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울 때에 가능하다. 2019. 03,24.
한 주간 동안 평안들 하셨습니까? 지난주에 우리는 일상에서 늘 “변화를 줄 수 있는 말”을 하자고 아주 평 이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서 늘 감사하며, 찬양하는 말을 하고, 사람을 향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고, 축복하는 말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실천이 아주 용이한 말씀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떠하던가요? 이것이 여러분의 일상에서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감사와 찬양과 칭찬과 축복의 말이 나오던가요? 너무나도 지당한 말씀이지만, 저의 삶을 면밀히 돌아보니까, 아직도 나의 삶과 인격에서 이 열매가 풍성하게 나타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왜, 이것이 우리 일상에서 자연스런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깊이 고민하며 오늘 말씀을 정리했습니다.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면, 그것은 오직 우리가 영으로 살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늘 성령 충만한 상태가 유지될 때에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으로 사는 것이 계속 가능하겠는가? 어떻게 하면 늘 성령 충만한 삶이 유지될 수 있겠는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그 비결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비울 때에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직도 잘 모르는 것, 두 가지가 있음을 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지를 모르는 것과 또 하나는 하나님의 얼마나 부요하고 은혜로우신 분이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또한 주님의 풍부하심을 안다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약함을 모르고 주님의 풍성하심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여전히 어렵고 궁핍하게 산다는 것을 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어려움과 실패는 모두 이 두 가지 사실을 모르는 것에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밝히 깨닫게 하시려고 하는 것은 한 면은 우리 자신이 어떤 자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고, 또 다른 한 면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약함을 알고, 주님의 강함을 안다면, 우리의 부족함을 알고, 주님의 풍성하심을 안다면, 우리의 모든 문제들은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일깨워주고자 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강함과 그 분의 풍성함을 얻고자 한다면, 자신을 겸손히 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비우고 내가 아닌 그리스도로 삶의 주체를 바꾸면 이 모든 것이 그의 영으로 가능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의 핵심 진리는 PPT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그리도 자주 망각하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우리가 바로 안다면 나를 비우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케 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입니다. 우리는 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삶으로 자꾸 되돌아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영으로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아직은 우리의 혼은 이 세상을 다 내려놓지 못한 상태에 있고, 특히 우리의 낮은 몸은 아직도 변화 받지 못한 죄의 습성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혼이 변화되고, 우리의 몸이 새로운 삶으로 훈련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을 보시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것이 우리 예전의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타락한 아담의 본성이 주인이 되어 살았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속한 사람이고 공중권세를 잡은 지금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는 악의 영에 의해서 조정을 당하며 삶이기 때문에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데로 사는 이기적인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이는 한 마디로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이성의 판단하고 감각을 의지해서 살았던 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육신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우리 몸에 배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후에도 이성과 감각으로 사는 육신의 삶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지난날에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진리를 앎으로 근원적인 죄의 본질로부터 건짐을 받아서 이제는 죄와 상관없는 온전히 자유로운 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죽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이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죽으신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대속의 진리는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한 죽음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죄의 공장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옛 사람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심판을 끝낸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3절에 보시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백하셨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구원받은 이후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 5장 10절을 보겠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는 말씀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아들의 죽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케 된 용서 받은 그의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이제 더욱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이후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 가운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영생을 얻는 구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 문제가 다 처리되어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면 이제 더욱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가 영원히 사는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영생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 생명주는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에 가장 중요한 핵심 진리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로마서 6장 8, 11절 말씀을 보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무어라고 말씀해 줍니까? 함게 암송하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아멘!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전과는 전혀 새 피조물의 삶을 사셔야 합니다. 이는 이제 영생을 소유한 자로서 이제 내 혼(이성)이 아닌, 온전히 새롭게 지어진 내 영으로 사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사셔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함축적으로 말씀해 준 것이 로마서 8장입니다. 5-6절을 보시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했는데, 여기에 두 가지 삶의 방식을 비교 되고 있음을 봅니다. 육신을 따라 산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의 삶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곧 옛 사람에 의해서 길들려진 이전의 삶의 방식을 육신의 생각으로 사는 것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이제는 혼이 아닌 영을 쫓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 안에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이가 지금 내 안에 생명주는 영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여기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서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삶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의식하면서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엇을 기뻐하시겠습니까? 그것은 무슨 일이든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곧 주님과 모든 것을 나누는 사귐을 소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연애할 때처럼 신혼 생활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고상하게 말하면,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삶입니다. 즉 주님으로 말미암는 사는 새로운 삶입니다. 한 마디로 주님이 베푸신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너무도 자주 깜박 깜박 잊어버리고 이전의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이 선택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곧, 하나님과 무관한 육신을 좇는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13,14절을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 중심의 삶은 끝이 나야 합니다. 더 이상 내가 주인이 되어 나 좋을 대로 내 육신의 욕구대로 사는 나 중심의 삶은 끝이 나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내 삶을 온전케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강함과 그의 풍성함을 계속해서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계속해서 더 많이 비워내야 합니다. 자신을 비우는 것이 더 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더 이상 비울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비웠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육신은 끊임없이 고개를 쳐드는 교만의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신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육신은 어느새 고개를 쳐들고 나서는 것이 육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으로 살려면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하셨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비우는 것은 날마다 계속 되어야 합니다. 이미 비운 것 같아도 얼마 후에 또다시 비울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 번으로 결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로 자신을 알아갈수록 더 많이 더 깊이 비워져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래야 주님의 풍성함과 강함을 더 많이 더 깊이 깨닫고 채움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장 53절을 보시면,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라고 말씀해 줍니다.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준비된 사람 곧, 굶주린 사람만을 위한 것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잠언 27장 7절을 보면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고 했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거만한 사람은 곧,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그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집회에 올 때, 무엇을 볼까, 무엇을 들을까를 생각하고 온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동기가 성경 지식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라면, 영적인 방면에서의 실지적인 어려움은 해결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축복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모든 영적 성장의 조건이 우리 마음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마태복음5장 6절을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해 줍니다. 누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왜, 그가 복이 있는 것입니까? 그 사람이 배부름을 얻고 만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워줍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자신의 영적 상태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영적 성장은 언제나 더 좋은 상태를 바라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꿔 말씀 드리면, 모든 실패와 퇴보의 원인은 스스로 만족해 버리는 것이 그 원인입니다. 자만이야 말로 실패의 원인인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불만을 느끼고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그때가 바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을 시작하실 때인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알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주님의 강함을 알게 되고 주의 도우시는 은혜가 역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도리어 자신의 궁핍과 부족을 모르고 있을 때가 영적으로 정지된 상태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퇴보의 시작은 자만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진보(성장)하는 때는 낮아져 있고 굶주려 있을 때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사실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먼저 우리 안에서 원하는 마음이 생겨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원이 일어나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그런 갈급한 마음이 있어야 그 소원을 두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채우심을 경험하려면, 먼저 갈급하고 가난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보고 애통해 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은혜로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그 때에 우리의 심령은 만족을 얻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심령이 비워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심령을 충만케 하시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4장 1-7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길을 보여줍니다. 우선 함께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 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여인이 물러가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그들은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 그가 이르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 이 여인과 아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까? 남편이 죽어서 빚을 지게 되어서 두 아들이 종으로 팔려갈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엘리사가 이 문제의 해결을 어디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까? 2절을 보시면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고 한 걸 봅니다. 문제의 해결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오직 한 병의 기름만 있었을 뿐입니다. 이 한 병의 기름이 바로 이 문제 해결의 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기름은 우리가 아는바 대로 성령을 가리킵니다. 이 성령의 기름은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듭난 자녀들만이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일하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계신 성령이 어떻게 일하시는 것입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바대로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좇아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고, 구하지 않으면, 성령님은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구한다.’는 것은 영어로 표현하면 desire입니다. 앞에서 강조한 바대로 이것은 굶주림이고 갈급함인 것입니다. 이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그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 37-38절을 보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 조건으로 제시하신 것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것입니다. 목마름은 주님이 제시한 유일한 조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누구도 목마르지 않으면 물을 마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기를 갈망하지 않는 자는 성령으로 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가 과부에게 무엇을 지시한 것입니까? 3절을 보면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기름부음을 받으려면 빈 그릇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왕 빌리는 것 조금 빌리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빈 그릇을 많이 빌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빈 그릇을 빌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령님께서 자리를 비워드린다는 말입니다. 비워드리되 한 자리만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많은 자리를 비워드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님께 많은 자리를 비워드릴수록 더 많이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원칙입니다. 오직 영적 성장은 계속해서 자신을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으로 충만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매 순간, 내가 아니라 주님임을 인정하고 자신을 부인하고 비워낼 때,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육체의 애씀이 아니라 오직 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 비운 것으로 더 이상 비워낼 것이 없다고 하지 마시고 계속 비워내야 합니다. 십자가의 체험은 깊이 들어갈수록 더 많이 우리 자신을 비우고 파내야 합니다.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임을 더 깊이 인정하고, 고백할 때, 그 때에 우리는 주님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 두 번째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기름을 어떤 곳에서 붓느냐 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오직 여인과 아들과 기름만이 그 안에 갇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성령님과 독대하듯이 은밀한 곳에서 교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은 다 우리 자신과 주님 사이의 일인 것입니다. 어려움도 승리도 다 우리 자신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핑계 대지 말고 문을 걸어 잠그고 오직 주님에게서만 자신의 문제를 개인적으로 처리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 육체는 문 밖에 두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깊이 자백하고, 성령이 주시는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셔야 합니다. 나를 속이고 있는 세상에서 들어온 거짓 된 사상이나 혹은 나를 붙잡고 있는 상처나 부정적인 생각이나 어떤 고정관념이 있다면, 성령의 빛 비추심을 통해 그 잘못을 깨닫고 거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를 성령이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관점으로 다시 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문제에서 믿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관계는 다 성령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풍성하게 될 것인지 궁핍하게 될 것인지는 우리가 성령과 함께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님께 우리의 영적 생활을 풍성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달든 쓰든 그것이 성령이 주신 것이라면 그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이렇게 성령의 처리를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인식해야 할 원칙은 빈 그릇이 없을 때, 기름이 그쳤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모든 빈 그릇에는 다 충만케 하십니다. 마지막 그릇까지도 충만하십니다. 만일, 거기에 빈 그릇이 더 있었다면 그 그릇에도 기름은 부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릇이 없을 때, 기름이 그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기름이 먼저 그치는 것이 아니고, 빈 그릇이 없을 때 그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가 빈 그릇을 가져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돌이켜 회개해야 할 세상의 것들이 아직도 우리에게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말씀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찾아서 빈 그릇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한하게 자신을 비운다면 성령님도 무한하게 우리를 충만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길은 우리에게 빈 그릇이 있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권리와 지위를 내어 드리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씀드린다면,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워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우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우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더 많이 비울 때, 더 많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원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을 비우기를 원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비울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비우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충만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일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우리 자신을 비운다면, 반드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혹 우리의 느낌은 충만하게 되지 않을지라도 충만의 사실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하나님은 굶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간구하는 심령이 생기게 하시고, 또 우리를 파서 비우게 하신다면,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반드시 충만하게 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빈손으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그러나 이 순간이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말씀을 들었다면 그것을 내 삶에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우리가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가 자신을 구체적으로 비우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이 시간에 조용히 성령님이 지적해 주신 우리의 죄와 허물을 구체적으로 깊이 자백하시고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 받아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그것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는 실제로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아직도 육신의 생각으로 남아 있는 옛 사람의 흔적을 비워내야 합니다. 아직도 자기중심적으로 살고자 하는 자아를 들어내고 자기 의를 완전하게 비우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자백하고 회개할 때, 우리는 우리의 혼이 변화되고 우리 몸의 습관이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이 비워지고, 그 대신 성령으로 곧,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성령님과 독대하듯 깊이 자신를 비워내는 기도의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