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더위를 피하느라, 늦장마 탓하며 게으름 피웠던 시절이 그럭저럭 지나고 다시 길을 나선다.
가까운 동네 은구비공원과 반석천 일대 걷기(9월 13일)며, 9월 23일에는 장거리 코스로 충북 충주시에 있는 달천생태 탐방로의 하나인 '수주8봉'도 보고 제천의 생육신 중의 한 분인 원호 선생 유적지인 관란정도 둘러보고, 태종대도 가보고 횡성군 안흥찐빵도 맛보고 신림면 용소막골의 옛성당도 가 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제대로 된 점심도 거른채 돌아오다가 문막에서 장터식당을 찾아 이른 저녁을 먹고 집으로 향하는 길. 여정이 모두 하루 540여km나 되는 장거리 코스길이 되었다.
몇 장의 사진과 글로 간략하게 소개하려한다.
'수주8봉'해서, 가는 차 속에서 우리끼리 말한다. 수주8봉의 '수주'가 무슨 뜻인가하고. 언뜻 생각나는 게 시인 변영로 호가 생각나서 말해본다. 차중 객담을 즐기면서 도착한 곳은 충주시 살미면 토계리 칼바위.
-한가한 주차장.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모원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앞에는 선행비 하나가 있다. 한문투로 된 국한문, 대략적인 내용은 불우하고도 어려운 환경에서 자식들을 잘 키워 고위공무원이 되기까지 등등 현대판 공덕비 같은 비이다....
그 비석 옆으로 난 구름다리를 건너야 수주8봉으로 이어지는 길. 여덟개의 봉우리를 다 가 볼 수도 없고 그저 칼바위에서 달천을 내려다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흔히 보는 강물이 굽이쳐 돌아가는 곳의 하나. 무주군 앞섬(내도리)이 그렇고, 안동 하회 마을이 그렇고, 대전 계룡시 건너편 무도리가 그렇다. 그러구 보니 '수주'라는 말이' 물 수'자에 '두루 주'자로 된 말임을 나중에서야 안다. 아하 우리말로 물이 돌아가는 무도리라는 뜻이구나. 하회라는 지명 또한 수주라는 지명이나 다 같은 물이 돌아가는 곳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 곳이 어디 한 두 곳이랴. 한반도 지형을 닮은 곳도 있고...
-칼로 베어낸 듯한 칼바위 아래로 냇물이 흘러내려 달천과 합해진다.-
-모원정에서 바라본 수주8봉 연봉들과 달천강 :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는 곳, 그 아니 절경이랴. 거기에 선비들의 그림자가 어리고 -
-달천의 이름이 물맛이 달다고 해서 얻어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는 달천 : 남한강의 상류. -
-달려서 박달재도 넘고 영월이 건너다 보이는 서강 가로 간다
생육신 중의 한 분인 원호 선생이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을 그리워해서 매일 올라가 서강의 물결을 바라보았다는 전설을 가진 곳. 그곳에는 원호의 호가 되어버린 관란, '관란정'이 있다.
그곳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 지난 역사의 흔적도 되새겨 본다.
충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선비정신은?
-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 가팔라서 내려가기 위험하다고 현지 산림감시원이 설명해준다.-
그 푸른 강물 위 바가지에 단종에 대한 충성스런 마음을 담아 보냈다는 이야기도 듣고,
그러니 관란정의 '란'이 파란만장하는 사자성어의 '파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글자이다.
커다란 물결이라는 뜻의 '란'. 그 물결을 바라본다라는 뜻의 '관란'이란 호를 가지게 되었단 말인가?.
'고사관수도'의 심정은 어떠한 것인가. 절개 곧은 선비 정신, 신하의 도리인가.
-건너편은 강원도 영월 땅이란다. 이 강물을 따라가면 단종의 유배지인 동강 청령포에 이르고
조선의 선비 특히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을 충忠으로 여기고 목숨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선비정신이 녹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성삼문의 사육신과 김시습으로 대표되는 생육신...
-관란정 현판을 읽어본다.-
-관란정 중수기(단기 4303년 경술 7월 15일) : '충忠'에 대한 언급이 길게 이어진다. 헌시도 있고.
-충북에서 강원도로 건너가서 태종대로 향한다.-
세조가 원천석의 마음을 돌리려 찾아왔다는 전설을 가진 곳. 태종대를 찾아본다.
- 태종대의 현판 글씨가 가까이 가서 보니 전각 형태로 돋을새김(양각)으로 되어있다.
(안에는 비석이 있으니 비각이네.. 경치를 즐기는 곳이 아닌)
-안흥면에 가서 안흥찐빵도 사먹고,
신림면으로 가서 용소막 성당도 본다. 오래된 느티나무와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사이로 성당의 십자가 너머로 감악산 줄기가 연봉으로 보인다.
문막으로 가서 전에 들렸던 곳, 그 맛을 못잊어 다시 찾아간 곳 장터 추어탕집에 들려 이른 저녁을 먹고, 대전으로 나선다.
왜 그렇게 길이 밀리는지..... 유성에 왔을 때는 밤 10시가 다 되어가고, 540여 킬로미터의 길을 달려왔노라고.
아침 7시에 만나서 밤 늦게까지 참으로 먼 길을 달려서 콧바람을 쐬고 왔다.
- 마침 읽고 있던 '열하일기' 중에서 '숭정후3경자'를 실제로 확인하는 현판 읽기 -
"숭정기원후4임술'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새로운 앎을 직접 확인하는 즐거움도 덤으로 얻은 하룻길
참고로 열하일기 권1 도강록편에 보는 내용을 소개한다.
「도강록서」 (渡江錄序)
(대본 참고 : 돌베개 간행 김혈조 번역 참고)
1)무엇 때문에 이 글의 첫머리에 후삼경자後三庚子라는 간지干支를 쓰는가?
여행의 일정과 날씨를 기록하며, 연도를 기준으로 삼아서 달과 날짜를 기록하려는 것이다.
2 )후 삼경자의 후는 무엇의 뒤라는 말인가?
숭정崇禎을 연호로 삼은 연도인 1628년의 뒤라는 말로 3경자는 즉 1780년을 가리킨다.
3)무엇 때문에 삼경자라고 했는가?
숭정을 연호로 삼은 뒤 세 번째로 돌아온 경자년 (1660, 1720, 1780)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4)무엇 때문에 숭정이란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가?
장차 압록강을 건너가려 하기 때문에 이를 꺼려 해서 숨기려는 까닭이다.
5) 무엇 때문에 숭정이란 연호를 꺼려 숨기는가?
압록강을 건너면 청靑나라 사람이 살기 때문이다.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청나라의 역법曆法을 받들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감히 명明나라의 연호인 숭정을 사용할 수 없다.
6)무엇 때문에 드러내지 못하고 몰래 숭정이란 연호를 일컫는가?
위대한 명나라야말로 큰 나라이기 때문이다.
7) 숭정17년(1644) 명나라 의종毅宗 열황제(烈皇帝)가 종묘사직을 위해 순국하고, 명나라 왕실이 멸망한 지 백삼십여 년이 되었건만, 어찌하여 지금까지 숭정이란 연호를 일컫는가?
청나라 사람이 중국에 들어가 그 주인이 되니 훌륭한 전통 문화 제도가 변하여 오랑캐 문화로 바뀌었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수천 리의 우리나라는 압록강을 경계로 나라를 다스리며 홀로 과거의 문화 제도를 지키고 있다. 이는 명나라 왕실이 오히려 압록강 동쪽에 존재함을 밝히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힘이 약해서 비록 저 오랑캐를 물리쳐 중원 땅을 깨끗하게 청소하여 전통의 문화 제도를 빛내고 회복할 수야 없겠지만, 모두가 숭정이라는 연호라도 능히 존숭하여 중국을 보존하려는 까닭이다.
숭정 156년 계묘년(1783) 열상외사洌上外史 쓰다.
(*열상외사는 연암의 다른 호 이다.)
<한문 원문>
출처: 한국고전번역원에서
(曷爲後三庚子。記行程陰晴。將年以係月日也。曷稱後。崇禎紀元後也。曷三庚子。崇禎紀元後三周庚子也。曷不稱崇禎。將渡江故諱之也。曷諱之。江以外淸人也。天下皆奉淸正朔。故不敢稱崇禎也。曷私稱崇禎。皇明中華也。吾初受命之上國也。崇禎十七年。 毅宗烈皇帝殉社稷明室亡。于今百三十餘年。曷至今稱之。淸人入主中國。而先王之制度變而爲胡。環東土數千里。畫江而爲國。獨守先王之制度。是明 明室猶存於鴨水以東也。雖力不足以攘除戎狄肅淸中原。以光復先王之舊。然皆能尊崇禎。以存中國也。
崇禎百五十六年癸卯。洌上外史題。)
<사족>
조선이 왜 그렇게 명나라를 큰나라로 존숭하는지 그 이유를 알만하다. 사대사상, 모화사상의 근원을 말해준다.
조선의 건국 역사가 그렇고 위화도 회군의 명분에서부터 조선이라는 국호를 책봉받고, 임진왜란 때 지원을 받아 망국의 간두에서 피할 수 있었고,,, 등등 명을 떠받드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 통치 이념 또한 유학의 선비 정신이었으니.
글자 한 자라도 틀리면 사문난적으로 몰아부치고, 사화를 일으키고...
'오랑캐니 되놈'이니 하면서 x무시해왔던 만주족이 청이란 나라를 세우고 명 대신 조공하라고 하니, 그러고도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굴욕까지 당한 조선의 심정은 어찌 청나라를 떠받들을 수 있겠는가.
조선의 선비정신은 모화사상에 쪄들어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연호인 숭정을 현재의 서기처럼 계속 사용하고 마음속으로 못잊어 하는 구나.
그리하여 조선 말기에 와서야 비로소 독립국임을 선포하고 고종황제니 광무니 하는 칭호와 연호를 사용하고 환구단이며 하는 것을 설치하고.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독립문으로 바꾸고,,,,
존명반청의 정신이 관람정 현판 한 구석에까지 계속 남아 있게되는구나!
중국의 동쪽과 만주일대와 왜까지를 호령하던 강대국이었던 옛 기개가 그립고나.
(2022.10. 05. 자부리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