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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Board 스크랩 잡담 내 이름은 황선홍, 내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
Ace Ventura 추천 0 조회 428 12.07.04 14:32 댓글 11
게시글 본문내용

 

 

(이번 편은 조금 긴 글이긴 하지만 재미있게 보실 수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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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황선홍,

내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

 

 

  

"엄마!"

 

 

 

아무리 불러도 반응은 없었어.

 

 

 

"아직도 안 오셨나..."

 

 

 

하루 종일 공터를 휘젓고 다니며

공을 차다가 땀에 젖은 얼굴로 돌아와도

 

 

 

날 씻겨줄 엄마는 집에 없었지.

 

 

 

집에 돌아와서야

엄마가 없구나, 알아차리곤 했지.

 

 

 

엄마는 항상 아버지와 자주 다투셨어.

그럴 때마다 엄마는 며칠 동안 집을 나왔고 다시 돌아와서

미안한 마음에 맛있는 반찬으로 우리를 기다렸지.

 

 

 

이번에도 엄마는 다시 돌아올 테니까

아무 일도 없다듯이 방으로 들어갔어.

 

 

 

그러나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지.

 

 

 

누구도 엄마가 떠났다고 가르쳐 주지 않았어.

 

 

 

그것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지.

 

 

 

그럼에도 어린 나는 울지 않았어.

 

 

 

형도, 동생도, 나도...엄마를 부르면

안 된다는 게 우리 가족의 약속처럼 되어버렸지.

 

 

 

어렸을 때 나는 엄마가 떠난 외로움에 공을 찼어.

 

 

 

 공을 차고 있으면 엄마를 보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거든.

 

 

 

어쩌면 엄마를 잊고 싶은 생각에 공을 찼을 것이고.

 

 

 

엄마의 가출로 충격을 받은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것이 축구였어.

 

 

 

엄마의 가출로 집은 가난해져갔고

 

 

 

아버지와 형, 동생, 그리고 나...

집은 단란하지 못 했고

 

 

 

아버지가 만들어놓고 나간

맛없는 반찬, 식은 밥...

 맛있는 반찬 냄새보다 더 그리운 것은

오지 않는 엄마의 냄새였지.

 

 

 

어렸을 때 나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어.

나는 자꾸 달렸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그것은 엄마가 없는 나의 도피였다고 해야하나.

 그렇게 배가 고파도, 눈물이 나도, 쓸쓸해도

공터에 나가 공을 차면 잊을 수 있던 나였어.

 축구는 내 곁을 지켜주는 '엄마'였지.

 

 

 

공을 차면서 자연스럽게 축구선수의 꿈이 생겼어.

뛰고 공을 차는 것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였기 때문이지.

 

 

 

이런 나를 보며 아버지는 형편없이 망가져버린

집안을 누군가는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말했어.

 

 

 

우리 3남매에게는 아버지뿐이었으므로

아버지의 희망을 저버릴 수는 없었어.

 

 

 

그래서 철들면서 더욱 축구에 매달려갔지.

 

 

 

제법 이름을 떨치며 숭문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용문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새벽 5시면 학교로 달려갔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합숙훈련이 잦아졌어.

다른 아이들의 경우 어머니가 시도때도 없이 드나들었는데

나에겐 나를 챙겨줄 엄마가 없었지.

 

 

 

또한 나는 합숙비를 제때 내본 적이 거의 없었어.

합숙비가 없어 훈련장으로 들어서지도 못한 채 운동장만

뱅뱅 돌았던 기억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때, 그 처절하게 무너지던 어린 내 마음의

상처를 김형인 선생님의 따뜻한 두 손이 닦아주었어.

 

 

 

"그러면서 합숙비 같은 건 괜찮다.

넌 축구를 잘하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선생님의 그 말에, 따뜻한 손길에, 나는 울었지.

 

 

 

나에겐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인 아버지가 계셨어.

아버지는 숙소 대신 내가 뛰는 경기에 한번도 빠짐없이 찾아왔지.

그런 아버지가 너무나도 고마웠어.

 

 

 

내가 3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택시 운전을 하시던 중 교통사고를 당하셨어.

아버지는 나의 경기를 볼수 없다는 것에 몹시 안타까워했어.

그러면서 나에게 '최선을 다해 뛰어라'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지.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관중석에 있었어.

아버지는 나의 경기를 보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목발에 의지해 겨우겨우 오신 것이었지.

 

 

 

그러한 아버지를 본 순간 뜨거운 것이 가슴 저밑에서 울컷 치솟았어.

아버지의 모습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행복한 상처가 되었어.

그래서 나는 그날, 내내 울면서 뛰었지.

 

 

 

 용문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용문고등학교에 입학했어.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키가 180센티미터 이상 훌쩍 커버렸지만

나는 여전히 젓가락 같은 체구를 하고 있었지.

 너무 말라 어떻게 공을 찰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고.

체력보다는 오기나 자존심으로 나를 지탱했다는 것이 맞는 말일 수도 있겠지.

 

 

 

'황새'

지금도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고 있는 이 별명이 생긴 것도 이때였어.

상대 수비와의 몸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경기 직전 양껏 물을 마셨고

출렁거리는 뱃속의 물 때문에 간혹 뒤뚱거리며 뛰는

나의 모습을 보고 선배들이 지어준 별명이 바로 이 황새였지.

게다가 내 성이 황씨이기도 하니 연관성 있기도 했어.

 

 

 

황새라는 별명에 사람들은 모두들 그냥 웃어넘겼지만 우리 가족은 아무도 웃지 않았어.

특히 아버지는 비쩍 말라서 붙여졌던 황새라는 별명 때문에 마음 아파했고,

밥을 짓던 동생은 내게 먹고 싶은 것 없냐고 물어보았을 때 너무 미안했지.

 

 

 

그리고 대학 진학을 앞두고 만난 첫번째 좌절, 내가 원하는 대학은 축구명문, 한양대

용문고와 한양대는 자주 친선경기를 가졌고 한양대 감독인 이회택 감독님은

내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 한양대로 스카우트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계셨어.

진학 상담이 한창이던 그때, 이회택 감독님이 한양대를 떠나게 되었지.

당연히 한양대 진학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어.

 

 

 

보잘것없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으므로

그마저 잃고 난 뒤 난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지냈어.

무엇 때문에 이제껏 매달렸나. 마음이 온통 상처투성이였지.

 

 

 

그 상처받은 마음에 아버지에게 대들기도 했어.

"걱정 마시라구요.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대학 가면 이 집에서 나간다구요.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나가준다구요!" 하며 아버지에게 헛된 울분을 토했었지.

 

 

 

그렇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며칠의 시간을 보냈고,

어느 날. 밤늦게 집에 돌아갔을 때, 아버지의 잠든 뒷모습을 보자 눈물이 쏟아졌어.

크지도 않은 단컨방 한구석에 모로 누운 채 잠든

아버지의 슬픈 등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울지 않을 수 없었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빌었어.

"죄송합니다. 아버지, 다시는 아버지를 아프게 하지 않겠습니다."

 

 

 

울고 있는 내 어깨에 아버지의 손이 내려앉았어.

따뜻한 손이 그간의 내 어리석음을 한꺼번에 닦아주었지.

 

 

 

그후 나는 방황을 접었고 건국대에 입학했어.

대학 입학 후 나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나갔어.

또한 내가 속한 건국대를 우승팀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도 세워뒀지.

 

 

 

결국 대학 2학년 때 내가 속한 건국대는 대학축구연맹전에서 최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어.

그 계기로 어렸을 때부터 내 꿈이였던 국가대표의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지.

 

 

 

 

  1988년 11월 7일. 나는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았어.

아찔하고 믿어지지 않았지. 대표팀을 맡고 있던 이회택 감독님의 선택이였어.

무명의 선수를 기용했다는 이유로 주변의 논란이 적지 않았지만,

선수를 기용하는 감독의 고유 권한까지 침해하지 말라는 말로 나를 지원해주셨지.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일본전으로 데뷔전을 치뤘어.

대표팀의 막내였던 나는 데뷔골을 성공시키며 나를 의심쩍어 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

 

 

 

특히 나는 90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에서 본선 진출 위기 상황에서

여섯 경기에서 무려 일곱 골을 기록하는 대활약을 펼치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어.

그때는 단지 신인으로서의 패기 하나만 믿고 뛰었을 때였거든.

모두가 나의 등장에 환호했고, 나는 시작부터 필요 이상의 주목을 받았지. 

(지금으로 치면 박주영의 등장 정도?)

 

 

 

 

 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월드컵 데뷔무대를 치른 나,

순전히 패기를 앞세워 2경기에 출전하며 더더욱 주목을 받았고
내 이름 앞에 미완의 대기, 절정의 기량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기 시작했어.

 

 

 

그러나 세상이 달아준 날개는 결코 만만치 않았어.

대학 졸업이 다가오자 프로 리그 진출에 온 신경을 집중했지.

 

 

 

그러나 당시 K리그 제도는 드래프트!

신인이라면 실력이나지명도등을 모두 배제하고 똑같은 연봉을 지급하는 조건이였지.

나는 이런 얼토당토않은 규정에 승복하고 싶지 않아 드래프트를 거부했어.

결국 무적선수가 되었어. 이 건방진 신인에게 어느 프로팀도 더이상 불러주지 않았지.

 

 

 

그러다 보니 막상 갈곳이 없어졌어. 막막했지.

그때의 절망감. 그 암흑 같던 시기에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있었어.

바로 이회택 감독님이였지.

 

 

 

나에게 국가대표 데뷔를 치르게 해준데 이어

벼랑 끝에 몰린 나에게 독일 유학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주었어.

이회택 감독님의 추천으로 독일 유학을 떠나는데 성공했지.

 

 

'살아보기 위해' 정착한 독일.

그러나 그 누가 알았겠는가. 이 땅이 내게 '다치기 위해' 찾은 나라가 될줄은.

 

 

 

입단테스트를 거치며 나는 레버쿠젠 아마추어 클럽에서 주목을 받긴 했으나

1군에서는 무리가 있다는 구단의 판단으로 2부리그 부퍼탈에 임대되었고

2차례의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어둡고 암담한 기억 뿐.

단지 독일에서 얻게된 것은 지금의 아내. 그리고 부상 뿐이였지.

 

 

 

1년 반의 독일 유학을 후원해 주었던 국내의 포항 제철에 입단했어.

재활에 힘썼고 얼마 후 94 미국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앞두고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했지.

 

 

 

아시아 예선에서 한국은 졸전을 펼치며

나는 1골이라는 기대 이하의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가 일본을 상대로 종료 직전에 동점골을 넣는

도하의 기적 덕분에 다시 한번 월드컵 무대를 밟을 수 있었지.

 

 

 

어렵게 진출한 94 미국 월드컵...

아무 일도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 난 너무 불운했지.

 

 

 

첫경기 강호 스페인을 상대로 2 : 2 무승부.

잘 싸웠다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나는 절망감에 빠져들었어.

결정적인 일대일 찬스를 날려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지.

 

 

 

그 불안한 마음은 볼리비아 전에서도 이어졌어.

1994년 6월 23일. 내 인생에서 결코 돌이키고 싶지 않은 날이지.

모두가 승리를 확신했던 볼리비아 전, 이기지 못할 경우 16강 탈락

그러나 결과는 0 : 0 무승부

 

 

 

그리고 나의 발끝에서 빗나간 수차례의 기회들.

이길 수 있는 게임을 무승부로 끝낸 것에 대한 책임이 온통 내게 돌아왔어.

똥볼만 차는 스트라이커, 헛발질의 명수, 당장 유니폼을 벗으라는 등...

처음이었어. 그렇게 굴욕적인 비난을 받아본 것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지.

 

 

 

마지막 경기인 독일 전,

만회골을 기록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어.

아니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지.

 

 

 

비록 16강 진출에 실패하긴 했지만

고국에 돌아갔을 때 유럽의 강호들을 상대로 잘 싸웠다고 했지.

 

 

 

단 한 사람, 볼리비아전 똥볼의 황선홍만 빼고 말이야.

 

 

 

"나는 '한 골'이 적실한 순간이 너무 많았다.

정말,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안 될 때가 더 많았다."

 

 

 

그 이후 나는 지독한 대인공포증에 시달렸어.

곱지 않았던 사람들의 시선, 똥볼만 차면 황선홍이라는 사람들.

어딜 가든지 불안에 떨며 살았지.

 

 

 

그렇게 6개월여의 시간을 고통스럽게 보낸 뒤 나는 다시 일어섰어.

처음에는 막연히 두려웠던 사람들의 비난.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비난과 손가락질은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되었어!

 

 

 

 

욕심을 버리며 출전한 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나는 네팔과의 경기에서만 여덟 골을 기록(당시 기네스북),

총 열한 골을 뽑아며 AFC 득점왕으로 선정되었어.

 

 

 

 

K리그에서 8경기 연속 골 기록을 세웠고

팀의 K리그 후기 우승, 챔피언 결정전 준우승에 이바지했고

올림픽과 아시안컵 등 60경기를 거뜬히 소화했지.

 

 

 

점점 골 감각이 살아나 나는 정신없이 골을 성공시켰고

사람들은 서서히 나를 향해 갈채를 보내기 시작했어.

 

 

 

그러나 기쁨도 잠시, 또다시 찾아온 무릎 부상 재발.

축구를 포기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

차라리 내 무릎을 포기하고 싶었지.

 

 

 

나는 인생이 끝나버린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혔어.

겨우 이렇게 끝내려고 시작한 축구가 아니였단 말이야.

지금껏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내일이 있다는 희망 때문이였지.

 

 

 

축구를 버리는 것은 죽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고

살고 싶었어.

 

 

 

그렇게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지.

나에게 아팠던 기억이 가득했던 독일이 내게 준 것은

희망이었어.

 

 

 

한국에서는 혼자서 견뎌야 했지만

독일은 나의 무릎을 내버려 두지 않았어.

 

 

 

그동안의 내 모습을 설명할 필요도 없이

나는 이를 악물며 미치도록 몰두했고

 

 

 

 

 부상 이후 10개월의 공백,

나는 한일전에서 잊지 못할 골을 성공시키며 화려하게 부활했지.

 

 

 

그리고 98 프랑스 월드컵이 기다리고 있었어.

지독한 비난의 악몽을 보란 듯이 털어내야 하는 기회였지.

 

 

 

그런데...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월드컵을 코앞에 두고 펼쳐진 중국과의 평가전.

상대 골키퍼와 부딪쳐 넘어진 후 내게 돌아온 것은 부상이었어.

그것이 이미 세 차례의 수술을 받은 그 무릎을 말이지.

 

 

 

나는 비로소 절망했어.

꿈꾸지 않았다면 이렇게 무너질 일도 없었을 거라고.

차라리 오래 전에 포기했으면 편했을 거라고.

그러나 돌이키기엔 너무 먼 길을 와있었어.

그래서 이번에도 돌아갈 수는 없었지.

 

 

 

벤치에서 지켜본 모두에게 상처로 남은 98 월드컵,

그러나 무엇보다 나 자신,

4년을 악쓰며 버티고도 결국 부상당해

단 한게임도 뛰지 못했던 나.

 

 

 

"그 때의 좌절감은 94년에 비할 바가 아니였다.

다시 월드컵에서 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더는 그들 앞에 서고 싶지 않았어. 이젠 도망치고 싶었어.

어디든 이 땅이 아닌 곳으로 말이지.

 

 

 

나를 보는 사람들만 없다면, 그 벅찬 시선만 아니라면,

차가운 비웃음을 떨칠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다고...

내 마음은 그뿐이었어.

 

 

 

 

결국 J리그의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했어.

 

 

 

등 떠밀리듯, 은신하듯 찾아간 일본.

그것이 나에게는 아주 잘된 선택이었어.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안정이 되었지.

 

 

 

아무도 나에게 기대하지 않아 좋았고

그래서 내안의 무거운 것들을 떨쳐버릴 수 있어 가벼워 졌지.

숨고 싶어 찾아간 그곳에서 나는 다시 버렸던 내 자신을 되찾았지.

 

 

 

 

그래서일까 나는 1999년 J리그 득점왕이 되어 재기에 성공했어.

 

 

 

"J리그라는 그 낯선 둥지에서

득점왕이 되어 내려다본 세상이 눈물겨웠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득점왕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였어.

버렸던 자존심이, 버렸던 자신감이 되살아난 것이 무엇보다 행복한 경험이었지.

 

 

 

또한 내 몸이 일본에 있었다고는 해도,

내 나라에 대한 기억이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해도

마음은 늘 한국에 있었어.

 

 

 

사실 2000년에 K리그의 수원 삼성에 복귀하긴 했으나

곧바로 일본의 가시와 레이솔의 샤샤와 트레이드되었어.

 

 

 

 

나는 구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J리그에서 활약했어.

 

 

 

그리고 2002 월드컵이 다가오고 있었지.

 

 

 

"전 다시 한국에 가야합니다. 난.. 한국 가야 돼요

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인식을 다 바꾸고 은퇴하려고요

그게 내가 해야 될 일이에요"

 

 

 

2001년 출범한 히딩크 호

마지막 도전인 2002 월드컵을 앞두고 치열한 경쟁이 치열했지.

 

 

 

계속되는 부상으로 가슴졸였던 월드컵 훈련 기간,

나는 두려웠어.

 

 

 

특히 대표팀 최고참으로 내가 느끼는 육체적, 심리적이

중압감은 더 무거울 수밖에 없었지.

 

 

 

월드컵에서 1골 아니 1승을 올리기 위해

매일 비지땀을 흘리며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어.

 

 

 

큰 압박감을 느끼고 있는 나에게 히딩크 감독은

누구보다 내 처지를 잘 이해했고 특별한 관심을 가져주었지. 

 

 

 

다행히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었어.

 

 

 

하지만 또다른 것이 마음의 한구석에 걸려있었어.

내 나이 어느덧 서른넷.

 

 

 

 길고긴 고민 끝에 월드컵 직전에 나는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어.

아쉽긴 하지만 정말 괜찮았어.

 

 

 

내 마지막을 장식할 월드컵이 어떤 결과를 안겨줄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았어.

아름다운 결과를 남기고 떠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람이 없겠지만, 결과 따윈 상관 없었거든.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 하나면 미련없이 후회 없이 떠날 수 있었지.

 

 

 

14년간 내 나라의 스트라이커로 울고 웃었지.

이제는 물러날 때가 왔고 아름답게 떠나고 후배들에게 물려줄 때가 왔다고.

 

 

 

어쩌면 월드컵 직전 은퇴 결정은 나 스스로에게 격려의 채찍질이였을지도...

 

 

 

그리고 운명의 날

 

 

 

난 아직도 그때를 떠올려...

 

 

 

2002년 6월 24일 부산 월드컵경기장

첫경기 한국 : 폴란드

 

 

 

전반 26분

 

 

이을용의 센터링을 직감한 순간,

 

 

 

동물적인 감각으로 공을 향해 뛰어들어갔고,

 

 

 

예상한 대로 패스된 그 공은 나의 왼발에 걸렸다.

 

 

 

 

 

 골이 터졌다.

 

 

 

감격적인 첫 골이였다.

 

 

 

 

 

 그렇게도 염원하던 첫 경기의 첫 골을 이뤄냈다는 안도감이라니.

골을 넣은 뒤 벤치로 달려가 환호하고 돌아나올 때,

나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어.

 

 

 

나를 응원해주었던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부르며, 아버지와 장인어른을 부르며

올리던 기도가 떠올랐던 까닭이지.

고맙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속으로 되뇌던 그 순간 저절로 눈물이 고였어.

 

 

 

그리고 월드컵 1승!

 

 

 

월드컵 진출 48년 만에 이룬 1승이었어.

대표팀 선수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4강 진출보다 더 값진 것이였지.

 

 

 

그날, 붉은 악마의 함성으로

물결치던 그라운드에서 비로소...

나는 울었다.

 

 

 

1승의 기쁨도 잠시,

폴란드 전에서 엉덩이 부상을 당하고 말았어.

 

 

 

다음 경기인 미국전에서는 진통제를 투여하고 시합에 참가했어.

아픔만 견딜 수 있다면 뛰어야 했거든.

 

 

 

미국전 역시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경기이기도 하지.

 

 

 

처음으로 가족들에게 월드컵 무대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뛰고 있는 

아빠를 보여주기 위해 경기장에 데리고 왔는데...

하필이면 그날 공중볼 다툼에서 눈두덩이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지.

 

 

 

 

 

 처음엔 땀이 흐르는 줄 알았는데 손으로 만져보니 피였어.

그 순간의 짧은 공포. 가슴 떨림 같은 것.

 

 

 

특히 경기장 밖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 골을 헌납하고 말았어.

부담감이 더 커졌지.

 

 

 

 

 

 

나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다시 경기에 참가했어.

고작 피흐르는 것 가지고 쓰러지면 노장으로서 체면이 안 서겠지. 안 그래?

 

 

 

나에겐 당연했던 출전이 이 경기가 끝나자 붕대투혼, 노장투혼이라는 과분한 칭찬을 받았어.

하지만 피 흘리는 내 모습에 축구 그만 하라며 안타깝게 울던 어린 딸을 보며 괜히 미안했지.

 

 

 

 

(노련미 ㅎㄷㄷ)

 

 

16강 이탈리아 전에서는 A매치 100경기 출전으로

센트리 클럽 가입했고 설기현에게 어시스트 기록

 

 

 

8강 스페인 전에서는

 

 

 

 

 연장전에서 결정적인 찬스를 내가 너무 끄는 바람에 찬스를 놓치고 말았고

그 아쉬움이 불안감으로 이어져 승부차기까지 이어졌어.

 

 

 

팀의 최고참으로써 승부차기 첫번째 키커로 나섰어.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

 

 

 

경기 전날, 페널티킥 훈련을 통해 나는 이미 방향을 설정해놓은 상태였지. 

만약 기회가 온다면 오른쪽 코스를 선택해서 때리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고

 

 

 

정신을 집중해서 공을 찬 순간,

 

 

 

 

 골키퍼가 공 쪽으로 몸을 띄우고 있었어.

 

 

 

그 짧은 순간의 아찔한 공포

 

 

 

  

 다행히 성공시켰고

 

 

 

 

 

 4강 진출!

 

 

 

 

 준결승에서 우리는 거침없는 질주를 마감했지만

 

 

 

우리는 절망하지 않았어.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 알고 있으므로,

나는 우리가 자랑스러웠지.

 

 

 

마지막으로 터키와의 3.4위전

히딩크 감독은 나에게 "원한다면 뛰게 해주겠다"고 말했어.

은퇴 발표한 나로썬 마지막 기회였지. 또한 그에게 감사했어.

 

 

 

하지만 난 그러지 않겠다고 했어.

진통제라도 맞아 뛰고 싶었지만 나 때문에 다른 멤버 한 사람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지.

 

 

 

 

 

 결국 나는 터키전에서 끝내 그라운드를 밟지 않았고

경기가 끝나자 히딩크 감독은 나의 손을 팬들을 향해 들어올려 인사시켜 주었어.

 

 

 

2002 월드컵이 끝난 후 전국적인 '감동의 국민대축제, 카 퍼레이드'의

하이라이트인 광화문 인사에서 모든 선수들이 한마디씩 주어지는 자리에서 나는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와 명보는 2002년 12월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에서 국가대표 은퇴식을 가졌어.

 

 

 

 

(부상 관계로 인저리 타임 단 3분으로 국가대표 14년을 마감했습니다.)

 

 

 

 

 "내 나라 스트라이커로 살았던 지난 14년. 때로 행복하고, 때로 아팠습니다.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운, 부상과 재기, 절망과 오기... 울고 웃었던 그 시간들.

 

그러나 이제 말할 수 있습니다. 축구가 아니면 황선홍이 아니라고.

 

그동안 참 고마웠습니다. 늘 잊지 않겠습니다.

 

푸른 잔디를 가르며, 골문 앞에서 눈물 흘리며, 그저 축구 있어 행복한 외길잡이

 

황선홍으로 뛸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 그 응원에 지금껏 저는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내내 축구 곁에, 축구와 함께 살겠습니다."

 

-황선홍-

(황선홍...그러나 다시 中)

 

 

 

 

 어쩌면 나는 이번 월드컵이 있어서 한국의 축구선수로 기억될 수 있었어.

 

월드컵 전에만 해도 나는 똥볼만 차는 선수로 기억되고 있는 불운한 선수였거든.

 

하지만 월드컵에서 첫골으로 나는 영광스럽게 은퇴할 수 있었지.

 

또한 월드컵 후에 가시와로부터 갑작스런 퇴출, 느닷없는 터키행 앞에 방황, 그리고 또다시 무적선수

 

언제나 그래왔어. 축구인생 내내 잘나가기만 하면 언제나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지.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자, 중요한 것은 어제가 아니라 내일이야.

 

그렇기에 절대로 멈춰서면 안돼.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

 

나 역시 골 하나가 너무나도 간절하던 시기가 있었어.

 

그럴 때마다 나는 인생을 배워갔고, 재기에 성공했지.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영원한 황새, 황선홍

 

 

 

 

"내가 뛰고 싶은 곳은 오직 그곳

한국 뿐이다."

- 황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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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 스페셜

 

 

 

 

 "한국 팀 공격진에 황선홍이 있음과 없음으로 인해 팀 공격레벨이 확연히 차이난다."

차범근(98 프랑스 월드컵 대한민국 감독)

 

"한국에는 황선홍이라는 만능에 가까운 스트라이커가 있다."

히딩크(2002 한일 월드컵 대한민국 감독)

 

 

모아두고 미처 다 쓰지 못한 황선홍 사진 방출~

 

 

 

 

 

 

 

 

요즘따라 특히 더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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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나만큼 부상을 많이 당한 사람이 있었나? 아니 없었을 것이다.'

 

 이 부분이 황선홍 자서전을 읽는 내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그만큼 황선홍 선수는 정말 부상을 옆에 두고 살았죠.

 

 특히, 94 월드컵 이후 그에게 날아온 언론과 팬들의 비난. 정말 대단했다고 하네요.

 

 다행히 그의 마지막 기회인 2002 월드컵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레전드로 탄생했죠.

 

 황선홍은 사실 세계적인 선수로 평가받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의 영원한 황새로 기억될 것입니다.^^

 

(부산 감독 황선홍에 대해서는 아직 아는게 없기 때문에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이해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잘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황선홍 자서전에서 그는 누구보다 K리그를 사랑하더군요.)

 

 자료참고 - 황선홍, 그러나 다시...

(황선홍 선수의 자서전입니다. 거의 문장 그대로 옮겼습니다. 저는 그냥 편집했을 뿐이구요^^)

 

 감사합니다. -bdh92-

 

 http://blog.daum.net/chiwoopyein(-<내 이야기 들어볼래? 시리즈)

 

 

 원본인 블로그에도 리플,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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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2.07.04 14:32

    첫댓글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라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동국이형 팬이긴 하지만요) 어느 하나 부족한 부분이 없으시고 결정력도 결정력이거니와 특히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능하셨죠. (안느와 투톱을 하시는 모습이 너무나 보고싶었는데, 참 아쉽습니다.) 활동폭도 넓으시도 의외로 수비가담도 괜찮으시고요. 피지컬과 운동능력이 아닌 이런 센스로 승부하는 스트라이커가 요즘 너무 없는게 참 아쉽네요. 포항 감독으로써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데 언젠가는 국대 감독으로도 오시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홍명보보다도 전 황선홍이 더 좋더군요.)

  • 작성자 12.07.04 14:32

    불우한 가정환경, 3번의 무릎 부상, 1번의 월드컵 부진, 1번의 부상으로 인한 월드컵 출전 좌절, 그 외 수많은 시련들. 그 누구보다도 시련을 많이 겪고 상처도 많이 입은 황선홍이죠. 허나 숱한 시련을 묵묵히 이겨내고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선수&사람을 좋아합니다. (히딩크호에서 유이하게 전경기를 출전한 선수가 황선홍과 유상철이라고 하더군요. 실제로 히딩크가 황선홍을 정말 아꼈다고 합니다.)

  • 12.07.04 14:43

    축구 첨보면서 우리나라 선수중 가장먼저 좋아했던 선수 이제는 감독님이 되셨네요 ㅋ
    수많은 부상과 불운에도 기어이 4강신화의 주역으로 활약하시고요 누가뭐래도 역대최고의 스트라이커시죠

  • 12.07.04 14:51

    정독햇네요 ㅋ
    서사적인 구성이라 감동도 잇고 재밋게 봣습니다 ㅇㅅㅇ

  • 12.07.04 15:01

    평생잊지 못할것같아요 폴란드전 골ㅠ 너무너무좋았었음

  • 12.07.04 16:08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ㅜ

  • 12.07.04 17:11

    94년 월드컵때 욕 엄청 먹었죠... 특히 볼리비아 전 때 황선홍이 받았던 욕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 12.07.04 18:11

    정말 98 때 정말 ㅠㅠㅠㅠㅠㅠ 그래도 2002년에 기회를 잡고 다시 부활해서 멋있었죠

  • 12.07.04 20:00

    2002멤버의 막형이신 선홍이형 오랜만이시네

  • 12.07.04 20:19

    나의 영원한 스트라이커

  • 12.07.05 15:15

    황선홍! 우리나라 최고의 스트라이커였죠! 기억에 많이 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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