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白日場 考選의 諸問題
蘇秉敦
高麗 4代 光宗大王 時(958년) 中國 後周의 山東지역에서 귀화한 雙冀의 제안으로 국가의 인재 선발방식이 科擧制로 바뀐 이래, 1894년 甲午更張이 시작되던 해 까지 이어진 우리나라의 과거제도는, 시행초기 白日場이 아닌 성균관의 居子들이 모여서 밤새워 글을 지어 아침에 답지를 제출하는 望月場 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14년 7월17일 태종이 성균관의 居子(成均館 儒生) 540여명이 치른 望月場을 親臨하고 이른새벽인 卯時에 還宮한 기록이 보인다. 이후 망월장의 비행이나 파행을 막고 공정하고 깨끗한 시험의 추진등을 이유로 밝은 白晝에 시험을 치르기 시작하여 그 과거제도가 1894년 까지 이어온 것이 현재 우리가 보는 白日場의 전신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國字가 漢文에서 한글 바뀌는 와중에도 전국도처의 儒林들이 면면히 斯文을 지켜오는데, 1927년 국내 東亞日報의 기록에 의하면 그 해 12월 30일 발표된 新春文藝 공고에 상금 2원씩을 걸고 漢詩부문 입상자 21인을 선발한다고 하였고, 1930년 신춘문예에도 역시 한시를 공모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현재와 같은 형태의 백일장이 어느시기 어느 곳에서 처음 시행됐는지는 아직 자세한 기록을 찾지 못했으나, 신학문의 주류에 밀려 재야선비의 소일거리 정도로 전락한 도처의 詩會와 吟社에 대한 분명한 기록도 아직 筆者는 접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주도 瀛洲吟社가 금년 創社 100주년 맞은것을 살피면 陸地部 에서도 같은 시기나 더 이른시기의 기록이나 역사가 충분히 있을 것인바, 후일 有眼者를 기다릴 뿐이다.
1990대 초기부터 한시공부를 위해 백일장에 참가했던 필자가 이후에 전국도처 多數의 한시백일장 채점관인 考選官을 경험해 보면서, 昨今의 백일장에 관하여 몇가지 아름답지 못한 점을 지적하여 공론화 해서 보다나은 후일을 기약해 봄이 이 글을 쓰는 주된 목적이다.
첫째는 昨今 한시백일장 참가자의 한문실력, 즉 한문을 해독하고 이해하는데 저급한 원문해독 능력이다. 自古로 한시는 文學,歷史,哲學의 소위 傳統學問의 결정체인데, 오늘날 백일장 참가자의 면면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전통을 얘기하며 漢詩라는 문학의 한 갈래를 오래지키려면 시급하게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른바 퍼즐 맟추기 식으로 최소한의 단어만 꿰맟추는 詩作으로 釣名 해서는 않된다. 시객이라면 최소한 四書정도는 多讀함을 원한다.
둘째는 四聲의 상당한 오해에서 오는 혼란의 가중이다. 특히 한시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발전을 꾀해야 할 漢詩協會에서 일부 字를 평성과 측성 양쪽으로 通用 한다고 원칙없이 공표하며, 또한 일부에서 근체시법이 어려우니 對句의 적용등을 완화하여 한시인구를 폭 넓게하기 위한 방편을 쓴다고 기존의 平水韻을 폄훼하는 행위 등, 전국의 백일장 현장에서 혼란을 부채질 하는 듯한 양상을 만드는 것은 한시의 개방과 발전이 아닌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처사이며 퇴행이다.
세번째는 일선에서 考選現場의 문제이다.
연중 6~70여개의 백일장중 장원자체가 취소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바, 未檢證考選官의 고선참여가 이러한 경우를 만들어 낸다. 실제로 原典의 文,史,哲 학식을 넉넉히 갖춘 고선관 배제에서 파생되는 현상이다. 연구해 보면 성균관이나 각 향교의 유교아카데미 등에서 순회교육의 형식으로 고선관 교육을 실시함도 해결의 큰 실마리가 될 것이다.
네번째는 지역교차 형식을 철저히 지키자는 것이다.
예를들어 某지역 백일장이면 그 某지역 고선관은 고선위원중 한 사람만을 배치하고 타지역 고선관을 나머지 위원으로 하며, 위원장은 반드시 타지역 출신으로 하는 것이다.
이상 크게 네가지 정도의 백일장에 당면한 문제를 짚어본 바, 세세하게 기타의 문제까지를 나열하지 않는다. 冒頭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론화하여 토론하고 협의해가는 과정에 우리가 원하는 답이 분명히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8월 23일 유교아카데미 강의원고 소병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