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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획연재 -미국의 여성 불교 >
예일대학교에서 불교와 명상을 지도하는 불교 지도 법사,
미국의 여성 명상가 수미 런던 에게 듣는
미국 불교와 명상 이야기
글 / 홍성미(본지 취재기자)
Duke Buddhist Students in 2015
동양과서양의영적 랑데뷰가시작되었다
우리의 정서 중에는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이런 말도 합니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요” 하지만 서양의 정서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대학교 2학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잉크 드로잉 수업을 가르쳤던 한 미국인 교수의 말이 지금도 가끔 떠오르곤 합니다. “나는 여러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심령술사가 아닙니다. 나에게 그런 걸 기대하지 마세요. 말하지 않으면 나는 여러분이 무얼 원하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이심전심을 미덕으로 알고 자랐던 나에게 그 교수의 말은 마치 수수께끼처럼 알듯 하면서도 선뜻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어렴풋이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은 무척이나 친절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관계에 있어서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나 역시 미국생활을 하면서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 할지라도 어딘지 모르게 너무 자기방어적이란 느낌이 드는 건 제가 미국에서 지낸 시간보다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이 더 많아서 일까요? 아님 제가 너무 감성적인 사람인 탓일까요?
수미 런던
대부분의 교육은 뜨거운 가슴보다는 차가운 머리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라는 말이 우리에겐 익숙하지요. 하지만 ‘인간은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존재’ 라고 우리는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사람에게는 이성과 감성이라는 적어도 두 개의 시스템이 공존하고 있는듯 합니다. 대부분 이성은 논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무엇을 절제하게 만들거나 따져보게 만들지만 감성은 그저 가슴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며 때로는 이유없이 우리를 한 쪽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자는 이성적이고 예술가는 감성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냉철한 이성
이 훌륭한 과학자가 가져야 할 덕목이라면 , 아름다운 감수성은 훌륭한 예술가를 만드는 밑거름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과학자나 위대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이성과 감성의 경계에서 자유자재 할 수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연구실 책상이 아닌 공원을 산책하던 중 E = mc²라는 상대성이론을 발견합니다. 자신의 이성을 잠재우고, 감성의 세계와 접속했던 천재 과학자는 또 다시 그 경계를 넘어 그동안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상대성이론이라는 공식을 읽어 냈던 것이지요. 1915년 이 이론이 발표된 후 약 10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직도 그의 상대성이론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음악의 아버지’라 불려지는 바흐의 음악을 사람들은 천상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감성이나 감정이라는 단어만으로 그의 음악을 설명하기에는 왠지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바흐의 음악이 위대한 것은 완벽한 소리의 균형이라고 음악분석가들은 말합니다. 감성이 아닌 절대 균형이 주는 아름다움을 통해 그는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주었던 것입니다. 바흐는17세기 바로크 시대에 활동했던 음악가입니다. 대대로 개신교인 루터 교회의 신자 집안에서 성장했던 그는 언제나 악보의 첫머리에 J. J. (Jesu Juva, 예수님 도와주소서)라고 글씨를 쓴 뒤 작곡을 시작했으며, 악보의 마지막에는 S.D.G(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라고 적으며 작곡을 마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바흐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신(神)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적이었던 17세기 유럽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그의 이러한 행위는 종교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를 초월한 인간의 본질적 존재 이유와 그 근원을 탐구하기 시작한 21세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마치 아인슈타인이 사색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이성과 감성 너머의 영역에 접속했던 것처럼, 어쩌면 음악가 바흐 역시 자신만의 루트를 통해 오감 너머에 존재하는 질서와 균형을 오감의 영역인 소리로 표현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사
람들은 그의 음악을 들으며,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자신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경험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양과 서양은 지난 수 백 년 동안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지구라는 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한 명은 눈에 보이는 과학과 물질문명의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다른 한명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 문명에 더 큰 의미와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동양은 이심전심이라는 데자뷰(Déjà vu)적 기억 속의 감성을, 서양은 대학교 시절 나의 드로잉 선생님처럼 눈에 보이는 것, 그리고 물리적으로 일어난 현상을 통해 세상을 인지하는 이성을 각자의 DNA 속에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자신에게 없거나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을 더욱 갈구하고 집착하게 만드는 심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실 그 사람은 심리적 빈곤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물질의 가치를 너무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태도 역시 내적 결핍감에서 비롯된 또 하나의 변형된 모습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에 너무 집착하거나 혹은 부정하는 마음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사실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 내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 혹은 내가 부정하고 있는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자신의 심리상태를 조금은 엿볼 수 있다고 합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정신 문명을 탐구했던 동양과 물질 문명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던 서양은 어쩌면 자신들이 갖고 있지 않는 서로의 것에 대한 무의식의 목마름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세기 초 불교가 미국에 유입되기 시작했을 때 미국의 지성들은 불교라는 동양의 정신세계에 열광했고, 동양은 서양의 과학적 발전과 물질적 풍요에 집착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내적 그림자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를 의식적으로 억압하거나 외면한다면, 이러한 내면의 그림자는 우리의 무의식에 저장되어 삶의 다양한 문제거리를 만들지만, 반대로 우리가 그 실체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오히려 개인의 성장과 발전, 풍요로운 삶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환경문제, 종교적 갈등과 인종 차별 문제, 경제적 위기감, 국가 이기주의 등 현대사회는 풀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이나 동물 복제 등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문명 앞에서 미래에 대한 인류의 불안감은 자꾸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요?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불교는 해를 거듭하며 새로운 성과를 만들고 있습니다. 나눔과 사회적 공동체의 발전을 중요시하는 기독교 정신, 과학 문명을 주도했던 강력한 추진력과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기 쉬운 일상적 언어로 해석하는 탁월함, 그들은 자신들의 강점을 살려 더 많은 사람들의 눈과 귀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정신 연구를 위해 수 천년의 시간을 보냈던 동양은 어떤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현재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불교와 명상을 지도하고 계신 여성 명상 지도자 수미 런던 법사에게 미국 불교가 찾아낸 그 해법에 대해 들어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셨는데요, 불교와의 처음 인연이 궁금합니다.
1975년 제가 태어났을 때, 저희 부모님은 뉴햄프셔의 작은 마을에 있는 일본 선 (禅) 공동체에 살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 공동체에 있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좌선, 걷기 명상, 반야심경, 절하는 법, 법당에서의 예절, 그리고 수행의 한 방법으로 공양하는 법 등을 배웠습니다. 그 공동체에 살고 있던 가족들은 태극권(tai chi chuan)과 “젠 농구(Zen basketball)”를 수련했고, 저희 아버지는 하타 요가(hatha yoga) 수행자였습니다.
청소년 시절, 저는 아드바이타 베단타(advaita vendante) 철학, 산스크리트어 염송, 그리고 요가 수행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16살이 되었을 때, 저는 아버지를 따라 매사추세츠 주 바레 (Barre)에 있는 통찰 명상 협회(Insight Meditation Society)를 방문했는데, 그 곳에서 죠셉 골드스타인(Joseph Goldstein), 샤론 살즈버그(Sharon Salzberg), 캐롤 윌슨(Carol Wilson) 선생님들과 함께 9 일간의 위빠사나(Vipassana) 명상 수행을 했습니다. 저는 느림의 철학이 담긴 위빠사나(Vipassana) 수행과 그곳의 삶에 매료되었고, 그 첫번째 리트릿 이후, 통찰 명상 협회(Insight Meditation Society)는 저의 영적 고향이 되었습니다.
성장하면서, 불교의 어떤 점에 마음이 끌리셨는지 궁금합니다.
New Canaan Academy, Kids Tai Chi 1979
Sumi_s Zen Community in 1979
New Canaan Academy Zen Basketball Ground
어린 시절, 선(Zen) 센터에서의 생활 중 제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공동체적인 삶과 그로 인해 느껴지는 소속감이었습니다. 특히 부처님의 따뜻한 미소를 볼 때마다, 저는 부처님과의 깊은 교감을 느꼈습니다. 어린 아이의 작은 키로 저는 불상을 항상 올려다 봐야 했고, 그럴 때마다 부처님은 그런 저의 눈을 지그시 내려다 보고 계신 것처럼 보였지요. 대학에 진학한 후, 저는 불교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불교의 가르침에 끌렸고, 그런 불교는 단순히 고통에서 살아 남는 방법이 아닌 깨달음의 길을 향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해탈이라는 불교적 통찰력에 다시 한 번 매료되었고, 책을 통해 접했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약 1 년 동안 저는 학교 내에 있는 복음주의 기독교 그룹에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사상 체계를 비교해 볼 수 있었고, 저는 불교의 가르침이 더 자명하고 심오하며 통찰력이 있다는 사실과 불교의 명상 수행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불교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대단하셨던 것 같습니다. 불교 수행 과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현재, 저는 제 자신을 남방 소승불교인 테라바다 불자(Theravada Buddhist)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Vipassana)"는 테라바다 불자(Theravada Buddhist)가 수행하는 명상법입니다. 하지만 불교가 의미하는 것은 명상 그 이상의 것이지요. 불교에서 제가 중점을 두고 있는 분야는 도덕성(ethics), 바라밀(paramitas), 브라마 비하라스(Brahma Viharas), 지역 공동체, 참여, 그리고 삶을 변화시키는 온전하고 깊은 영적인 깨달음을 도와 줄 수 있는 모든 연구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의 테라바다 불교 수행은 이 모든 것들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린시절 경험했던 일본 선불교의 가르침 역시 저의 수행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인식 자체에 대한 인식을 설명하는 티벳 불교의 가르침에서 많은 도움이 받게 되었습니다. 틱낫한(Thich Nhat Hanh) 스님의 대승불교와 마음챙김 (mindfulness)을 접목한 형태의 가르침 역시 저에게 많은 – 약 50% 정도 -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가 저를 테라바다 불자(Theravada Buddhist)로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곳이 제가 속한 수행 공동체이자 제 수행의 토양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수행 공동체를 통해 미국뿐만 아니라 해외에 있는 수행자들과도 친밀한 우정과 멘토링 관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많은 선생님들이 계시지만, 제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공부하고 수행했던 분들은 미국 통찰 명상(Insight Meditation) 센터의 선생님들입니다.
더럼가족명상회 May 2018
본인을 테라바다 불자(Theravada Buddhist) 로 생각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명상을 지도하실 때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계신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명상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과 일회성 명상 워크샵을 진행해야 할 경우, 저는 먼저 몸의 긴장감을 풀 수 있도록 유도한 후, 의식을 자연스럽게 호흡에 집중하도록 지도합니다. 호흡을 통해 느껴지는 몸의 감각에 의식을 머물게 하고, 아랫배에서 콧구멍 주변으로 의식을 이동시키는 약 15분 동안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들을 관찰하도록 합니다. 그 다음에는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하고 있던 의식을 놓아 주고, 그 상태에 머무르며 조용히 의식이 원하는 대로 흐를 수 있도록 허락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대부분의 학생들은 초기단계의 ‘각성’ 또는 고요한 의식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이 과정은 마치 자전거를 타고 매끄럽고 평평한 도로 위를 지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먼저 자전거의 페달이 빠르게 밟아 충분한 속도를 얻습니다. 그 다음에는 페달은 밟지 않아도 이미 탄력은 받은 자전거는 쉽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 배가 항해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지요. 그렇겠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의식을 호흡에 집중하고, 집중했던 의식을 놓아 주는 과정을 통해 일정 수준의 집중력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학생들은 애쓰지 않아도 고요함에 머물 수 있는 상태를 경
험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이 방법은 명상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처음 단계의 지도입니다. 6-8주의 전체 프로그램에서는 몸의 감각, 미각이나 청각과 같은 오감을 통한 마음 챙김법, 생각, 감정, 그리고 의식의 단계 등을 이용한 다양한 명상 기술과 명상법을 제공합니다. 각각의 수업은 이러한 명상법들이 명상 쿠션위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안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공부합니다. 저는 또한 자비심(lovingkindness, metta)을 명상 수행에 포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 챙김 수행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상을 명확하게 보는 것, 그리고 그 본 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입니다. 우리는 친구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상황을 사랑스러운 마음, 분노하는 마음, 짜증나는 마음, 유연한 마음, 애처로운 마음 등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받아들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은(metta) 우리가 보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인식의 조율은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할 때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자신에 대한 자비로운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가혹한 질책, 수치심 등으로 자신을 지속적으로 학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상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명상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극도로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류는 이기주의를 통한 단절, 소비주의라는 해로운 문화를 만들고 있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 이웃, 그리고 지구와의 관계 회복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인류는 자멸할 수도 있지요. 사람들은 그 해결의 실마리를 종교를 초월한 영적 성장을 통해 찾고 있습니다. 명상은 영적 성장을 돕는 한 가지 방법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명상만으로는 영적인 삶을 배양하는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정도 필요하고 우리의 경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거시적 통찰력도 필요합니다. 저는 불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사회가 풍요롭고 의미 있는 영적 삶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앱이나 책을 통해 혼자 수행하는 명상은 몇 모금의 물과 일시적 안도감은 제공해 줄 수 있지만, 결코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명상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어렵다고 생각해 선뜻 시도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명상이란 무엇인가요? 그리고 명상은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요?
명상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마트 폰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은 세 부분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응용 프로그램 (메일, 카카오 톡, 캘린더 등), 그 아래에 있는 운영 체제 (iOS 또는 Android), 그리고 하드웨어 (삼성, iPhone 등) 입니다. 우리 역시 스마트폰과 같습니다: 우리도 응용 프로그램 (직장, 건강, 관계, 육아)이 있고, 운영 체제 (이성과 감성), 그리고 하드웨어 (신체, 두뇌, 소화) 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상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삶에서 응용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더 나은 학생이 되기 위해 명상하고 하고 있습니다; 혹은 명상은 내 스트레스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명상은 운영 체제 단계에서 작동합니다 - 다시 말해 명상은 우리의 이성과 감성에 작용을 합니다. 불교 심리학에서 이성과 감성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만약 스마트 폰의 운영 체제가 업데이트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나요? 모든 응용 프로그램 역시 업데이트 됩니다: 업데이트 된 스마트폰은 보다 효율적으로 실행되고, 오류가 적어지고, 자주 중단 되지도 않으며, 속도도 빨라집니다. 마찬가지로, 명상은 우리의 이성과 감성을 "업데이트" 또는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인생의 “모든” 응용 프로그램 (일, 우정, 건강 균형)이 보다 효율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명상을 기능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명상을 단지 "삶의 불편함을 개선"시켜주는 수단으로 제한하는 것은 귀한 물건을 매우 헐값에 파는 것과 같은 것으로 명상이 가진 온전한 잠재력에 대해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명상이 불교의 가르침과 짝을 이룰 때, 명상은 깨달음의 과정으로서 우리가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현실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을 갖게 하고, 우리 자신과 세상의 치유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저는 명상과 불교의 가르침은 서로 짝을 이루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는 완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예는 빵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빵을 만드는 건조한 재료는 밀가루, 설탕, 소금이고, 젖은 재료는 물과 효모입니다. 우리가 마른 재료만을 먹는다면, 그 맛은 끔찍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씹을 수 조차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물과 효모만 먹는 있다면, 우리는 배가 고플 수 밖에 없습니다. 밀가루와 설탕, 소금, 누룩과 물을 함께 넣어야 우리는 영양가 많고, 속도 든든하게 해주는 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직 이성적 이해만을 통한 불교의 가르침은 물과 이스트가 빠진 빵처럼 건조합니다. 오직 명상만으로도 영양가 많고 속을 든든하게 해주는 음식이 될 수 없습니다. 명상과 불교의 가르침이 함께 할 때, 우리는 영양가 많고, 속을 든든하게 채워 줄 영적 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더럼불교가족회 Kids and Parents
가슴에 와 닿는 쉬운 설명 감사합니다. 미국이라는 토양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미국 불교의 특징이 있다면 어떤 점을 꼽을 수 있을까요?
저는 "미국 불교"라는 용어를 좀 더 복잡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불교는 캐나다, 유럽, 호주, 남아메리카,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서양의 문화와 사상에 의해 재구성된 "서구화된 불교"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서구 식민주의에 대한 반향으로 불교를 근대화 하려던 동양의 지식인과 종교인들에 의해 아시아 일부지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20 세기 초 D.T. 스즈키 (D.T. Suzuki , 일본), 아잔 붓다다사 (Ajahn Buddhadasa, 태국),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미얀마)와 같이 불교를 철학, 심리학, 그리고 소위 말하는 과학으로 만들기 위해 재구성했던 인물들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스리랑카의 현대화된 불교를 "개신교 불교(Prostant Buddhism)"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시아와 더불어 서양의 국가들은 문헌 중심의 경전 연구, 변증법, 공휴일 등을 강조하며 불교를 서구적인 형태로 발전시켰습니다. 비아시아계 서양인들은 불교가 페미니즘, 동성애자의 권리, 사회 정의, 참여, 그리고 환경과 같은 진보적인 운동을 환영하는 종교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문제에 대한 관심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양 불교 (Western Buddhism)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서양과 아시아 두 지역 모두에서 이러한 양식의 불교를 따르는 많은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 불자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에는 프로그램적으로 변화를 준 사찰들이 많이 있습니다. 명상, 요가, 건강한 식습관 등에 중점을 둔 이런 절들은 서양에 있는 센터들과 그 모습이 무척 흡사합니다. 중국에서 온 예일대 학생 한 명으로부터 최근 저는 그녀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관세음보살(Kuan Yin)을 경배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어떤 유대감도 느낄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취하는 방식의 불교는 그녀 세대의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나에게 명상법에 대해 물었습니다.
비아시아인 주도의 서양 불교가 그동안 좌선을 강조했다면, 이제 그 이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발전과 우정을 통한 협력은 우리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한 중요한 부분입니다. 또한 많은 불자 사회가 고령화 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60대 80대가 된 베이비 붐 세대들의 노력으로 이 땅에 뿌리 내렸던 불교가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젊은 세대들과 가족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은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현재 예일대학교 종교 센터의 불교 지도법사(Buddhist Chaplain)로 활동하고 계신데요, 지도 법사의 역할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듀크 대학교 (Duke University)에서 불교 지도법사로 8년간 봉사한 후, 저는 지난 여름부터 예일(Yale)에서 같은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생 정도 나이의 청년층 지도를 많이 해왔고 좋아합니다. 처음 학생들을 만나고 저는 예일 불교 승가회 (Yale Buddhist Sangha) 학생들이 준비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헌신적이고, 통찰력 있고, 호기심이 많으며, 참여적이고, 깊은 배려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민족 학생들을 많이 만나고 있습니다. 불교라는 종교와는 거리감을 느끼지만, 명상과 불교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는 아시아계 학생들과 아시아계 미국인 학생들의 수가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는데요, 부모로부터 명상을 배웠다는 백인 학생들의 수가 불교에 대한 어떤 유대감도 느껴지지 못한다는 아시아 학생들보다 더 많다는 것입니다. 직접 한 번 확인해 보세요!
불교 지도법사(Buddhist Chaplain)로서 제 역할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예일대학교라는 커뮤니티 안의 다양한 요구를 듣어주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입니다. 일부는 불교나 명상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새내기들이고; 다른 일부는 어린 시절부터 불교 신자였던 학생들입니다. 어떤 학생들은 명상을 배우기 위해 찾아오고; 또 어떤 학생들은 문화적인 또는 가족적인 이유로 이곳을 찾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비종교적인 마음 챙김 명상에 관심을 갖고 있고; 반면 다른 어떤 학생들은 종교로서 티베트 불교의 문화, 언어, 그리고 수행에 깊은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교와 사회정의를 분리할 수 없는 하나라고 보고; 또 다른 이들은 불교를 복잡한 일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특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렇듯, 전반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명상을 통해 어떤 영적인 성취를 찾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명상을 통한 영적 성장을 가르치고 지원합니다. 저는 목회 상담도 많이 하며, 학생들의 개인적인 문제도 도와줍니다. 저는 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그들만의 장기적인 영적 여정을 준비시키기 위한 고민과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인생의 많은 시련들 앞에서 어떤 살아있는 지식과 기술이 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일까?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아내, 그리고 대학에서 명상을 가르치는 지도법사로서 학생 상담까지 참으로 다양한 역할을 맡고 계신데요, 특히 애정을 갖고 계신 분야가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더럼불교가족회 Kids Circle
13 년 전 제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저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그동안 내가 수련해 왔던 마음 챙김 수련, 명상, 그리고 불교의 가르침이 부모라는 나의 새로운 역할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실제로, 처음 부모가 된 모든 사람들은 육아는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라고 말할 것입니다. 수도원에 앉아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쉽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울고 있는 2 살짜리 앞에서 인내심을 한 번 시험해 보십시오! 두번째는 그동안 우리가 생각했던 조용히 앉아서 명상만하는 불교 수행자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유치원을 다니는 두 명의 아이들이 있었을 때, 저에게는 명상을 할 시간이나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점을 두고 있는 분야는 불교의 도덕성, 상호 연관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 영적 공동체의 개발, 그리고 사랑과 자비의 실천적 경험 등으로 좌선보다 훨씬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제 아이들이 좀 더 성장했을 때, 저는 제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달마 공동체 생활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고, 제 자녀들에게도 일종의 영적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북부 캘리포니아의 더럼(Durham)에서 가족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매주 일요일 아침, 우리는 아이들을 위한 마음 챙김 수업, 명상, 그리고 부모들을 위한 교육을 준비해서 만났습니다. 부모들의 호응은 대단했습니다! 더럼 가족 명상회(Mindful Families of Durham)은 8 년 동안 빠르게 성장했고, 우리 가족이 떠나 온 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수업과 부모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이용할 수 있는 영어로 된 자료가 너무 적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수업 계획서를 만들기 시작했고, 4년이 지난 후, 그것이 하나의 교육 과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에도 책을 완성하기까지 3년이란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7년, 총 세 권으로 구성된 Sitting Together: A Family-Centered Curriculum on Mindfulness, Meditation, and Buddhist Teachings (Wisdom Publication)이 마침내 출판되었습니다. 그리고 세 권 중 부모를 위한 책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불교와 명상 지도자로서의 포부와 계획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시아와 서양에서 불교가 어떤 형태로 구성되었는지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 문제에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을 반대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자녀 교육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 붓습니다.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는 어린이, 청소년, 그리고 청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하나 없는 유대교 회당, 교회, 회교 사원, 성당은 아마 단 한 곳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떻습니까? 작고 소중한, 누군가 함께 뜻을 모았을 때, 빈약한 지원, 공간, 그리고 불교 지도부로부터의 소극적인 태도만이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왜 불교 센터에서 신세대 그룹인 밀레니얼 세대들을 더 많이 볼 수 없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가족을 위한 어떤 환경도 조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가장 큰 소망은 불교가 가족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1석 2조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젊은 부모는 물론 그들의 자녀들까지 불자로서 불교 공동체의 회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투자에 있어서 200 % 이상 순이익만큼 더 좋은 투자 조건이 또 있을까요?
불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의 활성화와 가족 프로그램이 해법이다
수미 법사는 불교의 가르침과 함께 명상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더불어 명상이 스트레스 해소나 일시적인 불안감을 완화시켜주는 치유 단계를 넘어 영적 성장이라는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지속적인 교육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녀는 가족 프로그램의 활성화를 통해 더 많은 가족들이 불교 센터를 찾을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명상이나 불교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공동체의 활성화 역시 놓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다양한 공동체 활동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도모할 수 있다면,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과 자비심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법이 살아 있는 곳이 부처님이 계시는 진정한 법당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미소가 아름다운 수미 런던 법사의 조용한 행보에서 거인의 든든함과 무게가 느껴지는 만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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