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글을 올리기전에 고민을 하나 했어요.
이건 과학/환경-상식에다가 올려야하나 역사/종교-상식에 올려야하나
그러다가 석주명님의 삶은 역사이고 그의 나비에 관한 이론은 과학/환경-상식
이라는 판단이 서서 이렇게 역사/종교-상식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곤충하면 앙리 파브르를 떠올리게 됩니다.이 사람은 모르는 사람은 없지요?
제가 시립도서관에 가니까 교회에 저희 아동부제자가 아동열람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어요. "선생님! 석주명이 누군지 알아요?"라고 물어봐요
저는 익히 "응? 나비연구가 아니니?"하고 대답하니까 "그럼 언제 시대 사람인지
알아요?"라고 물으니까 전 할말이 없었습니다."모르겠구나"
과학/환경-상식에 科를 다니는 사람의 체면이 말이 아니더군요.
그래서 제자와 같이 석주명전기를 읽었어요. "선생님! 거기 아직 저 덜봤는데요"
"가만있어봐.좀 보고" "선생님! 다른거 보고 있으세요"
하고 전 다른것을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제자에게서 그 석주명의 전기를 읽었습니다.
자! 이제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두고...
석주명....1908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습니다.(지금은 못가는 땅)
1914년 서당에 들어가서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어린시절부터 동물을
잡아다가 키우는걸 좋아하였습니다.비둘기,곤충,토끼,다람쥐,꿩...그중에서도
곤충을 가장 많이 키웠습니다.석주명은 동물들을 발견하면 끝까지 잡으러
다니려고 했기때문에 학교를 지각하거나 공부시간에 헛생각을 하다가 매를
맞곤 했다고합니다.그리고,나중에는 다 보내줬고요.(커서까지 동물 가져다가 키우는
일은 안될말이죠) 1917년 종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때까지도
동물을 데려다가 키우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후 2년뒤에.....1919년 3.1운동이 평양땅에서도 일어났는데
석주명도 어른들을 따라서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그리고,그 결과는
아시지요?결국 일본에 통치를 계속받았습니다.
1921년도에 숭실고등보통에 입학하였고 이듬해에 숭실고보를 중퇴하고
송도고보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리고,1926년 농업기술을 배워서 한국의 농민을 살리겠다는 생각으로
가고시마에 농림고등학교로 입학하였습니다.학교생활중에
곤충채집을 하라는 수업을 하는 수업시간이 있었는데 그날은 우중이었습니다.
우중이라도 수업은 해야한다며 벌레를 잡아오라는 일본인 선생님의 말에
모두들 벌레를 잡으러갔지만 아무도 못잡아왔고 오직 석주명 혼자서
나무사이 꽃사이에 있는 벌레들을 잡아왔다고 합니다.이때 일본인선생은
석주명을 크게 칭찬하였고 석주명은 이때 '박물과'로 전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농심으로 가려던 초심이 어릴적에 곤충을 좋아하던 마음으로 바뀌어서
좀 갈등했었다고 합니다.그리고,이때 에스페란토어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석주명은 제국주의자의 언어인 일본어와 영어를 쓰기가 싫어서였다고 합니다.
1928년 8월 석주명은 타이완으로 곤충채집을 떠났습니다.그당시에 타이완도
조선보다 20년먼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있었습니다.
1931년 4월 모교인 송도고보에서 박물교사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나비연구에
들어갔습니다.이때 석주명은 제자들을 인솔하다가도 나비가 보이면
끝까지 쫓아가는 모습을 보여서 제자들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1933년 7월 하버드대학의 베버박사로부터 재정을 지원받아 백두산으로
채집여행을 떠났으며
1935년 5월에 금강산을 비롯해 강원도,충청남도,전라도 곳곳의 산과 봉우리에
채집여행을 다녔습니다.8월까지
1936년 6월에는 전라남도 해안지방 (강진,목포,해남,여수,고흥,장흥,신안,보성등지)
과 제주도로 채집여행을 떠났고
1937년 6월 경상남도 일대로 채집여행을 떠났습니다.
그해 8월 제 13회 일본 동문학회 학술대회에 참가하여 '조선산 굴뚝나비의 변이'에
대하여 강연하였으며 사할린,훗카이도로 또 채집여행을 떠났습니다.
1938년 나비연구가로 유명해져서 영국의 왕립아시아학회로부터
조선산나비총목록 집필을 의뢰받는등 큰 영광을 얻었습니다.
1940년 7월,함경북도 관모봉에서 한국최초로 암수 한몸인 줄흰나비를 잡았으며
1941년 일본학실협회에서 한반도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나비 3종에 대해서 강의
하였고 1942년 3월에 송도고보를 사직하게 되었는데
일본에서 창시개명으로 석주명의 석자를 (석전石田:이시다)로 바꾸라는 요구에
분노하여 그동안에 애써모은 나비 채집상자를 스스로 모두 불태우고 사직하였습니다.
1943년 4월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으로 옮겨갔고.거기에서 제주도 방언을
연구하는데 한몫을 하였고
1945년 5월,수원농사시험장의 병리 곤충학부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해 8월 15일에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12월에 '조선 에스페란토학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활약하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1950년 6월에 한국산악회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25일에 6.25가 터졌습니다.그러나 석주명은 피난을 가지않고 과학관을
지켰습니다.공산군들이 과학관에서 연구하고있는 석주명을 불러다가
심문을 하였으나 나비연구에만 미친 사람인것을 알고는 그냥 보내주었습니다.
그리고,10월 16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공산군들이 산에 숨어들었는데 이때 산에숨어든 공산군을 찾으려던 국군은
산을 내려오던 석주명을 공산군의 첩자로 오인하고 총을 발사하였습니다.
석주명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그 시신을 본 다른사람들에 의해 그가 석주명이었
다는 걸 확인했습니다.그는 그가 쫒아다니던 나비처럼 하늘로 올라가버린것이었습니
다.그는 파브르의 부활이었고 나비연구에 큰 공헌을 한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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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상식
[인물]
석주명이 누군지 아시나요?
♡金 秀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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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2.0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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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비박사 6.25때 ㅇ ㅓ이없게 죽었던 ㅜ.ㅜ
숭실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선물받은 만돌린에 푹 빠져서 낙제하기도 했고, 그걸 계기로 마음을 바로잡고 학문에 길을 걷게 되고. 민족에 대한 의식도 남달랐고(일제의 통치에 대한 저항의식이 내면적으로 상당히 강했고) 그래서 나라잃은 설움도 많이 생각한 분이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많이 존경해요!!
초등학교 읽기 교과서 3학년에,, 나비박사 석주명나오는데..ㅎㅎ;;
우리학교 선배님...송도고!!
잠깐! 송도고보가 인천에 있는건가요?개성에 있지않는가요?
석주명 하면 나비죠.....
6.25전쟁때 어이없게 죽었던 아까운 사람이죠 석주명 박사가 송도고보에있을때 곤충채집을 방학때 아이들에게 숙제로 내주었죠 아이들이 잡은 곤충으로 송도고보에 전시를 했죠 그 당시 송도고보의 자랑이라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