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에 나름대로의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종교이다.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다. 힌두교와 불교로 이어지는 인도종교, 도교와 유교로 이어지는 중국종교, 유대교와 예수교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종교, 이스라엘과 동일한 조상을 가지고 있고, 유대교보다 더 단기의 창세기를 가지고 있는 이슬람종교, 그리고 신도와 천리교로 불리는 일본종교가 그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환배조(환국, 배달국, 단군조선), 부여삼한, 신라가야, 고구려백제, 통일신라대진국(발해)까지 융성하다가 고려, 조선에 들어와서 외국종교의 영향으로 그 영향력이 약해지긴 하였지만 그 맥을 꾸준히 이어온 신교(神敎)라는 종교가 있다. 실제로 고대로부터 근대인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들은 산상과 웅상을 만들고, 신상과 삼신단과 소도의 신궁을 세워 직접 하늘에 제사하였는데 이러한 행사는 모두 신교의 종교행사로 볼 수 있다.
역대의 왕들이 신에 대한 제사를 중시한 이유는 자신들이 신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려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 백성들에게 천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줌으로써 그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함이었다.
역대 왕조의 왕들은 삼신단이나 소도 신궁에서 지내는 천제 이외에 영고탑, 삼성사, 삼성당(또는 삼신당), 신묘, 태묘, 종묘 등에서 역대왕조의 왕의 신령들께도 제사하였는데 이러한 제사는 자신을 존재하게 해 주신 조상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왕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가묘를 세워 선조 신령께 제사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사당이나 제실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에서 발생한 종교가 언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환국시대부터 구전되어온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환웅배달국때에는 녹도문자로, 단군조선국때에는 국문정음(가림토문자)으로 체계화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참전계경은 배달국시대부터 존재하던 전인들의 계율(佺戒)을 고구려의 을파소선생이 발견하여 널리 보급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에 강력한 국가가 세워지면서부터 종교행위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종교는 신계의 전지전능한 일삼신(一三神)과 소통하고 재앙을 막아주고 또 사후에 사람의 혼을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고유종교인 신교의 전통은 천부경, 삼일신고, 오계 및 참전계경(366사)과 같은 경전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우리의 수많은 역사책에도 그 기록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천지인의 신상과 신궁과 태일단, 천수단, 태주단, 삼신단, 산상, 웅상, 토단과 같은 신단과 환구단, 참성단, 도기야 등과 같은 제단이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고, 환구제, 삼신제, 산신제, 성황제, 용왕제 등과 같은 제사가 거행되고 있고, 신교의 연장인 민족종교들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종교전통은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라 선덕 여왕이 경주에 쌓은 첨성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첨성대는 크게 상단, 중단, 하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삼신의 작용으로 책력을 만드는 기구로 보는 것이 정확하므로 삼신대(三神臺)라고 지칭할 수 있다.
즉 첨성대는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삼신단이지만 과학적인 측면에서는 절기를 측정하는 천문대인 것이다. 그러나 첨성대를 불교 상징물로 보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고대에는 일삼신께 기원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전인(佺人) 또는 선인(仙人)이라고 하였고, 조상제사를 받드는 사람을 종인(倧)이라고 하였다.
그외 신선, 선사, 천군, 천관, 신관, 신녀, 도사, 도인, 진인 등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선인 중에 가르침을 담당하는 사람을 사부라고 하고, 신을 수호하는 사람을 시랑이라고 하였다. 또 국가안위를 위해 종교세력이 군사세력화 되기도 하였는데 고조선의 조의, 고구려의 조의, 신라의 화랑, 고려의 국선 등이 대표적이다.
고려시대에는 환웅천황이 강림한다는 신목에 제사하는 성황이 전국적으로 생겨났다. 물론 신목에 대한 신앙은 배달국 말기에 성밖의 호족에서 왕검이 되어 천신족과 통혼하게 된 곰부족의 여군장이 신단수 아래에서 자식을 잉태하기를 빌었다는 고대기록에서 비롯된다.
처음 우리 민족은 한민족을 중심으로 주변에 야인족인 곰부족과 호랑이 부족이 존재하였으나 배달국 말기에 곰부족은 왕검이 되었다가 단웅천왕의 왕비족이 되었고, 비왕이 된 단군왕검에게 그 영토를 물려주게 되는데 이후 단군왕검은 배달국을 이어 단군조선의 천왕이 된다. 호랑이 부족은 배달국 말기 단웅천왕때 당시 법규범이었던 계율을 지키지 못하여 사해(四海)로 추방되었다.
중국사람들이 시조로 모시는 황제는 유웅국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다. 국내 성씨도 있지만 黃(황)씨는 주로 중국 황제의 후손들이, 柳(유 또는 류)씨는 중국 한(漢)나라의 후손들이, 韓(한)씨는 중국 은나라의 후손들이, 張(장)씨는 돌궐족의 후손들이, 孔(공)씨는 공자의 후손들이, 孟(맹)씨는 맹자의 후손들이 국내에서 주로 사용하는 성씨이다.
이외에도 고려와 조선시대에 국내로 들어 온 중국 성씨들이 많다. 풍씨가 배달국의 태호복희에서 비롯되었고, 강씨가 치우나 신농에서 비롯된 것처럼 김씨는 주로 소호금천이나 고시나 금군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가야나 신라의 김씨는 금천씨의 후손으로 성을 김(金)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헌원의 후예라는 기록도 있는데 이는 중국의 황제 헌원과는 다른 사람인 것이다.
중국에는 진한(秦漢)민족 이외에 한민족과 야인족이 있지만 일부 학자들이 우리 한민족을 중화민족에 복속시키기 위해 주장하는 김씨의 황제의 후손설은 터무니 없는 설이다. 그리고 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의 부인인 허황후는 단군조선 삼한(진한, 번만, 모한(마한) 중 번한에 존재한 아유타국 공주로 인도 사람이 아니다. 물론 오늘날 강씨 중에는 중국 성씨도 있고, 김씨 중에는 일본인이 사성 받은 일본 성씨도 있고, 개화기때 유대인이 사성받은 유대인 성씨도 있다.
오늘날의 일본인 하삼도(구야한국, 임나가라, 안라)와 동남아는 단군조선, 가락(가야), 백제, 고구려, 신라의 영향 아래에 있었고, 이들지역에도 제후들이 파견되거나 이주민들이 분국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하삼도 주변의 산과 섬에 거주하던 왜(倭)족과 이(伊)족이 한반도에서 이주해 간 사람들이 세운 구야한국을 몰아 내고 일본국을 세우기 이전에는 한반도에서 파견한 수많은 제후나 이주한 일부 왕족들이 직접 또는 분국을 세우거나 연정으로 이들을 다스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중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우리 한민족의 계승자로 환골하기 위하여 한반도나 대륙 왕족의 성씨라고 내세우는 성씨들이 있지만 실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부여를 건국한 해모수도 단군조선의 후예이다. 이후 부여는 고두막한에 의해 계승되고, 해모수의 후손들은 동부여로 이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해모수의 후손인 고진과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부여왕의 사위가 된 후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은 해모수의 후손이다.
고주몽의 둘째 부인인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는 한수(한강) 이남으로 이주한 후 온조가 백제를 세웠다. 그리고 부여 출신으로 진한지역으로 이주한 부여 제실의 딸인 파소가 낳은 박혁거세도 부여 출신으로 볼 수 있으므로 역시 단군조선의 후예이다. 또 몽고, 흉노, 최씨 낙랑국, 신라의 6촌, 가야의 9간, 백제의 8성도 단군조선과 관련이 있다.
참고로 환국은 연방제 형태의 정치구조를 가졌고, 배달국은 통일제국 형태의 정치구조를 가졌고, 단군조선은 1국 삼한 형태의 정치구조를 가졌다. 따라서 삼한에는 단군조선 삼한(진한, 번한, 모한(마한))과 한반도 삼한(마한, 변한, 진한)이 있다. 단군조선 이후 부여와 공존한 한반도 삼한 중 마한은 한수(한강) 이북 지역에 위치하였고, 변한은 한수 서남쪽에 위치하였고, 진한은 한수 동남쪽에 위치하였다.
고려시대에 성황으로 불리고 조선시대에 성황당으로 불리던 신목에 대한 제사풍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성황당이 그것이다. 또 성 밖의 백성들은 무당에게 굿을 청함으로서 재앙을 막고, 선조들의 혼령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무당은 재물을 갈취하거나 부녀자를 희롱하거나 특정인을 저주하는 등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역사책에 기록된 우리 고유의 종교인 신교의 종교관념은 천상의 맨꼭대기에 위치하는 신향천원에 존재하는 일삼신(一三神)과 천지인 삼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신은 천일지일인일, 천일지일태일, 천주지주인주, 천도주지도주인도주이신 환인환웅나반아만을 칭하는데 민간에서는 마고궁희소희를 삼신으로 칭하기도 한다.
환인환웅단군을 삼신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는 하느님으로 신과 현상인 기와 원리인 이를 의미하는데 조화치화교화를 주관한다. 상제도 삼신만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일상제는 보통 나반상제를 지칭하고, 일반적으로는 황궁백소청궁흑소, 4천인천녀, 유인씨를 지칭하지만 민간에서는 보통 환인상제를 상제라고 호칭한다. 왕가에서는 조상 신령을 상제라고 한다.
천신인 환인은 신으로, 천신족의 선조로, 주신으로 하느님으로 불리는데 환웅천황으로 하여금 700세계인 우주와 인간을 창조케 하신 후 사자와 신령들로 하여금 세상과 인간을 다스리게 하였다. 지신을 환웅천황이라고 하는데 지상을 다스리는 신을 천하대장군이라고 하고, 지하를 다스리는 신을 지하여장군이라고 한다.
천하대장군은 오제를 통솔하고, 지하여장군은 오령을 통솔한다. 인간의 시조로 나반과 아만은 태상제로 태부와 태모가 되고, 마고와 궁희소희는 성조와 성모가 된다. 사람의 생과 사는 삼신이 주관하지만 사람이 죽을 때 저승사자의 명으로 그 혼령을 구천으로 인도하는 신이 사신인데 현무, 주작, 용, 범, 그리고 기린을 닮은 천마, 봉황을 닮은 삼족오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신들은 아주 먼 고대에 존재하였다가 사라진 동물일 가능성도 있다.
위에서 말한 사신과 구분되는 것으로 짐승의 조상이 되는 마조나 조조가 있고, 특정 부족을 빗댄 야인족이 있는데 배달국 말기의 곰부족과 호랑이 부족이 그것이다. 단군조선때에는 중앙관직으로 오가가 있었는데 왕가의 사람 중에 공이 있어 선출된 자를 오가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사회는 무리사회였으므로 성 안의 백성들은 대부분 삼신을 숭배한 반면 성밖의 백성들 중에는 자연신이나 동물신을 숭배한 부족들이 일부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배달국 말기에 호족들이 대륙의 끝인 4해로 흩어지면서 해양이나 습지지역의 부족들이 호랑이토템을 가지거나 이들 호족들의 선조를 자신들의 조상신 내지는 세상의 창세신으로 인식한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신 아래에는 황궁백소청궁흑소씨, 2천인천녀, 4천인천녀, 3남3녀, 유인, 환국을 건국한 환인상제, 환연방국을 건국한 환인천제, 배달국을 건국한 환웅천왕, 팔괘를 창시한 태호복희(포희), 치우천왕, 단군의 신령이 존재한다. 그리고 또 일삼신은 수많은 소신과 신령들을 보내어 일월성진, 풍운우뢰성, 토수화풍, 수화목금토, 명산대천, 호수, 바다, 거목, 구릉, 묘지, 종묘, 사직 등을 다스리신다.
최초의 인간인 나반상제는 아만과 혼인하여 9환 64민을 이루신 후에 죽어서 하늘을 다스리는 천신이 되었다. 가야의 이비가도 천신(령)으로 숭배되고 있다. 삼신상제와 마고궁희소희는 태극의 신으로 나반아만과 마고궁희소희와 2천인천녀, 4천인천녀는 이기와 음양과 음양과 사상의 신으로 여겨졌다.
민간에서는 마고궁희소희를 삼신으로, 궁희나 소희를 성모나 지모로, 환인상제를 옥황상제로, 태호복희(포희)와 여와를 해와 달의 신령으로, 치우천왕을 태양의 신령으로 여기고 있다. 또 북두칠성의 신령인 황궁, 유인, 환인, 환웅, 단군, 부루, 색불루 및 신라의 법흥왕과 가야의 김유신, 물의 신령인 하백, 바다의 신령인 문무왕 김법민, 그리고 삼태성의 신령인 최치원이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신교의 가르침은 선(善)이다. 선행으로 악업을 선업으로 바꾸고, 선도를 닦아 참나(眞我)를 발견하고, 계불의식을 행하여 어진성품으로 복본하고, 경을 읽어 태초의 진리에 도달하고, 정성을 다하여 신을 경배함으로서 철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생장소병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전생과 현생과 후생으로 이어지는 악업을 인식할 수 있고, 이러한 악업을 끊음으로서 연속되는 법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의 심신이 타락하여 현실이나 꿈에서 신의 모습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기가 어렵다. 그러나 태초의 진리에 이르면 자연속에서나 꿈 속에서 신과 소통하거나 감응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천지의 우주자연만물과 인간을 창조한 신(神)이라는 존재와 현생에서 수많은 선업과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황천땅에서 구천을 거쳐 천궁으로 가는 신령(神靈)과 천궁에 들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유령을 구분하고 있다. 간혹 오래된 동물의 정령이나 원한이 깊은 혼령이 악령이나 귀령이 되기도 하는데 흔히 이들을 귀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귀신은 음의 세력이자 부정한 기운으로 신과 구별되는 의미를 가진다.
통일신라 이후 유교, 도교, 불교의 등장으로 그 영향력이 약해진 신교의 전통을 복원하기 위하여 신라에서는 박제상과 백결선생, 김유신과 김춘추, 고구려에서는 을파소와 을지문덕, 통일신라에서는 최치원, 발해에서는 대조영과 대야발, 고려에서는 강감찬과 이암, 조선에서는 김시습과 이맥과 김교헌과 서일 등이 노력하였으나 기존의 자료들을 보급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또 조선말기에 최제우가 천도교를, 정훈모가 단군교를, 나철, 오기호, 김교헌, 서일 등이 대종교를, 강증산이 상제교(증산도와 대순진리회)를, 그리고 박중빈이 원불교를 창시하여 고유종교를 복원하려 하였으나 범을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리고 말았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과 사람이 죽어서 신성시 된 신령은 구분된다. 신이 우주자연만물의 섭리, 인간의 시원, 그리고 사후세계를 주관하는 존재라면 신령은 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혼령으로 사후세계에서 그 후손들에게 경배를 받는 존재이다.
환국을 건국한 환인상제, 환연방국을 건국한 환인천제, 배달국을 건국한 환웅천왕, 세계제국을 건국한 치우천왕, 또는 환인, 환웅, 단군왕검의 신령도 삼신으로 불리며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들은 사람의 혼령이므로 삼신이라기보다는 삼성이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천은 환웅천왕이 단인천제의 조칙을 받들어 배달국을 세우고, 또 단군왕검이 단웅천왕의 조칙을 받들어 단군조선을 개국한 날이다.
개천은 하늘의 아들이 나라를 세웠다는 뜻이지만 배달국과 단군조선이 모두 연호로도 사용하였다. 따라서 개천절은 환웅천왕과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운 사실을 하늘에 고한 기념일인 것이다.
배달국의 개천은 기원전 3,897년에 이루어졌고, 고조선의 개천은 기원전 2,333년 10월 3일에 이루어졌다. 단군왕검의 어천일은 3월 15일이고, 탄강일은 5월 2일이다. 어천절 행사는 서울의 단군성전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있는 단군 사당에서 주로 양력을 기준으로 거행되고 있다.
고대의 제천행사는 음력 10월에 열렸으므로 10월 1일은 일삼신의 날, 2일은 천신의 날, 3일은 지신의 날, 4일은 삼신태상제의 날, 5일은 국조의 날, 6일은 혼령의 날, 7일은 정령의 날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리고 국조의 날을 건국기념일로 삼는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국가의 대표자 자격으로 국가원수와 행정수반들은 개천절 행사와 어천절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월수화목금토에 제사한 고대기록과 왕과 관료들이 제천행사를 주관하거나 참관한 고대기록이 있다.
종교는 허구인 소설과 다르다. 또 가르치기 위해 연구하는 학문도 아니다. 종교는 한 민족의 전통과 그 구성원들의 영적 깨달음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위치에서 천지의 우주, 자연, 만물, 그리고 인간의 형성에 관한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고,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데 필요한 규범을 제공하고, 사람을 교화하여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르침을 제공한다. 또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이루지 못한 공덕을 이루어 타고난 궤와 법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한다.
또 종교는 과학과 유사하지만 과학 그 자체는 아니다. 종교에는 과학 이외에도 한 민족의 고유한 전통과 태초의 진리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노력과 신과 영혼들의 신령한 힘과 신 및 영혼과 감응하는 인간의 신통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환인천신, 환웅천황(대장군), 나반아만, 마고궁희소희로 불리는 신상이 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면 태일단, 천수단, 태주단, 천단, 삼신단과 같은 신단은 우주자연만물과 인간의 형성을 형상화한 것이다. 우리 역사책에는 산상, 웅상, 토단 등과 같은 수많은 신상과 삼신단에 관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실제로 전국 각지의 산과 강가와 바닷가에는 수많은 신상과 삼신단이 존재하고 있다.
현재 토지에 건물이 들어서고, 산과 강과 해안이 개발되면서 우리 고유의 신상과 삼신단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외국의 일부 종교주의자, 식민주의자, 그리고 해양습지 야만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또 한반도를 쉽게 잠식하기 위하여 국내에 영향력 있는 그들의 하수인들을 조종하여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문화재 발굴이라는 미명으로, 또는 휴양지 조성이라는 미명으로 우리 고유의 신상과 삼신단을 파괴하거나 반출하거나 본래의 모습을 새롭게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근 문화 다양성이라는 국제적인 흐름으로 인해 세계 각국은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새롭게 개선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 중에는 자신들의 낡은 종교를 새롭게 개선하거나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기 위하여 무리한 방법을 동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한반도의 수많은 문화재들이 파괴되거나 해외로 밀반출되고 있는 것이다. 개발로, 도굴로, 매매로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 땅의 신상과 삼신단을 지키기 위해서는 개발시 문화재 조사를 철저히 하여 문화유적지구인 경우 다른 장소를 물색해야 하고, 전국의 산과 강과 해안가를 국립공원이나 역사유적지구로 보존해야 하고, 역사책과 경전뿐만 아니라 우리 고유의 신상과 삼신단을 보물로 지정하여야 한다.
신상과 삼신단을 훔치는 행위는 재물의 절도에 해당한다. 그리고 신교의 신상과 삼신단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므로 문화재에 해당한다. 실제로 암벽조각, 토우, 십이지상, 능묘조각, 장승, 석기, 골각기, 산신상, 성모상, 성인상, 석조물, 입석(선돌), 남녀근석, 제단(성황단), 석간(돌기둥) 등이 동산문화재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재를 훼손하거나 허가없이 반출하는 행위는 불법행위가 된다.
최근 국내의 일부 혼혈인들에 의한 문화파괴행위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신교(shinkyo)라는 영문도메인을 일본인이 소유한 사례나 예수교 목사가 단군상의 목을 자른 사례나 영국의 신흥종교가 지석을 수집하는 사례 등으로 볼 때 이러한 행위는 국내의 혼혈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 의해서도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타국의 종교문화나 종교유적을 훼손하거나 약탈하는 것은 범죄행위일 뿐만 아니라 이들을 반입하는 국가의 국민들에게 잘못된 정신문화와 종교관을 심어줄 우려가 있으므로 하루빨리 금지되어야 한다.
위의 첫 번째 사진은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전하는 한문으로 된 천부경이다. 환단고기는 여러 종류가 있다. 계연수가 편찬 보급한 것이 있고 오형기가 필사하여 발행한 것이 있고 일본인이 출판한 것을 역수입하여 한글로 출판한 것도 있다. 과거 원본을 찾지 못하여 위서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원본이 존재하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므로 진서로 보는 것이 옳다.
두 번째 사진은 배달국시대에 사용된 녹도문으로 기록된 천부경이다. 갑골문자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서로 다른 글자가 많아 후기 녹도문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 고유종교인 신교가 국문정음(가림토문자)을 사용하던 단군조선 이전인 배달국 시대에도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환국에서는 구설과 그림문자가, 신시에는 녹서가, 단군조선에서는 전서(가림토문자)가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 천단
신교의 종교시설은 전국 각지에 존재하였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산상(山像), 웅상(雄常), 토단, 태일단, 천수단, 태주단, 천단, 삼신단, 그리고 부도, 신시, 소도(蘇塗), 신궁 등이 그것이다. 천단, 제천단, 또는 천제단은 글자 그대로 하늘에 제사하는 단이다.
현재 전국의 명산대천과 바닷가에는 수많은 삼신단과 제단이 존재하고 있다. 삼신단에서 제사하는 풍속은 아주 먼 고대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풍속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위 사진은 삼신단의 하나인 강화도 참성단의 모습이다.
위 사진은 환구단의 사진이다. 환배조로부터 국교였던 신교는 통일신라 이후 유교, 불교, 도교의 등장으로 민간에 대한 교화력이 약해졌다. 특히 고려와 조선은 중국의 간섭을 많이 받는 국가였기 때문에 국왕이나 국인들이 삼신제례를 거행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명칭이나 형태는 조금씩 달라졌어도 고려시대에는 팔관회나 연등회라는 이름으로 우리 고유신에 대한 제례가 행해졌고, 조선시대에도 교외나 천단에서 고유제나 기우제 등의 명칭으로 삼신상제에 대한 제례가 행해졌다.
상제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삼신상제는 천궁의 환인천신, 환웅천황, 나반의 천일, 지일, 태일을 지칭하지만 후기에는 인간신인 마고 및 궁희소희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또 이기와 천신지기 또는 황천후토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황천상제 또는 구천상제인 마고 및 궁희소희의 삼신, 황궁백소청궁흑소씨, 2천인천녀, 4천인천녀, 3남3녀, 유인, 환인상제, 환인천제, 환웅, 태호복희(포희), 치우, 단군을 지칭하기도 한다. 보통 인류의 시조인 나반과 아만, 그리고 마고 및 궁희소희를 지칭하지만 민간에서는 주로 환인상제를 지칭한다.
삼신제례를 행한 대표적인 천단이 옛부터 전해져 내려온 고려의 환구단이다. 조선 초기에는 그 명칭이 원단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환구단으로 바뀌었다. 산 정상에 존재하는 천단과 달리 환구단은 성 안에 존재하는 제단이다. 환구단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남별궁에 세운 것이다.
세 갈래의 태주단 위에 사평면의 단을 쌓고 그 위에 원형의 지붕을 이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태극, 사방, 일원을 형상화한 것으로 삼신단을 의미한다. 원형의 황궁우에는 삼신상제(마고, 궁희소희)의 신상이 모셔져야 하지만 환구단에는 황천상제와 황지기의 신위가 안치되어 있다. 교외에도 수많은 천단들이 축조되었는데 여기에서 행해진 환구대례는 매우 성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 새로운 환구단이 만들어 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성 안에 2개의 천단이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측에 원형과 사평면의 석축, 그리고 원뿔형태의 지붕으로 구성된 곳이 천단이다. 좌측의 팔각모양의 건물은 황궁우이다. 원래 제사때 사용하는 신위를 보관하는 장소는 따로 있는데 황궁우는 그 규모로 보아 신위를 직접 모시고, 제사한 곳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현재의 환구단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황궁우를 신위를 모시는 일원으로 보고, 그 둘레에 사방의 석축을 쌓고, 그 앞에 신궁을 축조해야 한다. 이러한 복원작업을 위해서는 우선 주위에 있는 호텔건물들을 매입하여 태극 토단과 신궁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본다.
2. 산상(山像)
우리 선조들은 옛부터 산이나 계곡에는 산상을, 산어귀나 마을 어귀에는 웅상과 토단을, 그리고 산마루나 마을에는 부도, 신시, 소도, 신궁을 세워 신앙하였는데 여기에는 태일단, 천수단, 태주단, 천단, 삼신단이 있다. 산상에는 삼신의 모습이 주로 돌로 조각되거나 토석으로 주조되어 있다. 즉 산상은 주로 삼신의 신상과 신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웅상은 환웅천황(대장군)의 신상과 신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토단은 마고 및 궁희소희와 나반아만의 신상과 신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도, 신시는 소도마을이고, 소도는 신궁을 말한다. 소도 옆에는 경당이 있어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위의 첫 번째 사진은 경북지방에 있는 산상의 모습이다. 그리고 두 번째 사진은 우리가 암각화로 알고 있는 울산 반구대 산상의 모습이다.
동심원, 사람의 형상, 동물의 형상, 그물이나 활같은 도구들이 새겨져 있다. 동심원은 광명을 사람은 선인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물은 완전하고, 신령스러운 생물을 도구들은 완전하고 유용한 사물을 나타내는데 이들은 모든 것이 완전한 신의 성격과 유사하므로 신물로 보는 것이다.
산상은 산 정상이나 강 상류나 계곡에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초기에 사람들이 산마루에서 생활하다가 바다나 강이 인접한 계곡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상은 원시신앙의 유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임을 알 수 있다.
강에 보를 설치하거나 계곡에 댐을 설치하거나 산을 관통하는 터널이나 산천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건설할 때 철탑이나 케이블카를 설치할 때 스키장이나 골프장을 만들때 문화유적지를 철저히 조사해야 하는 이유이다. 실제로 이러한 산상이나 웅상을 파괴하거나 약탈할 목적으로 관련공사들이 시행되는 경우가 많다.
위의 사진은 김현철이 편찬한 가락국기의 천신강림도이다. 천신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위의 사진은 조상과 관련이 있는 천신으로 볼 수 있다. 가락국기는 김해김씨 종친회에서 발간한 것과 김현철이 편찬한 것이 있다.
태왕인 김수로왕으로부터 시작되는 가야의 왕력과 역사가 간략히 기록되어 있고, 관련 비문들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위의 사진은 산상에 있는 지신의 모습이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여기에는 오제와 오령의 모습이 존재한다. 양전동 암각화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지신의 모습에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위에 있던 산상의 모습들이 도로와 터널의 건설로 파괴되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위의 사진은 전국의 산마루에서 마을로 뻗어내려 오는 마고궁희소희의 모습을 형상화한 토단이다.
그 내용에 따르면 태초 인간은 삼신에서 시작하여 황궁백소청궁흑소씨, 음양이 분리된 2천인천녀, 4천인천녀, 3남3녀로 이어졌다고 한다. 환단고기에는 태초의 남자를 나반이라 하고, 여자를 아만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나반과 아만이 혼인하여 9환 64민을 이루었는데 오늘날 우리들의 시조가 바로 이들이다.
산상, 웅상, 토단에는 삼신이 형상화되어 있다. 토단은 주로 마고, 궁희소희, 나반과 아만, 황궁백소청궁흑소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간에서는 마고를 대왕이라 하고, 궁희소희를 성모라고 하고, 마고 및 궁희소희를 삼신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앞에서 본것처럼 나반과 아만은 태상제로 태부와 태모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고, 마고는 성조로 궁희와 소희는 성모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위의 첫번째 사진은 고려 개성 만월대의 첨성대 사진이다. 하지와 동지를 기준으로 24절기를 표시한 것이다. 두번째 사진은 선덕여왕(632-647년) 재위 2년(633년)에 쌓은 신라 경주의 첨성대이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 삼국사절요에 신라에서 첨성대(瞻星臺)를 만들었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모지고 아래는 둥글었으며 가운데는 비어있어 사람이 가운데에서 올라갔으니 높이가 몇 길[丈]이었다. 고려사 지(志) 동경 유수관(東京留守官) 경주(慶州)편에 첨성대(瞻星臺)(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축성(築成)한 것이다.)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慶州府)편에 첨성대(瞻星臺)(부성(府城)의 남쪽 모퉁이에 있다. 당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7년 계사에 신라 선덕 여왕(善德女王)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圓形)으로 높이가 19척 5촌, 위의 둘레가 21척 6촌, 아래의 둘레가 35척 7촌이다. 그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가운데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세번째 사진은 가야 김해의 기마인물상이다.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의 아버지인 천신(령) 이비가의 영혼의 모습(靈像)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네번째 사진은 부산 금정산의 산상의 사진이다. 성조 또는 성모는 다양한 명칭으로 사용되므로 그 실체를 밝히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우리 선조들은 건축을 할 때 풍수(천문, 지리)에 따라 그 위치를 정하고, 그것이 신상이나 신단이나 신궁인 경우 그 근원을 상징하는 상징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신의 형상이나 영혼의 형상을 만들어 안치하였다. 따라서 선덕여왕도 즉위후 국인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하여 신상과 신단과 신궁의 건립을 추진하였을 것이고, 그러한 결과로 첨성대와 같은 삼신대(三神臺)가 만들어 졌을 것이다.
첨성대가 단순한 천문대가 아니라 삼신을 모실 삼신대라는 증거는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앞에 남아 있는 주춧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주춧돌의 위치를 살펴보면 신궁을 세우기 위한 건축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월성에 신궁이 존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나정과 내을에 신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위의 네 번째 사진인 가야의 기마인물상에도 원형의 좌대가 있고, 다섯번째 사진인 금정산 성모상에도 좌대가 있다. 이는 이비가 천신(령)의 태생이 하늘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성모의 태생이 태극 또는 음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962년에 제작된 첨성대 도면에 따르면 첨성대는 크게 상단, 중단, 그리고 하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은 2층(돌 4+4개)의 정자석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삼사와 사사가 위치하는 곳이고, 중단은 원형 27층(돌 361+가로석 4+4개+넓은돌 1개)으로 되어 있는데 오사와 칠사와 삼사와 천의 일오사와 지의 일오사를 상징하고, 하단은 2층으로 1층은 12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고, 지하층은 4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십이지신과 사신을 상징한다. 이러한 방위와 절기선에 따라 12신을 배열하고, 해당 월에 해당 신에 대한 제사를 지낸다.
삼신대는 천원지방인각을 사용하여 24절기와 같은 역법과 시간을 계산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상징물이므로 보다 더 과학적이고 정확한 역법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나침반, 규표, 물레방아와 같은 기구들이 동시에 사용되어야 한다.
이들이 해시계, 물시계로 발전한 것이다. 또 계산하기 까다로운 태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태음력을 계산할 수 있는 달과 별의 관측소도 필요하다. 이러한 종합적인 기술이 혼천의로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첨성대 주변에는 삼신대뿐만 아니라 천지인의 신상과 천체와 태양력과 태음력을 측정할 수 있는 수많은 과학기구들이 필요한 것이다.
과학과 종교철학은 유사한 듯 하지만 차이점이 많다. 과학과 종교철학은 기본적으로 모두 우주와 자연의 원리와 현상 자체를 연구하여 설명한다. 하지만 과학기술은 우주와 자연의 논리 그 자체를 중시하지만 종교철학은 여기에 우주자연에 만연한 이기의 상징과 이를 다스리는 주재자인 신의 형상을 더한다. 첨성대는 과학적으로 보면 역법을 측정하기 위한 휼륭한 기구이다. 그러나 천문과 지리, 종교적인 이기의 상징과 신의 형상을 적용해 본다면 역법의 측정 이외에도 수많은 신의 배위가 펼쳐져 보이는 것이다.
김해가 가락(가야)의 수도 이듯이 경주는 신라의 수도이다. 따라서 경주의 문화정책은 신라문화의 보존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여기에 보충적으로 고려나 조선의 유적과 유물이 보존되어야 한다.
또 가야지방이 한반도 변한지역이듯이 신라지역은 진한지역이다. 따라서 풍수나 유적과 유물의 보존은 고조선시대로부터 전해져 온 우리 고유의 종교인 신교(神敎)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여기에 보충적으로 삼국시대 이후에 들어온 불교나 유교나 도교의 유적과 유물이 보존되어야 한다. 발굴되는 문화재를 인도의 불교문화나 중국의 유교문화나 일본의 식민지문화로 치부하는 것은 우리의 고유문화를 말살하려는 외래의 종교주의자와 식민주의자와 야만도굴꾼들의 더러운 수법이라는 사실을 하루빨리 인식해야 한다.
위의 첫 번째 사진과 두 번째 사진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치우천왕의 모습이다. 첫번째 사진은 천왕의 실존영정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관념속에 나타난 치우신령의 모습이다. 두 번째 사진은 무속에서 모시는 치우신령의 모습이다.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영정과 달리 신이나 신령의 모습은 사람이 사후세계에서 가지는 형상이므로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관련된 사람의 기억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될 수도 있다.
신교의 상징물은 경전, 신상, 그리고 계승자의 옷, 칼, 방울로 추측된다. 이외에 경전을 기록한 동경과 목책이 있고 피리를 포함한 여러 가지 악기들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경전과 신상들은 대부분 전해져 오고 있지만 금척, 피리 등이 사라져 안타깝다. 그외 다음과 같은 신상들도 있다.
3. 태일단, 천수단, 태주단, 천단
신교의 대표적인 신단으로 소도 안에 존재한 태일단, 천수단, 태주단, 천단, 삼신단을 열거할 수 있다. 태일단은 태극과 하늘의 형성을 형상화한 신단이고, 천수단은 사상과 팔방을 형상화한 신단이다. 그리고 태주단은 부도, 신시, 소도의 중앙 위치했던 신단으로 보인다.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그 흔적은 완연히 남아 있지만 온전한 형태의 신단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 사진으로 유사하게 만들어 보았다.
위 첫 번째 사진은 태백산에 존재하는 제단사진에 알을 놓는 좌대사진을 올려 태일단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태일단의 모습에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사진은 대형 연못 속에 원방각의 형태로 구성된 천수단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보통 여기에는 팔각정자가 세워지는데 사상팔방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사진은 경주 황성공원에 있는 삼신단의 모습인데 태주단으로 볼 수 있다.
역사유적지구인 경주를 기준으로 보면 첨성대 주변이 과거 인신단이 위치했던 자리이고 황성공원 주변이 과거 태주단이 위치했던 자리이다. 그리고 황성공원 북쪽 현재의 공단지역 남쪽이 천수단(팔각정자)이 위치했던 곳으로 추측되고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광중마을이 태일단이 위치했던 곳으로 추측된다. 산상과 웅상은 주로 남산을 중심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고조선 모한(마한)의 한반도 삼한(마한, 변한, 진한)을 기준으로 진한지역의 삼한 중 남부 삼한의 경우에는 광중마을에 천수단이 존재하였고 안압지 동쪽지역에 태주단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4. 웅상(雄像)
웅상은 주로 산어귀나 마을 어귀에 존재하는 신단이다. 환배조시대에 소도는 낮은 산마루나 마을에 존재하였다. 소도가 산에 존재하는 경우에는 산어귀를 빙둘러 환수(桓樹)와 환화(桓花)를 심고 돌로 담을 쌓았다고 한다. 환수는 주로 참나무, 소나무, 잣나무 등이 사용되었고, 환화는 무궁화, 진달래, 복사꽃 등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소도에 빙둘러 환수를 심고 가장 큰 것을 골라 웅상을 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웅상 앞에는 대부분 삼신을 상징하는 석상이 존재하고 있다.
환배조시대에 소도는 하나의 산 전체 또는 하나의 마을 전체로 구성되었으므로 소도를 둘러싼 환수는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성황당이 그것이다. 환배조시대의 통치제도는 제국의 왕-대한(韓)-소국의 왕-소한(韓)-주(主)칸(汗)간(干)촌장(村長)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금군(金君)이 특정 지역의 정치와 종교업무를 겸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국가에서 통치제도가 완비되면서 금군은 종교업무만을 담당하는 천군(天君)으로 변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신라가야, 고구려백제 이전의 소도는 종교시설인 동시에 행정시설로 볼 수 있다.
위의 사진은 경주 포석정에 남아 있는 웅상의 모습이다. 대장군은 지상의 오제를 다스리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의 오령을 다스리는 지하여장군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현재 포석정에는 대장군의 모습은 희미하고, 사신중 현무의 모습만이 뚜렸하게 남아 있다. 따라서 현재의 포석정의 용도는 저승사자의 명으로 사람의 혼령을 구천으로 인도하는 사신 중 현무에 대한 제사시설로 볼 수 있다. 포석정은 제단 예술의 극치인데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포석정 옆에는 나정이 있는데 박혁거세왕이 태어난 곳이다. 남산에는 산상과 웅상과 토단이 있고 수많은 신궁이 자리한 흔적들이 있는데 지형적으로 나정도 신궁이 있던 자리로 보인다. 이후 광명의 아들로 자처한 박혁거세왕을 추모한 사당과 팔각의 건물과 우물이 나정에 존재한 흔적이 있다. 즉 아래측의 사당에 박혁거세왕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있고, 그 위측에 있는 팔각건물 안에 왕의 인물상을 안치하고, 건물 상부에 알을 비치하여 광명이 빛나는 모습을 형상화 하였을 것이다. 이는 박혁거세왕이 광명의 아들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과거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뿐만 아니라 가야의 수도였던 김해와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 부여 등에 존재하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개화기시대와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외래인의 도굴로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문화유산들이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파괴되고, 반출되고, 왜곡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 뿌리를 둔 수많은 환배조, 부여삼한, 신라, 가야,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의 후손들이 개발정책에 의해 그 터전을 잃고 타 지역으로 이주하고 있으며, 이들의 빈 자리를 외래종교인들이나 혼혈인들이나 다문화가정인들이 대체하고 있다. 역사유적지가 기이한 도시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 지역에서 개발사업이 과도하게 진행되었고, 최근 경주지역에서는 교통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고, 부산의 야산에서는 총알이 발견되고, 영남지역에서 화재가 자주 발생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문화유산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정통성을 가장 잘 간직해오고 있는 이들 후손들이 외래의 종교주의자나 식민주의자나 해양습지하층민족들에게 더 이상 핍박받지 않도록 이들에 대한 보호대책도 마련되어야 한다고 본다.
5. 마고궁희소희, 나반과 아만, 그리고 환인상제와 삼성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와 단기고사와 징심록 부도지에는 태초 인간의 형성에 관한 내용들이 간략히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을 형상화한 신상과 신단들이 전국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민간에는 이들의 모습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민간에서 전해져 온 까닭으로 신성함은 많이 사라지고 평범함만 남았는데 인물의 격이 격상되었을 수도 있다.
위의 작은 사진 중 첫번째와 두번째와 세번째 사진은 산신령의 모습이다. 그리고 큰 사진 중 첫번째 사진은 우리 환민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인 환국의 왕인 환인상제의 모습이다. 민간에서는 주로 옥황상제로 불린다. 그리고 두번째 사진과 세번째 사진은 고조선의 왕인 단군의 모습이다. 단군을 모시고 제사한 구월산의 삼성사가 일제시대까지 존속한 까닭으로 이들의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 사진은 코수염에 덧칠을 한 흔적이 있고, 세번째 사진은 왼쪽눈에 낙서를 한 흔적이 있어 안타깝다. 네번째 사진은 왼쪽눈의 낙서를 지운 사진이다. 이외에도 일제시대와 군사정부 시절에 단군교와 대종교에서 새로 제작한 단군영정과 단인단웅단군의 영정이 있으나 원본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6. 소도(蘇塗)
부도, 신시, 소도, 신궁은 환배고시대에 우리의 국교였던 신교의 종교시설이다. 소도는 낮은 산마루나 마을에 위치하였는데 환수와 환화 그리고 돌담으로 둘러쌓여 있었다고 한다. 소도 옆에는 교육시설인 경당이 있었다고 한다. 소도에는 태주단을 중심으로 사방에 신을 모신 신궁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 사방으로 이동한 황궁백소청궁흑소는 우리의 선조들이다. 유인은 초기공동체의 군장이고, 환인상제는 환국의 왕이다. 또 환인천제, 환웅천왕, 치우천왕, 그리고 단군왕검 환검은 대제국을 건설한 제왕들이다. 따라서 소도 신궁에는 이들을 모시고 제사한 천인전과 삼성전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 사신인 현무, 주작, 용, 범을 기리는 사당도 존재하였을 것이다. 환배조, 부여삼한, 신라가야, 고구려백제에서는 국교로 존재하다가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는 민간에 대한 교화력이 약해진 신교의 부도, 신시, 소도, 신단, 신궁의 유풍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7. 수혈
신교의 영향력이 약해진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수혈이라는 종교시설이 등장한다. 산천이나 바다의 계곡에 위치하는 동굴에 신상을 모신 곳이 있는데 이곳을 수혈이라고 한다. 유교, 도교, 불교세력과 강대국의 간섭을 피해 선인들이 산천이나 바다 근처에서 활동하면서 생겨난 종교시설로 보인다. 문화유적지뿐만 아니라 이러한 동굴들도 역시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조선후기까지 선인들이 존재하였고, 아직까지 산마루나 계곡이나 강 하류나 바닷가에는 신교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8. 지석묘
산마루나 계곡에 존재하는 지석단과 달리 평지에 존재하는 지석묘가 있다. 지석묘는 맨 밑에 3개의 가로돌을 놓고, 그 위에 세로로 2개의 돌을 세우고, 그 위에 1개의 돌을 얹어 만드는 탁자형 지석묘와 커다란 1개의 돌을 놓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어 만드는 덮개형 지석묘와 선돌을 여러개 세워 만든 입석형 지석묘가 있다. 지석묘는 무덤 앞에 세워진 제사시설로 오늘날의 묘사(廟詞)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 지석묘는 대부분 통치자들의 무덤이다. 일반인들은 주로 공동으로 매장하였는데 그 위에 돌로 단을 쌓았다고 한다. 산마루의 석탑이나 돌무덤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9. 선돌
지석묘와 유사한 것으로 선돌이 있다. 선돌은 그 형태는 서로 유사하지만 성격은 매우 다른데 신단의 기능을 한 것도 있고, 지석묘의 기능을 한 것도 있고, 또 표지석의 기능을 한 것도 있다. 따라서 선돌에 새겨진 그림, 선돌의 모양, 선돌에 새겨진 글씨 등으로 선돌의 성격을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위 오른쪽에 있는 사진은 평평하게 잘 다름어 진 것으로 보아 제단이나 신상을 받치는 받침돌로 볼 수 있다.
상고시대의 무덤은 주로 돌로 장식을 하였다. 권력자의 경우 가족묘가 있었고, 일반인들은 대부분 집단적으로 매장을 하였다. 무덤은 돌로 탑을 쌓아 만든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고대로 내려오면 왕들의 무덤은 넓어지고 높아져 파라미드 형태를 이루거나 산모양을 이루었다.
10. 우리 문화가 인류문화의 원형이다.
이전에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을 문맹이라고 놀렸다. 최근에는 우리 고유 문화를 알지 못하는 신문맹인, 특히 혼혈출신의 신문맹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성 안의 배산임수 지역에는 양인들이 살고, 성 밖의 변두리 지역에는 야만족들이 산다. 근세 말기에 일본의 막부와 개화기에 일본의 황족들이 홍해 주변지역의 해양습지 하층민족들을 동양으로 끌어들이면서부터 동아시아지역에 유대혼혈인들이 늘어난 것 같다.
인도남부, 중국남부, 동남아시아, 일본으로 흘러 들어온 이들 중에 일본인과 혼인한 유대인들이 일제시대에 대거 한반도로 들어오면서부터 국내 혼혈인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물론 전쟁시 외국 군인과의 결혼으로 생겨난 혼혈도 있고 이후 국제결혼으로 생겨난 혼혈도 있다.
일반인들이 사람처럼 생긴데 반해 이들 해양이나 습지지역의 야만족들은 동물의 모양을 많이 닮았는데 일본지역의 야만족들은 개나 고릴라모양을 많이 닮았고, 중국지역의 오랑캐들은 소나 돼지모양을 많이 닮았고, 인도지역의 야만족들은 코끼리모양을 많이 닮았고, 중앙아시아지역의 야만족들은 말모양을 많이 닮았고, 중동지역의 야만족들은 낙타모양을 많이 닮았으며, 이스라엘유대 야만족들은 원숭이모양을 많이 닮았다. 그외 백인 야만족들은 몽구스모양을 많이 닮았고, 흑인 야만족들은 기린모양을 많이 닮았고, 물고기모양을 많이 닮은 해양야만족들도 많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들에 의한 인종변종 행위가 자행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왕족이나 귀족이나 선량한 사람들을 야만족이나 기형인으로 만드는 이러한 인종변종 행위는 국민의 육체를 기형화하고 정신을 분열시키거나 무의식화 시킨 다음 자신들의 영혼을 심어 하수인을 만든다는 점에서 교활한 범죄행위에 해당한다.
국내에 들어온 외래인들이 일부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을 가지고, 인종차별 당했다며 국내인을 처벌할 수 있는 인종차별금지법 제정을 조직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집안의 기둥역할을 하며 선조들의 제사를 담당하던 호주제를 없애고, 외국인에게 한국성을 부여하고, 선조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본과 성을 변경가능케 하고, 짐승을 학대했다고 사람을 감옥보내는 법률을 제정하고, 또 이번에는 외래인 구박했다고 국내인을 감옥보내는 법률을 제정하려 하고 있다. 현재 동물이나 식물 중에 보호가치있는 것은 문화재보호법에서 천년기념물로 보호하고 있다. 따라서 외래인에 대한 문제도 현행의 민법이나 형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개화기에 시작되어 일제시대에 확산된 이러한 혼혈인들이 외국의 종교주의자, 식민주의자, 그리고 야만족들과 연합하여 우리의 고유문화를 파괴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국인들이 정통성이나 정체성을 잃고, 우리의 역사문화가 약탈파괴되어 사라지고, 해양이나 대륙에서의 진출로가 만들어진다면 머지 않아 한반도의 영토도 외국의 식민주의자, 종교주의자, 야만족들에 의해 잠식될 것이다. 따라서 가능한 혼혈을 방지하고, 국내의 혼혈인들에게 우리 문화를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고, 이들이 당근에 속고 채찍에 또 속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계몽지도해야 한다.
또 신문맹인 중에는 지나치게 외국의 것에만 몰입하고 우리의 것을 등한시한 결과로 자의반 타의반 우리의 전통문화와 역사유적을 파괴하는데 앞장서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도 어렸을 때에는 서양의 것에만 익숙하여 우리 역사와 종교와 민속을 미신이라 배척하거나 학문적으로 왜곡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문연구를 업으로 하는 까닭에 우리의 역사와 문화문명에 관한 지식을 완전히 습득하여 문맹은 면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사실 우리의 학교교육이 뛰어난 장인을 만드는 제도는 아니다. 알 듯 모를 듯 어중간히 배워 사회에 나온다. 다행히 겸손하고 부지런하여 사회에서 다양한 학문을 학습하거나 연구한 사람들은 프로가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아마추어가 된다. 또 주변사람들의 입김으로 왜곡된 시각을 가지기 쉽다. 이들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지 아니하고, 독선적으로 행동할 경우에 수많은 갈등과 피해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국가는 국민, 영토, 주권으로 구성된다. 한 국가의 정통성도 왕족과 귀족과 명문대가와 건전한 백성들의 후손, 역사유적과 유물, 그리고 역사기록에 그 바탕을 둔다. 외래의 종교주의자들에 의해,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야만족들에 의해 이들의 후손들이 혼혈화되거나 하수인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하고, 역사유적과 유물이 파괴거나 도굴되어 외부로 유출되는 되는 것을 막아야 하고, 우리의 역사기록들이 사라지거나 왜곡되거나 외래의 것으로 둔갑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현재 이땅에는 수많은 환배조, 부여삼한, 신라가야, 고구려백제, 고려, 조선의 왕족과 귀족과 명문대가와 건전한 백성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이들의 몸과 정신이, 영혼이, 성씨가 외래화되거나 야만인화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그리고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더 이상 문화재가 파괴되거나 반출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야 한다. 또 우리의 상고사를 출판보급하여 우리의 상고기록이 사라지거나 외래화 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있어야만 전세계 인류문화의 원형인 우리 한반도인의 문명이 남의 것이 되지 않고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우리의 유물과 유적들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전국의 크고 작은 산과 강과 바닷가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거나 그린벨트로 보호하거나 역사유적지구로 보전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책과 경전뿐만 아니라 신교의 신상과 신단은 모두 중요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 또 과거 부도, 신시, 소도, 신궁이 있던 자리와 왕궁이 있던 자리도 역사유적지구로 보전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고유문화이자 세계 전인류의 문화유산인 한반도의 유물과 유적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유적지구인 경주에서도, 김천에서도, 부산에서도, 경남에서도, 울산에서도, 공주와 부여에서도, 서울경기에서도, 강원에서도 우리의 유물과 유적들이 발굴이라는 미명으로,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휴양지조성이라는 미명으로 파괴되고 있다. 도로, 철도, 지하철, 터널, 광산, 댐, 교량, 항만, 방조제, 공항, 신도시, 아파트 등을 건설하거나 주택을 재개발하거나 뉴타운, 산업단지, 과학단지를 건설하거나 산복도로, 천문대, 풍력발전소, 케이블카, 골프장, 스키장, 경지정리, 휴양단지, 관광단지 등을 건설할 때 환경영향 평가와 문화재 조사를 철저히 하여 해당 지역이 문화유적지에 속하는 경우에는 다른 위치를 찾아야 한다.
외래의 종교주의자, 식민주의자, 야만족들과 그 하수인들이 문화유적지를 지정하여 개발하면서 우리 신교(神敎)의 신상과 신단을 파괴하거나 부산물로 반출하는 악순환을 하루빨리 제거해야 한다. 땅은 어디든지 있다. 한반도 전체가 땅이다. 공사현장마다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부디 '신문맹인이 고유문화를 파괴했다.' 라는 사실이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도록 주의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