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도 다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무런 감동도 없고,
그저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그냥저냥 관성에 의해 움직이는 시계추처럼.
대중 앞에서는 더러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애쓰기도 하지만
자신만의 시간 안에서는 깊이 침잠해 버리곤 한다.
스스로 그러하니 아내에게 투영될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사람은 갈수록 모든 것이 좋아져야 하건만 내가 생각해도
거꾸로 가고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어제는 그 동안 잊고 지냈던 것들이 불현듯 떠 올랐다.
매일 쳐다보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보아왔던 것들이
왜 갑자기 생각 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제라도 늦은 철이 들려는 것일까.
아래의 사진들은 15년 정도 전 그러니까 1990년 경에
아내와 함께 만들었던 데코파쥬 공예품들의 일부다.
그 당시 데코파쥬가 반짝 유행했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데코파쥬는 헌 가구나 마음에 들지 않는 가구가 있으면 거기다가
엔티크 풍의 명화나 취향에 맞는 그림들을 오려붙여 만드는
유럽풍 생활공예다.
아내가 그 당시 유명했던 왕모선생께 배워 와서 집에서 실습을
한다기에 그러려니 하고 어깨 넘어 구경을 했는데
내성적이고 꼼꼼한 성격의 아내인데도 작품에 붙일 그림을 뜯고
오리는 게 내 마음에는 영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한 발 들여 놓다 보니 결국 수개월을 함께 작업하게 되는
고초(?)를 겪게 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부부가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게 참으로
행복한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든다.
양주병 장식
데코파쥬 제작과정을 잠깐 설명하면 이렇다.
먼저 작품의 크기와 분위기에 맞는 그림을 정한다.
그림은 달력이나 잡지 등에서 떼어내도 되고 남대문 시장에서 파는 것으로 안다.
그 다음은 그림을 코팅 부분만 남기고 얇게 벗겨내야한다.
이 과정이 무척 힘이 든다.
예전에 증명사진을 벗겨 보신 기억들이 다들 있으실 것이다.
증명사진은 도툼하고 작으니까 수월하지만 큰 그림, 그것도 사진이 아니고
그냥 잡지책 같이 얇기 때문에 잘못하다가는 찟어 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뜯기 전에 실러(그림 보호 약품)라는 약품을 도포하여 말린 후 뜯어내면
한결 수월하다.
물론 벗기지 않고 해도 되기는 하겠지만 작품의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그 다음은 그림의 형태대로 오려낸다.
인물은 인물만 그리고 정물은 정물 자체만 오려내야한다.
그리고 오려진 그림을 가구나 양주병에 본드로 붙인다.
배경그림은 원화와 비슷한 색감으로 별도로 그려내야 한다.
이 때 붓으로 그리지 않고 스폰지로 물감을 찍어 톡톡치면서 색칠한다.
그래야 질감이 더 좋다.
물론 그림에 소질이 있으면 직접 그려도 좋겠다.
물감을 완전히 건조한 후에 그로스(유광), 바니쉬(니스와 비슷)를 3회 정도 바르면
작품이 완성된다.
피아노 치는 소녀
사진관
데코파쥬의 영역은 다양하다.
위 두 작품은 동일한 그림을 5장 정도 똑 같이 오려서 층를 지워 붙임으로써
입체적인 효과를 내는 작품이다.(사진을 잘 못 찍어 입체미가 없지만)
모자걸이
보석함(우리집에는 보석이 없어서 반짓고리로 쓴다.)
고갱 <잡담>
명화를 복사하는 기법이다.
달력이나 사진그림을 그냥 오려 붙이면 질감이 없다.
따라서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림을 얇게 벗겨서 유화 캔버스에 붙이면
캔버스의 질감이 위로 올라와서 깜쪽 같이 진짜 유화처럼 보인다.
촛대
소품이지만 이 작품을 만드는 게 가장 힘들었다.
갖가지 화초가 얼마나 섬세하게 묘사 되어 있는지
오려내는데 정말 힘이 들었다.
먼저 투명한 유리 등잔에 흰 물감칠을 몇차례 했다.
그리고 그 위에다 촛불로 군데군데 그을음을 입혔다.
사진 오른쪽 꽃줄기는 0.5mm나 될까?
직선도 아닌 가는 줄기의 원형을 오려내는데 정말 힘들었다.
거의 다 내가 오렸는데 이 대목에서 아내는 감탄했었다.
무슨 남자가 그리도 꼼꼼하게 잘 오리느냐고...
일류 요리사나 디자이너는 남자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아내가 몰라서 한 말이었다.
아무튼 이 가는 줄기를 오리기 위해 손톱 다듬는데 쓰는 자그마한 가위까지
동원해가며 별짓을 다하여 완성했다.
지금은 몇 차례의 이사로 훼손도 많이 되었다.
소파 협탁
서랍장
이 작품 이외에도 벽시계며 거울, 쟁반, 고서적, 팔찌, 반지들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반지는 칼라만 잘 선택해서 만들면 오팔이나 호박 등 어떤 진짜 보석 보다도
화려하고 예뻤던 기억이다.
힘은 들었지만 그다지 어려운 작업은 아니므로 여러분들 중에도
관심있으신 분에게는 한 번쯤 해 보실 것을 권한다.
세월이 참 빠르다.
이걸 만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꽃은 같으나 사람은 그와 같지 않다 했던가.
데코파쥬 이후 15년의 세월 동안 아내와 무언가 함께한 것에 대한 기억이 내겐 없다.
이제 아내와 함께 했던 오랜 기억들을 반추하면서 이제 부터라도 좀 더 잘 하는
남편이 될 것을 다짐해 보지만 왠지 자신이 없다.
누가 좋은 방법을 제게 좀 소개해 주실 것을 기대한다.
뮈토스님 너무 멋집니다 존경스러워요~
허허... 그렇지님까지 보셨군요. 아무렴님과 그렇지님 모습들 부지런히 밴치마킹하면 제 고민의 해법이 분명 있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