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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천성 성도의 왕건묘(현재 이름 영릉)를 두고 이를 고려 태조 왕건의 묘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고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후 바로 이듬해 송악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적고 있다. 태조 왕건은 재위26년만인 계묘 26년(943)에 세상을 떠나고, 고려는 현릉(顯陵)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를 부장(祔葬)하였다고 고려사절요는 적고 있다.
북한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흔히 구글에서 검색되는 봉분이 2개인 모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약 대륙고려 주장자들의 말처럼 중국 사천성 성도의 왕건묘가 고려 태조 왕건의 묘라면,
사천성 성도가 바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송악)이 되게 된다.
중국 사천성 성도가 송악(개성)이라면, 이곳과 인근에는 고려 왕릉들이 산재되어있어야하는
것이다.적어도 고려사절요의 기록등에 따르자면. 그리고 정몽주가 피를 흘렸던 선죽교도
바로 이곳에 있어야 한다.
대륙고려설 주장자들은 북한지역에 있는 개성에 고려 왕들의 릉도 없고, 유적도 없다고 주장하지만
아래 참고자료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고려 왕릉 18기가 개성 인근에 위치해있다.
북한 개성에 있는 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형식에 대해 돌칸흙무덤(석실봉토분)으로 발해와 통일신라기의 형식과 같고, 내부구조는 외칸무덤(단실분)으로 평천정구조라고 관련자료는 전해주고 있다.
고려 태조가 통일신라와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라면, 무덤의 조성도 전 시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태조는 한(漢)나라 문제(文帝)와 위나라 문제의 고사(故事)에 따라 검약하게 하라는 유명을 남겼다고 하니, 과연 중국 사천성 성도의 왕건묘와 북한 개성에 있는 고려 태조 왕건의 현릉 두 곳 중에 어느 곳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할 지는 이로써 결정될 것이다.
또 고려사절요 태조편을 보면, 고려 신하 이제현(李齊賢)의 찬을 싣고 있는데 “신이 충선왕(忠宣王-고려
제 26대 왕/ 재위 1308~1313년)을 섬길 때에, 왕이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태조의 규모와 덕량(德量)은,
중국에 나셨더라면 마땅히 송(宋) 나라 태조(太祖) 못지 않았을 것이다. "고 적고 있다.
송나라는 충선왕이 즉위하기 전에 망한 중국 왕조로 960년 ~ 1279년까지 존속하였다. 충선왕으로서는
고려와 건국시기가 비슷한 중국의 송나라 태조와 고려 태조 왕건을 비교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이런 충선왕은 이렇게 마지막에 말했다고 고려사절요는 전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비록 크고 작은 형세는 같지 않으나, 두 조(祖 송 태조와 고려 태조)의 규모와 덕량은
이른바, '그 처지를 바꾸면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충선왕은 중국 송나라와 고려가 크고 작은 형세의 차이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보통 긍정적인 비교를 위해서는 자신보다 큰 나라에 비교할 것이니, 중국의 송나라가 고려보다
큰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대륙 고려를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대륙 고려는 동시대의 송나라를 압도하는 나라가
되는 것이니, 태조의 후손인 충선왕의 위 비교에 비추어 사실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륙고려설 주장자들은 또 고려가 수도를 여러번 바꿨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왕건묘가 있는
중국 사천성 성도가 또 송악(개경)이 아니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아래는 고려사절요 등 참고자료이다.
고려사절요 제1권 / 태조 신성대왕 (太祖神聖大王)
* 태조 신성대왕
휘(諱)는 건(建)이며, 자(子)는 약천(若天)이요, 성은 왕씨(王氏)이다. 한주(漢州) 송악군(松嶽郡) 사람으로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당(唐) 나라 희종(僖宗) 건부(乾符) 4년, 신라 헌강왕(憲康王) 3년 정유(877) 정월 14일 병술에 태조를 송악 남쪽 사제(私第)에서 낳으니, 신비한 광채와 자줏빛 기운이 종일토록 방 안에 비치고 뜰에 가득히 서리고 둘러 있었는데 형상이 마치 교룡(蛟龍)과 같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용모는 용안(龍顔)과 일각(日角)이며 턱이 풍만하고 이마가 넓었다. 기우(氣宇)와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목소리가 우렁차고 컸으며, 너그럽고 후하여 세상을 구제할 도량이 있었다. 왕위에 있은 지는 26년이고, 수(壽)는 67세였다.
* 기묘 2년(919), 후량(後梁) 정명(貞明) 5년ㆍ거란 신책(神冊) 4년
○ 봄 정월에 송악(松嶽)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 군(郡)을 개주(開州 경기 개성(開城))로 승격시키고, 시전(市廛)을 설치하고 방리(坊里)를 구별하여 5부(部)로 나누고 육위(六衛)를 설치하였다.
* 계묘 26년(943), 후진 출제(出帝) 잉칭(仍稱) 천복 8년ㆍ거란 회동 6년
....
○ 병오일에 병이 더욱 위중해지자, 신덕전(神德殿)에 나아가 학사(學士) 김악(金岳)에게 명하여 유조(遺詔)를 쓰게 하였다. 유조가 완성되었는데, 왕이 다시 말씀하지 못하였다. 좌우의 신하들이 매우 슬피 통곡하니, 왕이,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물었다. 대답하기를, “성상께서는 백성의 부모이신데 오늘 뭇 신하들을 버리려 하시니 신들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웃으며 이르기를, “덧없는 생명이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다." 하였다. 말을 마치고 조금 있다가 훙(薨)하였다. 태자와 제왕(諸王)ㆍ종실ㆍ근신들이 모두 땅을 치면서 슬피 부르짖고 백관들은 내의성(內議省) 문 밖에 벌여 섰다. 왕규가 나가서 유명(遺命)을 선포하기를, “도성 안팎 여러 신료들은 모두 동궁(東宮)의 처분을 따르라." 하였다. 이에 태자가 왕위에 올라 뭇 신하들을 거느리고 통곡하였다.
○ 6월 무신일에 상정전(詳政殿)에서 상을 발표하고, 김악이 유조를 선포하였다.
○ 기유일에 상정전(詳政殿)의 서쪽 뜰에 빈소를 마련하였다.
○ 경오일에 신성대왕(神聖大王)이란 시호를 올리고, 묘호(廟號)를 태조(太祖)라 하였다.
○ 임신일에 현릉(顯陵)에 장사지냈는데, 유명에 따라 상장(喪葬)과 원릉(園陵)의 제도는 한 문제와 위 문제의 고사에 따라 모두 검약하게 하고,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를 부장(祔葬)하였다. 왕후는 정주(貞州) 사람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천궁(天弓)의 딸이다. 천궁은 집이 큰 부자인데 고을 사람이 그를 장자(長者)라고 일컬었다. 태조가 장군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정주를 지나다가 오래 묵은 버드나무 밑에서 말을 쉬었는데, 태조가 길 옆 냇가에 서 있던 왕후의 용모가 덕성스러움을 보고, “뉘 댁의 딸이냐?"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이 고을 장자 집의 딸입니다. 잠시 저의 집에 쉬어 가시지요." 하니, 태조가 그 집에 가서 유숙하였다. 그 집에서는 온 군사를 매우 풍족하게 먹이고 왕후에게 태조를 모시고 자게 하였다. 그 후에 소식을 끊고 서로 알리지 않았는데, 왕후가 절개를 지켜 머리를 깎고 여승[尼]이 되었다.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불러 부인(夫人)으로 삼았는데 궁예를 쫓는 의거를 일으킬 때에 갑옷을 들고 입혀 대업을 도와 이룩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찬하기를, “신이 충선왕(忠宣王-고려 제 26대 왕/ 재위 1308~1313년)을 섬길 때에, 왕이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태조의 규모와 덕량(德量)은, 중국에 나셨더라면 마땅히 송(宋) 나라 태조(太祖) 못지 않았을 것이다.
송 태조는 주(周) 나라( 옮긴이 주/ 後周) 세종(世宗)을 섬겼는데, 세종은 현명한 군주였다. 송 태조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고, 송 태조 역시 그를 위하여 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공제(恭帝)의 나이가 어려서 정사가 태후의 손에서 결정되자, 여러 사람의 추대에 몰려서 주 나라 공제의 선위(禪位)를 받았으니 대개 마지 못한 데서 나온 일이었다.
우리 태조께서 시기심 많고 포학한 임금인 궁예를 섬기셨으니, 삼한의 땅을 궁예가 그 3분의 2나 차지하게 된 것은 태조의 공이었다. 세상에 드문 큰 공을 세워 의심받을 만한 처지에 있었으니 위태로웠다고 할 수 있을 텐데 나라 사람들이 진심으로 따르고 장졸들이 그를 추대하는 데도 오히려 굳이 사양하고 연릉(延陵)의 절조를 따르고자 하였으나, 도탄에 빠진 백성을 위로하고 죄 있는 임금을 친 일이야 어찌 그만둘 수가 있었으랴.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며,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주었으며, 공신들을 성심껏 대접하면서도 권세는 빌려 주지 않았으며, 제왕(帝王)의 기업을 세워 자손에게 이어 준 일은 진실로 그 법도가 송 태조와 한 가지였던 것이다.
송 태조는 강남(江南)의 이씨(李氏)를 와탑(臥榻)에서 코를 골고 잠자는 사람에게 비하였으며, 석진(石晉)은 거란에게 분양한 산후(山後) 16주를 대개 주머니 속의 물건처럼 보아서 이미 북한(北漢)을 회수하고는 멀리 군사를 몰아 진(秦)ㆍ한(漢) 시대의 영토를 평정하려고 하였다.
우리 태조께서는 왕위에 오른 후에, 김부(金傅)가 아직 귀순하지 않았고 견훤이 포로가 되기 전이었는데도 자주 서도(西都)에 행차하여 친히 북방의 변경을 순수(巡狩)하였었다. 그 의도 또한 동명왕(東明王)의 옛 영토를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물건처럼 여겨서 반드시 모조리 거두어 차지하려 하였으니, 어찌 다만 계림(鷄林)을 취하고 압록강(鴨綠江)을 칠[操鷄搏鴨] 뿐이었으리오.
이렇게 본다면 비록 크고 작은 형세는 같지 않으나, 두 조(祖 송 태조와 고려 태조)의 규모와 덕량은 이른바, '그 처지를 바꾸면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충선왕은 총명하여 옛 글을 좋아하였으며, 중국의 박학(博學)한 선비인 왕구(王構)ㆍ염복(閻復)ㆍ요수(姚燧)ㆍ소구(蕭㪺)ㆍ조맹부(趙孟頫)ㆍ우집(虞集) 같은 이들이 모두 그 북경 저택(北京邸宅)의 문정(門庭)에서 어울렸으니, 아마도 일찍이 그들과 함께 옛 사람의 행적에 관해 논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태조는 아랫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사람이 힘을 다하였고, 사람들에게 성심으로 대접하여 멀든 가깝든 모두가 그를 따랐으니,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仁德)은 천성에서 나왔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다. 견훤이 부자(父子)간에 서로 해치자 토벌하여 취하였고, 김부(金傅 신라)는 군신(君臣)이 와서 의탁하자 예를 갖추어 그들을 대우하였다.
강한 거란이 동맹국을 침략해 멸망시키자 국교를 단절하였고, 약한 발해(渤海)가 나라를 잃고 돌아갈 데가 없자 이를 위무하여 받아들였다. 자주 서경(西京)에 행차한 것은 근본이 되는 땅으로 만들려는 까닭이었으며, 친히 북방의 변경을 순수한 것은 사나운 풍속을 합쳐 교화하려 함이었다. 왕업을 처음 창건하여 모든 것을 고쳐 시작하였으니 비록 예악은 미처 제정하지 못했으나, 그 큰 규모와 원대한 계책이며 깊은 인덕과 후한 은택은 진실로 이미 5백 년의 국맥을 배양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위 사진은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1920년대의 현릉의 모습.
송나라
송(宋, 960년 ~ 1279년)은 중국의 옛 왕조이다. 960년 조광윤이 오대십국 시대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개봉(카이펑)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웠다. 국호는 송(宋)이었으나, 춘추시대의 송, 남북조 시대의 송 등과 구별하기 위해 황실의 성씨를 따라 조송(趙宋)이라고도 부른다. 통상 1127년 금나라의 확장에 밀려 장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 이후 임안(지금의 항저우)에 도읍을 옮긴 것을 남송이라고 불러 구분하였다. 북송·남송 모두 합쳐 송, 송 왕조라고도 한다. 수도는 개봉(開封, 또는 변경), 남쪽으로 옮긴 후 실질적인 수도는 임안(臨安)이다. 훗날 원나라에게 멸망당한다.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한 정권이며, 상비 해군을 설치한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문치주의 국가로 사대부 사명 의식이 있었다. 또한 이전의 왕조들과는 달리 철권폭정을 하지 않고 문화 정치를 폈다. 시대적으로 북송과 남송으로 나뉜다.
이 시기 당나라 시대부터 크게 발전된 괭이 등의 농기구를 배경으로 점성도(占城稻)라는 안정성이 있는 조도(早稻)가 도입되어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농업으로 인해 북송시대의 인구는 약 1억 명에 달했을 것이라 추정되었다.
송나라는 예술, 사상 및 각종 실용기술의 발달이 두드러져, 문화적으로 풍요롭던 시기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6%A1%EB%82%98%EB%9D%BC
한(漢)나라 문제(文帝)
5대 태종 문제 유항
재위기간 기원전 180년 ~ 기원전 157년 6월 (24년)
문경지치로 이름높음.
..최후의 유언도 검소함이 그대로 드러나보이는 말이다. "만물은 소생했다가 죽는 법이니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나의 장례는 소박하게 치르라. 묘지를 크게 만들지 마라. 진주도 함께 매장하지 마라. 장례 기간을 너무 길게 하지 마라. 전국의 백성들과 관리들은 단 3일만 상복을 입는 것을 허락하겠다. 간소하게 처리하라."
https://namu.wiki/w/%ED%95%9C%EB%AC%B8%EC%A0%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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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율곤 이중재의 주장.
[고려태조 왕건묘 중국 대륙에 있었다
(일요서울 1997.4.6 율곤 이중재)
모든 정사들은 고려 왕건의 기록을 똑똑히 기록하고 있다. 필자의 저서「고려사의 새발견」에서도 밝혔지만 한치윤의 저서「해동역사(海東繹史)」,「고려사(高麗史)」「명사(明史)」, 서긍(徐兢)이 지은「고려도경(高麗圖經)」그 외 많은 사서(史書)들은 왕건(王建)이 중국대륙에 있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http://www.siddham.kr/6139
율곤 이중재가 참조했다고 하는 서긍(徐兢)의「고려도경(高麗圖經)」전 40권 원문/풀이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hjang3&logNo=221033199362
《고려도경》(高麗圖經)은
고려 인종1년(1123년)에 송 휘종(宋徽宗)의 명에 따라 사신으로 파견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년 ~ 1153년)이 한달 남짓 개성(開城)에 머물면서 보고 들은 내용을 송 나라에 돌아가 편찬한 보고서다. 원명은 송 휘종의 연호인 선화(宣和, 1119년~1125년)를 넣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라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 고려도경
http://www.krpia.co.kr/knowledge/itkc/detail?artClass=MK&artId=kc_mk_a003
@청량산 치우, 청량산, 우람. 솔길 .. 너무 재밌네요^^
@무러기 그리고 치우님, 개싱인지 뭔지 모르는 용어 쓰는데 모르는 사람이 물으면 답해야하는거 아니에요!!
"합"을 찾아가는 과정이니 차분하게..
┗ economet 17.11.23. 06:16 - 내글 하멜 표류기 재해석
은하철도99콘 하멜의 원본 (네덜란드어본 최소 3가지
그리고 최초의 영문 번역본 등)을 발굴하여 처음부터 다시 번역하신 최두환 교수님의 수고를 이 분들은 알까요?
최소한 원본 확인이라는 걸 영국의회도서관의 당시 Times
또는 유럽 각지의 현지 대학도서관에 남아있는 초판본들을 확인해보는 수고를 한번이라도 해보았을까요?
적어도 수차례 정말 이상한 소위 원본이라고 불리는 예전 신문이나 잡지
그리고 도서의 이상한 조작을 그들은 직접 대한 적이 있을까요?
결단코 없다고 생각합니다.
┗ economet 17.11.23. 06:39
economet 예전에 coo2.net그리고 최두환교수님의 다음카페에서 영인본 위변조
그리고 서양의 기록물 위변조 관련 사진보고 영국의회도서관
그리고 독일의 한 대학 도서관에 가서 소위 진본 초판이라는 신문과 도서 가서 찾아보고 직접 확인해봤습니다.
진짜로 1800년대에 Corea를 언급했던 The Times의 기사는
지도가 달려있을 경우 어김없이 지도와 거기에 딸린 글씨체가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체로 바뀌더군요.
예: Garamond체가 Times체로 바뀌거나
(진짜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언급 안하겠습니다! 또 다시 조작하고 대응논리 개발할테니!)
@우전 최두환 교수님이 원본을 보고 번역한 하멜표류기에는 악어도 나오지요.
한반도에 악어가 살고 있는가..
중국 제주에서 강을 하나 건너면 왜놈들 거주지역이 있는데,
하멜이 강을 건너 탈출한것
@우전 http://cafe.daum.net/greatchosunsa/75XT/9394
리성계를 주원장으로 둔갑시킨 반도식민사관자들.
http://cafe.daum.net/greatchosunsa/75XT/9264
대조선을 이해하려면 명?청을 알아야 ㅡ지명선선생
http://cafe.daum.net/chosunsa/OTOR/479
明史는 조선왕조실록을 베낀 소설에 불과하다.
@우전 1920년대 손문과 장개석과 왜놈들이 조선역사를 한반도로 이식을 시작했다고 함.
고로 중공이 들어서며 연변 조선족을 학살했겠지요
한국에서는 조선사 편수회에서 이병도와 신석호가 왜곡시작
해방후 서울대 교수
60년대 문교부 장관..
80년대 후반에 사망했는 모양..
지금 4세.5세까지 새끼를 쳐서 왜곡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것.
고고학회는 이병도 제자인 고 김원룡 사단이...병도가 왜곡한 3.000년 역사를 가르치고 있지요.
결론은 병도부터 5세까지 100년동안 왜곡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현실..
통일되면 간도는 유엔에 제소했어니까 찾고 역사를 바로세워야
민족정기가 바로서고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겠지요
친일파 재산도 환수해야
@우전 훌륭하네요.
열심히 대륙이씨조선설 세뇌시켜 개스라엘에에 바치는
영광이 있기를 기원할 수가 없습니다.
"대륙조선설, 대륙사관"의 반대가 반도사관, 식민사관이 아니고 오히려 정통사관으로봐야할듯합니다. 왜냐면 주장이 비논리와 궤변으로 일관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중국역사가 "대륙조선"역사라는 식으로 거짓말을 시키는데 거짓말이 유치합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따라서 외국 역사침탈을 할려면 교묘히 반박하기 힘들고 터무니없지않게 연구하여 해야합니다. 오죽하면 수천억을 거기다 들이겠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