은 사람, 때린 사람, 둘 중에서 누가 평강을 누리는 사람입니까?
맞은 사람! 헐!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을 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여기서 뽑았습니다.
(23절)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의미>
23절이 말해줍니다. 진정한 평안은 어떤 것인가?
평강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할렐루야~
23절에서 “~영과 혼과 몸~”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두고 성경은 사람을 영, 혼, 육, “3분설(三分設)을 지지한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이렇게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3분설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씀한 본질은 데살로니가가 속한 그리스철학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 그리스 철학, 그리스 사상, 그리스의 종교 즉, ‘헬라 사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헬라 사상을 비롯하여 인류는 오래전부터 죄악이 인간의 평강을 해친다고 주장했습니다.
“죄가 인간의 평강을 해친다” 이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고, 때린 사람은 웅크리고 잔다”는 한국 속담과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죄가 인간의 평강을 해친다”라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평안을 누리려면 죄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헬라 철학도 이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인류 역사의 지혜가 이를 모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접근방식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 문제를 해결하고 평강모드에 들어갈 수 있을까?
대부분 사상과 철학에서 인간의 죄는 “육신이 저지른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놈의 몸뚱어리’가 문제라고 단정했습니다.
정신은 말짱한데, 영과 혼은 깨끗한데, 육신이 죄를 짓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몸에게 죄 값을 치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회초리를 듭니다. 종아리를 때리고 손바닥을 때렸습니다.
이것은 매우 전통적인 방식입니다. 어린아이를 키울 때는 이 방식이 매우 효과가 있습니다.
잠언에서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는 매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 자란 후에는 이 방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었는데요~~~
그런데도 헬라 사상은 어른의 몸뚱이도 매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 몸을 때리라는 게 아니라, 내가 내 몸을 채찍으로 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행종교가 나옵니다. 몸을 힘들게 하여 평강을 얻겠다는 것이 수행종교입니다.
삼천배, 삼보일배, 면벽 수행, 금욕주의 등등, 이런 사상이 모두 몸을 학대하는 겁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헬라사상을 신봉했습니다.
그들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헬라 지역에서 영혼에는 죄가 없고 육신에만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자기 몸을 학대하는 종교, 사상과 철학이 만연했습니다.
삼보일배를 하고, 금욕, 금식, 면벽 수행이 유행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죄에서 자유를 얻고, 평강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고대의 이러한 사상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현대인들은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죄는 몸이 짓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사람의 생각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마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하나님은 몸이 저지른 죄만을 죄라고 하시지 않고 마음의 생각부터 죄로 여깁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전한 복음입니다.
몸이 죄를 범했다고 몸을 학대하는 것은 잘못된 사상입니다.
고대 그리스 지역에는 이러한 사상이 만연했습니다.
몸을 학대하는 풍습이 여기서 생깁니다. 몸에 상처를 내는 것, 문신도 이와 유사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죄에서 자유를 얻어 평강을 누리겠다는 생각,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 23절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의미가 와 닿습니다.
(23절)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평강은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흠이 없을 때 우리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흠 없게 보전되기를 바울 사도가 기도합니다.
평강은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으로 가능한 열매입니다.
인간이 대충 인간의 생각으로 평강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평강을 얻겠다고 생각해낸 것은 육이 죄를 범하니 육에 채찍질하자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은 영, 혼, 육의 합작품입니다.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영의 치유, 혼의 치유, 육의 치유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치유를 누가 하겠습니까?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강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평강을 얻고자>
사람들이 평강을 저해하는 것이 죄라는 생각에 이른 것까지는 옳습니다.
그러나 죄가 영이나 혼에 있지 않고 육에 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은 틀렸습니다.
죄는 영.혼.육 전체에 있습니다.
죄가 육에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 평강을 누리는 것도 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육신이 편하면 그것이 평강인 줄로 압니다.
호의호식,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집에서 살면 평강인 줄 압니다.
추석이 돌아오면, 명품으로 쫙 빼입고, 명품 가방에, 명품 구두,
비싼 외제 차를 타고 고향에 가면 그것이 최고의 평강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은 진정한 평강이 아닙니다.
<맺음>
사람에게는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능력, 오직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육신의 고향도 주시고, 신앙의 고향도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거듭남, 다시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니고데모가 뭐라고 반문했습니까?
“어머니 태 중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건 아니지요!
거듭난다는 것은 생각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고, 몸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죄를 짓는 것은 영이나 혼이 아니라 육신이라고 믿었습니다.
평강을 위해서 자기 몸을 천하게 여겨야 한다는 세상의 풍조를 따랐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이러한 세상 풍조의 울타리에서 벗어남을 의미합니다.
예수 믿었다고 본성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본성은 진주처럼, 진주의 모래 알갱이처럼 그대로 있습니다.
그 알갱이를 우리의 진액으로 감싸고 감싸서 진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진주 속 모래알갱이가 밖으로 튀어 나오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진주 속에서 그 모래알갱이, 본성을 끄집어내고자 합니다.
성령은 그 본성이 새어 나지 않도록, 진액을 계속 흘려서 감싸고 감쌉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평강은 세상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나 자라가는 고향, 그 고향 진주!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앙의 고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나 신앙이 자라는 고향, 그 고향 예루살렘, 진주가 된 예루살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