쿄와 같은 대도시든, 나라와 같은 작은 시가지이든 오후 5시부터 7시 사이 일본의 공원 주변은 어디에서나 비슷한 풍경이 연출된다.
덮개가 달린 하늘색과 핑크색의 유모차를 끌거나,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꼬마의 손을 잡고 나온 젊은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서 이야기를 나눈다. 화이트 셔츠에 베이지색 슬림 팬츠를 깔끔하게 입고 있거나, 데님이나 면으로 만든 미디 길이의 스커트에 검정 터틀넥 풀오버를 입는다든지의, 전체적으로 똑 떨어지면서도 편안한 차림이 그것이다. 여기에 메이크업은 약간 하고, 헤어스타일은 내추럴하지만 어딘가 공이 들어간 쇼트 커트나 단발이다. 부촌인 오모테산도라면 여기에 까르띠에나 롤렉스 시계를 차고 있는 것이 조금 다른 풍경이다. 몸무게 40~50kg 정도의 날씬한 몸매와 단정한 차림의 이들 ‘일본 미시족’은 한국의 미시족과는 비슷한 듯 하지만 엄연히 다르다. 우리나라의 미시는 단지 일반적인 젊은 여성과 같은 옷차림이나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기혼녀를 말하지만, 일본의 미시는 좀 더 구체적인 소비 집단으로서의 캐릭터와 파워를 갖고 있다. 일본의 미시들은 젊은 미혼여성의 트렌드를 맹목적으로 좇지 않는다. 일본 미시족들은 그들만의 기준으로 실용성과 모양새를 모두 갖춘 트렌드와 시장을 만들어나간다.
지난 여름, 미국 부시 대통령의 반바지 차림과 검정 신사 양말에 검정 고무 샌들을 신고 있는 사진이 인터넷에 떠돌면서 ‘촌티 패션’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문제의 샌들이 있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대히트한 아웃도어용 샌들 ‘크록스’라는 것이다. 이 제품은 신은 사람의 발 모양에 맞춰 형태가 변하는 168g의 가벼운 남녀 공용 제품으로, 걷거나 서있을 때 다리와 발에 실리는 부담을 최소화한 것이 특징이다. 가격은 우리나라 돈으로 3만 원대 . 크록스 샌들은 일본에서 2007년 상반기에만 100만 켤레 이상이 팔려나갔다. 매장에서는 품귀 현상까지 빚었으며 옥션 등에서는 판매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차별화된 디자인과 기능 중시2007년 상반기 최고 히트 상품으로도 꼽히는 크록스의 일본 성공의 원동력은 바로 30대 전후 미시족들이었다. 처음 크록스가 일본에 들어왔을 때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가판대에서 판매를 시작했는데, 이때 주 고객층은 20대 후반~30대의 미시족. 독특한 디자인은 감각 있는 미시들의 이목을 끌었고, 쾌적한 기능을 실감한 후 다시 입소문을 통해 퍼져 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것은 물론, 아이들과 남편의 것까지 구입함으로써 크록스의 매출은 폭발적으로 상승하게 된 것이다.
크록스의 폭발적인 인기는 단지 디자인과 기능 때문만은 아니다. 획일적인 유행은 여성들에게 어필하기 어렵다. 크록스는 샌들 구멍에 다는 액세서리인 지비트를 개발해 판매함으로써 자신만의 고유한 디자인과 감각을 연출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일본 미시족들 사이에 ‘누가 더 예쁜 지비트로 독특하게 장식을 했는가?’라는 경쟁이 불붙기에 이르렀다. 동물이나 곤충, 디즈니 캐릭터 등 100여 종류 이상의 지비트가 개발되었고, 지비트를 수집하는 현상까지 나타났을 정도다. 남들과 함께 유행을 따르면서도 같은 것은 피하고 싶어하는 까다롭고 섬세한 미시족의 취향과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일본에서의 마케팅이 여성에게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남성보다도 여성이 여행이나 스포츠 등의 여가를 즐기는 편이며, 함께 즐기는 상대도 남편, 친구, 자식 등 활동 대상별로 달리하는 등 일본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파트너를 구분하고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중에서도 미시는 쇼핑에서 절대적인 결정권을 지니며 동년배 여성과의 공동 행동이 많다. 일본 남편이 결정권을 갖는 품목은 아마도 자동차뿐일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미시 마켓은 디자인과 실용, 응용과 취향을 모두 만족시켜야 하는 까다로운 시장이지만 일단 뚫기만 하면 그 폭발력과 양이 엄청난, 큰 마켓 플레이스다. 트렌드를 따르면서도 나만의 무엇을 추구하는 일본 미시족의 특성 때문이다.
박연(생활칼럼니스트)mypaper70@hotmail.com